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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Nov 25.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9

여유는 내면에서 나오는 법.

제주도에서 벌써 9번째 아침을 맞이한다.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았다. 어제는 나름 푹 잤다. 이제는 확실히 도미토리에 익숙해졌나 보다. 코를 고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뭐 이젠 괜찮다.


7시쯤 일어나서 대충 씻고 바로 밍그적으로 향한다. 오름 투어는 몇 시라고 했던가? 뭐 일단 가서 뒹굴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알려주겠지.

밍그적에 오니 조식이 준비되어 있다. 아 여기 조식 어마어마하다. 직접 만든 귤잼에 시리얼, 빵, 각종 커피와 차까지 모든 것이 갖춰져있다. 환상적이다. 거기다가 양송이 수프도 직접 그날 아침에 바로 만들어서 준다. 이 정도면 호텔 조식 부럽지 않다. 계란은 셀프라 스크램블드를 만들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거 이렇게 사치스럽게 먹어도 되나? 행복하군.

조식을 먹고 있으니 형님이 오셔서 앞에 앉는다. 어제 이후로 뭔가 BF가 된 느낌이다. 역시 사람은 모르는 거다. 이분 뭔가 특이하시긴 한데 아는 것도 많으시고 무엇보다 같이 있을 때 어색하지 않다. 나이에 비해 순수하셔서 첫 인상이 좀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나 싶다.

8시 좀 넘으니 사장님이 오름 투어 갈 사람은 준비하라고 일러주신다. 난 어제 이곳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몸빼 바리를 미리 챙겨서 아침에 이미 입고 왔다. 몸빼 바지가 편해서 좋긴 한데 이거 너무 적나라하다. 일종의 발레복 같다고나 할까? 나의 환상적인 엉덩이 라인이 대중에 그대로 노출된다. 치명적인 유혹으로 여기겠지?

다 같이 차에 올라타서 근처의 오름으로 이동한다. 오늘은 가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며 두대에 나눠서 간다. 사람들과 얘기를 좀 나누다 보니 금방 도착한다. 오름이라 얼마나 높을까 궁금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다. 아침 운동으로 가볍게 올라갈 만하겠다.

한 30분 오르니 금새 정상이다. 중간에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금새 친해진다. 보통 사람이 깊이 친해지는 경우는 술을 진탕 같이 어울려 먹거나 진솔하게 깊은 얘기를 서로 나눌 때이다.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여행자끼리의 초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서 저녁에 술자리를 만든다면 이곳은 오름 투어가 그 역할을 하는 거 같다. 건강하고 좋은 방식이다.

정상에 오르니 어제 그 형님이 내 사진을 몇 장 찍어주신다. 소니 알파 77에 대포 렌즈라서 오징어인 나도 꽤나 잘 나온다. 어제 이후로 진짜 베스트가 된 건지 내 사진만 찍어주신다. 괜찮은 기분이다. 나도 사진 찍으시는 형님의 모습을 몇장 카메라에 담아본다. 경치가 좋아서 사진도 꽤나 잘 나온다. 마음에 든다.

카메라를 본건지 주변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결국 형님이 다 인물 사진을 하나씩 찍어주게 된다. 자연스럽게 내 몸빼 바지가 화제가 된다. 이 적나라한 몸빼 때문에 다들 한 번씩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뭐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내 한몸 희생해서... 근데 이 몸빼 진짜 꽤나 편하다. 하루 종일 입고 있어야지.

정상에서 한라산이 은은하게 보인다. 진짜 보일랑 말랑한 정도이다. 이게 또 은근 매력이 있다. 그나마 눈이 와서 저 정도나마 보이는 거 같다. 정상을 다 같이 한바퀴 둘러보고 슬슬 내려간다. 소를 방목해서 키우는 곳이라 소똥이 사방팔방에 펼쳐져 있다. 안 밟으려 조심하며 다시 평지로 내려온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숙소로 돌아오니 10시다. 도미토리에서는 청소 때문에 나와야 하는지라 칫솔 치약만 챙겨서 밍그적으로 온다. 오늘은 여기에서 하루 종일 눌러앉아 있을까 한다. 밀린 책도 보고 생각도 하고,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거다. 이곳 최고다. 방명록에 밍그적을 심야에도 운영해달라며, 24시간 개방해달라는 얘기가 많이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와이파이 접속을 해보니 어제 어머니한테 등산장비 보내달라고 한 거에 대한 답변이 와 있다. 귀찮다며 그냥 돈 줄 테니 사서 쓰란다. 어머니... 이렇게 한라산은 물 건너가는 건가.


사장님은 옆에 누워서 잔다. 써니 허니에는 희한하게 여자가 대부분이다. 지금 있는 13명 중에 남자는 4명 뿐이다. 좀 여성스러운 게스트하우스의 느낌이 있다. 사장님이 남자라 그런가? 모두 앉아서 각자 책을 보고 있고, 형님은 아까 찍은 사진을 메일로 나눠주신다.


점심에 뭐할 거냐고 물으신다. 오늘은 그냥 있을 거라니까 어제 말한 아귀찜을 먹으러 가자신다. 혼자 여유를 즐기고 싶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점심은 그냥 밍그그적에서 라면이나 먹을까 했으니 나쁘지 않다. 가겠다고 하고 옆에 여자분한테도 같이 가자고 얘기를 한다. 아침에 오름에 오르면서 이미 친해져서 그런지 얘기를 거는 게 수월하다. 한분은 가신다는 확답을 들었으니 한 명 정도만 더 포섭해서 4명이서 먹으면 딱 좋을듯 하다.


착하고 친절하시고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엄청난 동안이신 스텝분은 아침부터 분주하시다. 아 성실하기도 하지. 바에 가서 귤을 까서 먹으면서 대화를 좀 나눈다. 어제 귤 서너 개 먹고 1000원 기부했는데 오늘도 적당히 먹고 적당히 기부해야겠다. 잡채를 만드시길래 말로만 도와드리면서 앞에 앉아있는다.


형님이 아침에 찍은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셨기에 한번 열어본다. 고놈 자알 생겼다~ 사진에서 형님의 애정이 느껴지는 듯? 흠... 제주도의 흑백 사진은 고차원 뽀샵의 효과보다 위대하다. 카톡이나 블로그 프로필 사진으로 쓰기에 적당할 듯해서 와이파이 될 때 여자친구한테 후딱 보내준다. 사진을 보더니 실물이 낫단다. 5년을 만나는 건 이유가 있는 거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이제 진짜 여행이 며칠 안 남았다. 여행 중반을 넘어서니 살짝 마음이 급해진다. 뭔가를 더 보고 싶은 급함이 아니라,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더 가지고 싶다는 급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하루 종일 밍그적에서 말 그대로 밍그적거리며 잉여스럽게 있고 싶다. 이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여러가지 사색이 자연스레 된다. 이곳에서 며칠 더 있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행 다니면서 점심은 그다지 생각 안 하고 그저 땡기는 데로, 발 닿는 데로 갔었는데 오늘은 일종의 일행(?)이 생기니까 달라진다. 대학교 신입생 때 같이 점심 먹을 사람 없어서 어색하게 헤매던 그때로 돌아간 건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여기서 라면이나 간단하게 끓여먹고 싶다. 어떨까 싶어서 형님한테 한번 물어본다.


형님은 어제 얘기한 아귀찜 집을 계속 가자고 하신다. 계속 그렇게 확신하시니 또 어제 훌륭했던 고기 생각이 나면서 여기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형님과도 이제는 둘이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이다. 혼자만의 고독을 느끼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어차피 차를 타고 가야 하고 아귀찜은 나름 크기도 있고 가격도 있는지라 밍그적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같이 갈 의사가 있는지 한번 물어본다. 어제 내가 고기를 먹고 와서 술김에  주변에 워낙 자랑을 해서인지 몇몇이 관심을 가진다. 결국 11시 반쯤에 4명이서 출발한다. 몸빼 바지를 갈아입고 갈까 하다가 밥만 먹을 건데 그냥 입고 나서기로 한다.


맴버는 형님과 나, 강원도 사투리를 조금 섞어서 쓰는 여인네 하나와 효린을 닮은 분, 이렇게 4명이다. 차를 타고 형님이 우리들을 간단히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그 유명하다는 대성 아귀찜으로 향한다. 유명세에 비해서 좀 생뚱맞은 곳에 있다. 이런 외딴 곳에 있어도 장사가 되나?

괜한 걱정이다. 들어가니 사람이 가득하다. 내 주제에 사장님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싶다. 형님이 아귀찜 주문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잠시 화장실에 들린다. 낮인데 소주를 한잔 해야 하나? 화장실에서 혼자 고민에 빠진다. 시키자니 뭔가 내가 술을 너무 좋아하는거 같이 비치는게 싫다. 그렇다고 저 맛난거를 먹으면서 한잔 안한다면 또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혼자 다닐 때는 이런 걱정 안 하는데 사람이 한두 명 같이 다니니 이런 저런 부분을 신경 쓰게 된다.


자리에 돌아오니 이미 한라산을 시켜놨다. 난 무슨 고민을 한 거지. 여자분들이 먹고 싶다며 주문했단다. 여행 다닐 때는 술을 과하게 많이 마시는 건 안 좋아하지만 이런 가벼운 한잔은 여행을 즐겁게 해주는 효소 역할을 하게 된다. 참고로 이 형님은 술을 전혀 안 드신다. 차를 몰고 다니시고 술은 안 드시니 여행 다닐 때 같이 다닐 일행으로서는 사실 최고다.

아귀찜이 나와서 소주 한잔씩을 미리 준비하고 한 젓가락 떠 먹어본다. 하도 기대를 해서인가? 맛이 좀 다르다, 괜찮다, 생각이 들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아무래도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 같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데 분위기를 망칠까봐 최대한 맛있게 먹는다. 원래 음식은 실제 맛 못지 않게 분위기도 중요한 법이다.

사람들이 막상 잘 못 먹는다. 결국 내가 혼자 2인분은 먹은 듯하다. 하지만 계산을 1/4씩 정확히 나눠서 지불하고 나온다. 햇살이 좋다. 술도 약간 들어가서 기분도 좋고, 다 같이 그 근처로 산책을 한다. 이쪽에 마시고 죽자로 유명한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가 있다고 해서 구경도 한번 갔다 오기로 한다.

넷이서 천천히 제주길을 거닌다. 확실히 제주에 있을 때는 날씨가 중요하다. 바람이 다소 거세지만 햇볕이 따뜻하니 산책하는 기분이 난다. 중간에 폐가를 하나 발견하고 이곳에 카페를 내볼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한번 해본다.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는 대부분 폐가를 개조한 경우가 많다.

조금 더 가니 함덕해수욕장이 나오고 그 명성 자자한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도 나온다. 아프리카는 사용자들에게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는 게스트하우스로 유명하다. 보통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술자리가 열려도 11시에는 끝내야 하는데 이곳은 그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그래서 늘상 새벽까지 술판이 벌어지는 그런 곳이다. 하루쯤은 잠 안 잘 생각하고 가볼만하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이미 내 여행이 계획보다 시끄러워졌다. 넌 패스!

해변이 정말 예쁘다. 말로만 들었던 에메랄드색을 눈으로 알게 된다. 동남아 쪽 많이 가봤지만 제주도도 절대 그보다 못할게 없다. 해운대처럼 어디는 어디까지만 들어간다라는 제약을 걸어놓은 곳도 없으면서 이국적인 풍경이 멋드러진다. 해변 앞 모래를 거울삼아 비치는 구름이 몽환적인 느낌을 더한다.

넷이서 해변을 거닐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서 다시 천천히 식당 쪽을 향한다. 이제 술은 다 깼다. 한라산 소주는 뒤끝이 별로 없다. 좋은 술이다. 자고로 술은 마실 때 빨리 취하고 뒤끝 없는 게 최고다.

오는 길에 밭이 보인다. 이게 무슨 밭이지? 강원도에 사는 여자분이 마늘 아니면 양파란다. 아니 줄기만 보고 이걸 어떻게 알지? 거꾸로 나에게 어떻게 이것도 모르냐며 되묻는다. 서울 사람 아니면 이런걸 다 아는 건가? 최근에 본 응사가 떠오른다. 의외로 지방과 서울 사람들의 갭이 큰가 보다. 근데 진짜 어떻게 알지?


차에 올라탄다. 좋은 식사와 산책이었다. 충분히 싸돌아 다녔으니 이제 다시 밍그적으로 돌아가서 말 그대로 그저 밍그적거리고만 싶다. 오늘도 벌써 오후 2시이고 여행도 얼마 안 남으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는 와중에 형님이 갑자기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신다. 다른 여자분 두분도 좋다며 동의한다. 아 이게 아닌데. 나 혼자 내려달라고 할까 하다 또 분위기를 망치는 거 같아서 그냥 따라가기로 한다. 하지만 이게 아닌데...

드라이브길로 먼저 눈이 쌓인 섬의 내륙길로 간다. 이 길이 1100번 도로던가? 예전에 여자친구랑 왔을 때 사진 찍으며 놀았던 곳 같다. 이번에도 역시 눈이 예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보기에는 좋다. 하지만 이미 조급해진 내 마음은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안준다. 그래, 그래도 여유를 가지고 즐겨보자.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길을 지나서 이번에는 제주시로 들어선다. 그리고 드라이브는 바닷길로 이어진다. 월정리 해변도 가고 이곳 저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개인적으로는 월정리 해변이 가장 아름답다 느껴진다. 마음에 드는 카페도 많고... 근데 해변 이름이 월정리 맞나...? 워낙 기억력이 안 좋다 보니 자신이 없다. 모래에 비치는 구름이 정말 예쁘다. 원리가 뭐지?

시간이 3시다. 이러다가 하루가 다 지나겠다. 저녁은 뭘 먹을지 의논을 한다. 이리 된거 나도 저녁은 맛있는 걸 먹고 싶다. 여러 군데 후보가 나오다가 전복이 맛있다는 명진전복으로 결정한다. 이번에는 진짜 게스트하우스를 갔다 가려나 했는데 시간이 이르니 드라이브나 하고 가잔다. 아, 정말 이게 아닌데.


어차피 글렀다. 포기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해본다. 어쩌다 연애 얘기가 나온다. 형님이 남자는 3달이 지나면 자기 여자친구가 아무리 예뻐도 다른 여자가 예뻐 보인다고 한다. 맞는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서 그렇다고 얘기를 한다. 실제로, 객관적으로 예쁜 사람은 많이 봤지만 난 5년이 지나도 아직 지금의 여자친구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리 얘기하니 나보고 이미지 관리 너무 한다고 한다. 사실인데 어쩌리. 이거 여자친구가 보면 좋아하겠군. 지가 예뻐서 그렇다고 하려나?


근데 그러고 보니 결국 몸빼 바지를 입고 제주도 전역을 돌고 있다. 원래는 잠시 점심만 먹고 들어올 계획이었는데,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근데 여행 다닐 때는 사실 남의 눈은 잘 신경 안 쓰게 된다. 어차피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들, 피해만 안 끼치면 내 맘대로 다니는 게 편하다.


해변길을 다니다 보니 정말 게스트하우스와 카페가 많다. 수요에 비해도 공급이 좀 과한 느낌이다. 여기도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지 싶다. 20%의 게스트하우스가 80%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려나. 사업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놈의 직업병.


사실 게스트하우스가 많긴 하지만 내가 찾는 딱 그런 게스트하우스는 없다. 원래는 티벳풍경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기도 약간 아쉬운 점이 있고 써니와 허니가 오히려 내가 바라는 점에서는 약간 더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다 뭔가 조금씩 부족하다. 인도 자이살메르의 타이타닉 같은 곳은 만들 수는 없는 건가? 확 내가 만들어버려?

돌고 돌아 6시가 되어 계획했던 명진전복으로 간다. 메뉴로는 전복돌솥밥이 있고 전복죽이 있다. 여기는 밥이 맛있다고 형님이 조언해서 밥을 시켜 먹는다. 전체적으로 오늘은 기분이 썩 안 좋아서인지 유명하다는 이곳도 막 맛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밥보다는 의외로 숭늉이 먹을만하다. 맛도 사실 굉장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맛집도 그래서  추천받아 가는 거 보다 그냥 자기가 가서 먹었는데 의외로 맛있을 때가 최고인 거 같다. 올레길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려나?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형님이 막걸리를 좀 사갈까 한다. 어차피 오늘은 포기했으니 난 좋다고 한다. 이리된 거 술이라도 마시면 좋겠다. 떡볶이를 해먹자고 하는데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하겠다고 한다. 재료를 고르고 계산을 한다. 막걸리는 종류별로 다 골라본다. 그래 오늘은 나도 너무 튀지 말고 어울려 놀아보자.

숙소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다. 일단 씻고 와서 이미 어제 다 써둔 여행기에 사진만 추가해서 올린다. 일기로 시작했던 여행기인데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약간 의무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 다니는 느낌을 나중에 보고자 쓰는 거지,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니므로 너무 집중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루에 한시간만 글쓰기에 할애하자.

떡볶이를 준비한다. 국물 떡볶이로 할까 졸인 걸로 할까 하다가 다들 졸인걸 원해서 그쪽으로 정한다. 떡을 물에 담가놓고 파와 어묵 등을 다듬는다. 고추장을 물에 풀고 물엿이 없어서 올리고당을 좀 넣고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는다. 떡과 어묵을 넣고 간을 보면서 졸인다. 간단하다.


요리를 하고 있으니 어느새 새로운 분도 몇 명 오신다. 드시겠냐고 물으니 모두 그러시겠다고 한다. 하긴 같은 공간에 있는데 여기서 빼면, 그것도 이상한 거다. 자기만의 여행도 중요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남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나도 마음을 더 넓게 갖도록 하자.


떡볶이가 다 되어가서 맛을 대충 본다. 헉, 너무 맵다. 이거 먹을 수 없는 정도 아니야? 너무 심해서 국물을 좀 빼고 물을 더 넣는다. 그러다보니 이거 완전 애매한 맛이 되어버린다. 이미 떡볶이를 기다리는 손님은 8명이나 되었는데 망했다. 어쩌지? 나서지 말걸 그랬나 보다.


이때 스텝분이 구원의 손을 내미신다. 그냥 대충 던져놓고 먹으라고 하려고 했는데 거기에 양배추를 넣고 어묵을 더 놓고, 고추장을 더 풀고 그리고 마법의 가루를 살짝 넣어서 맛을 살려내신다. 대단하다. 근데 그럼 이건 누가 만든 게 되지?


막걸리를 가져오고 잔을 준비하고 이제 파티를 시작한다. 여행 중에는 술을 먹더라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먹고 싶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주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서 해먹는 이런 자리가 더 편하고 좋다. 앉아서 서로 얘기를 좀 나눠본다.


이곳은 도미토리 밖에 없는데도 또 커플이 한팀 있다. 남자가 이전에 왔다가고, 여기가 좋아서 다시 오자고 했단다.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이제는 도미토리에서도 커플을 좀 보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한다. 여기도 여초현상이 심하다. 총 8명 중에 남자는 3명뿐이다. 근데 한 명은 여자친구랑 왔고 나머지 둘이 바로 나와 형님이다. 홀로 온 92년생 여자들한테 미안하다. 어쩌겠어, 지네 팔자지.

마시다 보니 다들 뭔가를 꺼낸다. 사장님은 투숙객이 선물로 보내줬다는 과메기를 꺼낸다. 다른 분들도 맥주와 막걸리 등을 꺼낸다. 좋은 분위기다. 사람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런 느낌은 또 좋다.


한잔, 한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넘어간다.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이 오늘이다. 도미토리에 와이파이가 안돼서 사장님한테 얘기하니 특별히 여기서 다 같이 봐도 된단다. 사장님은 따로 숙소가 없고 저녁에 밍그적에서 주무신다. 자기는 잘 안 깨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와서 보란다. 한번 물어보니 다들 오겠다고 하는데... 3시 반에 나올 수 있는 의지의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어쩔지 고민 중이다.


오늘은 기분도 좋아서 조금 더 먹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슬슬 정리하자고 한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설거지 당번을 정하는데 난 첫판에 이겨버린다. 도와줄까 잠시 고민하지만 뭐 이런 거는 원칙대로 가도 되겠지 싶다.


방에 가서 자리에 눕는다. 오늘은 뭔가 아쉬운 하루다. 그날 만족감이 어땠는지는 여행기를 쓸 때 확실히 알게 된다. 쓰는 게 재미있고 금방 다 써버리면 그날은 뭔가 맞았던 거다. 오늘은 여행기 쓰는 것도 약간 의무감으로 쓰게 된다. 근데 사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내가 나의 여행을 잘 컨트롤 못한 거다. 내일은 이곳에서의 마지막 시간이다. 오전에 오름 투어도 안 가고 남는 시간을 이곳에서 원없이 밍그적거리고 싶다. 그리고 새로 이동하게 될 고산리, 그쪽에서 다시 남은 여행을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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