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8시쯤 눈을 뜬다. 내가 어떻게 여기 들어와있지? 옷가지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어제도 안 씻었군. 이제 안 씻은지 3일째인가? 뭐 그래도 찝찝한 것도 없다. 이제 그냥 도민 다 됐나 보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깬듯 하여 다시 누워서 잠을 청한다. 9시쯤 되니 형님이 날 찾아오신다. 형님 어제 심하게 달리시더니, 보아하니 숙취에 시달리시나 보다. 난 그렇게 마신 것 치고는 의외로 멀쩡하다. 섞어서 안 마시니 꽤 먹었어도 괜찮다. 확실히 제주도 물로 만든 술은 다르다.
형님, 누님 두 분 다 오늘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조식은 그냥 스킵하겠다고 한다. 뭐 나도 빵과 주스 같은걸 먹을 상황은 아니다.
두 분이서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 청소를 하신다. 오늘 서울에서 4명의 손님이 오신단다. 난 오늘 어쩌지? 형님 내외분은 은근히 내가 남았으면 하는 눈치다. 사실 나도 이곳이 좋다. 매우 좋다. 하지만 그래도 내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하루는 좀 변화를 주고 싶다.
방에 누워서 고민을 하다 일단 짐을 싸가지고 나온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마음 가는데로 갈 수 있도록 짐을 가지고 다녀야겠다. 이래서 여행 다닐때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 안 돌아올 가능성이 크니 일단 작별 인사를 한다. 귀여운 까뮈랑도 안녕이구나. 곧 돌아올게.
사장님 내외분도 이따 마을로 내려오신다고 해서 점심을 같이 먹고 아마 진짜 이별을 할거 같다. 오렌지다이어리를 나서는데 그새 정들었는지 까뮈가 애절한 눈빛으로 담벼락에 매달려서 나를 배웅해준다. 나도 정들었다 이놈아.
고산리에서 몸국을 먹고 가야겠다. 제주도 여행 다니면서 막상 제주도 토속 음식이라는 몸국을 한 번도 안 먹었다. 사장님 내외분도 해장하러 오실 거라니 잘됐다. 이따 현영이네 풀밭카페에서 만나기로 한다. 오시는 김에 현영이네서 짜이도 두 잔 팔아달라고 내가 대신 영업도 해준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내려온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그래도 좀 쌀쌀하긴 하지만 반팔 입고 다니는 사람마저 보인다. 왜 떠나기 전날이 되니 날씨가 좋아지는건데...
풀밭카페에 도착하니 현영이 혼자 있다. 고산리에서 내 아지트가 되어준 이곳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그러고 보니 얘는 어제 술자리 파한 이후에 잘 내려왔나? 내가 먼저 잠든 건지, 어제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
둘이 잡담을 하면서 형님 내외를 기다린다. 현영이가 갑자기 오늘 같이 티벳풍경에 가자고 한다. 나쁘지 않긴 한데, 도미토리에 자리가 있을까? 난 산방산 온천에 들렸다 갈 생각이라서 현영이한테 먼저 가서 자리 좀 맡아달라고 한다. 둘 다 전화가 안되니 미리 물어보고 할 수도 없거니와 혹시 약속이 엇갈리면 그냥 그대로 끝이다.
조금 기다리니 형님 내외가 차를 몰고 온다. 몸국을 먹고 싶다고 하니 육거리에 있는 수월식당을 가자신다. 뭐 해장만 된다면 어디든 괜찮다.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차를 가져간다. 이 동네 살다 보면 짧은 거리도 걸어가기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전거는 필수다. 가는 길에 보니 앞집에 분식집이 오늘 오픈했다며 홍보를 하고 있다. 그걸 본 누님이 갑자기 분식이 먹고 싶어졌단다. 어쩔 수 없지. 취향에 맞춰 찢어진다. 나랑 현영이는 원래 목적지인 수월식당으로 가고 형님 내외는 분식집에 가는 걸로 결정한다.
수월식당에 가니 자리가 없다. 장사 잘되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이 거리 하나가 다인데 은근 상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어차피 풀밭 카페가 바로 옆이라 얘기를 해놓고 카페에 가서 좀 앉아있다 다시 나온다.
좀 있다 다시 가니 역시 그새 자리가 생겼다. 나는 몸국을 시키고 현영은 따로국밥을 시킨다. 2주 여행하면서 제주의 명물, 몸국은 처음 먹는다. 해초류가 듬뿍 들어간 국인데 이거 맛이 뭔가 희한하다. 약간 난이도가 있는 음식이다.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화들짝 놀란다. 몰골이 장난 아니군. 완전한 현지 도민 포스다. 하긴 안 씻은지 아마 이제 삼일은 됐지? 오늘은 산방산 온천 가서 오랜만에 묵은 때를 싹 다 벗겨내야겠다.
우리가 좀 늦게 먹어서 형님 내외가 이미 풀밭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까봐 걱정된다. 현영이가 밥을 빨리 먹어서 먼저 보낸다. 나는 그래도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고 나온다. 관광객이 그다지 없는 동네라 그런지 정말 제주도의 토속 맛이 담겨 있는 한 뚝배기였다. 특이하고 생소하긴 했지만 또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점심은 내가 사준다. 그동안 짜이 얻어먹은 게 있으니 밥이라도 사야지.
밥을 먹고 카페로 돌아가니 형님 내외분은 앉아서 현영이가 짜이를 끓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같이 합류하여 짜이를 마시면서 수다를 떤다. 그러고 있으니 역시나 동네 주민1이 스윽 들어온다 온다. 진짜 먹을 건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다. 대단하다. 동네 주민1은 짜이 한잔을 후딱 얻어 먹고 물안경을 빌려간다. 저번에 못한 문어 낚시를 하려나보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수영해도 그리 많이 춥지는 않겠다.
이제는 진짜 갈 시간이다. 정 들었던 고산리 하고도 작별을 할 시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온 동네였지만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들어온 동네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곳에서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 다음에 여자친구랑도 꼭 같이 와야겠다 생각을 해본다.
형님 내외분께 작별인사를 한다.내가 그러한 것처럼, 많이 섭섭해하신다. 그래도 조만간 또 올 거니까 괜찮다. 떠나는 사람은 웃으면서 가야 하는 법이다. 쿨하게 인사를 하고 나선다. 현영하고는 저녁에 티벳풍경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이따 보자며 작별인사를 유예한다. 좋은 풍경과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 고산리. 이제 진짜 작별이다.
사람들과 헤어져 정류장에 앞에 털썩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음악을 들으며 햇살을 몸으로 느낀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정겨운 거리, 그리고 정경들이 익숙해지니 작별이구나.
40여 분을 기다려서 버스에 올라 탄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잠깐 잠들었나? 갑자기 기사님이 탄산온천에 다 왔다고 내리란다.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급하게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그래도 표지판이 보여서 따라가니 어렵지 않게 탄산온천을 찾는다. 현영이한테 미리 받은 50% 할인쿠폰을 제출하고 6천 원만 내고 들어간다. 노천탕도 가고 싶지만 수영복이 없어서 안된다. 하긴 가봤자 찰진 상황만 예상된다.
옷을 사물함에 벗어 넣고 탕에 들어간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있다. 여기 물 색깔이 희한하다. 물이 탄산수라더니 확실히 다르다. 이름이 탄산온천이니 당연한 건데 별생각 없이 와서 이제 깨닫는다. 바보가 따로 없군.
탄산수는 뜨거우면 탄산이 날아간단다. 그래서 원수는 오히려 약간 시원함이 느껴지는 물이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왔다 갔다 하며 몸을 녹인다. (거기 설명서에 그리 하라고 쓰여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하니 몸이 나른하니 좋다. 한 시간 정도를 왔다 갔다 하며 피로를 푼다. 긴장이 풀린건지 급 졸음이 밀려온다. 근데 잘 데도 없다. 이젠 그만 나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샤워를 깨끗하게 하고 나온다.
어느새 오후 4시다. 지도를 보니 여기서는 버스를 한번 갈아 타야 대평리를 간다. 날씨가 너무 좋으니 좀 걷고 싶어진다. 그냥 버스 하나만 타고 내려서 거기서부터는 걸어가기로 마음먹는다. 3킬로쯤이야 금방이지. 근데 목욕했는데 또 땀이 나려나?
버스 정거장을 찾아 가는데 말 한 마리가 보인다. 내가 궁금한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가서 한번 만져줄까 하다 만다. 걷어차이고 싶지는 않다.
오늘이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니 모든 풍경이 달라 보인다. 덩달아 기분도 가라앉는다. 오늘을 조심해야 한다. 여행 막바지에는 항상 아팠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겠지. 잊지 말자, 나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오늘 하루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보자.
버스에 올라 타고 가다 안덕계곡에서 내린다. 금방이다. 귤이나 좀 사서 먹으면서 걸어볼까? 때마침 귤 판매하는 곳이 바로 보여서 들어가본다. 사장님 주무시고 계시다 내 입장에 화들짝 놀래며 깨신다. 하지만 여쭤보니 귤은 철이 지나서 이제는 없단다. 곤히 주무시고 계셨는데 괜히 깨웠다.
대평리 3킬로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드디어 다시 이곳에 돌아가는구나. 제주도에서 내 마음의 고향이었던 곳. 뭐 지금은 고산리가 고향인 거 같기도 하고.
새소리가 좋아서 이어폰을 빼고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걸어가다 보니 쉼터가 나온다. 여기도 여지없이 운동기구가 있다. 정말 건강한 대한민국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바람을 느껴본다.
자연을 느끼며 앉아있으니 이렇게 더 있고 싶다. 그래도 해 지기 전에는 가야지. 가기 싫어하는 몸을 일으켜서 길을 재촉한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계속 기분이 다운되며 센티해진다. 언젠가 다시 올 수 있겠지?
걷다보니 이제는 진짜 더위가 느껴질 정도다. 결국 잠바를 벗어서 허리에 두르고 걷는다. 자꾸 내려가서 거추장스럽다. 어깨에 둘러본다. 이게 낫다. 이렇게 가야겠다.
꽤나 간다. 한 시간 정도 투벅투벅 걸으니 드디어 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평리도 멀리서 자그마하게 보인다. 드디어 다시 돌아왔구나, 내 여행의 시작이었자 마지막을 정리할 곳으로.
이제 슬슬 눈에 익은 장소들이 나타난다.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던 선자네 쌀롱을 지나서 정갈한 음식이 좋았던 사소한 골목을 지나쳐간다. 처음 왔을 때 혼자 책 보며 여유를 부렸던 거닐다 카페와 제주 음식을 제대로 먹었던 용왕난드르 식당도 스쳐 지나간다. 더 가기 전에 버스 정거장에 가서 내일 버스 시간표를 미리 알아본다. 내일 아침 10시 40분 비행기니 시간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좋다.
티벳풍경에 가기 전에 이응 게스트하우스에 들러서 대평이가 있는지 확인해본다. 이놈 그새 다른 호구를 잡았는지 어떤 여자 여행자에게 열심히 끼 부리고 있다. 이 녀석, 내가 굶어 죽지는 않을지 알았었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니 엄청 반갑다.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이곳은 변한 게 없구나. 이놈도 나를 잊지는 않았는지 여자 여행자가 가고 나니 바로 나에게 달려든다. 그래도 너도 날 그리워한거지...?
일단은 짐을 풀기 위해 티벳풍경으로 간다. 아무도 안 보여서서 거실로 들어가니 스텝 한분이 있다. 이제 여기 스탭분들도 다 낯이 익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 이번은 느낌이 정말 다르다. 도미토리 방에 오늘은 자리가 꽤 있다. 저번에 왔을 때 탐나던 이 층 침대를 맡는다. 헌데 오늘은 이 도미토리에 남자 나 하나, 그리고 여자만 3명이라는 얘기를 한다. 이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짐만 풀고 다시 나간다. 길가에 있는 슈퍼에 가서 2200원을 주고 참치캔을 하나 산다. 대평이를 찾아 돌아와보니 얘는 그새 배고팠는지 쓰레기통을 열심히 뒤지고 있다. 그런 놈 앞에서 참치 캔을 들이대니 까기도 전부터 아주 난리다. 까는 와중에도 먹겠다고 달려든다. 주겠다고, 준다고! 캔 그대로 줬다가 날카로운 입구에 혹시 다칠까 염려돼서 바닥에 부어놓는다. 좀 더럽겠지만 길고양이니 이 정도는 감수하도록. 참치가 보이자마자 미친 듯이 먹는다. 잘 못 얻어먹고 다녔나...
이 자그마한 애한테 양이 너무 많으려나? 일단 다 먹는걸 보지 않고 티벳풍경으로 돌아간다. 다른 스텝분이 한분 더 있다. 그분이 말하길 현영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오늘 밤에 안 오고 내일 올 거 같단다. 지가 오자고 해서 왔구먼! 뭐 그래도 여행의 마지막 날을 혼자 조용히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곳에서 제주도의 마지막 밤을 고독하고 평온하게 보내봐야겠다.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나가는 길에 아까 대평이 밥 준 데를 보니 참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양 많을까봐 걱정한 내가 바보지. 문득 아까 본 모습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잘 지내라. 밥 잘 얻어먹고. 굳이 다시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계속 마음에 걸려하던 참치캔을 마지막에는 줬으니 그걸로 됐다. 여운이 남는 이런 이별도 좋다.
마지막 저녁은 어디서 먹지? 은근히 이곳에는 먹을 곳이 많지 않다. 일단은 익숙한 사소한 골목으로 향해본다. 골목 들어가는 입구에 고깃집이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밤인데 혼자 고기랑 막걸리를 먹을까? 들어가서 물어보니 1인분은 안된단다. 에잇. 혼자 다니니 고기 먹기가 쉽지 않다.
결국 사소한 골목으로 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견빈이 여전히 앞을 지키고 있다. 들어서는 나를 여자 사장님이 바로 알아보신다. "여행을 길게 하나 봐요." 라고 물으셔서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아쉬움을 담아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이게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 가능성이 크군. 마지막 식사를 사소한 골목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매번 먹었던 백반을 시킨다. 이곳의 백반은 3일마다 메뉴가 바뀐다고 했던가? 역시 저번에 먹었던 거랑 구성이 다르다. 여기는 무엇을 시켜도 정갈하게 나온다. 이리 푸짐해도 적당한 가격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사실 야채 위주라서 원가는 얼마 안 할 거다. 제주도에 좀 있어보니 야채는 얼마나 구하기 쉬운지 알겠다.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해놓으니 맛도 있고 돈도 아깝지 않다. 밥을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모든 반찬을 싹 비운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다. 마지막 밤인데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마지막을 잘 지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마지막임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냥 또 다른 여행의 하루일 뿐이다. 그래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핑크 라벨 막걸리는 먹고 싶다. 티벳풍경에서 오늘 술자리가 있으려나. 뭐 없으면 혼자 한병 사가지고 바다에서 홀로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해서 충분히 그래도 될 듯하다.
일단 티벳풍경으로 돌아온다. 이 시간에 도미토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이제는 익숙한 곳이라 혼자 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 일단 한 9시까지는 책을 좀 봐야겠다. 내일 공항 가는 차편을 미리 좀 알아보고 책을 핀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하도 노느라 책을 못 본거 같다. 이럴 때라도 봐야지.
문득 고산리 생각이 난다. 아무래도 마음의 고향은 대평리가 아닌 고산리인가 보다. 특히 오렌지 다이어리 사장님 내외 생각이 많이 난다. 그냥 마지막 날을 거기서 보낼걸 그랬나? 떠나온 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후회는 말자. 어차피 선택을 했으면 즐겨야지. 조용한 밤도 나쁘지 않아.
도미토리 밖에서 소근소근 소리가 들린다. 여자분들 3명이 온다더니 온건가? 문이 열리고 한 여성분이 머리만 빼꼼히 들이민다.
"맞네!"
뭐가 맞다는 거지? 헌데 이 여자분 얼굴이 낯이 익다. 어디서 만난 사람인 거 같은데... 내가 확실하게 못 알아보고 있으니 먼저 수줍게 얘기를 한다.
"써니 허니요~"
아 거기서 만났던 여성분 2명이다. 여행 다니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간혹 있어서 아주 놀랍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신기한 인연이다. 아까 내가 들어올때 스탭과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목소리가 비슷해서 혹시나 하고 와봤단다. 대단하다. 하긴 써니허니에 있을 때도 기억력이 대단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몸은 안 들어오고 머리만 내민채 조곤조곤 얘기한다. 이 친구 수줍음이 많나? 그래도 반갑다.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걸 잘하는 건가 고민하는 와중에 아는 얼굴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분들은 도미토리가 아닌 방에 머물기에 나중에 봐서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내가 먼저 얘기한다. 어차피 여기서 공식적인 술자리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막걸리 한병이나 먹을까 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나가고 다시 혼자 누워서 책을 본다. 책에 집중이 잘 안된다. 밖에서 또 소리가 난다. 이번엔 누구지? 도미토리에 있으면 누가 들어올 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누군지 몰라도 인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현영이가 들어온다. 어라? 너 안 온다며! 내가 섭섭해할까 봐 왔단다. 동네 주민2의 스쿠터를 빌려서 이 저녁에 타고 왔단다. 착한 동생 같으니라고. 다시 대평리가 익숙해진다.
티벳 풍경 옥상에 있는 자리로 올라간다. 이 자리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많이 왔을 텐데. 현영이가 여기 주방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병 가져온다. 한 모금 마신다. 웩, 맛이 없다. 제조일을 보니 21일이다. 오늘이 24일 니 무려 3일 전 생산된거다. 제주에서 내 마지막 막걸리를 이걸로 할 수는 없다. 슈퍼에 갔다 오겠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삼거리 슈퍼에 가서 막걸리를 한 병 달라고 한다. 주인아저씨가 냉장고 위쪽이 차가우니 그쪽을 가져가라고 한다. 그 위에 애들을 보니 다 제조일자가 꽤 된 애들이다. 아저씨, 저 초보 아닙니다. 아저씨 조언을 무시하고 오늘 날짜의 막걸리를 골라서 산다. 아저씨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돌아와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한 모금 마신다. 그래, 이맛이지. 서울 가면 이 막걸리 맛이 제일 그리울 거 같다. 한라산이야 이마트에 가면 살 수 있지만 생막걸리는 유통기한이 짧아서 서울까지 유통이 안된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당일 제조 막걸리를 서울에서 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지금 마시는 이 맛의 막걸리를 먹기 위하여 언젠가 제주도로 돌아오리라!
현영이는 오늘 저녁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혼자 홀짝홀짝 마신다.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아서 좋다. 별이 많이 보인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대범한 척 하지만 뭔가 울컥울컥 한다. 다시 오면 되지. 근데 그게 쉬울까.
우리가 있는 걸 알았는지 스텝분이 올라와서 같이 합류한다. 잠시 얘기를 나누다 해가 떨어져서 추우니 거실로 오란다. 오늘 막걸리 파티를 하려나? 조용히 그냥 이렇게 마시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 아까 재회한 써니허니 멤버 두 명도 있지. 현영이와 같이 조금 더 앉아서 정취를 느끼다가 거실로 내려간다.
방에 가니 막걸리와 과자를 이미 준비해놨다. 막거리를 보니 다 제조일자가 좀 된 놈들이다. 난 생생한 내 것만 마셔야지. 한두잔 나누면서 사람들하고 얘기를 나눈다. 이미 한번 만난 사람들은 반가운데 오늘 새로 만나는 분들은 사실 좀 부담스럽다. 그들하고는 인연을 맺을 시간이 없다. 난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오늘은 이 게스트하우스 전체에서 나만 남자다. 스텝과 사장님까지 포함하면 여자 10명에 남자 나 혼자다. 이런... 이걸 좋아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혼숙인 도미토리도 당연히 나만 남자다. 뭐 하룻밤이니.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막걸리를 좀 먹게 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안 먹으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자꾸 술잔을 한두잔 들게 한다. 내일은 원래 버스를 타고 가려했는데 써니허니의 일행 처자 두 분의 비행기 스케줄이 나와 비슷해서 그냥 같이 택시를 불러서 가기로 한다. 2만 원이니 내가 반인 만원을 내면 될 듯하다. 제주도에서 타는 첫 번째 택시가 될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사놓은 막걸리를 다 마신다. 술은 비었지만 아쉬운 마음은 아직 비우지 못했다. 스텝분이 내일 일정이 다 있으니 이제 그만 자리를 파하자고 한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가위바위보를 해서 설거지 당번을 정한다. 역시 난 한번에 이긴다. 이런 가위바위보 내기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다. 패자들이 설거지를 하며 치우는 동안 방에 들어와서 좀 누워있는다. 현영이는 스쿠터를 타고 아까 이미 고산리로 돌아갔다.
적당히 취하긴 했지만 마음이 아쉽다. 밖에 나와서 마당 한켠에 앉아본다. 옆을 보니 써니허니 일행 두 명도 나와있다. 아, 이 친구들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그랬지. 한잔 더 하자고 할까? 슬쩍 떠보니 좋단다. 가서 한병 사 오기로 한다.
한병만 사기는 좀 애매해서 마트에서 두병을 사 온다. 이들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올라가 있으니 어찌 알았는지 다른 여자분 두 분이 또 합류한다. 다들 22살 동갑이다. 나랑 15살 차이군. 뭐 익숙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앉아있어도 하나도 춥지가 않다.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서로 나눈다.
얼마 안 있었던 거 같은데 벌써 11시가 넘었나 보다. 스텝분이 이곳은 주민들이 많은 곳이라서 시끄러우면 안 된다며 11시 이후에는 조심해달라고 부탁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면 안 되지. 자리를 파할까 하다가 다들 아쉬워하는 거 같아서 이전 방문때 찜해놓았던 바닷가의 내 아지트로 데려간다. 제주도의 밤은 엄청 어둡다. 술을 들고 한치 앞이 안 보이는 밤길을 걸어 아지트로 간다.
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대평이가 있는 지 슬쩍 한번 본다. 이 아이 내가 아까 준 참치가 좋았나 보다. 안에서 날 보더니 또 뭐 없을까 싶은지 나를 쭐래쭐래 따라온다. 잘 먹고 잘 살거지? 그래도 인마. 너 있는 이곳이 공기 좋고 먹을 거 많은 곳이야. 좋은 줄 알아야지. 이젠 진짜 마지막이겠구나.
밤길에 아지트를 찾느라 조금 헤맨다. 그래도 일행을 데리고 무사히 도착한다. 어두움 속에 들리는 파도소리가 좋다. 내 마지막 만찬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어린 친구들은 맥주와 참이슬을 어느새 챙겨 가지고 왔다. 아니, 제주도에서 무슨 참이슬을... 소맥을 좋아해서란다. 그래 뭐 주도에 정답은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남은 기간 동안 다니면서 당일 제조한 막걸리는 꼭 먹어보라고 조언한다.
막걸리도 거의 다 먹어간다. 다 먹고는 소주와 맥주도 먹는다. 파도소리를 안주 삼아 한잔 두잔 먹으니 꽤 마셨는데도 취하는지를 모르겠다. 언제 다시 이 여유를 느낄 수 있을까나. 이곳도 사실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곳인데 그 마음이 항상 어렵다. 마시다보니 오늘 처음 만난 여자 2분은 먼저 숙소로 들어간다.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지만 나머지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 나랑 써니허니에서 만난 두 친구,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인 사람들끼리.
이제는 진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내일 아침 7시 50분에 택시가 오기로 했다. 술도 꽤나 마셨는데 숙취가 있을려나 걱정도 된다. 같이 일어나서 숙소로 향한다. 여자 두분은 방을 잡았기에 내일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 혼자 도미토리로 들어간다.
오늘은 도미토리에 여자만 6명, 그리고 남자는 나 혼자다. 이미 2층에 좋은 자리를 잡아놨기에 남들이 안 깨게 조용히 올라간다. 잠들기 전에 7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는다. 20분이면 준비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칠 시간이다. 그래도 아침에 바로 나가기 위해서 청바지까지 입고 잠을 청한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