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I Jul 25.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2

Mandalay, Myanmar to Bangkok, Thailand

드디어 미얀마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다. 생각해보면 15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처음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떠날 때가 되었다. 시포에서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해서 그런걸까? 아직은 떠나는 슬픔보다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다.

어제 맥주 4잔은 무리였었나 보다. 내 주량이 이거밖에 안되나? 그거 먹고 속이 안 좋고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머리가 약간 아프다. 아무래도 즐기면서 마신 게 아니라 약간 의무감으로, 억화심정으로 마셔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어제 바빠서 병원을 못 갔는데, 오늘 보니 벌레에 쏘인 상처는 그래도 진정이 될 듯 싶다. 아직은 큰 변화는 없지만 더 발전은 안되고 있고 오히려 약간 완화된 게 병원을 안 가도 자연적으로 치료가 될 것 같다.

오늘은 오랜만에 한국말을 하게 되는 날이다. 옛날 회사 선배가 이번에 회사를 퇴직하고 동남아 여행을 오게 되었는데, 오늘 방콕에서 그분을 만나기로 하였다. 이것은 뜯어먹을 기회! 뭐, 백수끼리 뜯어먹을 건 없고, 그래도 선배니 가난한 여행자로서 평소에 먹을 수 없던 것들을 이번 기회에 좀 먹어봐야겠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근데 어디로 가야 하려나. 카오산로드는 싫고 적당한 해산물 가게 좀 알아봐야겠다. 적당한 가격이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을 찾아내어 올바르게 뜯어먹는 개념찬 후배가 되어야지. 선배에게 특별히 소주도 한 병만 사서 가지고 와달라고 했는데 가지고 올런가 모르겠다. 오늘 마시려면 어제는 달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5시쯤 눈을 뜨지만 6시 반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나온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조식을 먹으러 올라오니 나 밖에 없다. 사실 7시부터 시작인데 내가 항상 그 전에 올라와서 스태프들을 기다리는 모습이 미안했는지, 오늘은 스태프들도 이 시간에 나와있다. 이거 미안한데.


진짜 아무 감흥이 없다. 왜 없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하다. 시포를 떠날 때는 그렇게 감정이 요동치길래 미얀마 떠날 때는 장난 아니겠구나 생각했는데, 전혀 없다. 비행기를 타야 알려나. 뭐 없으면 좋은 거지. 이 나이에 질질 짜고 이런 것도 한두 번이다.


앉아 있으니 몇몇의 여행자가 올라온다. 이곳에서 미얀마 여행을 이제 시작하는 듯하다. 말을 걸까 하다 그만둔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다. 생각해보니 내가 보름 전에 이곳에서 만났던 영국인 청년 스티브가 딱 나랑 비슷한 상황이다. 그가 보름 여행 하고 떠나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만났었다. 원래 이럴 때는 정보를 주고받는 게 여행자로서 하나의 마음가짐이지만... 솔직히 귀찮다, 그리고 덥다. 아니 뭐 아침부터 이리 더워. 어제는 40도까지 올라갔다더니만. 난 이 더위, 이제 떠나지요. 하지만 더 더운 캄보디아로 가지요.


밥을 다 먹고 내려가려 하는데 어제 마리안나와의 투어 중에 잠시 스쳐지나 갔던 영국인 아저씨가 올라온다. 어, 이 사람도 여기였나? 간단히 인사를 하니 합석을 하려 한다. 아, 난 오늘 떠나는 사람이에요. 어차피 난 다 먹었기에 난 오늘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여행자가 나에게 "Have a safe trip"라고 얘기를 해준다. 갑자기 발걸음이 멈춘다. 이  얘기를 계속 해주기만 했지 듣는 것은 오랜만이다. 그래, 오늘은 내가 떠나는 사람이구나.

내려오니 룸메이트들이 모두 일어나 있다. 마리오와 마리안나 이 커플만 빼고. 이 커플은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역시 내 옆에 침대에서 아직도 꼭 껴안고 자고 있다. 에잇, 남사스러운 것들. 얘네 행각을 보니 문득 얘네한테 줘야 하는 돈이 생각나서 13달러를 따로 챙겨놓는다. 이번 미얀마에서는 결국 얼마를 쓰게 된 거지? 이따 비행기를 타면 한번 정산해봐야겠다. 아 오늘 비행기도 타는구나. 떠나는 날이네.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가계부 어플은 못 쓰지만 이 실시간 여행기 덕분에 미얀마 시작할 때 922달러 예산이 있었다는 건 기록이 되어 있다.


이제 오늘 방콕에서의 숙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도를 다 출력해왔었는데 하필이면 그중 방콕 지도만 없어졌다. 쓸모 없는 치앙마이 지도는 그대로이구먼. 도미토리 침대에 앉아서 이것 저것 고민하는 동안 오늘 처음 보는 남자와 여자 여행객들이 들락날락 거린다. 하지만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 참 여행 많이 익숙해졌다.

저번에 갔었던 숙소로 갈까, 아니면 오늘 만나는 선배의 호텔 근처로 갈까. 차라리 오늘 식사하는 곳 근처로 가는 게 나으려나. 또 쓸데 없는 고민의 시작이다. 어차피 이리 고민해봤자 가면 그게 다 그건데 항상 이렇게 대비하도록  훈련받아왔고 그리 살아왔기에 버릇처럼 이렇게 된다. 그래도 오늘은 혼자가 아니니 조사는 좀 해야겠다.

문득, 2년 전에 노여사와 필리핀에 다이빙 자격증 따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노여사는 회사 일이 바쁘다고 하기에 (항상 바쁘지만...) 내가 위치 선정, 숙소 예약, 액티비티 등등 모든 예약을 다 하고 보고까지 했었다. 그때는 듣는 척 하더니 비행기 타러 가는 순간 노여사가 했던 딱 한마디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라고?"

그나저나 이 커플 진짜 안 일어난다. 모두 일어났지만 이들이 안 일어났기에 다들 속삭이고 있다. 그래도 이런 배려하는 모습은 좋다. 그러고 보니 코는 동양인들이 많이 고나? 제주도 여행 다닐 때는 그렇게들 코를 심하게 골더니 이곳에서는 단 한 명도 코 고는 사람을 목격하지 못했다. 이것도 논문 주제 감인데?

근데 에어아시아 셔틀은 언제 출발하지? 혹시 몰라서 이곳에 도착하는 날 썼던 여행기를 다시 보니 9시라고 쓰여있다. 나 진짜 모든 것을 적어놨구나. 이 여행기가 은근히 나한테도 정보를 얻기 편하게 해준다. 나중에 정보만 모아서 취합 해도 양이 꽤나 될 듯하다.

9시면 슬슬 준비를 해야 한다. 어느새 벌써 8시다. 뭔가 살짝 마음이 급해진다. 인사할 사람도 많은데. 일단 어제 한 빨래를 가지러 나가 보니 아직 덜 말랐다. 직사광선으로 옮겨 놓는다. 10분이라도 좀 더 마르렴.

짐을 싼다. 뭐 언제나 그렇듯이 쑤셔 넣는다. 빨래를 보고 오니 모두 아침을 먹으러 갔는지 방에는 나 혼자다. 8시 15분이 되고 나가 보니 아직도 빨래는 덜 말랐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입은 채로 말리기로 하고 가지고 온다. 짐을 다 싸고 가방을 든다.


항상 그래 왔듯이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뒤를 돌아본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잠을 편하게 들었던 방이다. 6명이 같이 있음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심지어 집 같은 편안함 까지 느꼈던 곳이다. 이제는 다른 집을 찾아서 떠나야겠지. 갑자기 진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오랜만에 든다. 만남과 이별, 이거 어찌 보면 참 지치는 일이다.

일단 옥상으로 다시 올라간다. 역시 마리오와 마라안나는 다른 사람들과 그새 친해져서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다. 이곳은 내 홈그라운드라는 생각 때문인지 나도 모두에게 말도 쉽게 걸고 친해지는 것도 금방이었었다. 마리오 커플과 이별인사를 나눈다. 악수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이 두 사람, 하루 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참 편했었는데 헤어지려니 아쉽다. 역시 여행에서의 하루는 일상에서의 한 달이라는 말이 맞다.

이번에는 여성 스태프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이제 진짜 떠나는거냐고 묻는다. 네, 이제 방콕으로 갔다가 캄보디아로 가요. 거긴 더 덥답니다. 그동안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나를 위해서 조금 먼저 나와서 식사 준비해준 거 너무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인사 소리를 뒤로 하고 1층으로 내려온다. 여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오늘 데이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인가 보다. 아직 8시 30분이 안됐다. 쪼우마는 엄청 바쁜 와중에도 날 보며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낸다. 여기서 오토바이 타고 5분이면 셔틀버스 정류장까지 가기에 걱정 말고 일 보라고 하고 구석에 서 있는다.


갑자기 문득 이렇게 떠나면 아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가방을 로비에 놔두고 카메라만 든체 다시 계단을 서둘러 올라간다. 1층부터 4층까지, 이제 진짜 이 계단의 마지막 오르막행이다.


옥상에 올라가서 여성 스태프 두 분한테 기념사진을 하나 같이 찍어도 되냐고 물어본다. 이런 거 이번 여행에서 한번도 한적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왠지 하고 싶어졌다. 싫어하면 어쩌지? 어디에 올릴게 아니라 내 추억을 위한 거라고 굳이 설명을 해준다. 근데 오히려 두분다 좋아들 한다.


마리오, 여기 와서 사진 좀 찍어줘. 마리오는 이런 거 시키면 매우 좋아한다. 참 밝은 아이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니 두 스태프가 내 양편으로 선다. 찰칵 소리와 함께 이곳에서의 추억을 디지털화시킨다. 이 한장으로 여기에서의 모든 추억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이 한장으로 나는 언제든 여기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여성 스태프들이 이번에는 자기들 핸드폰을 꺼내서 마리오보고 찍어달라고 한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추억이 되는 순간이다. 마리오가 또 신나게 카메라를 들고 구도를 잡을때 우리는 자리를 잡고 선다. 왼쪽의 스태프가 손을 내 허리에 얹는다. 어, 이건 내가 한 거 아니니 괜찮겠지. 나는 노여사를 생각하며 매너손으로 두손을 다소곳이 앞에 모아놓는다.

이제는 진짜 떠날 시간이다. 갑자기 두 스태프에게 한국말 하나를 가르쳐준다. "Be Happy,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를 두 분에게 따로 따로 얘기한다. 마리오와 마리안나 사진도 한 장 찍는다. 너희 내 사진 안 주면, 나도 너희 사진 안 줄 거야.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아직도 사람이 많다. 다른 남자 스태프인 마이클이 많은 사람들의 스케줄에 혼돈이 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야, 마이클이 뭐냐, 네 이름에 자부심을 가져라. 하지만 얘 하고도 그동안 많이 친해졌다.

여행자들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잠시 앉아서 오늘 이들이 떠나는 투어에 대한 내 노하우를 알려준다. Mingoon에 가거든 그 높은 구조물은 절대 올라가지 마세요, 진짜 뜨거워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배는 오전 9시까지니까 늦지 마세요. 무슨 전 여친의 대한 얘기를 현 남친한 테 해주는 거 같다.

8시 40분이 되고 이제 나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쪼우마한테도 사진 하나 같이 찍어도 되냐고 물어본다. 우리 둘이 닮아서 찍고 싶다고 하니 좋아하며 찍자고 한다. 거기 있는 여행자들 중 아무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마이클도 이제 좀 여유가 생긴 듯해서 같이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이제 떠나려니 문득 리셉션에 있는 세계 시간에 맞춘 8개의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쪼우마, 왜 서울은 없는 거야. 저 위에 큰 거 하나 달아줘. 알겠다고 하지만 어차피 안 달 거 알아. 내가 떠나 있는 2주 동안 나 말고 한국인은 딱 한 명 더 왔었단다.


쪼우마가 내 가방이 이거 하나냐고 물어본다. 응, 나 이거 하나야. 그 소리에 거기 있는 여행자들이 다 정말 그거 하나냐고 놀라워한다. 옷 두개로 하나 입고 하나 씻고 하고 생활하고 있어. 그래 나 더러워.

방금 만난 처음 보는 여행자들이 해주는 인사를 뒤로 하며 쪼우마가 건네주는 헬멧을 머리에 쓴다. 아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갑자기 실감이 팍팍 나기 시작한다. 아쉽지 않았던 게 아니라 역시 실감이 안 났나 보다.


쪼우마 뒤에 앉아서 그의 허리를 잡는다. 너 왜 이리 허리가 얇니. 좀 많이 먹으렴. 쪼우마 잘 안 들리는데도 이동하는 동안 계속 뭐라 뭐라 한다. 대략, 다음에 물 축제할 때 여자친구랑 같이 와, 이런 얘기같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과연 오게 될까. 스쿠터 위에서 쪼우마 뒤에 앉아 만달레이의 길거리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본다.


도착하니 에어아시아 셔틀이 이미 기다리고 서 있다. 내려서 쪼우마와 악수를 나눈다. 아쉽다. 아쉬운 마음에 용기를 내서 한번 슬쩍 안아보려 다가선다. 쪼우마, 그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아 이건 아니구나. 맞다 여기서는 안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어디선가 본거 같은데 오버하였다. 적당한 선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한걸음 더 나갔다. 뭔가 민망함에 서둘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탄다.

그래도 이번에는 후회 없이 제대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온 거 같다. 시포에서는 이 인사를 제대로 못해서 그리 서글펐나 보다. 여기는 그래도 충분히 정을 나누고 와서인지 아쉬움이 덜하다. 확실히 이곳은 나에게 고향이다. 시포가 살아갔던 고향이라면 만달레이, 아니 이곳 에이스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미얀마에서 태어난 고향이다.


버스에 올라타서 보니 서양인 여행자들이 수두룩하게 앉아있다. 맨 뒤에 넓은 자리로 가서 혼자 앉는다. 앉아서 도착해서 봤던 티셔츠로 만든 버스 좌석 커버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하지만 이건 약한 울림, 참을 수 있는 동요다. 생각을 돌리기 위해서 오늘 방콕에서의 숙소와 먹을 곳을 좀 찾아본다. 그러고 보니 3000키얏 주고 산 데이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어차피 이 나라를 벗어나면 못 쓸거, 버스타고 가는 길에 펑펑 써야겠다.

조금 있으니 버스가 출발하고 스태프가 에어아시아 항공권을 검사하러 온다. 다  문제없이 지나가는데 내 뒤에 있는 아이에서 문제가 생긴다. 항공권을 달라니까 안 가지고 왔단다. 영어가 굉장히 서툴다. 그럼 여권을 달라고 하니 잃어버렸단다. 뭐여? 야, 여권이 없으면 가서 대사관 가서 임시여권이라도 받아와야지, 없으면 공항은 왜 가는 거니. 국적은 호주란다. 호주 사람이 영어를 못 할 수도 있나? 얘 진짜 뭐지? 그냥 공항 근처에 일이 있어서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인걸까?

이런 순간은 기록해야지, 싶어서 키보드를 꺼내서 글을 쓰니 스태프가 엄청난 관심을 갖는다. 키보드가 얼마냐고 물어본다. 관심 있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가격을 물어보는 건 처음이다. 아마존에서 70달러면 산다고 얘기해준다. 이런 얘기를 나누니 뒤에 여행자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목을 쭉 내밀고 쳐다본다. 아 부담스러... 그냥 키보드일 뿐이라고.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안 갖는 사람들이 말이야.

스태프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아까 그 호주 총각을 전화기에 바꿔준다. 이 친구는 계속하는 말이 여권도, 항공권도 잃어버렸단다. 진짜 그럼 공항은 왜 가는 거냐. 스태프와 나랑 잠시 눈이 마주치며 서로 황당한 웃음을 나눈다. 결국 그냥 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걸로 마무리한다. 아 이거 진짜 미스터리다. 내리면 한번 슬쩍 따라가 볼까? 궁금한데.

핸드폰 배터리가 부족해서 갈아 끼운다. 글을 쓸려고 에버노트를 실행하니 SD카드가 컴퓨터에 연결되어 폰에서 읽지 못한다는 메세지가 뜬다. 여기 나한테 안 보이는 투명 컴퓨터라도 있는 거니?

재부팅해봐도 안된다. SD카드를 뽑았다 다시 꼽아봐도 역시 안된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재설치 밖에 없는데, 에버노트 너 백그라운드로 백업 얼마나 해놨냐. 3G 연결 상태였으니 백업했겠지? 난 믿는다.

재설치하니 또 이주전에 봤던 로그인에러가 뜬다. 뭐 어차피 곧 미얀마를 벗어나니까 에버노트는 포기하고 일단 다른 메모장 어플을 연다. 태국 가면 초광속 인터넷이 나를 기다린다!


똑같은 광경이 이리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14일 전에 이 길을 올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해 보였는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졌다. 이 버스의 스태프마저 저번에 봤던 친구라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중간 생뚱맞게 보이는 사원들도 이제는 직접 안 가봐도 대충 어떤지 뻔히 알겠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공항에 도착한다. 동네 버스 정류장 같이 생긴 이 공항에 보름만에 다시 돌아왔다. 12시 반 비행기니 아직 시간은 많다. 미얀마 돈이 애매하게 450키얏이 남았는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 돈으로 450원인데, 커피 한잔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돈이 너무 헤져서 기념으로 가져가기도 애매하다.


내리면서 사람들이 모두 한번씩 내 뒷자리에 미스터리 남성을 쳐다본다. 아까의 대화를 다 들었나보다. 여권도 없이 비행기 타러 공항으로 온 영어 못하는 호주 남성, 정체가 뭘까? 생긴 것도 호주 사람 같지 않다.

다들 내리더니 엄청난 배낭을 어깨에 울러 맨다. 짐이 왜 이리 많이 필요할까. 그들 사이에서 나는 7키로의 가벼운 배낭을 메고 쪼리를 질질 끌며 공항으로 향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누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이곳에 내가 알 사람이 있나?

바간의 Ostello Bella에서 내 위층에 잤고, 시포에서 오는 기차를 같이 탔던 그 여성이다. 이번 만남으로 약속 없이 3번째 보는 거다. 나는 항상 3번을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인연의 최고로 생각해왔다.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고 하니 아는 체만 하고 가방을 찾으러 사라졌다. 뻘쭘하게 잠시 서 있다가 그냥 홀로 공항으로 돌아선다. 인연은 무슨 얼어죽을.

오랜만에 복대를 꺼낸다. 한동안 복대 없이 그냥 다녔지만, 천사들의 나라 미얀마를 떠나니 이제는 소지품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 미얀마에서는 그냥 지갑도 여기 저기 던져놓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특히 캄보디아는 전형적인 관광지이니 특별히 좀 조심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공항이 무척 작음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자기 몸집 만한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한번 슬쩍 따라가 본다. 그 사람들도 모르는지 이쪽으로 가서 뭘 물어보더니 이번에는 또 반대쪽으로 간다.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헤매면서 알아보니 아직 티케팅 오픈을 안 해서 기다려야 하는걸 깨닫는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간이 좀 있으니 마지막 450키얏을 쓰러 한번 가볼까나. 앞에 슈퍼가 보이길래 콜라 가격을 한번 물어본다. 1000키얏이다. 이런 도둑놈들. 시내에서는 500키얏이니 두배인 셈이다. 그럼 450키얏으로 살 수 있는 거 아무거나 알려달라고 하니 멘토스를 보여준다. 서울에서도 안 먹는 건데, 졸지에 이곳에서 먹게 생겼다. 미얀마에서의 마지막 구매이니 450키얏의 기념사진을 찍고 멘토스를 넘겨받는다.


자리에 앉아 멘토스를 한알 꺼내 먹다가 앞에 인도 남자애가 있기에 습관적으로 한알 권해본다. 여행 다니다 보면 모두가 친구가 같고 모두가 낯선이 같다. 친구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고, 서로 떠나가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인도 남자애는 내가 권하는 멘토르를 거절한다. 싫으면 마는 거지 뭐.


앉아서 조금 기다리니 문이 열리고 티켓팅이 시작된다. 급할 거 없어서 천천히 앉아있다가 뒤쪽에 줄을 선다.

줄을 잘못 섰다. 아까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나한테 키보드 가격을 물어본 그 인도 가족의 뒤에 섰는데, 이 식구의 가방이 족히 열개는 되어 보인다. 옆에 줄이 다 빠질 때까지 이쪽은 한 칸도 안 움직인다. 옆에 칸은 계속해서 쑥쑥 줄어든다.

다른 여행자들은 모두 큰 가방 하나는 부치고 세컨드 백만 들고 기내에 탑승한다. 이거 저가항공이라 저려면 추가금을 내야 할 텐데. 내 차례가 돼서 나는 그냥 핸드캐리 하겠다고 한다. 나는 뭐, 30초면 티켓팅이 완료다.

패스포트 컨트롤도 별 이슈 없이 30초 만에 통과다. 오랜만에 온 공항이지만 모든 것이 참 익숙하다. 화장실을 찾으며 돌아다니는데 아까 그 3번 인연의 여인을 자꾸 마주치게 된다. 이 친구는 빠이로 간다고 하기에 내가 아는 여러 가지 정보를 준다. 사실 이런 살아있는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 이 친구는 핀요린에서 나와 헤어진 이후에 그새 다른 남자 일행이 생겨서 같이 다니고 있다. 왜 자꾸 일행을 만들지. 불편하지 않나.

탐승구에 들어선다. 가방 체크를 하는 사람한테 "밍글라바", 그리고 "제주디마레"라며 인사를 한다. 이게 내 마지막 미얀마어가 될까? 그래도 난 서양인들보다는 확실히 발음이 현지스러워서 얘기하면 현지인들이 굉장히 호의적으로 변한다. 아 '밍글라바' 이 단어가 앞으로 매우 그리워질 거다.


보딩 하는 곳에 앉아서 아까 산 멘토스를 하나 둘 먹다 보니 어느새 다 먹는다. 역시 과자의 힘이란. 이런 대기가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의자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이것 저것 확인한다. 서양인들은 양반다리하고 앉는 것을 잘 이해 못한다. 그게 편하냐고 항상 묻는다. 당연히 편하지. 언젠가부터 진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근데 왜 내 주위로 결계가 형성된 거 같지? 난 그냥 앉아있을 뿐인데 아무도 내 주위에 앉지 않는다.


시간이 되고 보딩이 시작된다. 올때는 우리 비행기가 유일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비행기가 두대인가 보다. 그래도 당연히 활주로는 휑하다. 보딩하는 통로도 나가는 중에 이상한 골목으로 빠지더니 정체 모를 계단으로 밑으로 내려간다. 내려가서는 2분만 걸어가면 될 듯 한데 버스가 와서 태워가기를 기다린다. 이건 안전 문제이니 어쩔 수 없을거다.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스튜어디스가 "사왓디카"라며 인사한다. '밍글라바'는 이제 끝났다. 인사가 뭔가 굉장히 어색하다. 나에게는 '사왓디캅'보다 '밍글라바'가 더 정감이 간다.

자리가 통로 자리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연속 창가 자리가 생각나며 아쉬워진다. 이번까지 창가였으면 장난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꽤나 여러 번 창가 자리를 차지했었다.



비행기가 이제 출발하려고 한다. 헌데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아 이런 식인가? 계속 창가 자리를 주기 민망했나 보지? 아예 줄 하나를 이번에는 나를 위해 비워놨나 보다. 깜찍하군. 당당하게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앉는다. 이러면 창가에 연속해서 앉은 확률이 어찌 되지? 그건 내일 캄보디아 가는 비행기에서 생각해봐야겠다.

비행기가 뜨더니 금방 미얀마를 벗어난 듯하다. 신기하게도 비행기를 타는 순간 감정이 안정되고 더 이상 아쉬움이 없게 된다. 나도 냉정한 여행자인 건가. 그리고 사실 시포를 떠날 때 이미 대부분의 감정 소모를 다 한 듯하다.


나에게 미얀마는 어떤 의미였을까? 누군가에게 미얀마를 추천해줄 수 있을까? 누가 나한테 물어본다면 이리 말할 거 같다. 유적지를 보고 싶거나 관광을 하고 싶으면 이곳에 올 필요가 없다. 바간이 좋긴 하지만 앙코르왓에 비할 바는 아닐 거며, 인레호수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 보다 좋은 곳은 아마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이들의 미소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광이 아닌 이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가서 같이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미소가 얼마나 갈까? 그렇게 여행지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던 라오스도 이번에 만난 여행자들의 말을 들으니 여행자들을 향한 바가지와 횡포가 만연해졌다고 한다. 이게 그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기 떼문에 변하는거다.

미얀마도 지금은 사람들의 그 아름다운 미소에, 그리고 밍글라바 한번에 마음이 힐링될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여행자들이 계속 찾는다면 똑같이 변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반해 찾아가지만, 그 아름다움을 갉아먹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보고자 가는 여행이 과연 맞는 것일까 싶다. 유적지나 명소를 보는 여행은 우리가 그곳에 주는 영향이 한정되어 있지만 사람을 느끼고자 하는 여행은 영향이 지대할 수 밖에 없다. 아직은 답을 모르겠다. 일단은 마음 내키는 데로 여행하면서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시간이 미얀마 시간으로 1시 반이다. 아 배고프다. 여기 기내식이 있을까? 조금 기다리니 스튜어디스들이 달구지(?)를 끌고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국제비행이니 뭐라도 줄려나보다.

주기는 개뿔. 메뉴판 사진을 들고 다니며 영업을 하고 있다. 자고로 에어아시아에 공짜란 없다. 주린 배를 좀 더 참아봐야겠다.

배고픈 것도 잊을겸 미얀마의 결산을 해본다. 현재 남은 달라가 정확하게 490달러이다. 도착했을 때 922달러가 있었으니 미얀마에서만 432달러를 쓴 셈이다. 4월 28일에 도착해서 5월 12일까지 있었으니 15일 동안 이곳에 있었다. 그럼 하루에 평균 28.8 달라를 쓴 셈이다. 숙박 이동 다 포함하여 하루에 3만 원 정도 쓴 셈이니 나쁘지 않다. 원래 하루 5만 원 예산으로 잡고 왔으니 사실 아끼며 잘 쓴 거다. 나름 할거 다한 거 같은데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군. 하지만 일정을 연장했으니 더 알뜰히 살뜰이 생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 선배한테 맛있는 것을 얻어먹겠다고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해본다. 이거 노트4를 안잊어버리고 가계부 어플로 정리했으면 꽤나 괜찮은 자료가 나왔을 텐데 아쉽다.

생각해보니 이 중국산 핸드폰 80달러를 포함해서 저리 썼다. 야, 나 꽤나 알뜰이 생활했구나. 거기에 심카드도 사서 두 번 충전시켰고 마지막 날은 은근히 과소비를 했는데도 저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이대로만 여행하면 예산 문제는 안 생기지 싶다.

어차피 내일 캄보디아에 가면 또 달러를 써야 하니 굳이 지갑에서 달러를 빼지는 않는다. 대신 미얀마 키얏이 없어진 자리에 지난번 태국에서 남겨온 965바트를 집어넣는다. 일단 이번에는 하루만 있어야 해서 많이 넣을 필요는 없다. 숙소는 지난번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로 아까 공항에서 이메일로 예약을 미리 했다. 지난번에는 380바트이엇는데 이번에는 재방문이니 350바트로 최종 합의를 봤다.

1시간 좀 넘게 가니 이제 조금 있으면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자, 시계를 다시 방콕시간으로 맞추고 내릴 준비를 하자. 이제 또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다시 찾은 돈므앙 공항은 역시나 익숙하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그냥 내 갈길만 스윽 스윽 지나간다. 내려서 출국 수속까지 15분 만에 완료한다.


미얀마에서 심카드를 썼더니 은근 편했기에 이번에는 태국에서도 한번 써볼까 싶다. 역시 사람은 한번 편해지면 다시 못 돌아가는 법이다. 사실 이 핸드폰이 너무 성능이 안 좋아서 데이터 통신을 켠다고 해도 인터넷은 제약적이다. 어차피 단절이 어느정도는 유지된다.

헌데 항상 있던 공짜로 심을 주는 곳이 이번에는 안 보인다. 저번에는 그냥 스윽 지나가도 보이더니 어찌 된 거지. 개똥도 찾으려면 없다더니만 얘도 찾으니 없다. 그냥 쓰지 말라는 얘긴가? 에잇, 안 써.


반복학습 만큼 좋은 학습법도 없다. 이곳에 몇 차례 왔더니 이번에는 모든 것이 손쉽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서 모칫역으로 가는 A1버스를 기다린다. 탑승 후 30바트를 교통비로 낸다. 모칫역에 내려서는 첫 번째 지하철을 지나서 BTS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창구처럼 생긴 곳에서 잔돈을 바꾼다. 그 잔돈으로 자판기에서 라타체윗까지 가는 표를 산다. 기차를 탄다. 일사천리다.



기차를 타니 문명으로 돌아왔음을 바로 느낀다. 미얀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문명이 바로 느껴진다. 태국은 확실히 동남아의 선진국이다.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게 서울하고 흡사하다. 그 가운데 거지 같은 내가 서 있으니 정말 모두가 쳐다보는 느낌이다.

숙소에 도착할때까지 지도 한번 안 꺼낸다. 랏타체위역도 너무 익숙해서 태국에 온 게 아니라 마치 서울에 돌아온 느낌마저 든다. 3시까지 저녁을 못 먹어서 일단 끼니를 간단히 때워야겠다는 생각에 숙소 앞에 있는 저번에 두 번이나 갔었던 몽키 뭐시기 식당으로 향해본다. 숙소는 예약도 되어 있으니 굳이 체크인하러 들어갔다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식당이 뭔가 분주하다. 일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어쩌지 하고 보고 있으니 한 스태프가 5분만 기다리란다. 청소하려면 좀 걸릴 거 같은데. 앉아있는데 다른 스태프가 한분 또 오더니 뭘 기다리냐고 해서 나도 모르게 "나는 팟타이를 기다려"라고 한다. 주문도 안 했는데 뭔 팟타이를 기다려. 여하튼 그 남자가 자기들 6시에 문 연다고 기다리지 말란다. 아까 그 아줌마 뭐여.

일단 숙소로 간다. 익숙하게 들어와서 여기 매니저인 핌에게 인사를 한다. 하루에 수십 명씩 지나갈 텐데 그래도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 역시 인상이 강하게 머리 자르기 잘했다. 앞에 한 명이 먼저 수속 중이라 기다리면서 배고픈 김에 여기저기 뒤져서 질끔찔끔 군것질을 한다. 냉장고에서 콩우유도 하나 빼서 마시고 20바트를 지불한다.

핌한테 오늘 저녁에 선배와 갈만한 곳을 한번 물어본다. 현지 느낌이 나지만 너무 추리하지 않은 곳으로, 싸지 않지만 너무 비싸지도 않은 곳으로, 너무 모던하지는 않으면서도 깔끔한 곳으로, 나 이런 곳 추천 좀 해줘. 게스트하우스 스태프의 일은 참으로 힘들다. 그래도 몇 군데 추천받는다. 일단 방금 내가 갔었던 이 앞에 몽키 뭐시기를 얘기하는데 나쁘진 않지만 왠지 형님을 모시고 가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또 하나는 현지인들은 조금 비싸서 못 간다는 쏨분인데 검색해보니 지점이 무려 8개다. 한국인들도 많이 가는 듯하다. 나 혼자라면 왠지 비싸서 못 가겠지만 오늘은 얻어먹는 날이니 괜찮을 듯 싶다.

체크인을 끝냈지만 방으로 안 올라가고 로비의 테이블에 앉는다. 여기 도미토리는 Ace Star처럼 쉬는 곳이 아니라 딱 잠만 자는 느낌이라 들어가서 쉬고 있기가 조금 애매하다. 차라리 로비가 이것 저것 하기 편하다.

오랜만에 체험하는 태국의 인터넷 속도에 감탄한다. 집에 있는 NAS에 연결이 된다! 사진이 백업이 된다! 오늘 사진도 올릴 수 있겠다! 처음 왔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미얀마를 갔다 왔더니 이 놀라운 속도에 입이 떡 벌어진다.

오늘 만날 형님과 카톡으로 약속을 잡아본다. 옵션을 얘기해드리니 쏨분 씨암스퀘어 지점으로 정하신다. 나도 가까워서 좋다. 앉아서 사진을 백업하고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글도 쓰고 그냥 잡다구리한 일들을 한다. 점심을 못 먹었더니 배고프다.


다행히 재설치했던 에버노트의 글들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역시 에버노트, 배신하지 않는다. 앉아있는데 계속해서 여행자들이 큰 가방을 짊어지고 들어온다. 핌은 다 안면이 있어 보인다. 재방문이 많은 게스트하우스는 보통 시설도 좋아야 하지만 스태프가 좋아야 한다.

한 명이 빨래를 맡긴다. 여기 빨래는 7키로까지인 걸로 기억한다. 내 가방이 7키로다. 여하튼 빨래를 맡기면서 뜨거운 물로 하지 말고 탈수는 40도를 넘기지 말고, 뭐 이리 까다로운 조건들을 계속해서 붙인다. 그런 예민한 옷을 도대체 여행에 왜 입고 온걸까. 난 그냥 찢어지면 버리면 되는 옷들이다.

6시 반 약속인데 핌이 씨암스퀘어까지 10분이면 간다고 해서 6시에 출발한다. 나는 여행자니까 약간의 페널티를 안고 가야지. 근데 구글 지도에 나오는 길과 핌에게 안내받은 길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

기계보다는 사람을 믿어야지. 아니면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내가 잘못 읽는 것일 가능성도 크다. 결국 핌을 믿고 알려준 길로 따르기로 한다. 막상 떠나기 전에 잠시 블로그 검색을 해보니 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거 여유 부리다가 한국에서 온 형님보다 늦게 도착하겠다. 갑자기 서둘러 걸음을 제촉한다.


핌이 알려준 길을 걸어간다. 이 길 맞겠지? 라차테윗과 씨암센터가 근거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향이 문제다. 일단 핌을 믿고 가본다. 사실 그다지 믿지 못해서 가는 중간에 경찰이 보일 때마다 물어본다. 네다섯 명에게 물어도 한결같이 맞다고 하는 거 보면 맞는 거 같다. 경찰이 거짓말하지는 않겠지.

급하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모든 행인들을 멈춰세운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다. 잠시 후에 고급차들이 줄을 서서 가는 것이 어떤 왕족이 행차하셨나보다. 가끔 이런 광경을 목격할때마다 태국에는 왕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느끼고는 한다.

조금 걸어가니 씨암센터가 나온다. 근데 내 목적지는 씨암센터원이었던 거 같다.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씨암센터원?"하며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한 곳을 가리킨다. 지금은 옵션이 없다. 사람들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해본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들도 미심적은 표정을 지으니 걸어가면서 나도 불안해진다. 혹시 몰라서 다시 블로그를 본다. 물론 인터넷이 안되지만 가끔 캐쉬에 들어가서 내용이 나올 때가 있다. 조마조마하며 열어보니 사진은 안 나오지만 내용은 나온다. 씨암센터원도 아니고 씨암스퀘어원이었다. 뭐야 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은.

다시 이 이름으로 물어보니 사람들이 잘 알려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6시 25분이다. 형님은 이미 도착했겠지? 아 이게 뭔 매너 없는 짓이냐. 졸지에 개념 없는 후배가 되어버렸다.


뛰듯이 길을 찾아 간다. 무슨 길이 핀요린에서 잤던 그 숙소보다도 미로 같다. 돌아 돌아 가니 멀리서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쏨분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앞에 형님이 앉아있다. 아니 들어가 계시지 왜 굳이 밖에....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린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잘 받아주신다. 그리고 둘이 드디어 그 유명한 곳에 입성한다. 어디 얼마나 맛있는지 보겠어.

원래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니 신기하게 여행지에서 벗어난 느낌이 든다. 주변에 한국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도 한몫한다. 여기가 태국이여 한국이여. 이곳 음식이 한국인들 입맛에 맞나? 미얀마에서 그리 보기 힘들던 한국인들이 이곳에서는 이리도 수두룩하니 신기하다기보다 갑자기 불편해진다.

일단 모두가 주문한다는 게살볶음과 새우찜을 시킨다. 그리고 맥주 하나를 시킨다. 그때 형님이 왠 물병을 꺼내며 선물이라고 건네주신다.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안동소주를 들고 다니기 쉬우라고 물병에 옮겨 담아오셨단다. 아니 그냥 소주 한 병 사다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안동소주라니...


일단 오늘의 첫끼이기에 음식과 맥주를 정신없이 흡입한다. 흠, 맛있긴 한데 약간 느끼하다. 한국인들이 전부 좋아하는 맛이라기보다는 한국인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렇다고 나쁘지는 않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먹다 보니 시킨 음식을 다 먹어버렸다.

이제 그만 먹을까 싶었는데, 형님이 또 주문을 하신다. 내가 워낙 불쌍해 보였나? 또 다시 두 가지 요리를 주문한다. 배낭 여행 중인 나에게 이것 저것 먹이고 싶어하시는것 같다. 여기 비싸 보이던데 괜찮을까.


양이 많을 거 같더니 옛날 회사에 대한 얘기도 하며 먹고 마시다 보니 어느새 다 먹는다. 참 사람의 배는 놀랍다. 아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못 먹겠다.

배가 터지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형님이 먼저 일어나자고 한다. 물주가 일어나자면 일어나는 거지. 후딱 짐을 싸가지고 나온다. 계산하실 때 옆에서 슬쩍 보니 대략 7만 원 정도가 나왔다. 헐, 내 이틀 생활비다. 이거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거겠지? 그래도 이 나이에 후배로서 얻어 먹을 수 있는 행운이라 여기기로 한다.

8시 50분이다. 내일을 위해 그만 들어가볼까 하는데 한잔 더하자고 하신다. 뭐 나쁘지 않다. 아침 9시 50분 비행기면, 원래 일어나는 시간 생각하면 충분히 여유가 있다. 이차는 내가 사야겠다는 생각을 머리에 담은 채 1차는 거한데 갔으니 2차는 좀 편한, 로컬 한 곳으로 가자고 내가 먼저 제의한다.

이차 장소를 찾아가는데, 갑자기 형님이 아까 소주 챙겼냐고 물어보신다. 아! 소주! 갑자기 나오느라 아무 생각 없이 놔두고 나왔다! 안동소주를 놔두고 나오다니... 물병에 담았기에 이미 버렸을 듯 하지만 그래도 그 비싼 안동소주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다시 급하게 돌아가 본다. 돌아가자마자 정신없이 물어보니 역시 이미 버렸단다. 그 한 병에 3만 원 정도라던데... 돈도 돈이지만 나를 위해서 서울에서부터 챙겨오신 건데 너무나도 미안하다. 아 받자마자 가방에 넣었어야 했다. 얘도 내 물건이 아니었던 건가.


그래도 2차는 가야지. 죄송스러운 마음을 안고 더운 날씨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탐험이 시작된다. 씨암센터는 내가 생각했던 태국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번화한 명동을 연상시킨다. 특히 돌아 다닐 때 보이는 자주 한국 간판들이 인상적이다. '설빙'의 아류작인 듯한 '서빙구'도 보이고, 그 이외에도 각장 한글로 된 간판들이 계속해서 눈에 띈다.

아까 식당에서도 한국인이 많더니 이 동네는 한국인한테 유명한가 보다. 이주 동안 우리나라 사람을 못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많이 마주치게 되니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역시 태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결국 이곳에서는 뭔가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서 내가 차라리 내가 머무는 숙소 방향으로 가자고 제의한다. 어차피 한정거장 차이라 그리 거리가 멀지 않다. 그리고 그쪽에는 길거리 식당들이 꽤 많았었다.

내가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으니 형님이 스마트폰을 열고 금방 방향을 찾아준다. 이래서 문명의 이기는 좋은 거다. 덕분에 길은 쉽게 찾지만 걸어가는 건 다른 문제다. 나는 미얀마에서 왔더니 여기 더위가 그다지 심하지 않게 느껴지지만 서울에서 온 사람은 다르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따라오신다. 괜찮으시겠지?


저번에 갔었던 수상버스 승강장에서 고양이랑 잠시 놀아주다가 근처에서 그냥 자리를 잡는다. 맥주 한 병을 시킨다. 여기도 안주를 안 시키니 종업원이 슬쩍 눈치를 준다. 앞 뒤 현지인은 다 안 시켰구먼 왜 우리한테만 이러냐. 외국인은 돈이 많다는 것도 편견인데. 그래도 예의상 목살 구이를 하나 주문한다.



잠시 앉아서 맥주 한잔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형님이 땀을 더 심하게 흘리신다. 여기 정도면 시원한 듯 한데, 긴팔을 입고 오신 것도 영향이 있는 거 같다. 결국 한 30분 먹고 자리를 파한다. 여기는 내가 계산한다. 난 매너남이니까. 단돈 130바트. 7만 원을 얻어먹고 4천 원으로 갚는다. 나중에 서울 가면 한잔 사야 할려나.

형님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오니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로비에 많이 앉아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구석에 앉아 맥주 한잔을 더 마시며 하루 정리를 잠시 한다. 사람들과 얘기도 조금 나눈다. 그러다가 내일 오전 일찍 일어나야 하는 몸인지라 침대로 향한다.


미얀마에서 벗어나는 순간 바로 이렇게 문명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뭔가 당황스럽다. 게다가 오늘은 발전된 태국에서도 더 번화한 시암스퀘어를 갔더니 그 극과 극의 체험이 더 크게 느껴진 하루다. 미얀마를 떠난지 하루도 안 지났건만 내 몸은 벌써 문명에 적응해버렸다. 아까 낮에 이곳에 앉아서 인터넷 할 때 감동스럽던 속도도 어느새 적응되었고, 게스트하우스의 화려한 시설들도 그새 적응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길을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밍글라바"를 외치고 싶은 것을 보니, 사람들에 대한 적응은 아직 남은 거 같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추억이 된 그곳이 이 순간에도 문득 문득 그리워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