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생고기의 첫경험
오랜만에 짜증내며 일어나는 불쾌한 아침이다. 지금도 분노에 손이 덜덜 떨린다. 어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옆자리에 룸메이트, 역시나 새벽 6시 반에 알람이 소리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이건 뭔 무개념이야. 5분 이상 울리더니 그래도 꺼진다. 그래도 끄긴 끄는 군군. 그런 생각하기 무섭게, 10분이 지나니 또 시끄럽게 울린다. 슬슬 짜증이 난다. 이해해줄 수 있는 무개념에도 한계가 있다. 잠결에 "전화 왔어요"라고 얘기를 하며 알려준다. 알람이겠지만 뭐 그게 그거지. 그럼에도 한참을 울리다 자동으로 다시 꺼진다. 그리고 또 울린다. 그게 6번 반복된다. 4번째부터는 알람 소리도 바뀐다. 뭔 설정인지.
어차피 한두 시간 있으면 헤어질 친구지만 짜증이 극에 달한다. 누워서 이불을 걷어차며 내 딴에는 아예 대놓고 짜증을 내도 신경도 안 쓴다. 나는 내 갈길을 가겠다, 마이웨이냐, 뭐 그런거냐? 진심 쌍욕이 나온다.
결국 내가 일어난다. 계속해서 짜증을 냈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대놓고 얘기를 해야 하나 싶다. 일단 화장실로 가서 대충 세수만 하고 돌아온다. 그 분은 아직도 누워있다.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그때서야 슬슬 일어난다.
"도미토리에서는 알람 소리로 하면 안돼요."
"네?" 라며 아무런 어조 없이 대답한다.
"알람이요!"
화가 난 상황인지라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난다.
"아 네..."
그리고 이게 끝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더 뭐라고 할까 하다가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그냥 나온다. 4인용 풀로 꽉 찬 도미토리에서 이런 무개념이라니.
서비스 업종에 있으면서 늘 생각하는 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서비스를 행할 수 없는 자는 그 서비스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저렇게 배려가 부족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쓰는 도미토리를 오면 안된다. 서로 이해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선이라는 게 있다. 모두 다 잠든 새벽 시간에 6번의 알람이라... 다시 이런 무개념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기분은 잡쳤지만 여행에서는 이런 기분을 오래 지니고 있어 봐야 나만 손해다. 기분을 풀어본다. 마당에서 어떤 여성분이 강아지들과 놀고 있길래 나가서 같이 놀아준다. 이곳은 강아지가 겁나 많다. 훈남 주인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진돗개와 풍산개, 그리고 한라산개(?)의 잡종이란다. 뭐 결국에는 똥개라는 얘기 구먼. "똥개네요?"라고 정곡을 찌르며 물어보니 슬그머니 주제를 바꾸신다. 뭐 그래도 귀여우면 됐지.
오늘은 새로운 게스트하우스인 써니허니로 이동하는 날이다. 옮기는 곳에 대한 기대가 꽤나 크다. 거기는 밍그적이라는 별도의 공간이 따로 있어서 청소를 하는 중에도 그곳에서 하루 종일 밍그적 거리며 있어도 된단다. 그 사실 때문에 그곳으로 정했다. 이미 토요일까지는 일정을 잡았는데 그 이후에는 지금부터 정해야 한다. 그 무개념남 덕분에 일찍 일어난 김에 아침 준비를 기다리면서 게스트하우스도 검색해보고, 이동 중에 들릴만한 곳들도 한번 찾아본다.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길에 성산일출봉을 들릴까 한다. 정확히 가는 경로에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니 그 갈아타는걸 성산에서 하면 될 듯하다. 이제 길을 나설 시간이니, 사장님 내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온다. 어제 약이 없는데 나가서 직접 사와주시고, 주인 내외분의 친절은 쉽게 잊지 못할거다.
넙빌레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위미리. 날씨가 궂을 때 와서 좋은 기억이 많이 남지는 않은 곳이다. 인도 여행 다닐 때 만났던 불운의 파티뿌르 시크리가 생각난다. 그때도 잘 놀다가 그 동네에 가서 몸살이 난 바람에 안좋은 기억의 장소로 남아있다. 딱히 맘에 안 들만한 요소가 없는 곳이었는데... 병은 몸이 힘든 거 보다 마음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거 같다.
넙빌레 게스트하우스는 티벳풍경과 완전히 반대되는 곳이었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사생활이 존중되는 곳이고 또한 편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여행 중에 지친몸을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역시 성향이 맞는 사람들한테는 120 퍼센트 이상을 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아쉽지만 여기는 다시 안 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훈남 사장님, 이틀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또 이동이다. 어제 미리 조사한 데로 큰길로 나와서 700번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는 것도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 버스를 타고 조금 가니 어제 비 맞으며 걸었던 그 동네가 나타난다. 하루만에 익숙해진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반갑게도, 어제 인상 깊은 식사를 하였던 안녀어랭이 집도 지나간다. 내려서 인사하고 갈까 순간 고민하지만 너무 오바하지 말자며 그냥 스쳐 지나 간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노래에서 에피톤 프로젝트의 유채꽃이 나온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가사를 음미해본다.
푸른 바다 제주의 언덕
올레길마다 펼쳐져 있는 그리움을 따라
무얼 찾으러 이 곳에 온 걸까?
너는 혹시 알고 있니?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비, 바람 불고 모진 계절이 힘겨울 때마다
가만히 나를 안아주던 네게
다시 기대어도 되니?
지금 상황에 정말 딱 맞는 가사다. 창 밖을 바라보며 가사를 음미한다. 창 밖의 풍경이 아름답다. 바람은 불지만 비는 어느새 멈쳐서 햇빛이 바다를 그윽하게 비추고 있다. 노래가 끝나고 아이폰 디제이가 랜덤하게 틀어주는 다음 노래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본다. 이번에는 루시드폴의 알고 있어요이다.
아이폰 센스쟁이. 이 노래도 선곡이 좋다. 다 알고 있다며 읊조리는 얘기가 뭔가 내 가슴에 저며 든다. 자, 다음 노래. 아이유의 나 말고 넷. 아이폰아, 이러기냐. 하지만 아이유 앨범 전곡을 다 넣어놨으니 랜덤으로 하면 나올 확률이 큰 건 어쩔 수가 없다. BOO가 안 나온 게 어디냐. 남자친구가 자기 말고 4명이나 더 양다리를 하고 있었다는 중학생 느낌의 발랄한 가사다. 바람 피면 죽는다는 마나님의 경고로 생각하고 명심하며 듣는다.
에피톤프로젝트의 여기, 브로콜리의 청춘열차, 윤하의 hello beautiful day가 이어서 차례대로 흘러나온다. 이어폰을 통하여 전달되는 노래에 자연스레 생각을 맡긴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즐기며 노래를 듣고 있으니 어딘가 목적지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든다. 여행 중에는 버스 타고 이동하는 이 시간들이 이전 여행지를 정리하고 다음 여행지룰 맞이하는 심적인 정리의 시간이다. 초밥 먹을 때 입을 리셋하기 위해 먹는 생강절임(?) 같은 거라고나 할까?
음악을 듣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다. 조금 더 가도 되는데. 근데 어차피 이 버스는 성산일출봉 안에까지 안 들어간다고 한다. 뭐 걸어서 가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 앉은 아저씨가 저기 아가씨들하고 같이 택시 타고 가라며 다리를 놓아준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멀리서 보니, 가는 길에 유채꽃밭도 보여서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내리니 그 아저씨가 따라 내려서 굳이 또 그 아가씨들한테도 가서 얘기한다. 그래 탄다 타! 결국 2명의 여대생들과 택시를 쉐어 한다. 물어보니 2박 3일로 온 일정인데 이 둘은 우도로 들어간단다. 내리는 곳이 달라서 2천 원을 주고 내리는데 천 원은 자기들이 내겠다며 돌려준다. 사양하다 받는다. 착한 애들이네.
성산일출봉은 예전에 한두 번 온 적이 있다. 하지만 혼자 온건 처음인가? 바람이 거세다. 거센 정도가 아니라 날아가겠다. 오늘 우도까지 가볼까 했는데 이 날씨에는 절대 안 되겠다. 편의점에 들러서 일단 실과 바늘을 산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또 다시 뜯어진 청바지를 조심스레 수선한다. 이번에는 나름의 등산이 기다리고 있으니 특별히 꼼꼼하게 꿔맨다. 이러고 있으니 영화 람보에서 자기 살을 꿔매는 장면이 생각난다. 고어 영화에서 입을 꿔매 놓은 게 생각나기도 한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편의점 누님의 이상한 눈빛은 살짝 무시한다.
2000원을 주고 입장료를 사서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궂은 날씨임에도 사람은 꽤 많다. 갑자기 나와의 약속으로 정상 꼭데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절대 고개를 들어 경치를 보지 않기로 다짐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뻔해질 거 같은 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등산하듯이 다리에 힘을 주며 계속하여 계단을 오른다. 사람들이 머물러서 경치를 음미하며 탄성을 짓는 곳에서는 고개를 들고 싶은 유혹이 온다. 뒤를 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된 설화를 생각하며 꿋꿋이 땅바닥만 보면서 한칸 한칸 올라간다. 힘들다.
생각보다 금방 정상이 나타난다. 이상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꽤나 힘들게 올라왔던 거 같은데. 체력이 좋아진 건가? 이래서 자고로 남자는 허벅지 힘이 좋아야 한다. 나이가 들었는데 체력은 더 늘다니. 훌륭하군.
정상에 와서 드디어 내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든다. "와, 장관이다!"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눈앞에는 공허한 분화구만 보인다. 방향이 잘못됐군. 분화구는 그냥 풀밭이라 별 감흥이 없다. 뒤로 돌아 다시 바라보니 드디어 제주도가 한눈에 쫙 펼쳐져 눈에 들어온다. 기대가 컸나? 멋진 광경이긴 한데 생각보다 기대했던 만큼의 감동은 없다. 잠시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 바람이 차서 역시 이곳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겠다. 다음에 제주도 올 때는 이왕이면 날씨 좋은 날을 택해서 와야겠다.
내려가는데 아이폰 디제이가 이번에는 어바웃 타임 OST에 있는 Spiegel im spiegel을 틀어준다. 인공지능이 들어있나? 탁월한 선택이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힘겹게 올라갔던 곳을 천천히 내려간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 오를 때는 자기 앞의 한 발짝만 열심히 보면 되지만 내려갈 때는 주위도 살펴야 하고 의외로 신경 쓸게 많다. 보통 다치는 경우도 올라갈 때 보다는 내려갈 때 많이 생긴다. 앞만 보고 달릴 때, 사람은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모른체 그저 힘차게 열정만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이때는 노하우보다는 식지 않는 열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리 올라갔다면 잘 내려오는 것이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 어차피 한번 올라가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 법이다. 지금이 내려올 때가 맞다면, 최대한 현명하게 내려와서 그 흐름을 다시 타고 새로운 열정으로 또 다른 길을 오르고 싶다.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다시 앞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법이다.
내려오는 중간에 아이언하루방맨을 만난다. 어벤저스2의 우리나라 촬영 기념으로 놔둔 거냐. 넌 누구냐.
거의 다 내려오니 노래가 그에 맞춰서 딱 끝난다. 굿 타이밍. 이제는 밥 먹을 곳을 찾아야겠다. 새롭게 옮기는 게스트하우스 근처에는 먹을 곳이 거의 없다고 하니 그냥 이 근처에서 먹고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 주위 식당을 둘러보는데 전부 뚝배기집 뿐이다. 바깥에서 슬쩍 메뉴를 보니 모든 식사가 기본 15,000원이다. 비싼 것도 걸리긴 하지만 여행 와서 이런 뜨내기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지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겠다, 여유 있게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다.
바닷가로 가니 햇빛이 예쁘게 비추는 곳에서 테이블 하나를 발견한다. 이곳이 지나가는 곳이 아닌, 머무는 동네였다면 여기를 내 아지트로 삼았을 텐데. 앞에 펼쳐진 바닷길이 너무 아름답다. 아이폰의 노래를 끄고 자연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 길을 거닐어본다.
12시가 넘어가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식당을 찾아본다. 이때 문득 멀리서 해물라면 파는 곳을 발견한다. 라면이라... 이음 게스트하우스의 마늘라면 보다는 낫겠지.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허름한 벽에는 연예인 싸인이 가득하다. 성시경부터 이병헌까지. 어? 잠깐. 자세히 보니 이병헌 사인에는 밑에 '이천에서'라고 적혀 있다. 어머니... 이건 이천 가서 받으신 거잖아요. 어디서 약을...
주문한 해물라면이 나온다. 해물라면이지만 최근 무한도전에 나왔던 문어라면과 느낌이 비슷하다. 이거 이름을 문어라면으로 하는 게 더 인기 있을 거 같다. 해물이라고 하니 평범한 느낌이다가 문어라면이라면 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먹어본다. 오, 맛있다. 정신없이 한 냄비를 뚝딱 비운다. 제주도에서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와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누군가에게 추천도 해주고 싶은 집이다. 의외의 맛에 만족해하면서 나온다. 이런 유명 관광지에서 5,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했으면 훌륭한 거다.
관광지 답게 스타벅스부터 롯데리아까지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들도 진출해있다. 한곳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할까 하다가 차라리 아까 택시 타고 오면서 슬쩍 봤던 유채꽃 밭으로 가서 좀 거닐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쉬기로 마음 먹는다. 아이폰을 들고 지도를 열어 방향을 살펴본다. 유채꽃 밭이 어차피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지라 그곳을 찾아 천천히 산책하듯이 걷는다.
한 20분 걸으니 유채꽃밭이 나타난다. 근데 무슨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근처에 가서 보니 사진 찍는데 1,000원이란다. 무슨 꽃 사진을 찍는데 돈을... 뭐 자본주의 사회에 사니까 어쩔 수 없지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다. 밖에서 꽃 사진을 몇장 찍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유채꽃밭 옆에는 말 농장도 하나 있다. 말들이 꽤 여럿 있는데 모두 한결같이 여물을 먹고 있다. 다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희한해 보이는 광경이다. 한 마리도 빼지 않고 다 밥을 먹고 있다니. 얘네는 24시간 밥을 먹나?
그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버스정거장이 보인다. 정거장에서 710번 버스를 기다린다. 네이버 지도에는 제주도 시외버스의 번호가 안 나온다. 행선지만 나와서 노선도를 보고 번호를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정거장에는 어떤 아저씨가 같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길면 한 시간까지도 기다려야겠다. 여유를 가지고 앉는다.
이곳에서 앞에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경관이 멋지다.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그곳을 바라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온다. 이 여행에서 나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있는 걸까?
정말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올라타서 행선지를 말하고 카드를 찍는다. 제주도의 시외버스는 행선지에 따라 요금이 달라져서 기사님한테 꼭 얘기를 하고 찍어야 한다. 아까 기다리면서 지도에서 봤을 때는 목적지가 금방이었어서 안내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는다.
생각보다도 금방이다. 무심코 지나칠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넘기고 잘 내린다. 내리자마자 습관처럼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마음에 든다. 이곳에서는 '추억'이 생길거라는 기분이 든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를 한바퀴 쭉 거닐어본다. 조용한 동네다. 어울리지 않게 앞에 큰 카페가 하나 들어서 있다. 이곳에 있을만한 게 아닌데 왜지? 올레길이 여기로 이어지나?
돌아다니다보니 다소 추워져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간다. 미리 알아본 데로 여기는 숙소와 쉬는 곳이 구분되어 있다. 밍그적이라고 적혀 있는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으로 온 이유가 바로 저 '밍그적' 때문이다. 하루 정도는 멍 때리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책도 보고 사색도 하고 싶다.
설레인 마음을 안고 들어서니 이미 사람들이 서로 얘기하고 놀며 여기저기 앉아 있다. 나름 화목한 분위기다. 공간이 아늑하니 마음에 든다. 나도 들어가서 몇몇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는다. 사장님은 젊은 남자분인데 인상은 좋아 보인다. 이곳에는 만화책과 책들이 정말 수두룩하다. 한 일주일은 나가지 않고 여기에만 있어도 될듯한 공간이다.
아까 잠시 같이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어제 온 분들이고 이제 떠난단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는 법이다. 나는 사장님한테 잠자는 숙소에 대한 안내를 받는다. 일찍 왔지만 다른 일행이 이미 먼저 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2층을 배정받는다. 뭐, 2층 나쁘지 않다. 밍그적으로 돌아와서 오늘 떠나는 여행자들과 이별 인사를 나눈다. 그들이 우루루 떠나니 이제 여기 몇 명 안 남았다. 한 커플과 한 여자분, 그리고 내가 전부다. 왠지 이곳에서는 너무 독립적인 것보다는 같이 대화도 좀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켠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역시 언제나처럼 처음에는 어색함이 느껴진다. 새로운 게스트하우스에 가면 항상 느끼는 분위기다. 그래도 이제는 나도 여행에 꽤나 익숙해져 있기에 이 분위기를 즐긴다. 조금 앉아 있다가 느긋하게 주방에 있는 바로 간다.
써니허니 주방에 있는 바는 완전한 셀프로 운영되고 있다. 차, 귤 등 갖은 주전부리가 자유롭게 놓여있고 먹은 사람이 알아서 기부금을 내든지 음식을 사 와서 채우는 시스템이다.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느끼기 힘든 정과 자유로움이다. 바로 가서 귤을 하나 깔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여자분 두 분이 있길래 스텝이냐고 물었더니 한분은 현재 스텝이고, 다른 한분은 전의 스텝이라 한다. 둘 다 친근한게 분위기가 좋다. 어딜 가든 직원을 보면 사장님을 알 수가 있다. 이곳, 꽤나 괜찮은 느낌이다.
귤을 까먹으면서 자연스레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대화를 열어갈 때는 자연스러운 게 중요하다. '억지로 대화를 해보겠어!'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추어들이다. '어라? 내가 얘기를 하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한다.
현 스텝분과 어쩌다 나이 얘기가 나온다. 서로 자기가 더 많을 거라고 얘기한다. 나이 많은 게 자랑은 아닌데 말이지. 그래도 내가 더 많을 거 같다. 내 얼굴을 보고 나이를 추측하면 안되지. 결국 서로 까보니 반전으로 나보다 5살이나 많으시다. 헐. 나름 동안이라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동안이라니. 역시 동안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이곳 밍그적의 분위기가 좋다. 사람들이 처음 만날때 생기는 어색함의 벽을 이곳의 분위기가 쉽게 허물어버린다. 오늘은 자신감도 좀 생겼으니 드디어 제주도의 고기를 시도해봐야겠다. 1인분은 먹기가 힘들어서 일주일 동안 제주도 고기를 못 먹었다. 도미토리에 사람이 들어오면 같이 먹자고 꼬셔봐야겠다.
스텝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보니 사장님이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아저씨 한분과 같이 돌아오신다. 이 남자분 여행자인지 스텝인지 그것도 아니면 동네 주민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얘기를 듣다 여행자라고 일단 결론을 내린다.
내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걸 아는 스텝들이 이 남자분과 같이 가라고 얘기를 해준다. 이 남자분, 첫인상이 좋지는 않다. 뭔가 설명하기 힘든 특이함 같은 것이 있다. 꺼려지지만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거 같아 그러자고 한다. 그래도 둘이 가려니 어색하다. 그냥 지금이라도 거절할까 고민을 해본다. 근데 사실 고기는 내가 정말 먹고 싶어하는 거다.
사람을 모아 본다. 그래도 뭔가 이분하고 둘이 가자니 기분이 안 난다. 어쩔 수 없다. 여행 와서 찰진 상황이라니. 게다가 이분 뭔가 나랑 코드가 맞을까 걱정이 든다. 옆에 있는 여자 2분에게 고기 먹으러 가자고 살짝 얘기를 해본다. 3일 내내 고기를 드셨단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고기를 먹으려면 6시 반에는 떠나야 한다고 했다. 식욕과 나의 즐거움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 30분이 된다. 주위 다른 분들한테도 다시 한번 물어본다. 역시 싫단다. 단호박인 줄 알았다. 그래 가자. 난 오늘 꼭,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겠다.
그 형님한테 2인분도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 된단다. 준비를 하고 일어난다. 그냥 동네 고깃집을 가고 싶은데 아까부터 얘기하신 가시리라는 곳을 가자고 한다. 엄청 유명한 집인가? 조금 귀찮긴 하지만 지금 거절하자니 민망해하실 듯하다. 이 정도 상황이면 따라가는 것이 맞다.
그 형님의 차를 탄다. 네비를 찍으시는데 은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을 느끼셨는지, 15분이면 충분히 간다고 하며 차를 출발하신다. 가다가 중간에 샛길로 빠지신다. 갑자기 또 U턴을 하신다. 뭐하시는 거지? 이쪽으로 가면 멋진 드라이브 코스 있는데 너무 돌아가는 듯해서 돌리신단다. 아저씨, 고기나 먹읍시다. 남자끼리 무슨 분위기 있는 드라이브를...
다시 원래 길로 간다. 밤길이 좋다. 제주도의 밤은 정말 어둡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헤드라이트를 끄면 정말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제주도 총각들이 내륙 여자들을 꼬실 때 많이 하는 것이 5월에 이런 드라이브 코스를 도는거란다. 한번 경험하고 나면 너무 좋은 풍경에 자리를 잡고 싶어서 제주도 총각 하고 결혼하기도 한단다. 관심 있는 사람 혹은 이런거 질색인 사람, 둘 다 참조하자.
한 20분 걸려서 도착한다. 이거 뭐, 그냥 동네에서 먹을 것이지. 살짝 짜증도 난다. 얼마나 맛있나 두고 보겠어. 이런 기분으로 맛있는 음식은 본 적이 없는데. 일단 그래도 배려의 아이콘이라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으려 노력하면서 차문을 열고 나선다.
식당이 한개가 아니라 몇 개 보인다. 어라? 가시리가 식당 이름이 아니라 동네 이름이었나보다. '가시'라는 이름의 '리'인 거다. 허 그렇군.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왜 몰랐을까. 이 동네에 유명한 식당이 여러 개 모여 있다고 한다. 두루치키도 유명하고 머 그렇다는데 난 지금 그저 구이를 먹고 싶다. 구이! 구이를 먹자고 얘기한다.
고기구이가 유명하다는 곳을 들어가보니 안쪽이 굉장히 허름하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이긴 한데 자리가 없다. 저녁 8시에 문 닫는 가게를 7시에, 그것도 평일에 왔는데 자리가 없다. 정말 유명한가 보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이 정도 고생했으면 결과를 보고 물러나야 한다.
다행히 생각보다 금방 자리가 난다.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한번 본다. 헐, 가격이 너무 싸다. 생고기가 6천 원, 삼겹살이 8천 원이다. 6천 원짜리 고기, 너무 싸니 뭔가 수상하게 느껴진다. 예전에 왕십리에서 막고기인가를 먹었는데 실패한 기억이 난다. 근데 이분 여기는 무조건 저 저렴한 생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생고기 2인분을 시킨다.
반찬이 세팅되고 고기가 들어온다. 고기가 보통의 여타 고기와 달라 보인다. 껍데기부터 뭔가 진짜 말 그대로 생고기 느낌이 난다. 이거 맛이 괜찮을까? 비주얼은 생각보다 괜찮아서 생각치 못한 기대를 해본다. 서둘러 불판에 올려서 굽기 시작한다. 같이 온 형님은 술을 전혀 안 드신단다. 그렇다고 나도 안 먹을 수는 없지. 일주일 여행하는 동안 술을 제대로 먹은 것이 티벳풍경에서 먹은 막걸리 서너 잔이 끝이다. 여행 다닐 때 술을 별로 안 마시려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오늘은 소주 한두 잔은 기필코 마셔야겠다. 가서 일하시는 '삼촌'한테 한라산 소주를 한병을 주문한다. 한라산 소주는 흰 병과 녹색 병이 있는데 형님이 무조건 흰 병인 오리지널이 좋다며 그걸 먹으라고 권하신다. 아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식당에 있는 분들한테 이모나 어머니라고 안 하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무조건 '삼촌'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운다. 희한하군. 이건 내 조카가 날 깨울 때 하는 말인데.
소주가 나오고 고기가 익어가기 시작한다. 별로 기대 안 하고 있었지만 냄새를 맡다 보니 은근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고기의 싱싱함이 육안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느 정도 익은 고기를 먼저 한 접 입에 넣어본다. 제주도에서는 돼지고기를 젓갈에 찍어먹는다. 순간 기대가 생겨서인지 한입 먹어보니 생각보다 별로다. 좀 질기다고 해야 할까? 하긴 그분이 오늘 바로잡은 고기라 좀 질길 수도 있다고 얘기하시긴 했다. 그래도 너무 속단하여 실망하지 않고 계속 먹어본다.
3점을 먹을 때 쯤인가? 갑자기 그분이 오신다. 아 이거 맛있구나! 묘하다. 일단 그냥 돼지고기이고 뭐 엄청 특이한 맛은 아닌데 생각보다 매우 맛있다. 일반적으로 파는 고급 흑돼지 구이는 먹을 때 바로 아는 맛이라면 이건 가랑비에 몸이 젖듯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느껴지는 은은하고도 엄청난 맛이다. 맛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역시 재료가 신선한 것이 깡패구나.
쌈에 싸서 한점 먹고, 그냥 한점 먹고, 젓갈에 찍어서도 한점 먹고, 소금에 찍어서 한점 먹고... 아니 이 가격에 어찌 이런 맛이 나오지? 게다가 1인분이 150g이 아니라 200g이란다. 허허. 소주가 쭉쭉 들어간다. 이 형님이 술을 안 드시니 어쩔 수 없이 혼자 먹는 게 조금 안타깝다. 술은 같이 먹어야 맛있는건데... 왕십리에 사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이 고기면 나 홀로 소주 1.5병도 먹겠다. (주량이 1병...) 정신없이 먹고 1인분을 더 시킨다.
고기를 먹으면서 이분하고 얘기를 많이 나눈다. 얘기를 들어보니 나보다 6살 연상이시다. 형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나 보고는 갑자기 이승기를 닮았다고 해주신다. 오고 가는 덕담 속에 솟아나는 우정. 이 형님은 한 달 중에 반인 15일은 제주도에 계신단다. 전자 쪽 일을 하시는데 제주도에 살고 싶어서 땅도 사고 가끔은 이렇게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신단다. 제주도에 계신 기간이 긴 만큼 확실히 현지인들의 정보를 많이 알고 계신다. 가시리도 현지인들이 많이 오는 곳 중 하나라고 얘기해주신다. 그래서 가격도 다른 곳과 다르게 비싸지 않다. 성산일출봉의 자비 없는 가격이 떠오른다. 이런 곳 몇 군데를 더 추천받는다. 이 형님한테는 희한하게도 아귀찜이 제주도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란다. 그건 백날 얘기해봐야 알 수 없고 직접 가봐야 안단다. 아까 같으면 이 말도 의심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형님느님을 무조건 믿는다.
고기를 다 먹고 꼭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순대국수를 하나 추가한다. 3천 원이다. 뭐 맛이 있든 없든 이미 맛있을 수 밖에 없는 가격이다. 이미 고기를 먹고 눈이 하트 가득한 상태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두근거리며 기대가 된다. 기다리던 순대국수가 나와서 보니 고기국수랑 비슷한데 고기가 아닌 내장이 잔뜩 들어있다. 이게 어떻게 3천 원이지? 또다시 왕십리 사는 친구가 생각난다. 둘이서 이거 하나면 소주 3병은 비우겠다. 제주도 좋은 곳이구나. 사랑한다!
형님 얘기를 듣다 보니 한라산이 오르고 싶어 진다. 원래 첫날 왔을 때부터 여행자들이 하도 얘기해서 가고 싶었는데 장비가 없어서 계획을 못 잡았다. 지금 눈이 많이 온 상태라 장비 없이 그냥은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기가 생긴다. 예전에 인도에서 벼르다가 떠나기 직전에 결국 갠지스 강을 헤엄쳐서 건넌 생각이 난다. 올라야겠다. 이건 올라야만 해.
집에 연락해서 택배로 등산 장비를 보내라고 해봐야겠다. 고산리에 사는 동생이 있으니 그쪽으로 보내라고 해서 받으면 될거다. 갑자기 의욕이 불타오른다. 느슨하고 평화로운 여행도 좋지만 그래도 이 여행에 뭔가 하나의 족적을 남기고 싶다. 한라산, 개나 소나 오르는 곳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오르면 또 나에게는 다른 경험을 주지 않겠나.
계산하고 나온다. 둘이서 고기 3인분에 소주 한 병, 순대국수 하나를 먹어서 24,000원. 인당 12,000원. 소주는 거의 내가 다 먹어서 더 낸다고 하니 굳이 반을 내시겠단다. 사실 기름값 생각하고 정보 얻은 거 생각하면 내가 다 사도 되는 건데. 이분 의외로 괜찮다.
차를 타고 오면서 여러 얘기를 한다. 나도 참 이 나이 먹도록 배운 게 없나 보다. 사람은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가 얼마나 한심하고 부족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가 나를 아는데도 30년 이상이 걸렸는데 다른 사람을 5분 만에 알려고 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잘 모르지만 일단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여행의 목적 중에 하나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바보 같았음에 반성한다. 세상에 이해하기 쉬운 인생이란 없다.
써니허니에 돌아와서 밍그적으로 바로 간다. 아까 그 형님이 말하길 이곳에 들어오면 집에 돌아온 느낌이라 좋단다. 들어와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늑한 느낌이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티벳풍경도 매력이 있지만 이곳도 이곳만의 매력이 그득하다.
안에는 사람이 어느새 꽉 차 있다. 다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자연스럽게 물들어있다. 고독을 원하는 사람은 고독하게 홀로 앉아 있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다른 곳에서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최고다. 사장님이 직접 하시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 공간의 분위기 자체는 이분이 만든 걸 거다.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만드는 거, 그거 만큼 어렵고 고차원적인 경영은 없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커플인 줄 알았던 남녀는 오누이고, 또 다른 커플은 부루마블을 하면서 사장님에게 규칙을 물어본다. 사장님은 부루마불 규칙을 모르는 사람도 있냐며 타박한다. 한편에서는 여자 일행 두 명이서 있다가 한 명은 먼저 숙소로 들어가고 나머지 한명만 남아서 만화책을 본다. 스텝 두 분은 뭔가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사장님은 예약 전화를 받으면서도 이곳저곳을 챙기신다. 모든 게 자연스럽고 모든 게 사랑스럽다. 이곳, 좋다.
술도 한잔 하고 기분도 업되서 글을 좀 쓴다. 사람들과 대화도 좀 해본다. 역시 처음이니 어색함이 있다. 그래도 나쁜 어색함은 아니다. 오늘은 김연아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이곳에서 같이 보고 싶지만 밍그적은 11시에 문을 닫는다. 어쩔 수 없이 방에서 혼자 봐야겠다.
10시 좀 넘어서 씻고 김연아 경기 볼 준비를 해야 할거 같아서 방으로 간다. 아이유와 연아 이 두 명은 신성불가침인 거다. 무조건 봐야 한다.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김연아 경기를 보기 위해 아이폰을 집어 든다.
헌데 방에서 와이파이가 안 잡힌다. 설마... 리스트를 찾아보지만 역시 안 나온다. 이러면 안되는데. 다른 분들한테 물어봐도 다 안 잡힌단다. 사장님이 이곳은 잠만 자는 곳이라고 하시더니 방에서는 와이파이도 안 잡히게 해 놓았나 보다. 평소 같으면 책 보고 잠들면 되니까 상관이 없는데 오늘은 좀 다르다.
하지만 뭐 그래봐야 별 수 없다. 밑의 형님은 3G로 보신단다. 난 전화를 끊어서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같이 보자니 새벽까지 할 텐데 한 침대에서 그때까지 찰진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포기한다. 어차피 내가 보는 경기가 잘 풀린적이 없다. 연아를 위하여 포기하자.
마음을 접고 11시쯤 일찍 잠을 청한다. 이곳 침대도 아늑함이 나쁘지 않다. 게다가 도미토리 생활 1주일을 지나니 주변인들이 코를 골든 뭘 하든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 일찍 자고 푹 자고 술 잘 안 마시고 운동도 많이 하고, 이러니 여행 다니면서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내일 아침에는 오름 투어에 한번 따라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