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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Dec 28. 2017

삶의 의미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레 사냥을 하고 배설을 하고 번식을 한다. 왜 사냥을 해야 하는지, 왜 번식을 해야 하는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존재에 대한 탐구, ‘왜’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자연에서 ‘왜’라는 질문의 답을 백날 팩트로서 찾으려 하면 답이 안나온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해가 어떻게 뜨는지(뜨는걸로 보이는지)는 알 수 있어도 ‘왜’ 해가 뜨는지, ‘왜’ 해가 존재하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가상의 존재와 가치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회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으며, 국가를 만들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게 ‘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책을 보면서 내가 존재함에 대한 이유를 찾았고,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내가 존재함을 찾았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피 같은 목숨도 아낌 없이 바쳐왔다. 당연하다. 존재의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 순교를 통해서라도 지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지적했듯이 이제 이런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증명되지 않는 신과 종교는 점차 사라질 것이며, 인간이 중심인 현재의 모든 이데올로기 또한 4차 산업이 진행되면서 AI의 대두와 함께 구시대의 산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유발 하라리는 그 이후 시점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가 아닌 데이터가 주체가 되는 ‘데이터이즘’이라는 신 이데올로기(혹은 종교)가 주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초월한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주장에 일견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이와 별개로 인간 자체의 존재 가치에 대한 탐험은 멈출 수 없다. 인간이 단순히 데이터를 수집하는 프로브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전기생산을 인간의 존재 이유로 정의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인간은 절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공허함은 이러한 존재 가치의 불명확함이 이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국가, 이데올로가 주력이던 시절에는 이 ‘왜’에 대한 질문이 쉬웠다. 왜 존재하냐고? 하느님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왕이 그리하라니까, 사회주의를 위해서! 하지만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현 시점에서 이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역할이 각 개인에게 주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릴때부터 정답만 교육 받았지 정답을 찾는 과정에 대한 공부, 즉 철학에 대한 교육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질문만 있지 정해진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이제는 다 다른 이데올로기를,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전 보다 선택의 폭은 매우 광범위해졌다. 세상은 어차피 살아가야 할 것, 오는데로 받아들이자, 라는 운명론도 한 방법이다.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가치를 생성해서 내 존재 이유를 남기겠어, 라는 가치우선주의도 방법이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정하고 그 사람을 통해 예전에 종교가 그랬던 것 처럼 존재 가치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모든 정답은 나 안에 있으니 나를 탐구하여 근본을 찾겠어, 라는 자아주의도 좋다. 심지어 자신을 아예 내던져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종속시키면서 그 안에서 살아갈 이유를 수동적으로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종교가 없어진 시대에, 윤리 또한 모호해질 시대에, 어떤 방법이든 누가 맞다 틀리다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저 자기한테 맞는 방법이 옳은 방법일 뿐이다.

결론은 다양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가치를 이렇게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시점이 생각보다 금방 올거라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을 봤을때, 백년 후가 아닌 십년만 지나도 이런 논의가 활성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예전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한번 과학, 수학이 아닌 철학이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올거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는 자만이 그 혼란의 시대에서 자아를 잃지 않고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자아를 유지하며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존재의 의미가 어느 영화에서처럼 ‘42’라는 단순한 정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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