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부스럭 소리에 잠에서 깬다.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다. 의외로 어제 밤에는 한 번도 안 깨고 잠을 잤다. 이런 적도 제주도 여행 중에 아마 처음인 걸로 기억한다. 여행 중에는 왜 이리 부지런해질까? 그래도 바로 일어나기 싫어서 조금 더 누워 있다가 7시 반이 되어서 일어난다.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정말 마지막이다. 나가 보니 써니허니의 두 미녀분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다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나야 뭐, 그냥 잠바를 스윽 걸치고 가방 하나 들고 나선다. 올 때 이리 왔으니 갈 때도 이리 간다.
스텝분과 작별 인사를 한다. 이분도 이제 여기 스탭을 그만두시고 현영이가 있는 고산리에 정착하러 가신단다. 다음에 고산리로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문득 생각해보니 조식을 안 먹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먹고 갈걸. 서울 가면 제주에서 각 집마다 있는 직접 만든 감귤잼 생각이 많이 날 거 같다.
세 명이서 함께 티벳 풍경을 나선다. 이곳에 총 3일을 묵었다. 오렌지다이어리에서도 3일을 묵었으니 이 두 곳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셈이다. 도미토리가 매력적인 곳, 마니아들이 많은 이유가 확실히 있다. 다음에 제주도 올때도 하루 이상은 머물지 않을까 싶다.
택시 타러 가는 길에 대평이랑 대평이 엄마와 마주친다. 이놈아, 어제 이미 작별 인사 다 했는데 왜 자꾸 눈앞에 나타나냐. 이러면 극적인 이별이 안되잖아. 그대로 갈 수 없어서 잠시 앉아서 쓰다듬어 주고 안떨어지는 다리를 떼고 등을 돌린다. 이젠 진짜 이별이야. 잘 살아햐 해. 끼 좀 더 열심히 부리고. 그래야 끼니를 해결하지.
삼거리 슈퍼에 가니 택시가 이미 기다리고 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앞자리에 올라 탄다. 그리고 출발이다. 극적인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하긴 갈 사람은 원래 조용히 가는 거다. 그게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미세먼지가 좀 끼긴 했지만 그래도 보이는 게 어디냐. 날씨는 이제 완전한 봄이다. 겨울에 시작한 짧은 여행이 봄을 맞이하며 끝난다. 이 복장으로는 더이상 더워서 못 다니겠다. 타이밍 참 좋군.
바지를 보니 대충 꿔 매 놓은 곳이 또 벌어지고 있다. 뭐, 이제는 상관없겠지. 이런 생각을 하니 또 진짜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보름만에 아이폰의 비행모드를 끈다. 바로 통신이 연결 된다. 보름전 정지시킬때 KT에 오늘 자동으로 연결되도록 해달라고 했었다. 얘네 일 잘 하네. 아이폰에 오랜만 LTE 신호가 보인다. 이제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자.
공항까지 50분도 안 걸려서 도착한다. 뭐 이리 금방이지. 2만 원이어서 내가 만원을 내고 나머지 여인분들이 만원을 낸다. 원래 여행지에서는 정확하게 1/3로 나누는 게 원칙이겠지만 가는 길에 조금이나마 베풀고 싶다. 일종의 허세라 봐도 무방하다.
어제부터 함께한 처자 두 명과도 이별할 때이다. 난 근처 올레 국수를 가서 고기국수를 먹고 가려고 한다. 그 친구들이 나중에 서울에서 문자 하란다. 어라? 전화번호를 받았었나? 어제 저녁에 주고 받았단다. 취해서였는지 기억은 전혀 안 난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대평리 이쁜이'로 저장되어 있다. 이거 어제 내가 끼를 좀 부렸었나? 이 친구들하고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마지막을 함께 해서인지 꽤나 정이 들었다. 서울 가서 연락을 하게 될까? 공항에 서서 서로 잘 가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8시 반이다. 10시 50분 비행기니 먹고 오려면 서둘러야 한다. 버스를 타고 올레국수를 찾아간다. 공항에서 1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9시 반부터 문을 열기에 아직은 준비 중이다. 안에 앉아서 기다려도 되냐고 물어보니 괜찮단다. 미리 국수를 주문해놓고 키보드를 꺼내서 글을 쓴다.
9시 반 즈음되니 나 홀로 있던 식당에 사람이 바글바글해진다. 벌써 웨이팅까지 생긴다. 여기 진짜 대박집이군. 예전에 제주도 왔을 때 여자친구랑 같이 왔었던 곳인데 맛있어서 다시 찾아왔다. '3대 맛집', 이런 식으로 불리는 곳은 대부분 별로던데 여기만 마음에 든다.
일찍 와서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9시 반에 오픈하자마자 내 국수가 가장 먼저 나온다. 먼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는다. 그래 이 맛이지. 천제연 폭포 앞에서 먹었던 거와는 완전 다르다. 맛에 심취해서 정신없이 먹는다. 국물이 진하고 고기도 꽤나 있어서 다 먹으니 배가 상당히 부르다. 그래도 국물까지 싹 비운다.
여기 식당에는 다 서울 사람이다. 갑자기 벌써 서울에 온 느낌마저 든다. 난 그래도 오랜 여행자임을 티 내기 위해서 '삼촌, 여기 계산이요'라고 외친다. 다들 촌스럽게 제주도에서 '이모'를 찾고 있다. 이런 날라리 여행자들 같으니라고. 제주도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무조건 '삼촌'이라고 부르는 법이란다.
밥을 다 먹고 버스 정거장을 가니 운 좋게도 시간 맞춰서 버스가 딱 온다. 타서 찍으니 환승할인이라는 안내가 나온다. 내가 이곳에서 한 시간도 채 안 있었나? 뭐 돈도 아끼고 잘됐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천천히 수속을 밟고 면세점을 슬쩍 한번 둘러 본다. 뭐 어차피 면세점은 나랑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 근데 공항에 사람이 전체적으로 좀 많다. 앉아서 쉴 자리도 없다. 뭔 일 있나?
보아하니 김포공항에 안개가 많이 껴서 전체적으로 지연되나 보다. 모든 비행기가 대략 2시간씩 지연되고 있다. 원래 내 비행기가 10시 50분인데 지금이 10시다. 그럼 도데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
갑자기 아까 대평리 이쁜이들도 안 가고 있으려나 싶다. 한번 문자를 보내보니 역시 이들의 비행기도 지연되어서 아직 공항이란다. 잘됐다 싶어 만나기로 한다. 같이 롯데리아에 가서 콜라와 주스를 마신다. 아까 택시비를 내가 좀 더 냈다고 음료는 자기들이 산다. 개념녀들 같으니라고. 미팅이라도 시켜주고 싶은데 맞는 나이대의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오늘따라 뭔가 급 피곤해진다. 긴장이 풀려서일가? 이 친구들은 8시 50분 비행기인데 아직도 못 가고 있다. 이 친구들이 빨리 가야 내 차례도 올 텐데...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064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2주 만의 첫 전화다. 근데 누구지? 받아보니 진에어란다. 지금 나 빼고 다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며 빨리 서둘러 오란다. 이게 웬일? 다 지연되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의외로 진에어는 별로 지연이 안됐나 보다.
급하게 가방을 울러 매고 서둘러 인사를 한다. 작별이 갑자기 이루어져서 아쉽다. 그래도 일단 비행기는 타야지. 나중에 따로 문자로 인사를 하든지 해야겠다.
창구에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고 공항의 안내 방송으로는 내 이름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런 진상짓을 하다니. 뛰어서 공항을 가로질러 간다. 그래도 겨우 늦지 않게 들어간다. 여유를 즐기기 위한 여행에서 마지막은 이렇게 급하게 가는구나.
이번 내 여행은 여기까지다.
겨울에 시작된 여행은 겨울이 끝나면서 같이 끝났다. 이 여행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이루었을까?
사실 원래 계획했던 것들은 거의 다 못한 것 같다. 목표했던 사업계획서도 완성 못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아직 두리뭉실하다. 원래 테마 중 하나였던 하루 3.5만 원 쓰기도 흐지부지 됐다. 하긴 그래도 대략 하루에 4만 원 정도로 생활하긴 했다.
다만, 하나 생긴 게 있다면 여유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해가 지는 방향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서울의 나무 위에도 새집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게 됐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노래 가사를 음미하게 되었다.
하루를 두 번 사는 초능력이 있어야지만 여유가 생기는 건 아니다. 삶에 여유를 조금 더 가미하는 것만으로도 그전에 못 보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급할 거 뭐 있나. 천천히 가지 뭐. 내가 항상 했던 얘기를 스스로에게도 다시 한번 해본다.
다음번에는 어디를 가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