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어제는 정말 잘 잤다. 푹신한 침대와 침구, 코 안고는 룸메이트, 그리고 덕분에 조용한 방, 앞으로 남은 여행에서 또 이런 곳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옆방 커플도 다행히(?) 매너 없는 행동이 없었던 것 같다. 흠...
아침의 삭막함이 다소 적적하지만 또 나름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넙빌레에서의 둘째 날. 그래도 적응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다.
룸메가 먼저 나간 후 조금 있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조식을 먹으러 나간다. 원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집에서 입는 편한 파자마 차림으로 마구 돌아다니는데 여기는 분위기가 왠지 그러면 안될 거 같다. 나가 보니 역시나 갈아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티벳풍경과 다르게 다들 기본적인 옷차림은 입은 상태로 다니고 있다. 문명인들 같으니라고.
조식은 빵, 계란, 드립 커피가 간단하게 있고 셀프다. 계란을 직접 조리해야 하기 때문인지 줄이 꽤나 생겨있다. 줄 맨 뒤에 룸메 커플이 있길래 인사하고 그 뒤에 가서 선다. 이리된거 기다리면서 룸메랑 대화를 또 시도한다. 그래도 내가 같이 잔 사람이 살인자나 도둑이 아닌 것 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나. 1년 정도 된 커플이고 부산에서 왔다고 한다. 이 둘은 4일 여행을 하고 내일 떠난다. 1년이라. 좋을 때다. 2년 넘으면 남자는 뭔가 노예가 된 느낌을 알 수 있을 거다. 꼭 내 얘기는 아니다.
난 14일 여행 중이라고 얘기한다. 놀란 표정으로 나한테 학생이냐고 묻는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학생이냐고 묻는다. 나한테. 말도 안되는 물음에 깜짝 놀라어서 37살이라고 대단한다. 뭐 사실 37살도 학생이 아니라는 조건은 안되니 잘못된 대답이지만 잘 알아듣는다. 깜짝 놀라더니 20대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 커플 갑자기 예뻐 보인다. 훈훈한 커플이구나. 보고 있나? 나 아직 안 죽었다!
내 차례가 돼서 계란을 깨고 후라이팬에 올려서 스크램블드 에그를 조리한다. 줄이 좀 있길래 뒷사람들한테 스크램블드 먹을 사람 있냐고 물어본다. 어차피 하나 하나 두개 하나 그게 그거다. 또 그 낯선 눈빛이 돌아온다. '나한테 말한건가? 이 사람 뭐지?' 이런 눈빛 말이다. 아 여긴 그런데 아니었지. 조용히 혼자 내것만 요리를 한다. 이제는 안 물어보리라. 쳇.
자리에 와서 먹는다. 어쨌든 조식은 꽤나 괜찮다. 난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드립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연한 커피가 좋다. 앉아서 배부르게 먹는다. 어제를 교훈 삼아, 오늘도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무조건 조식은 배 빵빵하게 먹어야 하는 거다.
옆 테이블에 다른 커플이 앉는다. 무려 커플티다. 남자가 브이를 그리며 같이 셀카를 팍팍 찍는다. 하... 저쪽은 100일 정도 된 풋풋한 커플의 느낌이다. 그 뒤에는 가족단위로 와있다. 가족인 듯한데 남자는 안보인다. 무성생식인가. 왜 아빠는 항상 버림받는 걸까...
이곳은 아무래도 혼자 오는 사람보다는 커플이나 가족 단위가 많이 보인다. 휴양지에 있는 작은 규모의 호텔 느낌이 난다. 하긴 시설 좋고 깨끗하니 조용히 있고 싶거나, 가족들, 커플들끼리 오는 팀은 추천할만하다. 나도 이곳에서 이틀 정도를 보내기에는 괜찮은 것 같다. 앞에는 보통 펜션에서 많이 보이는 바비큐 시설도 몇 개 갖춰져있다. 단 이곳은 대중교통이 아닌 차량을 렌트해서 오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옆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가 문득 보이길래, 아 그래도 혼자 오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지만 조금 앉아있으니 여친이 눈을 비비며 안에서 나와서 그 앞에 앉는다. 여자가 오니 남자는 조용히 아침을 준비해주러 간다. 지는 손이 없나. 그럼 그렇지. 뭐 괜찮다. 날 강하게 키워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해한다.
다행히 비는 멈췄다. 훈남 주인 사장님은 역시 오늘도 카운터에서 할일없이 뻘쭘하게 서 있다. 다시 한번 사장님에게 속으로 파이팅을 외쳐본다. 앉아서 글 좀 쓰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한다. 비가 멈췄으니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 일단 서연의 집까지 1키로가 안된다고 하니 거기까지 가볼 생각이다. 천천히 가면서 좋은 카페도 찾아보고, 오래간만에 한가하게 거리를 돌아다녀봐야겠다.
조식을 하고 훈남 사장님한테 이 근처 갈만한 곳을 물어본다. '서연의 집'은 어차피 알고 있고, '큰엉산책로'를 추천하신다. 이곳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단다. 적당하군. 지도를 찾아보니 가는 길에 '서연의 집'도 있다. 들렸다 가면 딱이겠다.
룸메는 오늘 떠난다. 코를 안골아준 룸메에게 감사를... 뭐 사실 허룻밤이라 정 들것도 없었으니 후딱 인사하고 나도 출발한다. 길을 보니 어제 비맞으며 길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 무슨 연구소의 뒤쪽으로 가면 된다. 지금은 비는 안 오지만 날씨는 좀 흐리고 바람이 꽤 분다. 꽤나 춥긴 한데 그래도 버틸 만하다.
길을 걸어가니 올레길 표시가 보인다. 몇번 봤더니 표시들의 의미를 알겠다. 저 표시를 따라가면 원하는 곳이 다 나올 거 같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올레길을 걷게 됐군. 그래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올레길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바닷가로 길이 향하더니 해변을 거쳐서 들어갔다 나온다. 바로 옆으로 가면 되는 곳도 한바퀴 둘러서 가게 해놨다. 뷰가 좋은 곳 위주로 길을 잡았나 보다. 저 올레 화살표의 사람인자 들어간 거랑 머리끈 같은 표시는 잘 만든 거 같다. 마케팅하는 사람이 디자인 센스가 좀 있어보인다.
걸으면서 좋은 명소에서는 사진도 찍고 잠시 앉아서 경치 감상도 하면서 계속 걷는다. 어제 비 맞은 운동화가 아직 축축하고 청바지에 임시로 꿰맨 부분도 다시 조금 뜯어졌다. 저녁에 실을 빌려서 다시 처리해야겠다. 이거 뭐 완전 그지 다 됐다.
한 30분 걸었나? 저 멀리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는 곳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역시나 서연의 집이다. 예상보다도 사람이 꽤나 많다. 날씨도 꾸리꾸리 하고 평일인데도 이 정도면 확실히 이곳이 올레길에서 필수코스인가 보다. 들어가 본다. 입장료가 의외로 그리 비싸지는 않다. 하지만 커피는 안 마신다. 이미 아침에 마셨는데 또 마시면 저녁에 잠 못 잔다.
97학번인지라 내 시대를 다룬 건축학개론은 꽤나 재미있게 봤다. 여자친구가 내가 첫사랑 생각할게 뻔하다고 못 보게 하는 바람에 꽤나 늦게 봤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고 여긴 여기다. 별 감흥은 없다. 2층에 올라가니 주인공 둘이서 이어폰 끼고 있는 큰 사진이 있다. 어라? 이거 나랑 여자친구 사진 표절 아닌가? 룩앤필이 비슷한데? 너 고소?
안쪽을 한바퀴 쭉 둘러보고 나온다. 나쁘진 않지만 이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 또 길을 걷는다. 올레길은 어딘가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올레길을 걷다 보니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갈길이 정해져 있고 안내가 계속 나와있으니 걷는 재미가 없다. 영화만 스포일러가 있는 게 아니다. 여행 중에도 5분 후에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르는 반전의 감정이 중요하다. 경관은 확실히 멋지고 예쁜데 정작 감흥이 없다. 아무리 예쁜 길이라도 남이 개척해놓은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 힘들더라도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제주도에는 개가 참 많다. 내 주변에 개 한 마리만 봐도 기절할듯 무서워하는 친구들도 있는 데, 걔네는 제주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내가 맨날 얘기하는 거지만 너네가 개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개들이 너네를 더 무서워할 거야.
생뚱맞은 곳에 예쁜 카페가 하나 나타난다. 정말 생뚱맞다. 근데 생각해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카페다. 로스팅을 직접 하는 걸로 유명한 와랑와랑. 어차피 올레길 걷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니 사실 그 길 위에만 있다면 어디든 상권이 되나 보다. 들어가서 메뉴를 보니 커피 말고 감귤차 같은 것이 당긴다. 지금 들어가긴 그렇고 이따 밥 먹고 한번 돌아와볼까? 거리가 되려나. 아니면 말지 뭐.
삼거리에서 갑자기 웬 고양이 하나와 마주친다. 오는 길에 몇 마리의 고양이를 보긴 했었지만 얘는 좀 심상치 않다. 땅바닥에 벌러덩 하더니 지가 먼저 나에게 다가온다. 딱 보니 사람 손 탄 발정 난 고양이다. 내가 이런 애들 잘 알지. 내 특효 고양이 마사지를 해주니 아주 좋아 죽는다. "그르르" 거리면서 내 바지에 볼을 엄청나게 부비 된다. 이놈 예쁘다. 곧 SBS 동물농장에서 '삼거리 고양이'로 보지 싶다.
길을 계속 가야 하는데 얘한테 붙잡혀서 거의 30분을 앉아있는다. 털의 상태를 보니 영양도 괜찮은 게 길고양이 같지는 않다. 주인이 있으면 목걸이라도 달아놓지. 얘는 딱히 뭘 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얘도 사실 그걸 바란 것은 아닌 거 같고 그냥 볼을 비빌 대상을 찾았던 거 같다.
얘는 나 말고도 보살필 사람이 많을 테니 대평이때처럼 아련해지지는 않는다. 계속 부비되는 애를 두고 매몰차게 길을 떠난다. 이놈 따라올 줄 알았더니 그냥 잘 가라고 앉아있다. 역시 고양이한테 뭘 기대하면 안된다. 잘 있어라 요놈아.
계속 걷는다. 바닷길로 갔다가 도로로 왔다가. 표지판을 보고 여기가 올레 5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걷다 보니 바닷가에 회센터가 하나 보인다. 첫날 엄청 헤매서 먹었던 해물뚝배기가 생각난다. 딱 저렇게 생긴 회센터였는데. 여기도 1인분 먹을 때 눈치가 보이려나?
........
제주도 회센터는 다 비슷하게 생겼나? 뭔가 이상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정경들도 보인다. 내 기억력이 안 좋다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분명하다. 여긴 첫날 왔던 그 회센터가 맞다.
소름이 돋는다. 사실 소름까지는 아니고 조금 놀랬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육성으로 "하하하하!"고 웃는다. 이게 올레 5길에 있었구나. 그럼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도 이 근처니 걔도 올레 5길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나보다. 그럼 그렇지. 그런 계산도 없이 그렇게 생뚱맞게 있을 리가 없다.
반가운 마음은 반가운 마음이고 갈길은 가야 한다. 계속 올레길을 따라간다. 게스트하우스가 몇 개 보인다. 확실히 올레길이라 게스트하우스가 길에 많이 있군. 천천히 구경하면서 간다. 여기서는 누가 숙박하려나. 꽤 새 건물도 보인다. 이곳도 꽤나 예쁘군.
흠... 달파란이군. 난 왜 한 번에 못 알아보는 걸까? 난 머리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항상 미스터리다. 달파란을 일주일 만에 다시 보니 새롭다. 그때 있던 개들이 내가 지나가니 짖는다. 날 알아본 걸까? 그냥 도둑인 줄 알고 짖는 거겠지.
여행 첫날 마주친 달파란은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사회악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지금은 또 느낌이 다르다. 만약 오늘밤 예약이 안되어 있었으면 한번 더 묵었을지도 모르겠다. 도미토리 룸도 나쁘지 않았고, 휴게실도 남녀공용으로 사람들의 대화를 유도하는 의외로 좋은 느낌의 장소였다. 게다가 카페도 내부에 있고 조식도 제공된다. 조식의 커피는 무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는다.
지니어스 시즌2를 보고 지니어스 시즌1의 출연진들이 예뻐 보이는 효과인가? 뭐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역시 어디든 하루로는 알 수 없다. 달파란도 하루가 아닌 이틀 있었으면 또 다른 느낌이었을 수도 있겠다. 절대 비추 한다는 의견을 취소한다.
그나저나 훈남 사장 아저씨, 1시간이라면서요. 놀지 않고 꾸준히 2시간 이상을 걸은 거 같은데 큰엉산책로는 여전히 안 나온다. 근데 이름이 왠 큰엉? 제주도는 방언이 있어서 그런지 지명 이름들이 좀 특이하다. 대평리의 원래 이름도 난드르이다.
지칠 때쯤 큰엉산책로가 드디어 나타난다. 근데 바로 앞에 금호리조트가 자리 잡고 있다. 확실히 좋은 곳은 대자본이 잠식했다. 아쉽지만 관광지에 왔다고 생각하고 산책로를 거닐어본다.
경치는 정말 좋다. 우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근데 길이 너무 잘 정돈되어 있으니 감흥이 크지는 않다. 난 남들이 정해준 길을 가는 데는 매력을 못 느끼는 거 같다. 중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보인다. 날씨만 좋으면 앉아서 글 좀 쓰고 책 보면 딱인데 솔직히 지금은 그러기에는 너무 춥다.
리조트다 보니 비싼 식당들이 꽤 보인다. 하지만 어차피 여긴 내가 갈곳들이 아니다. 한 식당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Golf TV에 나온 곳이라고 크게 쓰여있다. 사장님, 골프텔레비전에는 골프가 나와야지요. 흑돼지구이가 골프텔레비전에 나온 걸 자랑하시다니. 그래도 들어갈 사람들은 들어가겠지.
산책로 중간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책이 하나 놓여있다. 저 표지에 인물 예수님 같은데. 호기심이 생겨 들어본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만든 책이다. 이걸 왜 들었을까. 호기심이 항상 문제다. 얘네는 진짜 진출 안 하는 데가 없구나. 북한에도 전도하러 갈 수 있을 거 같다. 국정원에서 특별 채용해야 한다.
관광지답게 포토존도 있다. 커플끼리 여기서 사진 찍고 좋은 추억을 만들란다. 상상을 하고 찍는다. 이 사진에는 내 상상 속의 커플이 들어있는 거다. 나무 모양이 자세히 보면 한반도 모양이라 포토존이란다. 은근히 신기하다. 일부러 만든 건 아닌 거 같고 누가 발견했나 보다.
이제 식당을 찾아야 한다. 12시 반 정도 됐는데 운동을 해서인지 슬슬 배가 고프다. 근데 리조트 영역 안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지 식당 같은 게 안 보인다. 리조트 안에 있는 관광객용 식당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고 계속 적당한 곳을 찾아본다. 올레길이니 그래도 뭐라도 나오겠지.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젠장. 날씨가 계속 흐리더니 결국 오고 만다. 아무래도 올레길을 계속 따라가다가는 밥 먹기 힘들겠다. 비만 안 오면 느긋하게 가볼까 했더니 안 되겠다.
왼쪽을 보니 마을 비스무리한 게 보인다. 그래 저기 사람들도 밥은 먹고 살 테니 가면 내 한끼 해결할 곳 정도는 있겠지. 무작정 걸어가 본다. 오리고깃집이 나탄난다. 흠 아무리 그래도 오리고기는 패스. 좀 더 가니 '안녀 어랭이'라는 집이 나타난다. 이건 또 무슨 뜻의 이름일까? 일단 무작정 들어가본다.
들어가니 아저씨 대여섯 명이서 술을 시끌벅적하게 드시고 계신다. 주인아주머니한테 메뉴를 물어보니 물회가 된단다. 물회라.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먹어보지 뭐. 그걸 달라고 하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실내에 테라스용 외부 난로가 있다. 아저씨 이건 원래 실내에 두는 게 아닌데.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앉아서 기다리니 아주머니가 밑반찬을 가져다 준다. 밑반찬에 젓갈이 하나 있는데 그거에 대해 설명을 따로 해주시는데 제주도 방언이라 죄송하지만 도데체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다. 그나저나 아주머니가 정말 순박하게 생기셨다.
주인아저씨는 밖의 어항에서 물고기를 들고 오신다. 물회도 이렇게 바로 회를 떠서 넣나 보다. 그럼 왜 그 맛있는 회를 물 속에 넣어서 먹지? 그냥 먹는 게 낫지 않나. 뭐 다른 맛이 있겠지. 기다리니 물회와 생선뼈 튀김을 같이 들고 오신다.
아주머니 주시면서 젓갈을 슬쩍 치우려고 하신다. 분위기를 보니 서울 사람이 거의 안 오나 보다. 그래서 이런 특이한 향토 젓갈이 좀 부끄러우신가 보다. 나 먹을 거라고 치우지 말아달라고 한다. 좀 특이하게 생긴 젓갈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훨씬 더 난이도 높은 음식도 주신다. 내가 먹을 거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또 아이처럼 좋아하신다.
식당 사람들이 다 날 신경 쓰고 있다. 근데 나쁜 관심이 아니라 좋은 관심이다. 자기들이 평소에 먹는 건데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지,라는 어머니의 관심이다. 별거 아닌거에 기분이 좋아진다. 제주도 여행 와서 시골인심을 처음 느껴본다. 한 그릇 더 먹어야겠다. 배가 고파서라기 보다는 그러면 더 좋아하실 거 같다. 가끔 어머니가 힘들게 요리하시면 꼭 두 그릇을 먹는다. 그게 나만의 배려 방법이다. 장모님이 주시면 배 터지겠구나...
주인아저씨가 먼저 밥을 더 먹으라고 권하신다. 제주도 방언으로 얘기를 하신 후 아차 하시더니 다시 표준말로 어색하게 얘기하신다.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귀여우시다. 흔쾌히 한 그릇 더 먹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매우 좋아하시면서 젓갈도 더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배가 좀 부르긴 하지만 달라고 한다. 대신 조금만 달라고 한다.
어머니 조금만 주시면 되는데... 처음보다 더 가지고 오셨다. 이거 다 먹기 힘든데. 성격상 남기는 건 안되는데. 결국 밥은 다 먹는데 젓갈은 조금 남긴다. 대신 물회는 국물까지 싹 비운다.
벽을 보니 연예인 싸인이 몇개 보인다. 김응룡 감독님이야 알겠는데 오미연은 누구일까? 제주도에서 유명하신 분일지도...?
제주도 여행 온 후 이 식당에서 제대로 된 제주도 방언을 처음 듣는다. 이제는 제주도에서도 제주도 사투리는 거의 안 쓰는지 알았더니 젊은 부부이신데도 진하게 쓰신다. 무슨 말인지 알아는 듣겠는데 어미가 이상해서 좀 희한한 느낌이 든다.
젓갈은 맛있었고, 어랭이 뼈튀김도 괜찮았다. 물회는 뭔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역시 회는 깻잎에 싸서 마늘과 청량 고추를 곁들여, 소주 한잔 하고 같이 먹는 게 최고다. 아까운 회를 왜 물에 넣는 건지... 그래도 주인분들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좋았다. 맛집을 찾아서 가는 것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식사 한 끼가 여행의 맛을 더 한다.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린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사장님한테 여기가 어디인지를 물어본다. 비를 피하면서 갑자기 길에서 빠져나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온지라 지도가 없다. 넙빌레로 돌아가는 길을 물으니 앞에 큰길에서 아무 버스나 타면 된단다. 큰길로 걸어가면서 적당히 바닷길로 빠져서 아까 봤던 와라와랑을 찾아가서 커피 한잔을 마셔야겠다고 계획을 잡는다.
지도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대충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정해진 올레길을 걷다가 이렇게 막연하게 흐름 따라 걸어가니 다시 내 여행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하지만 그래도 길을 너무 모르니 문제다. 좀 가다가 못 찾으면 아무런 다른 카페라도 들어가면 그만이지 뭐.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버스 정거장에서 갑자기 푸시 알람이 울린다. 어? 와이파이가 잡히나? 확인해보니까 잡혀있다. 어디에서 마음 넓은 분이 와이파이를 공유하나 보다. 한 칸만 잡히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급히 지도에서 와라와랑을 찾아서 다운을 받아놓는다. 지도로 자세히 보니 거리가 꽤 된다.
날씨가 꽤나 춥다. 어제 오늘 계속 비 맞고 찬바람도 맞았더니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바닷길로 가지 않고 최대한 큰길로 가려고 노력한다. 바닷길은 바람이 너무 세고 차다.
가는 길에 바닥에서 귤 한 더미를 발견한다. 버린 건가? 그러기에는 상태가 너무 좋아 보인다. 운반하던 트럭에서 떨어진 듯하다. 어차피 거지 다 됐는데 이거라고 못 먹으랴. 상태 좋은걸 골라서 하나 까 먹어본다. 맛있구먼.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선다. 그런 골목 마다 강아지들이 매번 달려 나온다. 그때마다 잠시 멈춰서 강아지랑 놀아준다. 이놈들 모두 놀이에 굶주려있나 보다. 조금 놀아주니 좋다고 아주 난리다. 근데 막대기를 던지면 물어와야 할거 아냐! 던지면 그냥 던지나 보다 한다. 제주도에는 득도한 강아지들만 있나?
몇 번 헤맨 끝에 목적지를 찾는다. 중간에 다른 카페도 있지만 들어가서 메뉴를 보니 커피만 있어서 그냥 나온다. 오전 조식으로 커피를 이미 먹은 지라 그냥 따뜻한 차를 먹고 싶다. 와라와랑에 들어가니 역시 사람이 꽤나 있다. 하지만 아까 오전에 잠시 스쳐지나갈 때 바 자리가 있는 것을 이미 봐뒀다. 바는 눈치를 좀 덜 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귤차를 주문한다.
앉아서 차를 마시며 글을 쓴다. 그런데 몸 상태가 계속 별로다. 글도 잘 안 써지고 집중이 안된다. 그 와중에 손님은 또 계속 온다. 여기 위치를 은근 잘 잡은 것 같다. 소문도 꽤 나서 차를 타고 오는 손님도 있다. 바 자리 잡기 잘했다. 자리 없어 돌아가는 사람이 있어도 나랑은 상관없다. 바는 혼자 온 손님에게는 최적의 자리다.
도저히 몸이 안 좋아서 안 되겠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씻고 쉬어야겠다. 힘겹게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 나온다. 버스를 타고 갈까? 거리가 애매할 듯한데?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보니 대략 2키로 정도다. 버스 타고 가긴 좀 애매하다. 아 이럴 때는 그냥 쓰라고! 버스비,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꾸역꾸역 걸어간다. 생겨먹은 게 왜 이럴까나. 그래도 나름 기분을 업해볼까 싶어서 이어폰을 벗고 노래를 부르면서 간다. 술 취한 사람 같다. 괜찮다. 보는 사람도 없다. 조깅 한번 하면 최소 5키로는 뛰는데 2키로 쯤이야.
2키로를 걸어서 가면 꽤 되는구나. 날은 갈수록 추워진다. 원래 여행에는 디테일한 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딴 게 없다. 이래서 만사에는 건강이 중요하다.
몇 번의 택시 유혹이 지나간다. 택시 기사들은 혼자 걷고 있으면 앞에서 꼭 천천히 간다. 여인의 유혹도 아니고 택시의 유혹인가. 그래도 잘 버티고 꾸준히 걸어간다. 좀 힘들었지만 이제 숙소가 보인다. 그래도 해냈다. 스스로가 장하다.
넙빌레 마당으로 들어서니 이곳의 강아지 5마리가 날 반긴다. 같이 뛰어주면서 놀아준다. 하도 개, 고양이랑 놀아주다 보니 내가 제주도를 온 건지 애견 카페를 온 건지 헷갈린다. 강아지 중에 한 명이 대빵이다. 이놈 자기만 쓰다듬으라고 다른 애를 건드리면 으르렁 거리면서 협박한다. 욕심쟁이.
방에 들어오니 아직 청소를 하고 계신다. 4시 50분인데. 훈남 주인아저씨 오늘 좀 노셨나 보다. 카페에서 기다리니 청소를 끝내고 들어오란다. 오늘은 방에 혼자 있고 싶다. 한 9시쯤 일찍 잠들고 싶다. 하지만 물어보니 역시 도미토리에는 4인이 모두 다 찼단다. 일진이 한번 꼬이면 그냥 계속 꼬이는 거다.
방으로 들어가 앉아서 일단 침대에서 잠깐 쉬고 있으니 첫 번째 룸메가 들어온다. 학생 같은데 인사를 제대로 하자니 뭔가 내가 힘이 너무 없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목욕하러 간다. 뜨끈한 물로 지지면 좀 나아지려나. 씻고 돌아오니 룸메가 없다. 여긴 다른 이들에게는 잠만 자는 공간이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밖에서 맛난 거를 먹으려 했는데 도저히 못 나가겠다. 여행 다닐 때는 원래 건강이 최우선이다. 아플 때는 돈도 좀 써야 한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으로 가서 메뉴를 보니 제주 흑돼지 돈가스가 만원이다. 눈물을 머금고 주문한다.
그래도 씻고 좀 쉬니 약간 몸이 나아진다. 주문하고 5분도 안돼서 돈가스가 나온다. 5분이라... 음식 주문 후 나오는 시간에 내가 예민한 편이다. 지금 돈가스를 시킨 이유가 뜨슨 밥을 먹고 싶어서인데. 5분이면 돈가스는 미리 만들어놨거나 냉동을 샀거나 둘중 하나다. 신뢰가 확 떨어진다.
샐러드의 야채가 많이 죽어있다. 하나가 밉보이면 다 밉보인다. 칼로 썰어본다. 고기도 질기다. 내 만원... 버스 안 타고 택시 안 탄 게 뭔가 억울해진다. 퀄리티가 부족하면 내 식성으로 채우겠어! 싹싹 비워서 우걱우걱 다 먹는다.
차를 마시면서 아까 못 쓴 기행문을 마저 쓴다. 그래도 비싼(?) 걸 먹으니 확실히 기운이 샘솟는다. 그렇다고 오래 있기는 그렇고 진짜 일찍 자야겠다. 왜 하필 이런 날 도미토리가 풀인걸까. 내일은 내륙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바다를 하도 봤더니 감흥이 없어졌. 티벳풍경 사장누님이 해외 가서 바다를 봐도 이제는 아무 감흥이 없단다. 자기 집 앞에 풍경이랑 큰 차이가 안 나서란다. 이해가 된다.
들어가려니 혼자 온 남자분이 뒤에 여자분들한테 접근한다. 맥주 한잔 하자고 하는 게 들린다. 오! 파이팅! 거절당한다. 내가 다 실망하는데 나한테 온다. 나한테도 같은 제의를 한다. 이런. 평소 같으면 받아줬을 텐데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다. 게다가 내가 두 번째 선택이라니! 쿨하게 거절한다. 그래도 좀 미안하다. 진짜 몸 상태만 좋으면 찰진 술자리도 환영이었을 텐데. 인연이 아닌 거지 뭐.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약을 좀 먹어야겠다 싶다. 훈남 주인 형님한테 감기약이나 타이레놀이 있냐고 물어본다. 약 먹고 일찍 자야겠다. 하지만 없단다. 어제 저녁 옆방에서 어떤 사람이 다 먹었단다. 단체로 감기 걸렸었나. 어쩔 수 없지. 방으로 들어간다.
아까 한잔 하자던 친구, 알고 보니 아까 왔던 룸메였다. 아 나의 기억력이란. 뭔가 더 미안해진다. 괜히 머쓱해서 몸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한다. 근데 이 친구 이상하다. 밖에서는 굉장히 살갑게 말을 걸더니 방에서는 대꾸 한마디 없고 여하튼 뭔가 특이하다. 삐쳤나? 그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이함이 있다.
누워있다 다른 룸메가 와서 인사한다. 진짜 몸이 좀 으스스한 게 영 불안하다. 여행 다닐 때는 아프면 큰일이다. 이불 덮고 누워서 좀 떨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갑자기 나를 건드린다. 돌아 보니 훈남 주인아저씨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는데 타이레놀 한알을 가지고 오셨다. 아 감동받았다. 아까 시계를 보시더니 이 시간에 사가지고 오신 건가. 감사한 마음으로 한알 먹고 다시 눕는다. 미열이 좀 있는 것 같지만 만병통치약 타이레놀을 한번 믿어본다.
오늘은 좀 힘든 날이었다. 비도 연달아 이틀 맞고, 바닷바람도 그렇고... 게다가 장기 여행 중에는 적응한 이후에 원래 살짝 한번씩 아프곤 한다. 긴장이 풀리는 걸가. 그나저나 주머니에 넣어있는 동안 아이폰 어플이 몇 개가 지워졌다. 자동으로 x를 누르고 확인도 오케이를 했나 보다. 그래도 어플이 4개나 지워지다니. 그중에 하나가 가계부 어플이다. 열심히 관리하고 있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대략 42,000원 정도 썼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는 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여행을 즐기라는 신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