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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28.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5

@ Siem Reap, Cambodia (Orphanage)

어제 같은 도미토리 룸메이트 중 동남아 여성이라고 추측했던 분은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 분 또한 내가 한국인이라고는 생각 못하셨단다. 뭐 그런 슬픈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밤 늦게까지 안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안 보고 각자 침대에 앉은 채로 그 한국 여성분과 얘기를 그래도 꽤나 나누었다. 쓰다 보니 무슨 로맨틱한 상황 같지만 일찌감치 노여사의 존재를 밝히고 여행자로서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정말로! 이분은 캄보디아만 9번째 온 동남아 쪽 여행 전문가(?)라서 여러 가지 비하인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공식적인 정보는 아니기에 공개는 못한다. 그리고 한국인 사회는 워낙 좁기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그 분 얘기는 여기까지만.

저녁 10시가 되니 졸려 죽겠는데 도미토리 롬메이트들이 다들 안들어왔다. 나중에 그들이 들어오면 깨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한번 잠든 뒤에 죽은 듯이 푹 잤다. 새벽 3시쯤에 한 명이 코를 심하게 고는 소리에 잠시 깨긴 했다. 하지만 아 고나 보다, 하며 또 다시 죽은 듯이 잤다. 여행 와서 불면증은 완전히 치료되었다. 피곤한 데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이곳 도미토리의 가장 나쁜 점은 화장실이 방 안에 있다는 거다. 이게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만 다녀보면 도미토리 화장실은 밖에 있는 게 진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룸메이트들에게 "쪼르르르", "뿌지직", "풍덩" 등의 몸이 전하는 자연의 소리를 전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물론 예외이다.

워낙 일찍 잠들다 보니 4시에 일단 기상한다. 그 이후 침대에서 잠들다 말다 비몽사몽이다가 6시에 완전히 잠이 깬다. 잠은 깼지만 뭔가 애매하다. 올라갈 루프탑 조식도 없고, 일출을 보러 갈 곳도 없다. 캄보디아에서 4일이면 그래도 꽤나 머무는 건데 너무 계획을 잡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첫날 탐험을 좀 더 했다면 이곳에 대해 더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7시 반이 돼서 몸이 찌뿌둥 해서 더 이상 못 누워있고 일어난다. 아침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나오면서 화장실을 들려서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이 뻗쳐있다. 오, 드디어 머리가 좀 자라는 건가? 근데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여행 다닐 때는 짧은 머리가 확실히 편하다. 그렇다고 한번 더 밀면 노여사가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리셉션으로 가니 드디어 첫날 나를 처음 맞이했던 그 여성 스태프가 있다. 이 친구를 기다렸다. 하루 4달러로 합의 봤는데 다른 사람이랑 다시 네고하기도 애매해서 숙비를 지불 안 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다른 얘기하기 전에 후딱 숙박료부터 4달러 기준으로 지불해버린다. 어제 계속 있던 남자 스태프인 '녹'하고는 많이 친해져서 이런 저런 농담을 한다. 전에 맡겨놨던 내 빨래가 되었다길래 아침 먹고 받으러 온다고 한다. 속옷 빨래를 부탁하다니....


오늘 아침식사로는 이쪽 길을 지나가면서 몇 번이나 봤던 현지인들이 가득하던 숙소 앞 식당으로 점 찍어놨다. 하지만 들리니 이미 만석이다. 엄청 바빠하는 사장님한테 슬쩍 자리가 있나 여쭤보니 역시 없단다. 그래, 여긴 다음 기회로 넘기자. 이 동네를 떠나기 전에 꼭 올 식당으로 체크해둔다.


주변을 잘 모르니 갈 수 있는 곳이 그다지 없다. 햇볕도 엄청 강해서 그늘로 피하며 걸어 오다 보니 어제의 그 Pub Street로 다시 와버렸다. 여기는 관광객 상대라 비싼데... 캄보디아에서는 나도 관광객이 되는 건가. 숙비를 좀 저렴하게 썻더니 다른 가격이 조금씩 비싸도 무감해지고 있다. 이거 정산이 무섭다.


이른 아침의 Pub Street는 지난 저녁과 달리 고요하다. 그 많던 길거리 가판대들도 사라졌고, 레스토랑들은 아직 오픈을 안 한 곳이 대부분이다. 한 식당에서 오픈 준비하느라 분주히 바쁜 스태프에게 다가가 메뉴를 한번 물어본다. 조식이 커피까지 하면 대략 4달러다. 아 뭐 이리 비싸냐. 조식 포함 숙박을 생각하면 결국 8달러다. 이래서 조식이 포함된 숙소를 무조건 가야 하는 거였는데, 별 수 없었지 뭐. 몇 군데 물어보니 가격이 얼추 비슷하길래 그나마 4달러 세트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여기 좋은 점은 와이파이가 어디든 터진다는 거다. 접속하는 형태를 보니 한 곳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한다기 보다는 전체 거리를 통으로 하나의 와이파이가 있다. 그 증거로 어제 저녁 먹은 곳과 와이파이 접속 아이디 및 패스워드가 동일하다. 아무래도 관광지라 개발이 잘된 곳이라 그런지 다르다. 

비싼 4달러짜리 식사라고 해서 보통 조식이 포함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애들과 크게 다를 거 같지는 않다. 메뉴가 바게트, 과일, 주스, 커피로 계란도 없어서 큰 기대 없이 기다려본다. 기다리면서 노여사한테 보고 싶다고 오늘 예쁘게 나온 사진 있으면 하나 보내 달라고 했더니 오늘 바쁘다고 꺼지란다. 그래 조용히 꺼져줄게... 앉은 김에 오늘 고아원을 같이 가기로 한 그분과도 카톡으로 연락을 한다. 이거 만약 파토 나면 다른 일정을 잡아야 하니 약속을 확실히 해야 한다.



기다리던 조식이 나온다. 그래도 4달러라 다르다. 의외로 숙소 기본 조식하고는 퀄리티의 차이를 꽤나 보인다. 반으로 잘라진 따끈따끈한 커다란 바게트와 용과, 파파야 등이 포함된 과일이 꽤나 푸짐해 보인다. 그래 봤자 빵과 과일이지만 일단 먹음직스러워 보이면 반은 성공이다. 커다란 바게트의 한쪽에는 버터를 바르고 다른 한쪽에는 딸기잼을 바른 후 합체시켜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입 베어 먹는다. 나쁘지 않군.

다시 한번 게걸스럽게 크게 입을 벌린다. "앙~, 윽!" 너무 크게 벌렸나. 왼쪽 목 근육이 삐끗하더니 담이 걸린다. 가끔 담이 걸려봐서 알지만 이러면 이삼일 고생하는데, 큰일이다. 아니 바게트 먹다가 담이 뭔 말이다냐. 일단 지금은 그래도 많이 심한 건 아닌 거 같아서 이리 저리 몸을 풀어준다. 아 진짜 운동부족이야, 운동부족.

앉아서 오랜만에 댓글에 답변도 달고 놀다 보니 몸에 살짝 땀이 어리는 게 느껴진다. 시간을 보니 9시도 안됐다. 벌써부터 이리 더워지기 시작하면 어쩌라는 거냐. 이미 새벽부터 무섭게 거리를 달구던 햇볕은 그새 더 화가 난 듯 열기가 심해지고 있다. 어제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옮기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숙소로 돌아오니 남자 스태프인 '녹'이 빨래를 건네준다. 건네주는걸 보니 투명 봉투에 내 빤스가 맨 위에 올라가 있다. 지긋이 녹을 쳐다본다. 너 일부러 이런 거지. 아 민망하구먼. 계산하기 전에 속옷이 안보이게 살폿이 뒤집어놓는다.

방으로 올라오니 해가 중천인데 여기만 한밤중이다. 창문이 없어서 불을 꺼놓으면 완전 깜깜하다. 보아하니 한 명이 아직 자고 있다. 도미토리에서는 단 한 명이라도 자고 있으면 불을 키기 좀 애매하다. 어제 늦게 들어오더니 좀 달리셨나 보구먼.

아 신호가 오는데 애매하다. 야외에 화장실이 하나 있긴 한데, 가보니 물 내리는 게 고장 났다. 급해지니 어쩔 수 없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가서 임시로 고쳐버린다. 아침에 스태프에게 얘기했는데 무시하는 거 보니 그냥 4 달러면 그 정도에 만족하라는 눈빛 같았다. 그래도 스태프들이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에어컨도 잘 나오고, 침대도 은근히 아늑해서 오늘 하루 더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서 마지막 한 명이 드디어 일어나서 모두가 일어난듯하여 물어보고 불을 킨다. 슬쩍 보니 한국인 여성분이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 사진 백업 한번 해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슬쩍 물어본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신다. 가끔 이럴 때 보면 확실히 한국인이 편하긴 하다. 하지만 그 한국인 여성분 때문에 방안 화장실을 못 가겠다. 동포끼리 나누는 고마움과 민망함.

카메라의 SD카드와 한국에서 가져온 32기가 SD 카드, 그리고 USB를 가지고 온다. 백업은 최소 두 군데는 있어야 안전하다는 지론이다. 근데 USB 메모리를 꼽고 확인해보니 메모리가 3기가이다. 아무거나 대충 들고 왔더니 하필이면 쟤를 가지고 왔다냐. 용량이 너무 적은 USB는 포기하고 SD카드에 옮긴다.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나 걸린다. 컴퓨터로 옮겨서 다시 새로 옮겨야 하는데 대략 한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 무슨 민폐냐.

그래도 이해해주셔서 강행한다. 아침에 고아원건으로 연락드렸더니 12시까지 오라고 하셨는데 11시가 다 돼간다. 이거 백업 그때까지 완료될까? 중간에 에러 메시지도 몇 번 뜨지만 여성 룸메이트분이 알아서 귀찮은 일도 다 처리해주신다. 이따 저녁이라도 한번 사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 끼리니 이런 도움도 받는다.

다행히 11시 반쯤 돼서 백업이 끝났다. 그래도 백업을  하나해두니 마음이 다소 편해진다. 물론 하나의 백업만으로는 만족 못한다. 500장 정도는 나스에 올려두긴 했는데 나머지도 조금씩 올려야 한다. 내 가방 안에 백업 하나, 그리고 도난 등을 대비한 Disaster Recovery로 나스 혹은 클라우드 서비스에 백업까지 완료되면 그때서야 비로서 안전하다 할 수 있는 거다.


인도 여행 다닐 때 노여사가 나를 만나기 전에 찍었던 한 달간의 사진을 모두 분실했었다. 나와 있을 때 내 MP3 플레이어에 사진을 혹시 몰라 백업으로 담아놨는데 난 그것을 도둑 맞았고, 노여사의 카메라도 여행 중 잊어버렸다. 결국 그래서 날 만나기 전의 사진과 그 이후의 사진도 그녀의 사진기로 찍은 건 단 하나도 없다. 난 당시 아날로그 콘셉트로 구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달랑 하나 들고 다니던 때라서 역시 사진이 그다지 없다. 대신 같이 다니던 남동생이 어마어마하게 큰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다녔었던지라 그 동생이 우리를 떠나던 순간까지의 사진만 어마어마게 고퀄리티로 존재한다.

11시 40분이 되어서 나갈 준비를 한다. Freedom Hotel에서 보기로 했는데, 대충 지도를 보니 한 10분 정도 가면 될 듯하다. 이곳은 기사들이 워낙 많으니 어찌 갈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던 데로 역시 나가자마자 오토바이와 뚝뚝 기사들이 달려든다. 어제 50달러를 1달러 짜리로 바꿔놨는데 남은 게 간당 간당하다. 1달러짜리는 환전할 때 불이익이 있기에 이것만 쓰고 더 이상 교환은 안 하는 게 좋다. 고로, 뚝뚝은 무시하고 오토바이 택시만 물어본다.

지도를 보여주니 2달러를 달라고 한다. 야, 공항까지가 2달러잖아. 그건 너무 많아. 1달러로 가자.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1달러로 합의 본다.


뒤에 올라타고 출발하는 순간 살인적인 햇볕이 온몸에 전달된다. 40도가 넘는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런 것 같다. 모래 먼지와 차들의 매연을 뚫고 나는 오늘도 달린다. 오늘은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근데 이 기사분 위치를 잘 모르는 거 같다. 큰 호텔이니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 같은데 묻지도 않는다. 자꾸 해메는 듯해서 그냥 사람들에게 묻자고 내가 제의를 한다. 한번 물어보고 감을 잡은 듯, 밝은 표정으로 운전한다.

어렵게 도착한 프리덤 호텔은 진짜 '호텔'이다. 약간의 위화감이 있긴 하지만 내가 아무리 거지처럼 보여도 여행객이니 거리낌 없이 들어가본다. 이런데서는 당당해야 한다. 여기 사람 만나러 왔다고 얘기를 하고 와이파이 비번을 받은 후 푹신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숙이 꽂아 넣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내 몸의 더위가 밀려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잠시 앉아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딱 보기에 한국인 같은 분이 들어온다. 저분인가? 내가 내 자신을 반삭의 거지처럼 보이는 수염 난 한국인이라 묘사을 잘 해서인지, 그 분이 날 먼저 알아보시고 내쪽으로 오신다.

만나서 제대로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이 일단 오토바이로 날 이끄신다. 뒤에 올라타니 바로 출발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 5분 달려서 어떤 카페 같이 생긴 곳에 도착한다. 이제 드디어 자리에 앉아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이분의 첫인상이 나보다는 연세가 좀 있어 보이고, 약간 무뚝뚝해 보이며 남성적이신듯 해서 오늘 하루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된다. 그리고 왠지 이런 봉사활동에 안 어울리실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분위기로 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너무 더운 시기라 고아원의 애들이 자고 있다면서 일단 식사부터 하자고 하신다. 이곳은 카페 겸 식당인 듯 하다. 주위를 좀 둘러보니 여기저기 한글이 보이는 것이 고아원을 후원하는 이분과 그 친구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추정된다.

일하시는 분들도 한국말을 조금 하신다. 물어보니 이 근처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새들이다. 여기서 일하면 돈도 벌면서 한국말도 연습할 기회가 많이 생겨서 상부상조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만 사용하는 카페에서 일하는 거와 같으려나. 언어는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무조건 입으로 배워야 한다.

근데 이곳은 어떻게 운영이 되는 걸까? 봉사단체나 비영리단체를 보면 솔직히 조금 의심하며 지켜보게 된다. 후원을 통해서이건, 멤버들의 기부를 통해서이건, 아니면 다른 방식이건 간에 어쨌든 일정한 수익이 있고 그걸로 해당 단체가 운영이 되는 거 같으면 깔끔하게 문제가 없다. 하지만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으면 좀 의심을 해봐야 한다. 좋은 목적을 앞에 내세우면 사기가 쉬워진다. 일단 의심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동남아 쪽에 그런 의심스러운 단체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많어서 더 유심히 지켜본다. 여기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잠시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점심이 나온다. 점심이 무려 한국식 카레와 김치, 그리고 무말랭이이다. 거의 한 달만에 접하는 한국음식에 눈이 뒤집힌다. 김치는 이곳에서 만들었는지 색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맛은 꽤나 원조를 닮아있다. 일단 먹고 보자. 앞으로 또 다시 다음 한 달간 못 먹을지도 모르는 한국음식이다.

두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 나는 이국적인 음식을 매우 잘 먹고 또 즐기는 편이지만 그래도 한번씩 이렇게 한국음식을 먹어야 만족스러운 거 보면 확실히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아직 출발할 시간이 남은지라 얘기를 더 나눈다. 대충 들어보니 6분 정도가 이 모임의 일원이고, 한분씩 시간 나는 데로 여기 와서 고아원에 봉사도 하고 이 식당 관리도 하고 그러는 듯하다. 이분은 8번째인가 이곳에 오셨다는데 이번에는 3달 정도 있으실 예정이시란다. 

오늘은 그냥 먹을 것만 좀 사들고 가서 놀아주면 된다고 하신다. 어제도 한분이 오셨는데 지체장애가 있으셔서 휠체어를 타고 오셨단다. 휠체어를 타고 동남아 자유여행 중이시라는 소리에 보지도 못한 분께 존경심이 확 올라온다. 신체의 장애는 그냥 좀 불편한  것뿐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유 여행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정말 대단하신 분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아원 봉사는 아무래도 무리일 거 같아서 안타깝지만 맥주 한잔 하고 돌려보내셨단다.

여행 중에 봉사하러 오는 사람이 그래도 꽤나 있나 보다. 태사랑에도 꾸준히 내용이 올라오는 거 같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진작 누군가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계를 좀 풀어볼까.

2시쯤 돼서 출발한다. 그분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또 다시 먼지를 뒤집어쓰며 어딘가로 향한다. 가는 길에 일단 슈퍼에 들려서 6달러치의 과자와 얼음을 산다. 또 한 군데 들려서는 8달러로 콜라 한 박스를 산다. 이건 내가 전부 지불한다. 아마, 봉사 오는 사람들이 이 정도의 기부를 하는 건가 보다. 밥도 얻어먹은데다, 봉사를 가는 거니 이 정도는 당연히 낼 의향이 있지만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 싶다. 이런 건 처음에 확실하게 얘기하고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짐을 오토바이 앞과 뒤에 꾸역꾸역 싣고 10분 정도 더 가니 고아원에 도착한다. 캄보디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약간은 허물어져가는 듯한 건물에, 관리가 잘 안되는지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바닥에 보인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항상 오른손에 들고 다니는 카메라를 일단 가방에 집어넣는다. 여기서는 사진은 찍을 일이 없을 거다. 오토바이 소리가 나자 방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은 아이들이 부시시한 모습으로 눈을 비비며 걸어나온다. 오른쪽은 남자애들 방이고 왼쪽은 여자애들 방이다.

일단 그 분이 얼음과 콜라, 그리고 과자를 테이블에 세팅한다. 컵을 가져오라고 몇몇 애들한테 시키니, 가지각색의 컵을 어디선가 들고 나온다. 제대로 된 컵도 있는 반면에 페트병을 잘라서 쓰는 임시적인 컵도 보인다. 아이들이 이런게 익숙한듯 캄보디아식으로 손으로 얼음을 집아서 컵에 담고 각자 콜라 하나와 과자 하나씩을 가지고 각자 자리를 잡고 먹기 시작한다.

확실히 남자애들은 금방 나와서 적응하는데 반해, 여자애들은 좀 수줍어하며 방에 있는다. 나도 뭐 딱히 할게 없어서 그냥 자리에 앉아서 애들하고 미소를 주고받는다. 애들 옷차림이 딱히 깔끔하진 않지만 나도 그에 못지 않기에 뭔가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근데 진짜 뭐하며 놀지?

그 분은 이미 여러 번 왔는지 애들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놀아준다. 이게 딱히 무슨 놀이가 있는 게 아니라 복싱 흉내도 내고 그냥 들어서 이리저리 흔들고 하는 일종의 막놀음이다. 나도 그냥 자연스럽게 앉아있지만 무슨 게임 같은 거라도 준비해왔음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과 고아원을 돌아보며 그분의 멤버들이 여기에 기여한 시설 등을 구경한다. 이 고아원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독일인들도 후원을 하고 있다. 보아하니 돈으로 후원을 하기보다는 시설을 하나둘씩 같이 만들어나가는 거 같다. 사실 이런 방식의 후원이 뒷말이 없고 깔끔하다. 뒤편에는 강의를 위하여 캄보디아 전통식으로 만든 교실도 있다.

돌아오니 여자애들도 하나씩 나와서 먹고 있다. 그래도 내가 사온 걸 맛있게 먹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그 분이 설명하시길 가르쳐보면 여자애들 중에서 '소피아'라는 아이가 가장 똑똑하다고 한다. 소피아의 공책을 보여주는데 영어로 구구단을 예쁘게 작성해놓은 게 전형적인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의 손놀림이다.

여기 아이들은 한국어 조금, 영어 조금, 이런 식으로 조금씩 알아서 어느 한 언어로도 대화가 쉽지는 않다. 항상 그렇듯 바디랭귀지로 통해야 하는데 난 이게 은근히 약하다. 그 분은 애들하고 한글, 영어를 섞어가며 여러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오히려 좀 어색하게 놀아준다. 그래도 애들이 밝아서 뭐 하는 거 없어도 참 재미있게 잘 논다.

사온 콜라와 과자를 하나씩 주고도 꽤 남았다. 하나 더 먹을법도한데 배운 게 있는지 딱 자기 몫만 먹는다. 하지만 보아하니 모두가 더 먹고 싶어하는 눈치이다. 그 분이 갑자기 나보고 강의실에서 애들에게 퀴즈를 내고 맞히는 애들한테 남은 음식을 선물하자고 한다.

애들을 모두 불러서 교실로 데려간다. 아, 이렇게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앞에서 강의하는 건 오히려 편하다. 이건 내 영역이지. 근데 뭘 가르치고, 무슨 문제를 내지? 일단 수학을 해볼까?

그 분이 사진 찍게 카메라를 달라고 한다. 에이 무슨 사진이냐며 괜찮다고 하니 본인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내주시겠단다. 굳이 필요 없는데...


애들이 어디까지 아는지 수준을 먼저 보려고 일단 상품과 상관없이 간단한 문제를 내본다. 몇 가지 질문을 해본 결과, 구구단은 알고 있고, 10 이상의 숫자에 대한 곱셈은 할 줄 모르고, 사칙연산의 순서는 모르지만 3 숫자 이상의 곱셈은 또 할 줄 아는듯한다. 당연히 1차 방정식 같은 개념은 모른다.

너무 쉬운 문제를 내면 바로 다 맞춰버릴 테고... 잠깐 고민하다가 1차 방정식의 방식으로 문제를 한번 내보기로 한다. 개념만 모르는 거지 구구단은 다 알기에 약간의 머리만 굴리면 충분히 풀 수 있다.

시작은 5 x __ = 45 같은 쉬운 문제로 칠판에 적어본다. 다른 애들이 고민하는 중에 역시 소피아가 바로 맞춘다. 몇 번 해본 결과 소피아가 독식할게 뻔한지라 결국 소피아에게 내는 문제와 다른 애들에게 내는 문제를 구분한다. 소피아에게는 ( 5 + __ ) x 8 = 56 같은 조금 어려운 문제를 낸다.


자 이제 연습게임이 끝나고 진짜 콜라를 걸고 시작이다. 문제를 구분해서 내니 그래도 수준이 비슷해지지만, 이번에는 또 소피아가 문제다. 3 문제를 냈는데 소피아는 하나도 못 가져간다. 얼굴에 분한 표정이 만연하다. 생각해보니 소피아도 먹고 싶을 텐데 이건 오히려 역차별이 아닌가 싶다. 시스템을 바꿔야겠다.

이번에는 남자팀과 여자팀으로 나누고 팀 대항을 한다. 일단 산수를 떠나서 영단어로 hangman을 한다. 단어를 내가 빈칸으로만 적고 돌아가며 알파벳을 얘기하면서 있으면 적고 없으면 기회가 하나 박탈되는 놀이이다. 단순하게 최종 단어를 맞추는 팀이 이기는 걸로 한다.

단어를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애들을 보는 순간 children이 떠오른다. 빈칸 8개를 적고 게임을 시작한다. 애들이 참 적극적이다. 다들 손을 들고 참여하려고 난리다. 상품 때문일까?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냥 이런 놀이나 공부가 좋은 거다.

_hil_ren 까지 갔는데도 못 맞춘다. 그러다가 소피아가 감을 잡고 손을 번쩍 든다. "Children!" 드디어 소피아에게도 과자와 콜라가 전달된다. 정확하게는 여성팀에게 가는 거지만 과자보다 맞췄다는 즐거움이 더 커보인다.

아직 상품이 몇 개 더 남아서 팀별로 다시 수학 문제를 낸다. 이번에는 좀 어렵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기본적인 구구단을 넘어서면 안된다. 확실히 여자애들이 잘 맞춘다. 어쩌다보니 초반에 남자애들이 싹스리해가서 이제 균형이 맞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기에 좀 어려운 문제를 낸다.

( 4 x __ ) / 2 = 4. 문제 자체는 쉽지만 나눗셈이 들어가서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여자애 중 소피아 말고 다른 애가 바로 손을 들더니 "2!"를 외친다. 남자애들은 막 찍는데 얘는 눈빛을 보니 찍은 게 아니다. 얘 똑똑한데? 다른 애들은 맞는지도 모르고 막 찍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뭔가 얘를 유심히 보게 된다. 아 며칠 더 있으면 이것저것 정말 가르치고 싶다. 

이제 잠시의 놀이는 끝났다. 애들이 아쉬워한 듯해 보이지만 상품도 없는데다 막상 이런 것도 한 시간이 넘어가면 집중력이 풀어지는 법이다. 딱 좋은 순간에 끝났다. 그래도 재미있게 논거 같아서 마음이 좋다. 나도 배우려는 사람에게 가르치는걸 워낙 좋아해서 재미있는 시간을 가진듯하다. 지식에 대한 열망이 있는 애들한테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밖으로 나오니 살짝 아쉽다. 뭔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가고 싶다. 소피아를 불러서 공책과 연필을 좀 가지고 오라고 한다. 아직 아이들이 구구단 수준이라 복잡한 건 못 알려주고, 9단을 일단 쭉 써보라고 시킨다. 그리고 9단의 결과는 항상 1의 자리와 10의 자리를 더하면 9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깜짝 놀라며 신기해하고 애들이 몰려든다. 소피아가 다른 애들한테도 캄보디아어로 열성적으로 설명해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거밖에 없다.

확실히 한번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까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애들이 '하나 빼기'를 배워서 알고 있기에 같이 하며 논다. 근데 왜 하나 빼기에서 주먹을 두개를 내는 거니. 가차 없이 손목을 후려쳐준다. 이런 거에 자비란 없는 법이다.


예전에 장애인들 가르칠 때 수업 초반에 집중을 시키기 위해서 마술을 배웠지만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서 소개팅 할 때나 쓰고, 노여사 만나기 전에 작업할 때나 썼던 그 마술을 여기서도 몇 가지 보여준다. 역시 마술이 최고다. 모두가 순식간에 집중하고 몰려든다. 아까 강의실에서 초반에 좀 보여줄걸 그랬나 보다.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서너 개만 보여주고 그중 하나는 눈에 띄는 한 아이에게 비법을 살짝 알려주고 다른 애들한테는 퍼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이럴 때는 정말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막내 여자애에게 손으로 뱀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분이 이제 그만 가자신다. 3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놀 때는 나도 즐거워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갈 때가 되니 갑자기 현실이 보인다. 나는 하루 놀아주러 온 사람이다. 나는 이 친구들을 다시 못 만날 테고, 얘네는 나 같이 잠시 놀아주다 떠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만났을 거다.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굳이 정을  주고받는 게 좋았던 걸까. 그냥 과자만 주고 가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일주일만이라도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또 감정이 올라오는 듯해서 애써 내리누른다. 애들하고 이별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좋겠다 싶다. 무심하게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출발하니 뒤에서 애들이 "바이 바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도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게 나았을까? 순간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피아가 눈에 보인다.

다시는 이런 거 안 해. 차라리 돈만 보내거나 과자만 사주는 게 낫지, 이렇게 하루살이 정을 주고받는 건 못 견디겠다. 애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놀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가 견디기 힘들다. 아예 한 일주일 정도를 잡고 와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면 이건 너무 슬픈 봉사다. 다시는 안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오토바이는 다시 아까의 그 식당으로 돌아왔다. 3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멍하니 앉아있는데 그 분이 수육에 맥주 한잔 하자고 하신다. 수육? 갑자기 정신이 돌아오며 침이 고인다. 아니 수육이라니, 그게 가능한 건가?

그분이 직원을 시켜서 돼지고기와 야채 등을 사오라고 한다. 막상 도와드리기 애매해서 앉아있으면서 지켜보니 고기를 삶고 야채를 다듬고 쌈장도 만들고 정말 제대로다. 고기가 익는 동안에는 그 분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동네 한바퀴를 돌고 온다. 이곳에 오래 있으셔서 그런지 주민들과도 많이 아는 사이라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현지인들의 삶을 살펴본다.



자 이제 상차림이다. 제대로 된 수육에 마늘, 양파, 쌈장, 상추, 배추까지 완벽한 한 차림이다. 거기에 배추 겉절이까지, 여기가 캄보디아인가 싶다. 마지막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소주를 한병 꺼내신다. 오늘 드디어 소주를 먹게 되는구나. 소주 3병을 뺏기고, 안동소주를 잃어버린 후에 어렵게 찾아온 소주이다. 기분이 제대로 업된다.


그분이 주변의 동네 주민들을 모두 모은다. 왼쪽 가게의 미용실과 제봉 일을 하시는 아저씨, 오른쪽 집의 영어로 투어가이드를 하시는 분, 그리고 건물주 아주머니까지 모두 모인다. 배추 위에 고기를 얹고 그 위에 마늘과 양파를 올린 후 쌈장을 듬쭉 찍어서 한 쌈을 완성시킨다. 사람들과 캄보디아어로 건배인 "쫄무이"를 외치고 소주 한잔을 털어 넣은 후 입을 크게 벌려 고기쌈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앙상블이 어디 있을까.

이 모든 음식을 그 분이 사주신다. 14달러 선물을 사갔을 뿐인데 너무 과한 만찬을 대접받는다. 배낭여행을 다니는 자에게 이런 만찬은 사막에 내리는 비처럼 달콤하다.


소주 한병은 순식간에 비우고 맥주로 갈아탄다. 이곳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못해서 투어가이드가 통역을 해주지만 유부남인 그가 부인한테 불려서 사라진 이후에는 거의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한다. 말이 안통하고 정 답답할 때는 모두가 "쫄무이!"와 "원샷!"을 외치며 술로 대화를 나눈다. '원샷'은 그 분이 이웃들에게 가르쳤다는데, 저 단어 덕분에 금방 취하게 된다.

왼쪽의 제봉틀 아저씨는 중간에 역시 애기를 씻기러 사라지신다. 한국이나 여기나 유부남들의 삶은 고달프다. 사라졌던 그 아저씨가 조금 있다 갑자기 왠 커다란 얼음을 손에 끼고 나타나신다. 그리고 맥주에 그 얼음을 넣어준단다. 동남아에서는 어디든 맥주에 얼음을 넣어서 먹는다. 이분 좀 취하신거 같다.


더 마시고 싶지만 내일은 캄보디아를 떠나는 날이니 아쉽지만 10시쯤 돼서 일어난다. 이곳에서 내 게스트하우스도 다소 먼데 너무 늦게까지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제봉틀 아저씨가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준다고 난리지만 너무 취해보이셔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대신 돌아가는 길은 술을 안마신 거기 여성 스태프분이 오토바이로 배웅해준다. 큰 길로 나온 후에는 거기 있는 오토바이 택시들과 흥정도 대신 해준다. 덕분에 1달러로 숙소까지 돌아온다. 이제 남은 건 6달러, 공항까지도 가야 하니 내일 아침을 안 먹으면 간당 간당하게 딱 맞지 않을까 싶다.

도미토리로 들어오니 역시 불이 꺼져있다. 그래도 먼지를 너무 뒤집어써서 샤워는 해야 한다. 최대한 조용히 샤워 도구를 들고 들어가서 몸의 때를 벗겨낸다. 나와서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눕는다.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진다. 그래, 나름 액티브한 하루였다.

캄보디아에 대해 안 좋았던 첫인상이 오늘 그래도 많이 없어졌다. 나쁜 인상이 생기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그 나쁜 인상이 다시 좋아지는 것도 의외로 생각보다 한순간이다.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둘 다 사람 때문에 생긴다.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밤이 좋은 기억이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떠나는 오토바이 뒤로 보였던 소피아의 표정이 머리 속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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