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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Dec 04.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10

고산리로의 버스 여행

새벽 3시 반에 알람이 울린다. 아무도 안 일어난다. 혼자라도 일어날까? 아니면 그냥 더 잘까? 고민하다가 알람을 1분 후로 다시 맞춘다. 한번 더 울리면 그래도 누군가는 일어나겠지. 다시 알람이 울린다. 아무도 안 일어난다. 에잇, 나라도 일어나야지. 김연아와 아이유는 무조건이다. 나라도 가서 연아 씨가 외롭지 않게 해야겠다.


밖에서 개들이 엄청 짖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지긋이 쳐다보니 어둠 속에서 어제 커플 중 남자분이 밍그적으로 향하고 있다. 개들이 이분을 도둑인 줄 알고 짖나 보다. 이놈들 그저 순한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집을 지키긴 하겠구나. 그분은 결국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가고 있길래 내가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선다. 이놈들 나를 봐도 이를 들어내고 마구 짖는다. 살짝 무섭다. 그래도 나는 이틀 동안 봐서 얼굴이 좀 친숙한지 다가서니 길을 내주긴 한다. 남자분을 에스코트해서 데리고 밍그적으로 들어간다.


조금 있으니 커플 중 이번에는 여자분이 오셨는지 개들이 또 짖고 난리났다. 남자분이 나가서 모시고 온다. 처음부터 같이 올 것이지. 개들이 하도 짖어서 사장님도 결국 깨신다. 근데 어제 8명 다 온다더니 결국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이 끝이다. 혹시라도 여자분 한 명만 나와있으면 둘이서 이 므흣한 상황을 어찌 하려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이제 다음 차례가 김연아다. 모두 숨을 죽이고 말 없이 같이 화면에 집중한다. 밴쿠버 때 생각이 난다. 정말 감동이었던 4년 전, 오늘 다시 재현되려나? 앞 부분은 못 봤는데 사회자가 하는 말이 점수를 퍼줬다는 얘기가 많다. 살짝 걱정이 된다.

김연아가 나온다. 연기가 시작되고 여유롭게 점프를 한다.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성공. 다시 점프. 또 성공. 처음에는 좀 긴장한 듯하다가 조금 지나니 표정에 여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긴장하니 연기에 몰입이 안된다. 또 점프. 성공. 왜 이리 점프가 많은 거야. 하지만 마지막 점프까지 성공.


실수 하나 없는 클린이다. 역시 멘탈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다 같이 환호한다. 다른 선수들의 과한 점수 때문에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뿐히 우승은 하지 싶다. 점수가  발표된다....


...


어쨌든 실수하지 않고 다 했으니 할 일은 다 한걸 거다. 은메달이지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일 텐데 아쉽지만 또 어쩌리.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건 즐겨야 한다. 이건 김연아나 나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시 자러 간다. 이제 잠이 잘 안 온다. 어젯밤부터 숙소에서 글로 표현하기 힘든 소리가 밤에 들리고 있다. "그듥큯듯" 뭐 이런 소리? 뭔지 몰랐는데 커플 중 남자분이 지긋이 일러준다. 이를 가는 소리란다. 헐, 그렇구먼. 형님이 이를 가시나보다. 하긴 말 들어보니 나도 코를 조금 골았다니 뭐라고 못하겠다.


잠을 좀 설쳤지만 8시가 되면 무조건 일어나야 한다. 드라이기 소리, 샤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져서 안 일어날 수가 없다. 오름 투어는 안 갈 거지만 그래도 역시나 조식은 중요하다. 오늘은 떠나는 날이니 일어나서 짐을 미리 싸고 밍그적으로 향한다.

밍그적에는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다.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났는데 제일 빨리 씻었나 보다. 대충 세수만 하면 되지 다들 뭘 이리 열심시 씻을까. 어차피 더러워질 거. 내가 평상시에도 이런 건 아니다. 여행이니 좀 편하게 지내자.

조식을 먹으면서 어제 김연아 경기의 반응을 검색해본다. 숙소에는 와이파이가 안 되니 소급해서 새벽 글부터 다 검색해서 챙겨본다. 조식을 먹고 있으니 이제서야 한 명 두 명 나오기 시작한다. 새벽에 안 나온 사람들 구박도 좀 하면서 담소를 나눈다.


8시가 되니 오름 투어 갈 사람은 준비하라는 사장님의 소리가 들린다. 난 오늘 안 가기로 했으니 좋은 자리를 잡고 편히 앉는다. 어제 하루는 돌아다니느라 날렸으니 오늘 이동하기 전까지라도 최대한 밍그적거려야 한다.


모두가 떠나고 아무도 없는 밍그적은 매력적이다. 앉아서 오랜만에 채팅도 하고 밀린 글도 쓴다. 여행에서는 리듬이 중요한데 어제 하루는 그 리듬이 깨진 느낌이다. 어차피 오늘 떠나지만 남은 시간 동안 리듬을 살리고 싶다. 마지막 이틀을 어디서 보낼까 고민했었는데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써니허니는 크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최적화되어 있는 공간이다. 지난 이틀이 좋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을 생각하면 좀 과했다.


떠나는 마당에 정리를 좀 해본다. 이곳 역시 동네를 잘 파악하지는 못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여행을 하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아쉽다. 동네가 꽤나 괜찮아 보였는데.


써니허니의 가장 큰 장점은 부지런한 사장님이다. 청소도 관리도 정말 엄청나게 부지런하시다. 그래서 그런지 디테일이 살아있고 구석까지 깨끗하다.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힘든 거다. 오전 11시가 되면 청소를 시작하셔서 거의 하루 종일 그 청소를 이어가신다. 침대 시트를 매일 빨고. 귤잼을 직접 만들고, 사람들이 입고 놔둔 몸빼도 빨고, 항상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 성공의 핵심은 디테일과 부지런함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느낀 바가 크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해도 역시 밍그적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밍그적은 제주도의 여타 게스트하우스와 다르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방한다. 내가 딱 원했던 그 멍 때리는 공간이다. 좋은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뭔가 아쉽다. 너무 현대적이라고나 할까. 티벳풍경의 분위기에 이런 곳이 있으면 정말 좋을 거 같다. 뭐 이렇게 욕심내면 바라는 게 끝도 없겠지?


여행 중에는 늘상 그렇지만 밍그적이라는 특수한 공간 때문에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인연이 생긴다. 어쩌다 하루를 같이 하게 된 분들, 한 분은 72년생이고, 나는 78년생, 그리고 83년생과 92년생의 여인들이다. 평소 같으면 세대차이 난다고 못 어울릴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나이를 벗어나서 어울리게 된다. 내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름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준 분들께 정말 감사한다.

다음 행선지인 고산리를 가기 위해 지도로 검색을 해본다. 헐, 3시간 40분이 나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여행 중 최고 난이도의 코스다. 갈 수 있겠지? 써니허니 사장님이 제주도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가는 거라며 고생 좀 할거라고 일러주신다. 원래 느긋하게 가려고 했는데 슬슬 출발해야겠다. 밥은 중간에 내키는데서 먹지 뭐. 다시 혼자이다. 다시 여유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라고 생각하고 버스 시간표를 본다. 11시니까 슬슬 떠나도 될듯해서이다. 헌데 다음 버스가 12시 50분이다. 어쩔 수 없이 2시간을 더 이곳에서 묶여있게 되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점심은 어쩌지? 오늘은 고생이 예견된다. 고산리에 사는 동생을 보기 위하여 제주도 여행 안에서의 또 다른 여행을 떠나야 한다.


점심시간이 애매하다. 라면을 먹고 출발할까? 형님은 마지막으로 같이 고기국수를 먹으러 가잔다. 또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이 있단다. 살짝 구미가 땡기지만 정중히 거절한다. 이제는 나의 여행을 다시 찾을 때가 됐다. 내 여행을 내가 끌어야지, 끌려가면 결국 이건 내 여행이 아니게 되는 거다. 굶을까 하다 오랜만에 여기서 라면을 직접 끓여먹기로 한다.


라면이 종류별로 있다. 역시 라면은 너구리지! 주위에 한번 물어보니 아무도 안 먹는다 해서 혼자 끓여먹는다. 김치를 꺼내기 좀 눈치 보인다. 누군가 꺼내 줄까 싶어 처량한 표정으로 먹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너구리는 원래 라면만 먹는 게 진리지!

라면을 먹고 기부를 하려고 주머니를 뒤져본다. 천 원짜리 한 장, 500원 동전 두개, 그리고 100원 두개가 있다. 동전을 다 넣는다. 이 정도면 되겠지? 1000원도 넣을걸 그랬나...


다 작별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래도 이틀 동안 정들었던 사람들이라 뭔가 짠하다. 너무 좋으신 사장님한테도 인사한다.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꼭 오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는데 고산리 동생한테 카톡이 온다. 게스트하우스로 가지 말고 일단 자기 집으로 오란다. 헛. 이미 지도 다운 다 받아놨는데. 와이파이가 끊겨서 다시 밍그적으로 들어간다. 아놔, 극적인 인사도 다 끝났는데!


주소를 물어보니 그냥 정거장에서 내리면 안단다. 야 그건 네 입장이고, 난 도민이 아니잖아. 마을이 작아서 괜찮단다. 알았어. 내리면 "현영아!!"라고 소리쳐 외치기로 한다. 안 나오기만 해봐.

날씨가 예술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제주도 여행 중 최고의 날씨다. 햇볕이 정거장을 그윽하게 비춘다.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기다리니 기분이 또 들뜬다.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도 좋았지만 홀로 되서야 느껴지는 이 자유로움이 나는 너무 좋다. 고산리 동생이 오늘 저녁에 마을 사람들 불러서 파티를 하자고 한다. 기대해본다. 이곳의 사람들을 떠나서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버스에서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즐겨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타서 보니 만석이고 자리 없이 서 있는 사람도 좀 있다. 제주도 버스도 이런 상황이 생기는구나. 어쩔 수 없이 서서 간다. 근데 뒤에 보니 맨 뒷줄 의자의 가운데 자리가 비어있다. 이런 배부른 사람들 같으니라고. 꾸역꾸역 그쪽으로 가서 앉는다. 나도 이제 관절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다.

자리에 앉아서 책을 핀다. 아니 실행한다. 저번 책은 잘 안 읽혀서 재미있게 본 '역사e'의 2권으로 바꿨다. 하지만 책을 펴서 두장을 읽으니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버린다. 쳇, 도와주질 않는구먼.

버스카드를 찍고 내린다. 원래는 내릴 때는 안 찍는데 환승할인받으려면 찍어야 한다. 의외로 서일주 노선은 금방 찾는다. 이젠 이 정도쯤이야. 운 좋게 조금 있으면 바로 출발한데서 버스에 올라타서 자리 잡고 앉는다.


갑자기 마플이 울린다. 엥? 보니 와이파이가 신호는 약하지만 잡혀있다. 여자친구한테 온 메시지다.


점심 일찍 먹고 들어와서 책 읽고 있는데 공유하고픈 내용이 있어서.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결국 변하지 않는 것, 본질을 보라, 가 책이 하고자 하는 얘기네.

어젠 퇴근만 기다리는 빨리 벗어나고픈 곳이었는데 내가 바뀌니 장소는 따라오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휴가나 여행이 아니라 마음속 여유겠지? 나른하고 기분 좋네. 오늘도 즐거운 여행하세요.


멋진 여성 같으니라고. 나의 여행 마음가짐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어제 힘들었던 것도 여유가 없어서다. 여유, 오늘은 그놈을 가져보도록 하자. 땡큐!


버스가 출발하고 곧 바다가 보인다. 여유를 가지고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니, 덜컹거리는 버스가 뷰가 좋은 도서관으로 느껴진다. 두 시간 가면 어떻고 세 시간 가면 또 어떠리. 즐기자.

역사e는 1편도 괜찮았는데 2편도 나름 괜찮다. 이런 역사책이 좋다. 소설책처럼 사건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일부분을 보면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심시티에서 심즈를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 챕터 정도를 봤는데 다 인상에 깊이 남았다.

버스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다. 바깥 풍경을 보면서 책에 빠져 있다 보니 오히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느낌이다. 제주도 차편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실 여유만 가지면 어디든 갈만하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한테야 일상이니 넓은 배차간격 등이 많이 불편하겠지만 여행객들이야 뭐... 이 정도를 감수 못한다면 여행 오지 말아야 한다.

내려서 여기 사는 동생 현영이가 얘기한 식당 앞으로 간다. 이 근처 집이라는 잘 모르겠다. 일러준 데로 진짜로 앞에서 "현영아!"라고 소심하게 외쳐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들릴 리가 없지. 바보 같으니라고.

근처를 기웃기웃 거리며 찾는다. 바로 옆에 풀밭 카페라고 보이길래 안에를 스윽 보니 현영이가 보인다. 정말 반갑다! 거의 일 년 만인가? 인도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쿨렐레나 젬베를 칠 때 꿋꿋하게 초등학교 때 배운 피리를 불고 다니던 소녀가 제주도 고산리에서 작은 카페의 여사장님이 되어 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대평리의 선자네 쌀롱에 있으면서 왠지 모르게 현영이 생각이 많이 났는데 이곳에 오니 역시나 그곳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분위기기 좋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자기가 하나하나 직접 다 만든 거란다. 대단한 것. 남자친구랑도 나름 친해서 도와주러 안 왔냐며 물으니 남자친구는 이런 일을 할 줄 모른단다. 필요 없는 남자친구 구먼. 근데 내가 아는데 남자친구, 정말 정말 착한 친구다. 여행 다니면서 이런 카페를 10일 동안 계속 찾아 해매고 있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발견하는구나.

이 친구는 제주도로 온지 일 년 정도 됐다. 제주도로 여행와서 대평리 티벳풍경에 머무는 동안 같이 있던 친구들과 함께 고산리로 넘어와 자리를 잡았단다.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으니 동네 주민(?)들이 아무말 없이 스윽 들어온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같이 앉아 식빵에 귤잼을 발라먹으면서 얘기를 나눈다. 이 동네 주민도 원래 서울 사람이고 이곳에는 한 일 년 전부터 와 있다는데 얼굴에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나도 확 제주도에 한 일 년만 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욕구는 욕구일 뿐, 현실을 잊지는 말자.

허름한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별 의미 없는 수다를 떠는 이 여유가 좋다. 얘기를 나누다가 해가 슬슬 내려가서 일어난다. 제주도에서는 집 문을 잠그지 않는다. 얘기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안 잠근다는 것이 인상 깊다.


이번에 묵을 게스트하우스는 오렌지 다이어리이다. 써니허니 사장님이 이곳에서 예전에 스텝 일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장님이 바뀌었다지 아마? 현영이네 풀밭카페에서 그곳까지 거리가 좀 있다. 현영이와 함께 자전거를 가지러 같이 동네주민 집으로 간다. 자전거를 그 집에 맡겨놨단다. 폐가인듯한 집인데 정말 소박하고 멋지게 꾸며놨다. 프라이버시 때문에 사진은 안 찍었지만 예술적 소양이 있어 보인다.


자전거를 끌고 가다 이번에는 또 다른 주민 집으로 간다. 이분도 서울에서 내려오신 분인가? 현영이가 자전거 좀 빌릴게 하고 안쪽에 소리치고 대답도 안들은채 그냥 가져온다. 저 자전거는 이틀 동안 내꺼가 될 예정이다. 자전거를 받은 후 현영이와 잠시 헤어지고 바람을 맞으며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간다. 생각보다 거리가 좀 된다. 걸어왔으면 좀 힘들었을 듯하다.

쪽으로 오니 게스트하우스가 한두 개 보인다. 그 반면, 여행객은 거의 안보이는데 괜찮으실까? 일단 현영이 추천으로 예약해 뒀던 오렌지 다이어리에 간다. 현영이와 함께 오는 날 보셨는지 사장님이 직접 나오셔서 문을 열어주신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아주 촐싹 맞은 강아지가 한놈 있다. 이놈 대걸래를 닮았다 하여 그리 불리던 개 아닌가? 근데 진짜 활발한걸 넘어서서 촐싹 맞다. 처음 보는 나를 너무 반겨준다. 이곳에 있는 며칠 간 이놈하고 좀 놀아줘야겠다.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있는 카페로 들어가서 사장님과 현영이랑 셋이서 담소를 나눈다. 앤한 소품들이 많은 게 이런 쪽이 취미이신 거 같다. 예전 필름 시절의 카메라들을 저리 해놓으니 또 품격 있어 보인다.

오늘은 나 혼자 이곳에 묵게 된다. 도미토리, 화장실, 샤워실 모두 오늘은 내꺼다. 내가 다 빌린 느낌이다. 사장님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덕분에 아주 여유로운 이틀을 보낼 수 있을 거 같다. 시설도 좋고, 룸 안쪽에 자리한 휴게실도 아늑하고 분위기 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현영이네 풀밭 카페로 돌아 온다. 카페 이름이 왜 '풀밭카페'냐고 현영이한테 물으니, 행복의 나라에서 나온 구절을 제목으로 썼단다.

바깥을 바라보니 이제 슬슬 해가 지려고 한다. 일몰을 보러 같이 나갈까 하다가 현영이는 귀찮다 하여 나 혼자 자전거를 끌고 일몰을 찾아 나선다.

해를 바라보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는다. 아, 춥다. 젠장. 경치도 좋고 느낌도 좋은데 바닷바람이 너무 거세다. 제주도는 왜 이리 추운 걸까. 그래도 경치가 너무 좋아서 무리해서 더 가본다.

제주도는 섬인데도 해가 바다에서 지는 게 아닌가? 오름 쪽으로 지는 거 같기도 하고. 내일은 아예 오름에 올라서 일몰을 봐야겠다. 어느 정도 가다가 구름에 해가 가려지니 어차피 안 보일 거라고 합리화하며 돌아선다. 절대 추워서 그런거 아니다.

고산리. 매력적인 동네다. 시골 같지만 치과부터 대형 할인마트가 2개나 있고, 있을 거 다 있는 동네다. 그런 반명 여행객들한테 소문은 아직 안났는지 여행객이 너무 없다. 안타깝다. 이 아기자기한 동네를 제주도에 와서 놓치다니. 식사를 해결할 식당도 꽤 보이는데 여행객 없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다소 궁금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니 현영이는 그새 또 어디 마실 갔는지 카페 불이 꺼져있다. 역시나 문을 열어놨기에 주인 없는 카페에 들어가서 키보드를 꺼낸다. 글을 쓰며 앉아 있으니 현영이가 장을 봐왔는지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오늘 저녁으로 닭볶음탕을 해주겠단다. 티벳풍경에서 뵈었던 그 매력 넘치는 여성 스텝 분도 오기로 했단다. 동네 사람들도 다 모이려나? 원래 여행에서 사람들과 우루루 모여서 노는걸 그리 반기진 않지만 이런 건 예외다. 오늘은 즐거운 밤이 될 거 같은 느낌이다.

좀 앉아있으니 처음 보는 얼굴의 주민이 들어온다. 제주도에서는 섬 출신과 육지 출신을 확연히 구분한다. 섬이다 보니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느낌이 없을 수 없나 보다. 내륙 출신은 '육지것들'이라는 표현도 쓴다. 방금 온 사람도 육지인인데 아까 자전거를 빌려준 분이란다. 이분 또한 한 일 년 전부터 내려와 있다고 한다.


근데 알고 보니 이 분도 5년 전에 인도 여행 다닐 때 나와 마주친 적이 있단다. 기억이... 원래 난 기억력이 안 좋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뭔가 반가워진다.

조금 있으니 현영이가 닭볶음탕을 다 만들어서 가지고 온다. 이곳에서는 이웃들이 정이 많아서 감자 같은 채소는 그냥 있어도  엄청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채소가 듬뿍 들어간 닭볶음탕이 오늘의 메뉴다. 역시 맛있다. 얘가 원래 이리 솜씨가 좋았나? 아님 재료가 깡패?


밥을 먹고 앉아서 차 한잔 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한다. 언제 제주도로 내려왔는지, 여기 심심하지는 않은지, 그리고 무섭지는 않은지, 오빠로서 물어본다. 문도 안 잠그고 다니고 저녁 되면 너무 깜깜해서 무서울 법도 한데 막상 여기서 살면 또 안 그렇단다.


좋은 분위기의 카페에서 밥만 먹고 가자니 뭔가 아쉽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막걸리를 3명 사 온다. 이곳 사람들은 감귤 막걸리나 땅콩 막걸리 같은 믹스된 제품은 절대 안 먹는다. 맛이 없단다. 그리고 실제 제주도에서 만드는 막걸리는 핑크라벨이 유일하단다. 제 감귤 막걸리 먹었을 때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하지만 계속 먹는다고 생각하면 안 좋을  하다.


일반 핑크라벨 막걸리를 사 온다. 각 1병씩, 잔에도 안 따르고 맥주처럼 그냥 병채 들고 마신단다. 별거 아니지만 또 하나의 문화충격이다. 하긴 맥주도 그리 먹고 가끔 소주도 그러기도 하는데 막걸리라고 못할 것도 없다. 설거지도 줄고 분위기도 나고, 일석이조다. 나도 같이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셔본다.

, 겁나게 맛있다. 이 막걸리가 원래 이 정도로 맛있었던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다. 근데 나뿐 아니라 다른 두명도 평소보다 맛있다며 좋아한다. 궁금해서 병을 자세히 보니 제조일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 만든 술을 오늘 먹는거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원산지가 애월인데 이곳에서 한 시간 거리다. 그러기에 이런 경험이 가능한가 보다. 닭볶음탕 남은걸 안주 삼아  홀짝홀짝 마신다.


티벳 풍경의 그 스텝분은 안 오시려나보다. 뭐, 일이 있겠지. 현영이는 핸드폰을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신경도 안 쓴다. 마을 어딘가에 있겠지 뭐, 이런다. 병채 마시다 보니 분위기에 슬쩍 취한다. 이거 좋은데? 서울 가서도 병채 마셔볼까나.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오렌지 다이어리 사장님이 10시까지 돌아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다돼간다. 아쉽지만 일어나야 한다. 난 여자고 이 사람들은 생활하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생활패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새 10시가 넘었기에 사장님 걱정하실까봐 전화를 드리고 갈까 했더니 현영이도 나도 전화가 안된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가야지. 오늘의 술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나온다.


바깥바람이 차다. 이 날씨에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현영이가 빌려준 장갑을 끼고 자전거에 올라선다. 페달을 밟고 아까 갔던 길을 기억에 의존하여 되돌아간다.


문득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질 거 같다. 제주도에서 있던 밤 중 오늘이 별이 가장 많이 보이는 날이다. 앉아서 정취를 느끼고 싶지만 날씨도 너무 춥고 사장님이 왠지 기다리실 거 같아서 음미하는 채로 계속 패달을 밟는다.


자전거를 타니 좋긴 한데, 이 자전거는 기어 변속이 안된다. 오렌지 다이어리의 사장님이 그 주민분한테 선물로 준거라는데 한편으로는 그분한테 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기어가 없으니 언덕 올라가는데 힘이 많이 든다. 이틀 동안 운동 좀 하겠다. 가는 길에 조금 헤매기도 하지만 잘 찾아간다. 게스트하우스 앞은 너무 언덕이라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서 그냥 끌고 간다.


조용히 들어가려는데 정문에 사장님이 이미 나와 계신다. 이런, 걱정하셨보다. 이 추위에 나와 계신걸 보니 굉장히 미안해진다. 근데 또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이러면  안 되겠다.


방으로 들어온다. 10시가 조금 넘었다. 오늘은 이 넓은 건물을 나 혼자 쓴다! 도미토리 왔는데 혼자 있는 것이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계속 사람들과 다니다 보니 지금은 이런 혼자 있는 공간이 너무 좋다. 오래간만에 페이스타임 오디오로 여자친구한테도 전화를 걸어본다. 별그대에서 중요한 장면 보고 있는데 전화했다고 혼난다. 그거 본방도 아니잖아! 다시 보기 보는 주제에 그거 멈추기 싫다고... 진짜 확 한 달을  사라져버릴까 보다. 이게 일주일 만의 통화다.

간단히 씻고 와서 책을 좀 볼까 고민을 해본다. 이곳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다. 만화도 질 좋은 것들이 수두룩 하다. 근데 너무 졸리다. 여행 다니다 보니 11시에 잠드는 게 버릇이 돼 나서 10시 좀 넘으면 눈이 막 잠겨온다. 나 원래 불면증 있는 사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불면증이 아니라 신경 쓸게 많아서 잠을 못 잤었나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리 잘 자다, 뭔가 낯설다.


난로가 있긴 한데 혼자 있는데 틀려니 사장님한테 죄송해진다. 한 3명은 있을 때 틀어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 그리 엄청 춥지도 않다. 결국 난로는 놔두고 전기장판만 킨채 이불 속에 들어가 눕는다.'


침대에 누워서 오늘 하루를 정리해본다. 오늘은 지금까지 여행과는 조금 다른 하루였다. 고산리, 내일 탐험을 제대로 좀 해봐야겠다. 여행객이 없어서 오히려 더 정취 있는 동네지만 조금은 사람 오는 것도 이곳에서 영업하는 분들에게는 좋을 거 같다. 이 좋은 곳이 안 알려져서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내일은 혼자 만의 자유도 누리고 앞에 오름도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지금 나에게 이곳은 정말 딱 맞는 곳이다.


오늘은 숙박비 25,000원, 라면값 1200원, 막걸리 5000원, 총 31,200원을 썼다. 다시 알뜰여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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