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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Dec 06.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11

자연스러운 고기 파티

7시쯤 눈을 뜬다. 오랜만에 혼자 자는 것이 너무 편하다. 화장실 갈 때 신경 쓸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다. 전기장판만 키고 잤는데도 은근 따뜻해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어두워서 그런지 잠을 정말 잘 자게 된.


어차피 나 혼자라 사장님과 어제 조식은 9시에 먹기로 합의했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와보니 사장님이 거실의 난로를 켜놨다. 머리를 감고 나와서 말리면서 난로를 꺼버린다. 혼자 있는데 아깝게시리 난로는 무슨. 잠바 입고 있으면 되지. 정리를 하고 좀 앉아 있다가 조식을 하러 카페로 간다.

사장님한테 어차피 저 혼자니까 청소를 안 하셔도 된다고 일러드린다. 개인적으로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는 너무 청소를 많이 한다. 깨끗한 게 좋긴 하지만 어차피 집에 있어도 매일 같이 이불 빨고 그러는 사람이 있을까. 한 삼일에 한 번만 청소해도 될 듯한데. 차라리 좀 덜 깨끗하더라도 낮에 방에서  밍그적거릴 수 있는 게 훨씬 좋다.

사장님 내외분이 만을 위한 호화로운 조식을 준비해주신다. 어제 서로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손님이 나 혼자여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사장님이 직접 만든 귤잼을 식빵에 발라서 먹는다. 제주도는 확실히 귤잼이 맛있다. 수프도 만들어주셔서 먹는다. 커피는 직접 핸드드립으로 정성스레 내려 주신다. 맛있어서 식빵을 몇 개 더 추가로 먹고 내 그릇을 설거지 해놓는다.

밥을 먹고 나와서 내외분과 대화를 좀 나눈다. 비수기에 고산리는 너무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 많으시다. 뭐 당연하다. 나도 사업을 하는 입장이라  이런저런 얘기를 공감하며 같이 나눈다. 얘기를 들어보니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도 많이 세우셨다. 사실 3박, 4박 하는 단기 여행자들은 고산리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장기 여행하는 사람들한테는 이곳이 꼭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조용하면서도 있을 거 다 있는 동네, 사색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이집 푸들 하고 좀 놀아준다. 이놈 말 잘 듣는다. 앉아! 엎드려! 기다려! 이런 거 처음 해보는데 내 말도 철석같이 알아듣고 따라한다. 기특한 놈. 고양이도 두 마리 있다는데 사장님 숙소 쪽에 있어서 밖에서 창으로만 슬쩍 본다.

오늘은 별 계획이 없다. 그냥 숙소에서 뒹굴거리면서 책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 그럴까나, 아님 점심 즈음에 자전거 타고 현영이네 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오설록에 다도교육이 그렇게 진국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한번 가야 하는데 오늘 갈지 내일 갈지 고민이다. 고산리를 떠난 이후인 일요일, 월요일 이틀간의 일정도 아직 정하지 않았다. 현영이랑 같이 풍경으로 돌아 가서 거기서 제주도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도 생각 중이다. 우리 대평이...

조식으로 빵을 4개나 먹어서 오늘 점심은 거를까 한다. 숙소에서 밍그적거리다가 1시쯤 돼서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좀 춥긴 하지만 구름이 거의 없는 것이 라이딩하기에는 좋은 날씨다. 어제 올 때랑 지금 내려갈 때랑 주변이 달리 보인다. 고산리가 눈에 조금씩 익어가는 중이다. 풍경들이 낯설지 않아야 적응을 마치고 여유를 즐길 수가 있는 법이다.


내려가는 길에 빵집이 하나 보인다. 어제 현영이네서 식빵을 얻어 먹은 게 생각나서 하나 사가지고 갈까 잠시 고민해본다. 귀찮다. 그냥 가야겠다. 어제 먹고 남은 게 좀 있지 않을까?


카페에 도착한다. 밖에서 보니 불이 꺼져있고 커튼이 내려와 있다. 아무도 없나? 문을 열고 들어가본다. 제주도에서는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으니 이런 일상이 가능하다. 들어가보니 현영이와 어제 간단히 한잔을 같이 한 자전거를 빌려준 동네 주2가 같이 있다. 방금 일어난듯한 포스다.

방금 일어난 거 맞단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조금만 일찍 올걸. 먹을 복이 없다. 일단 자리를 잡고 앉는다. 현영이가 짜이를 끓여주겠다며 기다리란다. 계속 얻어먹는 것이 미안해서 차라리 사 먹겠다고 하니 됐단다. 호의를 거절하기가 또 애매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식빵이라도 사 올걸. 뭔가 미안하군.


다 같이 앉아서 할 일 없이 잠시 밍그적거린다. 어쩌다 고산리 살리기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논의해본다. 말이 논의지 사실 그냥 수다다. 팟캐스트를 하자, 카페를 아프리카에 실시간 중계를 하자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것들을 당연히 하지는 않을거다. 장담컨데 이곳은 일 년 후에 와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이 확실하다.


장기거주자들을 같이 있으면 항상 뭔가 어색하다. 그 어색함의 근원은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그런 게 없다.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있는 거다. 이들과 아무 것도 안하고 조금 앉아있으니 벌써 뭔가를 해야 할거 같은 생각이 든다. 난 아무래도 서울 사람이다.

옆에 기타가 있어서 집어 든다. 몇 개 코드를 잡아보고 조금 쳐본다. 잡은 김에 악보를 몇 개 찾아서 노래도 불러본다. 그러는 나를 보더니 현영이가 실로폰을 꺼낸다. 얘는 왜 실로폰을 가지고 있는 거지? 같이 몇 곡을 합주 한다. 내 기타 실력이 좋지 않아서 멋진 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같이 열심히 연습해서 풍경에 가볼까라는 얘기도 해본다. 티벳풍경에서는 저녁에 사장님이 항상 노래를 시키고는 하기 때문이다. 근데 진짜 내일은 뭐할까.

현영이가 우리에게 짜이를 끓여준다. 인도에서 먹던 그 방식대로 끓인다. 티백이나 가루가 아니라 잡다구리한 이것저것 넣어서 냄비에 끓이는 진짜 인도 스타일 말이다. 단언컨대 짜이를 이렇게 제대로 끓이는 곳은 여기 이외에는 몇군데 없을 거다. 다 끓이고 먹으려는 찰나에 어제 만났던 동네 주1이 자기 집인 마냥 스윽 들어온다. 먹을 복이 있는 자다.

복덕방 같은 느낌이다. 넷이 쭈르르 앉아서 공짜 짜이를 마신다. 뭔가 출출해서 옆에 고산 슈퍼에 가서 과자를 몇 개 사 온다. 앉아서 다들 짜이와 과자를 먹는다. 딱히 하는 일 없이 또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다. 좋긴 한데 아직은 역시 그냥 멍 때리는 건 체질에 안 맞는다. 얘기를 하다 오늘 저녁에 고기를 구워먹자고 다 같이 합의한다. 동네 주1의 집에서 먹으면 될 거 같다. 내가 손님이니 고기는 이따 내가 사가야겠다.


안 되겠다. 밖에 나가서 오름도 좀 오르고 일몰도 봐야겠다. 이 옆에 당산봉이 경치가 정말 좋단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당산봉을 뒤에서 올라서 앞으로 내려온 후에 해안 산책길을 건너서 수월봉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일몰을 보는 게 제일 좋단다. 그 코스를 밟아야겠다. 현영이가 자기도 일몰은 보고 싶다고 해서 이따 수월봉 앞에서 5시 반에 만나기로 한다. 전화 못하는 상태에서의 약속은 정말 오랜만이다. 난 전화를 끊었고 현영이는 어제 핸드폰을 잃어버린 상태다. 5시 반에 못 만나면 그냥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얘는 진짜 핸드폰을 안 찾네? 동네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그냥 만사태평이다.

먼저 당산봉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다. 마을 근처 입구가 있긴 한데 그쪽은 내려오는 길이고 올라가는 건 반대쪽에서 꼭 올라가야 한다고 그랬었다. 그래야 뷰가 좋다나? 일러준 길을 찾아보는 잘 안 나온다. 길을 잃었나? 나름 시간 약속이 있는 상황이라 조금 서둘러본다.

한참을 가서 올라가는 입구를 드디어 찾는다. 그래도 오름이다 보니 나름 잘 정돈해놓았다. 길을 들어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조금 가니 양갈래가 나온다. 어디로 가라는 거지? 양쪽 다 산책로라고 쓰여있다. 그냥 산 방향인듯한 길을 선택해서 올라간다. 올레길 하고는 조금 다른 리본이 가는 길에 몇 개 보인다. 이 리본도 방향을 알려주는 건가보다. 제주도는 길이 참 친절하다.

얼마 안 올라갔는데 꽤 좋은 뷰가 나타난다. 나는 항상 이게 신기하다. 진짜 조금만 올라온 것 같음에도 꽤 높이 올라온 뷰가 나타난다. 왜일까? 전망이 좋아서 서두르지 않고 좀 느긋하게 올라간다. 새소리가 좋아서 음악은 끄고 여유를 즐기며 산책하듯이 걷는다.

정상인가 보다. 불조심이라고 쓰여 있는 초소가 있다. 가까이 가니 안에 사람이 보인다. 한 할아버지가 라디오를 듣고 계신다. 공무원인가? 아님 그냥 여행객이 쉬는 거?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잠시 앉아서 전망을 보다가 다시 또 걷는다.

갑자기 앞에 바다가 보인다. 어제 일몰 볼 때도 못 찾던 바다가 여기 올라오니 한눈에 보인다. 그래서 이쪽으로 무조건 올라와야 한다는 거였구나. 이쪽으로 올라야 바다를 등지지 않고 바라보며 걸을 수가 있다. 바다를 보면서 계속 간다. 산도 좋지만 역시 일몰은 바다로 떨어져야 하는 법이다.

일종의 뷰포인트(?)가 나타난다. 의자도 있고 안내문구도 있다. 여기가 거북바위인가 보다. 전망이 정말 끝내준다. 제주도 다니면서 본 전망 중에 거의 탑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만히 있는다. 좋다. 이런 곳이 숨어있다니... 이 동네 여행객이 나 하나라는 게 아쉽기도 하면서 좋기도 하다.

더 앉아있고 싶지만 5시 반 약속이 생각난다. 5시쯤 일어나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라고 했다. 거북바위에서 짧게 이어진 길이 나온다. 딱히 특이한 건 없는데 뭔가 조용한 느낌이 좋은 길이다. 눈을 감고 걸어본다. 바람이 느껴지는 게 좋다. 서울 가서도 이런 여유로움을 잊지 않고 싶다.

내려가다 보니 올레길 표시가 보인다. 아 여기도 올레길이구나. 근데 올레길이 거북바위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별 곳을 다 가게 해놓구서는 이런 멋진 전경을 못 보게 해놨다니. 역시 올레길 마음에 안 든다.

올레길 표지를 따라가다 보니 딱 보기에도 해안산책로 같은 길이 나타난다. 길이 해안을 따라 예쁘게 펼쳐져있고 반대편은 지층의 단면이 보이는 돌벽이 있다. 여기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아까 워낙 좋은 뷰를 보고 와서인지 큰 감흥이 없다.

길을 쭉 따라간다. 이곳은 올레길이라 그런지 여행자들이 한둘 보인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겠다 싶어서 조금 서두른다.

저 멀리 현영이가 보인다. 그래 약속할 때 꼭 핸드폰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전에 삐삐 시절에도 다 약속 잡고 만나고 했다. 계속 같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보니 반갑다. 집에서는 찌질하게 있더니 나온다고 단장을 좀 했나 보다. 사람 같아 보인다.

같이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에 건강관리 도구들이 쭉 늘어서 있다. 여기도 대한민국이군. 우리나라는 정말 시민들의 건강을 너무나도 아낀다. 여기는 좀 특이한 기구들이 많다. 이걸 쓰면 특별히 더 건강해지나?

수월봉에는 제주도에 3개 있는 기상대 중 하나가 있단다. 그래서 뉴스에서 날씨 얘기를 할 때도 그리 크지 않은 마을임에도 꼭 고산리가 나온다. 일몰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지 사람들이 많이 온다. 하지만 걸어오는 사람은 별로 없고 다 차를 타고 온다.


올라가는 길에 슈퍼에서 현영이가 막걸리를 한병 사 온다. 그래 일몰 보면서 한잔 마시면 또 죽음이겠다. 자기만의 일몰 보는 명소가 있다고 해서 따라간다. 어딘가로 올라가더니 둘러쳐져 있는 팬스를 넘어서서 들어간다. 이거 이래도 되나? 법 없이도 사는 나지만 그래도 일몰을 잘 보고 싶다는 생각에 따라 넘어간다.

여긴 앞이 완전 절벽이다. 말 그대로 절벽이다. 바위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단 막걸리를 한잔 따르고 해를 보면서 얘기를 나눈다. 눈 앞에 절벽이 좀 아찔하다. 뭔가 보고 있자니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나처럼 내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 나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이유는 뭘까? 사람은 모두 자살 충동이 내재되어 있는 걸까?


절벽 끝에 약간 튀어나온 곳이 있다. 현영이가 그곳에 앉아보란다. 아 무섭다. 난 원래 안전이 확실한 것은 아무리 무서워도 스릴을 즐기는 편인데 불안한 건 절대 안 하는 주의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도 안 간다. 난 소중하니까. 그래도 여기는 한번 앉아보고 싶다. 이런 기회가 또 있겠나.

슬쩍 가서 앉아본다. 헐. 오금이 저린다. 왠지 뚝 떨어져 내릴 거 같은 기분이다. 빨리 인증샷을 찍으라고 한다. 현영이가 사진을 몇 장 찍는다. 여유로운 모습이어야 멋진 사진일 텐데 너무 겁난 게 티가 난다. 없어 뵌다. 난 안되나 보다.

여기는 좀 위험하다. 사람들한테 알려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뒤에 어느새 사람들이 많아졌다. 관광객들이다. 우리가 안에 있으니 한두 명 들어왔다가 절벽을 보고는 잽싸게 나간다. 원래 우리도 이러면  안 되지만 주민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혼자 합리화를 한다. (물론 그래도 안되는 거다.)


해가 이제 많이 내려왔다. 이미 막걸리는 다 먹었다. 아 제주 핑크라벨 막걸리, 정말 맛있다. 진작 좀 많이 먹을걸. 이 막걸리를 제외한 감귤 막걸리 같은 다른 모든 막걸리는 실제로 제주에서 만든 게 아니란다. 한라산 소주도 그렇고, 제주는 물이 좋아서 그런지 술이 정말 괜찮다.

해가 내려온다. 안개는 꽤나 껴있지만 구름이 없어서인지 일몰이 잘 보인다. 제주도에서 보는 제대로 된 두 번째 일몰이다. 예쁘다. 이곳에서 하루 더 있을까 생각을 해본다. 지금 당장 정할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일몰은 여기도 좋지만 아까 오름에서 봤던 거북바위에서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내일 하루 더 있으면 그쪽으로 가야겠다.

해는 어느새 수평선 밑으로 떨어지고 잠시 여운을 즐기며 앉아있는다. 사람들은 해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싹 다 사라졌다. 뭐가 그리 급한 걸까. 여운을 즐길 정도의 여유는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도 이제는 슬슬 일어난다.

주변에 쓰레기를 줍고 다시 펜스를 넘어온다. 동네를 향해 걸어간다. 가는 길에 무밭이 보인다. 근데 무가 하나도 안 뽑혀있다. 이번에 무 농사가 망해서 안 뽑고 그냥 방치하고 있단다. 그래서 무가 먹고 싶으면 가서 그냥 뽑아가면 된단다. 시골 구나. 여기서는 채소 사 먹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다 주니까 그냥 얻어서 먹는다.

아까 고기 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고기를 사가야 한다. 현영이와 GS마트로 간다. 여기 GS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GS가 아니다. 아마 '고산'의 약자라고 한거 같다. 근처에 도축장도 있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귀찮다. 마트에서 15,000원 치 고기를 산다. 술도 사가야 하지 않나? 현영이가 동네 주민들 얻어먹기만 하는거 얄밉다며 술은 들한테 내라고 할거란다. 그러지 뭐.

카페로 돌아 오니 동네 주민 1, 2가 둘 다 이미 와 있다. 인터넷이 그 사람들 집에서는 안돼서 다 이쪽으로 몰린단다. 히피들이라 얻어만 가는 것 같아 어찌 보면 얄밉기도 하지만 또 나름의 균형이 맞쳐져 있겠지... 다른 애들이 노는 동안 현영이가 감자를 호일에 싸고 이것저것 준비한다. 너무 혼자 하는 거 같아서 나도 도와주려니 괜찮단다. 착한 동생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이 히피들, 좀 도와주지.

다 준비를 하고 동네 주1의 집으로 간다. 바로 옆이다. 마당이 꽤나 멋지게 있어서 고기 구워먹기 딱이다. 이런 게 있으면 난 맨날 먹었을 거다. 없는 게 다행이다.

여기저기서 나무를 주워 온다. 거기에 토치로 불을 붙인다. 돈 들어가는 건 고기밖에 없다. 나무 직화구이가 몸에는 안 좋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뭐 한 번쯤이야. 비쥬얼이 죽인다.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고기를 다 구워간다. 아 맞다. 술! 술 없냐고 물으니 없단다. 사오라는 얘기를 돌려 말한건데... 없다면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거지. 그냥 내가 사 올까 하고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다 좋다고 한다. 그래 내가 사 오자. 장소도 제공해주시는데 마음 넓게 가져야지. 각 1병씩 마실 것만 옆의 고산 슈퍼에서 사 온다. 오늘은 한라산으로 정했다. 컵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병 채 마시면 된다.

다 익은 고기를 한 점 먹어본다. , 역시 맛있다! 불빛이 없는지라 잘 안 보여서 태우는 것도 많지만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가시리에서 먹은 그 고기 보다도 맛있는  듯하다. 맛있으니 고기가 쑥쑥 없어진다. 좀 천천히 먹을까 했는데 다들 먹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평소에 잘 못 먹나보다. 정말 게걸스럽게 달라붙어서 잘 먹는다. 이러다간 잘 못 먹을 듯해서 나도 체면이고 뭐고 달라붙어서 같이 게걸스럽게 먹는다.

마지막 한 점이 남는다. 보통 이런 경우에 서로 양보하는 문화지만 여기는 그런 거 없다. 오히려 누가 덜 익은걸 먹을 수 있냐는 치킨게임이다. 내가 진다. 내가 양보한 걸로 치지 뭐. 맛있는 고기 파티였다.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9시다. 어제 오렌지 다이어리 사장님이 기다리던 게 생각나서 일단 먼저 일어난다. 이 사람들은 언제까지 마시려나? 딱 소주 한 병만 마셨더니 취기는 적당하다. 짐을 가지러 일단 풀밭 카페로 간다.


어제 블로그 올린 글에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온다. 보니 고산리 주민이다. 헐, 세상 정말 좁구나. 그래도 반갑다. 여기 있는 동안 만날 수도 있겠지? 그거 또한 재미있는 인연일 거 같다. 어느 순간 이 여행기를 제주도 사람들이 보기 시작해서 살짝 부담스럽다. 자기 얘기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심스러워진다. 너무 실시간으로 올리나? 이제는 이틀 뒤에 올리는 걸로 할까 고민해본다.


자전거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적당히 취했겠다, 하늘의 별도 예쁘겠다, 기분이 좋다. 깜깜하지만 이제 몇 번 가본 길이라 익숙하다. 근데 마을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라 편한데 거꾸로는 오르막이라 좀 힘들다. 가다가 근처에 와서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간다.

돌아 왔는데 아무도 없다. 사장님 내외분도 외출하셨나 보다. 도둑이 없으니 그냥 이리 열어놓고 다니신다. 그냥 들어가 잘까 하다가 왠지 걱정하실  듯해서 카페에 메모를 남긴다. 그러고 방으로 가니 조금 있어서 인기척이 들린다. 나와보니 사장님 내외다. 근처에서 한잔 하시고 오시는 거란다. 사장님 하고도 한잔 해야 하는데,라고 하니 지금 먹자고 하신다. 콜!

막걸리 한 병을 꺼내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한 병은 순식간에 비운다. 한라 반  남은 게 있다. 하지만 역시 이놈도 금방 비운다. 이쯤 되면 집안에 모든 술이 나오는 법이다. 어디선가 인삼주를 꺼내신다. 아 이건 좀 쓰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건 한라산이 아닌 진로로 담근 거란다. 어쩐지.

술 먹으면서 오늘 고기 파티 완전 좋았다고 우리도 여기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자고 제안한다. 사장님도 좋다고 한다. 그런 김에 일단 하 더 머물겠다고 한다. 내일은 현영이도 불러와서 사장님 내외분 하고 고기 파티를 해봐야겠다. 숙소에 나 혼자 있으니 사장님이랑 안 친해질 수가 없다. 여기 개, '까뮈' 하고도 이제 꽤 친해졌다. 내 집 같은 느낌이다.


인삼주가 좀 독했나 보다. 그거 몇 잔 먹은 이후에 기억이 희미하다. 제주도 여행기간 중에 제일 많이 취한 날이다. 원래 여행 때는 술을 많이 안 먹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뭐 한번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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