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I Aug 01.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9

@ Ko Lipe, Thailand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8시다. 여행 와서 한번도 안 깨고 이리 오래 잔 건 처음이다. 어제 10시에 잤으니 10시간을 잔 거다. 피곤하긴 많이 피곤했나 보다.

몸 상태를 체크해본다. 정체 모를 벌레에 쏘인 곳은 이제 흔적만 약간 남았지만 모기의 습격으로 온몸에 모기 자국은 100개는 될듯하다. 손가락과 발가락에는 습진 때문인지 피부가 자꾸 벗겨지고 있다. 어제 두통은 조금 남아있지만 머리가 흔든 흔들 거리던 거는 없어졌다. 대신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좀 있다. 아무래도 어제 배 위의 화장실에서 넘어졌을 때 부딪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두통이 산소 결핍으로 인한 잠수 휴유증인줄 알았는데 혹시 머리가 부딪친 거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문제가 좀 있는데.

아침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멀어서 일어나기 귀찮다. 비수기라 문을 연 곳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잠은 잘 잤지만 침대는 습기로 젖어 있고 수도물은 깨끗하지 않아서 뭔가 찝찝하다. 얼굴에도 두드러기 비슷한 뭔가가 났다. 바닷물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 물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늘 어쩔까? 그냥 이틀 연장을 할까? 고민이다. 만약 이곳에서 액티비티를 할 거면 연장해도 무리가 없을 거 같은데 어제 다이빙만으로 활동적인 거는 이제 충분하다. 더 이상 이 늙은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다. 여기 올때 다짐했던 본연의 모습인 휴양을 하고 싶다. 고민해봤자 답도 안 나오니 아침을 먹으러 나간다. 가면서 생각 좀 해봐야겠다.


가다가 수영장이 있지만 너무 화려하진 않고 손님도 그다지 없어 보이는 리조트를 한번 들린다. 리셉션으로 가서 가격을 한번 물어본다. 제일 안 좋은 방이 1700바트, 그보다 좋은 방이 1800바트이고 그 위로는 쳐다보지 못할 가격이다. 확실히 비싸다. 지금 있는 포라리조트가 500바트이니 3배 차이다. 그래도 수영장...


일단 흥정을 좀 해본다. 당연히 가장 안 좋은 방을 기준으로 얘기를 해보니 이틀을 머문다면 1600바트까지 해주겠단다. 조식을 안 먹으면 1200바트로 해줄 수도 있단다. 조식이 400바트인 셈이다. 뭐 이리 비싸. 그게 당신이 줄 수 있는 마지막 가격이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아 그래도 좀 비싸다.

일단 방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가본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안에는 에어컨, 금고, 그리고 심지어 텔레비전까지 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들어가자마자 이불을 만져본다. 뽀송뽀송하다. 화장실로 가서 물을 틀어본다. 깨끗한, 투명한 물이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일단 아침 먹으면서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하고 나온다. 아, 어쩌지? 방을 보고 나니 욕심이 생기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큰 지출임은 확실하다. 머리가 복잡하다. 아침을 먹으면서 생각 좀 해봐야겠다.

일단 Walking Street로 간다. 리조트들의 레스토랑은 절대 엄두가 안 나고 이쪽 거리 밖에 옵션이 없다. 초입에 있는 처음 오자마자 들렸던 그 식당에 손님들이 좀 앉아 있는게 보인다. 다들 낚였구먼. 무시하고 거리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진짜 불친절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 식당을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

한참을 들어가지만 문을 연 곳이 없다. 정녕 초입의 그곳이 유일하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이 많았나 보다. 그리고 그래서 불친절했나 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경쟁이 있어야지만 퀄리티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독점은 그래서 경계해야 하거늘. 방법이 없다. 발을 돌려서 내 여행 일정에서 가장 불친절했던 곳 중 한 곳인 그곳으로 결국 간다.

앉아있으니 메뉴판을 던져준다. 그래, 감수하자. 조식 메뉴가 120바트와  160바트짜리가 있다. 큰 차이가 안 느껴져서 120바트 식사를 주문한다.

종업원이 오더니 무표정하게 물어본다.
"커피, 티."


둘 중 하나 고르라는 거겠지?
"커피"

질문 형태도 아니고 정말 무뚝뚝하게 물어보고, 나도 기대를 안 하니 그냥 커피를 달라고 한다. 기대하지 말자. 조금 있으니 음식이 나온다. 음식은 그래도 다행히 썩 나쁘지는 않다.


밥을 먹으면서 노여사에게 자문을 구한다. 무료 심카드 받기를 잘했다. 신기하게 인터넷은 접속도 안되지만 카톡은 된다. 속도 제한을 건 거 같은데 인터넷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되지만 카톡은 아주 수월하게 되니 뭔가 나를 위한 전용 패키지 같다. 딴짓하지 말고 여행에 집중하되 연락은 하고 지내라, 뭐 이런 건가.

노여사에게 고민을 얘기하니 차라리 그 돈을 아껴서 라오스를 가는 게 맞지 않냐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 대답 아니야. 난 이미 마음이 돌아섰나 보다. 슬쩍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이틀은 쉬고 싶다고 하니 그러면 그냥 하라고 한다. 난 왜 물어본 걸까. 그래도 누군가의 동의를 얻어야 마음이 편하다. 보통 사람들은 선택을 할 때 이미 정답을 머리 속에 품고 있다고 한다. 그 이후 고민의 과정은 그 선택을 위한 합리화의 과정일 뿐이다.

찬찬히 계산을 해본다. 지금 남은 돈이 대략 350달러, 숙소가 이틀에 3200바트니 거의 정확하게 100달러이다. 바트 남은 게 1500바트 정도니 이걸로 남은 태국 일정을 생활하기는 힘들다. 결국 태국에서 150달러 정도를 초과해서 사용해야 한다.

원래 계획이라면 이곳이 마지막 여행지라 남은 저 돈을 모두 여기에 쏟아 붇고 떠나는 거였으니 상관없는데, 지금은 일정을 연장해서 베트남, 그리고 혹시라도 라오스까지 생각하고 있는 마당이라 돈을 쓰는데 주저함이 생긴다. 이거 잘하는 걸까? 하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결정은 이미 처음에 끝난 거 같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식사값을 지불하고 아까 봤던 리조트인 Z-Touch 리조트로 간다. 리셉션으로 가서 계약전에 마지막 점검을 한다. 앞에 무슨 공사를 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혹시 이거 하루 종일 하냐니까 밤에는 안 한단다. 그럼 하루 종일 한다는 얘긴가. 와이파이는 되냐고 하니 어제 무슨 일 때문에 다 나갔단다. 그럼 내일은 되려나. 뭐 그건 안되면 안되는 데로 나쁘지 않다. 아까 본 기억이 안 나서 혹시 냉장고는 있냐고 하니 없단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진짜 이미 결정을 내리고 왔나 보다. 다 안 좋은 대답인데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 네고를 해본다. 조식은 뺄 수가 없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퀄리티도 훌륭해 보이고, 무엇보다 정말 제대로 여유를 부리려면 아침에 바다 보면서 조식을 먹는 그 시간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아침 식사를 저 멀리서, 그것도 친절함이 눈곱만큼도 없는 곳에서 먹으니 하루의 시작이 엉망이다.

비수기 가격이 1700바트, 그리고 거기서 100바트를 더 빼준다고 아까 합의를 봤었다. 아까 했던 이 협상에서 내가 이틀에 그냥 3000바트에 하면 어떠냐고 추가 협상을 시도한다. 하루에 200바트를 빼 달라는 얘기다. 이 정도면 나름 합리적인 네고라고 생각해서 제의를 한다. 한참을 계산기를 두드리며 고민하던 매니저가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됐다. 이 정도면 그래도 '합리적인 사치'를 한 기분이다.

여러 서류를 작성하고 일단 1000바트 디파짓을 넣는다. 나머지는 오늘 환전을 해야 한다. 여기는 섬이라 환율이 너무 안 좋아서 방콕에서 해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네고해서 깎은 만큼 환전할 때 다 날아가게 생겼다.

원래 오후 2시부터 체크인이지만 지금 옮겨도 되는 걸로 합의를 본다. 지금이 9시니까 시간도 꽤나 번 셈이다. 이런 세세한 거까지 생각하니 짠돌이 같지만 한 달 이상 여행을 다니면 어쩔 수가 없다. 짐을 들고 30분 정도 후에 온다고 얘기하고 나온다.


포라 리조트로 돌아온다. 들어오는데 스태프가 연장할 거냐고 묻는다. 어제 연장할지도 모른다고 괜히 얘기를 했다. 300바트를 내기 미안해서 그랬는데 여기서 아니라고 하는게 더 미안해졌다. 나쁜 소식은 최대한 빨리 전해야 하는 건데 성급했다. 하긴, 그때는 연장할 생각이 70% 이상이긴 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체크아웃할 거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준다.


스태프의 씁쓸한 표정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막상 여기로 돌아오니 내가 잘한 건가 싶다. 이곳 테라스의 해먹은 사실 매우 마음에 들었었다. 게다가 바다가 지천이라 수영하고 와서 바로 씻기도 좋다. 숙소도 축축하고 물 더러운 거 빼고는 지낼 만하다. 대나무로 만든 방이 나름 운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이 꽤나 들었다.

그래도 디파짓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다. 짐을 순식간에 정리한다. 어제 널어놓은 수영복이 아직도 안 말랐다. 여기 도대체 습기가 얼마나 많은 걸까. 안 마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배낭에 쑤셔 넣는다. 어차피 이동하면 에어컨이 있어서 말리기 편할 거다.

나오면서 스태프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다. 어제 슬쩍 얘기한 게 있어서 나보고 선라이즈 비치로 옮기냐고 묻는다. 거기서 대놓고 '아니, 여기서 5분 거리에 있는 3배 가격의 호화로운 리조트로 옮겨'라고 얘기를 차마 못해서 그냥 그렇다고 얘기한다. 아 자꾸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이러다가 근처에서 다니다 마주치게 되면 더 민망할 텐데. 죄지은 것도 없는데 뭔가 죄인의 느낌이다.

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래도 여기서 이틀간 저렴하게 잘 지냈다. 하루는 무료로 잤으니 결국 이틀을 300바트에 지낸 셈이다. 이 동네 물가를 떠나서 태국 어디서든 있을 수 없는 가격이다. 아마 500바트를 고수하지 않고 100바트라도 깎아줬으면 이틀 더 연장해서 계약했을 거다.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진짜 5분을 딱 걸어가서 Z-touch 리조트로 온다. 리셉션으로 바로 가서 방을 보여달라고 한다. 매니저가 자리를 비워서 여성 스태프와 함께 방으로 간다. 그런데 아까 보여준 방이 아니라 더 안쪽이다. 여기도 같은 방인가?


헌데 뒤편이라 수영장 하고도 거리가 멀고 뷰도 그다지 안 좋다. 마음에 안 든다. 여성 스태프에게 아까 보여준 그 방으로 달라고 하고 어딘지 데리고 가서 알려준다.


스태프가 그럼 열쇠를 다시 가져와야 한다고 해서 그럼 난 배낭이 무거우니 그냥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스태프를 기다리면서 숙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계단에 앉아있는다. 청소하는 사람이 꽤나 많다. 아침부터 참 부지런히들 청소하시는구나.

저 멀리 여성 스태프가 매니저를 데리고 오는 것이 보인다. 헌데 매니저 손에 아까 보여줬던 가격표와 계산기가 들려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팍 든다. 포라리조트는 체크아웃해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데 뭐가 문제일지 걱정이 된다.

일단 표정 관리를 하면서 얘기를 듣는다. 매니저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저 뒤쪽이 1700바트짜리고 여기는 1800바트짜리란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아까 분명히 여기를 보여주고 1600바트로 네고하지 않았냐고, 내가 들어가서 물 확인까지 한 거 기억 안나냐고 하니 당황한 얼굴이다. 보아하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이분 영어가 좀 부족해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좀 미안하지만 난 여기를 보고 온 건데 절대 뒤로 갈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냐며 강력히 항의한다. 여기서는 내가 취소하겠다고 먼저 얘기 하는 건 더 어리석은 짓이니 그냥 배째라 모드로 항의한다. 난 잘못한 것이 없다. 너네가 잘못했으니 알아서 해결해라.

매니저 잠시 고민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리셉션으로 돌아간다. 아 뭐가 이리 꼬였지. 그래도 난 진짜 잘못한 것이 없다. 정당한 네고를 통해 1500바트로 계약을 했고, 그때 이 방을 보여줬으면 난 이 방을 가져야 하는 거다.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돈을 더 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다.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매니저가 다시 걸어온다. 태연하게 굴기 위해서 가까이 올 때까지 못 본척한다. 가까이에 왔을 때 비로소 쿨하게 "왔어?"라고 응대해준다. 근데 손에 열쇠가 있다. "OK?"라고 물으니 오케이란다. 아싸!


들어가서 에어컨을 켜주고 매니저는 약간 안 좋은 표정으로 떠난다. 조금 미안하지만 뭐 내가 실수한 건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결국 난 1800바트방을 1500바트에 자게 된 거다. 1800바트도 비수기 가격이니 내가 생각해도 꽤나 대박딜을 했다. 여행지사 새옹지마다.


오자마자 일단 씻으러 들어간다. 제발 투명한 물에 한번 제대로 씻고 싶다. 뜨거운 물도 나온다. 샴푸도 있다! 물을 틀고 혹시 몰라 다시 손에 한번 고이게 해보니 투명하다. 별거 아닌데 감동한다.

뜨거운 물에, 그리고 깨끗한 물에 씻는 게 이리 행복한 일이었나? 별거 아닌 거지만 감동한다. 씻고 나오니 개운함이 하늘을 찌른다. 방을 둘러보니 냉장고가 보인다. 냉장고 없다며! 아마 더 저렴한 방 기준으로 생각했나 보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보너스다. 물도 두개나 주어져서 가지고 다니던 물 두병과 함께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이따 맥주 사와서 넣어놓고 저녁에 먹으면 돈도 아끼고 좋겠다.


침대를 만져보니 역시 뽀송뽀송하다. 에어컨을 틀고 침대에 앉아서 잠시 누워있는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며칠간 지쳤던 몸이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함에 녹아든다. 미안하지만 포라리조트 따위는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여기 오기 잘했다. 아주, 아주 만족스럽다.

잠시 앉아서 키보드를 핀다. 이 섬에서는 쓸 곳이 적당하지 않아서 글 쓰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는데 시원한 침대 위에 앉아서 쓰니 글도 술술 써진다. 모기도 없고, 덥지도 않다. 정말 좋구나.

지금부터 48시간 동안 정말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할 예정이다. 비싼 돈을 내고 왔으니 최대한 이용해먹을 거다. 조식은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배 터지게 먹고, 낮에는 수영장 앞에서 책을 보다 더우면 수영장에 들어가서 몸을 식히는 거다. 그리고 한낮에는 에어컨을 틀고 잠시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테라스에 앉아서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 마신다. 아 생각만 해도 신난다. 바다도 한두 번 갔다 와야겠다.

한 달간 고생하며 다녔으니 이틀은 좀 사치해도 된다고 합리화한다. 게다가 다음 한 달도 보나 마나 고생일 테니 최대한 누려야겠다. 역시 돈을 조금 쓰니 환경이 차원이 다르게 바뀐다.


어제 한 빨래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서 다시 세제물에 담가놓는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음 얼리는 판이 있다. 별게 다 있구나. 문명의 이기에 감탄하며 물을 좀 얼려놓는다. 저녁에 맥주에 타 먹어도 좋을 듯하다.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본다. 와이파이가 안되니 책 보기에는 더 좋은 환경이다. 펄벅의 'Good Earth'는 한 인물을 통하여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여준다. 내가 여행기에서 추구하듯이, 심시티가 아닌 심즈를 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독자들에게 안내해주는 것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한 인물이 돈을 가지게 되면서 생기는 갈등과 변화를 나타내는 것도 흥미롭다. 시리즈 답게 책도 길어서 내일까지 시간을 보내는데 충분할 거 같다.

12시가 넘을 때까지 럭셔리한 여유를 즐긴다. 슬슬 배가 고파오기에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수영장을 보니 한 커플이 이미 들어가서 놀고 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나도 저들과 합류해서 놀아야겠다.


해변의 물이 많이 올라와있다. 어제는 썰물이어서 수위가 그리 낮았나 보다. 지금은 조금만 들어가도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꽤나 깊이가 나온다. 바다 수영도 좀 해야 하려나?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그리고 내일 하루 종일이 있으니 급할 거 없다. 천천히 모든 것을 해보도록 하자. 

Walking Street로 들어가서 첫 번째 식당을 무시하고 들어 가본다. 점심이니 몇 개 더 열지 않았을까? 조금 더 들어가니 와이파이 가능하다는 식당이 보인다. 이 섬에서 와이파이라... 믿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더 속아보자.


들어가서 똠얌 누들을 시킨다. 태국 음식 중 유일하게 정을 못 붙이는 게 똠얌꿍이다. 맵고 신 거는 사실 김치찌개와 동일하니 그렇다고 치는데 중간에 있는 대나무 같은 질긴 식물은 도저히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식감도 별로고 향도 없고, 이해가 안된다. 그래도 다시 한번 시도해본다.


와이파이는 역시나 안된다. 이놈들아, 공유기까지만 연결된다고 그게 와이파이가 되는거니. 공유기가 인터넷에 연결이 되어야지! 안테나는 가득 뜨지만 인터넷은 카톡도 안된다. 나도 그냥 사막 한복판에 태양충전기로 공유기 하나만 덜렁 갖다 놓고 와이파이 된다고 해볼까나. 근데 계속 안 되는 건 아닐 거고, 엊그제 비가 심하게 왔다더니 그 이후 끊긴 거 같다. 그렇게 나의 단절은 계속된다.


이번 똠얌누들은 꽤나 맵다. 매운 거야 언제나 환영이다. 돈 아끼려고 물도 안 시켰지만 밥은 하나시켜서 같이 먹는다. 역시 적응이 안 되는 맛이다. 토마토가 들어가는 음식은 아무래도 적응이 쉽지 않다. 서양식 토마토 음식은 괜찮은데 왜 태국 음식만 별로지.

물론 맛이 안 맞는다고 해서 음식을 남기는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싹 다 긁어먹고 150바트를 지불하고 나온다. 이제는 환전을 하러 가야 한다. 어제 저녁에 물어보니 환율이 32바트에서 또 31바트로 떨어져있었다.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도 환전을 해야 한다. 수중에 남은 돈이 260바트가 전부이다.

어제 들렸던 환전소가 문을 닫았길래 돌아오는 길에 다른 곳에 물어보니 30.5바트란다. 아니 왜 갈수록 내려가는 거지. 일단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기에 저녁 먹으러 나와서 다시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돌아오는 길에 세븐일레븐에 들려서 맥주캔 4개들이 한팩을 산다. 223바트를 지불한다. 이제 진짜 바트거지가 됐다.


숙소에 돌아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음이 벌써 얼어있다. 진짜 문명이란 좋은 거였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보니 마음이 부자가 된 느낌이다.


오는 동안 땀을 꽤나 흘렸다. 빨리 수영장으로 가야 한다. 마음이 급하지만 일단 아까 담가놓은 빨래부터 헹구고 밖에 널어놓는다. 깨끗한 물에 씻었으니 이제는 그 썩은 냄새 안 나겠지.


나와서 수영장으로 온다. 한 커플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옆에 소지품을 놔두고 옷을 벗자마자 바로 그냥 물에 뛰어든다. 시원한 물 속에 몸을 담그니 이제 좀 살 거 같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잠수도 한다. 그러다 잠시 멈춰서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가 참 아름답다. 사람들이 조금만 들어가도 바닷물이 허리를 넘는다. 엊그제 들어갔을 때는 30분 이상을 들어가도 수위가 겨우 무릎 정도이더니 저 정도면 수영해 볼만하겠다. 비싼 리조트에 오니 해변 앞에 전용 비치베드도 갖춰져 있다. 이틀 동안 이곳에 있을 생각하니 기분이 엄청나게 들뜬다. 여기 오기 잘했다.


잠시 수영하다 나와서 수영장 옆에 비치베드에 눕는다. 수영장과 그 앞에 있는 바다가 참 조화롭게 보인다. 물 근처라 그런지 바람도 시원해서 하나도 덥지 않다. 어디든 글이 빠질 수는 없지. 수건을 하나 깔고 글도 좀 쓴다. 저녁에는 냉장고의 맥주를 가지고 와서 한잔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몸을 가리려고 난리였지만 이곳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섬에서 한국인은 한 명도 못 봤다. 그냥 벗은 채로 누워있는다. 맨살에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다. 멀리서 검은 구름이 보이지만 하나도 걱정 안된다. 동남아에서 저런 가짜 먹구름이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은근히 비가 오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비 올 때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거나 간단한 바다 수영만큼 낭만 있는 것도 드물다.

한 달을 다녀보니 여행에서는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포나 빠이 같은 여행지에서는 현지인들과 어울려 여행자가 되어야 하며 씨엠립 같은 관광지에서는 유적을 보며 관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곳 같은 휴양지에서 여행을 하려 했으니 뭔가 안 맞는 게 아니었을까. 휴양지에서 휴양을 하니 비로소 퍼즐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 이 돈은 아까운 돈이 아니다.

인터넷은 안되지만 희한하게 심으로 하는 카톡에서는 사진까지도 전송이 된다. 어제 그냥 대충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사람들한테 보내니 난리다. 이 섬에서는 그냥 아무렇게 대충 찍어도 다 엽서 사진급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파타야라니 다들 놀랜다. 태국에는 파타야가 두개가 있다네. 하나는 방콕에서 두 시간 거리에, 그리고 여기는 버스 타고 12시간 넘게 오고 또 배로 2시간 들어오는 곳이지. 나는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때문에 비행기를 타서 좀 편하게 왔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에어아시아도 나름대로 잘 활용하고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들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이 시간은 미래의 나도 부러워할 시간이다. 최대한 즐기자. 복잡한 생각할 필요 없다. 편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이틀을 보내자.


한 시간 정도 누워서 책을 보다 보니 살짝 지루해진다. 그럴 때는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수영장으로 직행이다. 수영복만 입고 있으니 그냥 텀벙 빠지면 된다. 아까의 커플은 가고 지금은 태국 가족이 같이 수영중이다. 잠수도 하면서 수영하고 있는 애와 놀아준다.


바다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다. 이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수영장을 나와서 바로 바다로 향한다. 짐을 그냥 놔두고 오기가 살짝 걱정되지만 코앞인데 누가 훔쳐가겠나.

바다에 발을 담그니 수영장보다 따뜻하다. 조금 들어가니 금방 허리까지 오고 더 들어가니 목 까지 온다. 수영을 조금 해서 들어가니 발이 땅에 안 닿는다. 수영을 하는데 물이 너무 깨끗해서 손이 다 보인다. 말 그대로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여기 해변이 유명한 게 이유가 있다. 내가 도착한 날이 하필이면 썰물이라 좀 실망스러웠나 보다.

조금 수영하다가 돌아온다. 오늘은 스노클링 장비도 없어서 뭔가 허전하다. 내일 스노클링 장비를 하루 대여해서 제대로 바다를 탐험해봐야겠다. 다시 수영장으로 와서 밖에 설치된 샤워기로 바닷물을 헹궈내고 수영장에 들어가서 조금 놀다가 다시 비치배드로 가서 눕는다. 그새 태국 가족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왜 금방 왔다 가는거지. 뭐 나야 나 혼자 전세 낸 듯해서 매우 흡족하다. 휴양 한번 제대로 한다.

문득 맥주 한잔이 당겨서 숙소로 가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캔 중 하나를 가지고 온다. 여행 중 첫 낮술인 셈인가. 여기 저렴이 맥주인 창 맥주 말고 일부러 한 단계 고급인 LEO 맥주로 샀다. 캔을 따서 한모급 마시니 부드럽게 넘어간다. 냉장고도 제 역할을 해서 차갑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책 보다가 물기가 좀 말랐다 싶으면 수영장에 들어간다. 수영 좀 하다 지겨우면 또 다시 나와서 책을 본다. 정말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취지에 어울리는 곳이다.


4시 반쯤 돼서 일어난다. 오늘은 그래도 선셋비치로 가서 일몰을 좀 볼까 싶다. 숙소로 돌아와서 일단 샤워부터 하고 수영복을 적당히 빨아서 말린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여행 다닐 때는 언제나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수영도 하고 목욕도 자주 했더니 절대 안 깨끗해지리라 여겼던 발바닥도 하얗게 돌아온다.

이제는 일몰을 보러 나가 볼까 한다. 누군가가 댓글로 일출 일몰을 왜 항상 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이리 아무 계획 없는 여행에서 그래도 뭔가 스케줄이 있다는 거 자체가 심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두 번째로는 자연의 거대함을 느끼면서 그 안의 내가 정말 작은 존재임을 깨닫고 그런 나의 고민들은 사실 그다지 의미 없다는 걸 느끼기 하는데는 일출 일몰 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리셉션에 선셋비치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듯하다. 혹시나 해서 내일 모레 배 편도 물어본다. Walking Street에서 물었을 때는 900바트 더니 여기서는 700바트다. 고급리조트라 오히려 이런건 바가지가 없나보다. 비싼 곳에 묵고 있지만 그만큼 아끼는 돈도 상당하다.



선셋비치는 생각보다 가깝다. 30분 정도는 걸을 생각하고 왔는데 10분도 안돼서 도착한다. 헌데 이거 매우 짧은 해변이다. 파타야에 있다 이곳에 오니 해변이라 부르기도 다소 민망하다.


비수기라 그런지 여기는 문 연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버려진 동네 같다. 개들만이 외로이 해변을 지키고 있다. 동남아 어디든 개가 많지만 꼬리뻬에는 특히나 개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심지어 어린 강이지들도 보인다. 개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표지판도 보이던데 그럼 여기 개들은 도대체 뭘 먹고 생존하는 걸까? 문득 걸견이가 생각난다. 그 이후에 못 본걸 보니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아직 해가 질려면 시간이 꽤나 있다. 강아지들하고 놀면서 사진도 찍는다. 여기는 물도 파타야 같이 에메랄드 빛은 아닌 듯 하지만 확실히 해는 바다 안 가운데로 떨어질 듯하다. 그러니 선셋비치겠지.


해변을 향해 펼쳐진 나무 의자들을 발견한다. 뒤에 있는 레스토랑 소유 같지만 비수기라 지금은 버려져있다. 아, 명당이다. 이곳에서 일몰을 보면 딱이겠다. 원래라면 돈을 꽤 줘야 할듯하지만 오늘의 나에게는 공짜다.

주인이 없는 자리에는 개미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어 있다. 오늘 잠시만 빌릴게. 개미들을 살짝 털어내고 자리에 앉는다. 만약 지금이 성수기이고 이 섬이 찾아오기 쉬운 곳이었으면 인산인해를 이뤘을 정도로 여기에서의 일몰뷰가 멋지다. 이것이 진정 비수기에 여행 다니는 맛이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날씬한 여성분이 하나 와서 물 속으로 들어간다. 온몸을 다 감싼 게 한국인이 맞는 듯하다. 항상 정신없이 벗어재끼는 사람들만 보다가 이리 몸을 다 감싼 사람을 보니 뭔가 반갑다.


뒤에서 중국말이 들리더니 같은 옷을 입은 20여 명의 중국인이 나타난다. 아까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더니 명당임을 눈치채고 온 거 같다. 나의 평화를 방해받는다. 조용히 파도소리를 음악 삼아 일몰을 보고 싶었는데 시끄러운 중국어를 듣게 되었다. 어? 근데 조금 있더니 그냥 간다. 뭐지? 왜 어디든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를 못하고 조금 있다 가는 걸까? 진정한 매력은 오래 있어야 비로소 나온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

예전에도 연애를 꽤나 했었지만 2년 이상의 장기 연애는 한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사랑이란 연애 초기에 느껴지는 그런 스펙터클함과 자극이 전부라 여겼다. 그래서 연애를 짧게 많이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여인을 만나서 2년이 지나고, 또 4년이 지나고, 그리고 6년이 되면서 사랑이란 그리 간단한 게 아님을 느끼고 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지금과도 또 다름을 느낄 테지.

모기가 공격한다. 미리 대비해서 모기 억제로션을 발랐더니 그 빈틈을 공격하려 한다. 대단한 놈들이다. 이미 물릴 데로 물렸지만 그렇다고 쉬이 물려줄 수는 없다. 나도 공격을 해서 잡아낸다. 이 넓은 야외에서 한 마리를 잡은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몰은 아름답게 지지만 오늘다라 다른 곳에서 보던처럼 지금 인생에 대한 고민 같은 복잡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냥 아름답다. 파도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일몰이 참 아름답다, 이 생각만 든다. 철학도 휴양이 필요한가 보다. 게다가 때맞춰 나타나는 모기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한 마리를 잡았더니 5마리가 나타났다.

모기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포기하고 일어난다. 이놈들 그냥 바지를 뚫고, 상의를 뚫고 문다. 엉덩이를 포함하여 5방 이상 물리고 나서야 명당을 포기한다. 여기 사람이 안 앉는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변 앞으로 가서 해가 사라지는 마지막 모습을 관찰한다. 일어나는 순간 낭만은 끝났다. 약간 의무적으로 바라본다. 헌데 하필이면 이런 날에 이번 여행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일몰을 본다. 구름이 하나도 가리지 않아서 해가 바다 뒤로 천천히 아름답게 넘어가고 있다. 심지어 섬 두개 사이에 해가 정확하게 떨어진다. 그래도 감상은 없다. 에잇, 빌어먹을 모기들.


일몰 후의 모습도 꽤나 예쁘지만 이미 쇼는 끝났다. 늦어지기 전에 돌아가고자 길을 나선다. 가는 길에 젖을 물고 있는 강아지들을 본다. 이 아이들 아까는 다른 개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을 내가 분명히 봤는데 뭐지. 젖품앗이라도 하는 걸까.


한국인 부부 3쌍이 와서 사진 찍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분들은 이 시기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려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좋다. 아까 수영장에서도 그랬지만 진짜 여기는 커플 밖에 없구나. 나는 외롭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숙소로 빠지는 길을 가지 않고 쭉 걸어가 본다. 가다 보면 Walking Street가 나오겠지. 급할게 없으니 천천히 감에만 의존하여 길을 쭉 가본다. 산 중턱에서 보니 이곳에도 의외로 다양한 펍과 식당,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들이 즐비하다. 물론 비시즌이라 다 쉬고 있다. 피피섬이 관광객들로 붐비고 복잡해지면서 이쪽 섬으로 옮겨온다더니 진짜 그러한가 보다.


앞에 걸어가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현지인들을 따라가니 Walking Street에 돌입한다. 역시 길은 다 연결되는 법이다. 일단 환전을 해야 하기에 위쪽으로 간다. 오전에는 문을 안 열었더니 역시 지금은 열려 있다. 31바트 환율에 150달러를 환전한다. 대충 계산해보니 태국에서의 마지막 환전으로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한 끼로 300바트를 계산해놨으니 그 안에서만 해결하면 된다. 일단 길에서 조각피자를 테이크아웃으로 판매하는 게 계속 눈에 들어왔던지라 집에 가면서 하나 사가서 맥주와 함께 먹으려 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르기에 저녁을 먹을 곳을 물색한다.



웨스턴 바처럼 되어 있는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다니면서 계속 눈에 띄던 곳이다. 밖에 '단돈 100밧에 저녁을!'이라는 문구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항상 사람이 많더니 오늘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에 들어가서 바에 자리를 잡는다.

100바트에 한 끼면 방콕에서는 꽤나 비싸지만 팟타이가 120바트인 꼬리뻬에서는 떨이 가격이다. 메뉴를 보니 메뉴 이름도 '가난한 배낭여행자를 위한 세트'이다. 종류가 5가지길래 카레로 주문한다. 고기를 고르라기에 돼지고기를 고른다.


조금 앉아있으니 메뉴가 나온다. 정갈하게 나오는 게 마음에 든다. 국물을 한번 떠먹어본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카레를 맛본다. 좋군. 이번에는 밥과 섞어서 먹어본다. 좋은 정도가 아닌데?

이 섬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다. 깜짝 놀라서 주방을 보니 한 푸짐한 현지 누님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딱 보기에 음식을 아시는 분 같다. 바에는 서양인 남성분이 바텐더를, 그리고 주방에서는 요리 잘하시는 현지 여성분이 주방장을 하니 환상의 조합이다. 태국 현지 음식을 다루므로 100바트로도 충분히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거 같다.


꼬리뻬 온 이후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다. 찬찬히 음미하며 먹고 있는데 길에서 누가 아는 척을 한다. 보니 어제 그 이스라엘 여성분이다. 이분은 그다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왜 자꾸 만나게 되는 거지.

이분이 문제가 있는 건 절대 아닌데, 뭔가 정이 안 간다. 그래, 예쁘지 않다. 근데 꼭 그거 때문이 아니라 묘하게 매력이 없다. 그래도 착하셔서 잠시 얘기를 나누다 약간 일부러 대화를 정리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 앞에 식고 있는 밥이 더 신경 쓰인다.


맛있기에 싹 다 긁어먹었더니 배가 좀 부르다. 그래도 피자는 포기할 수 없다. 배를 좀 식힌 다음에 먹는다 하더라도 난 기필코 먹고 말테다. 주문하면 구워서 10분 걸린다고 쓰여 있기에 넘어가서 주문을 하고 식당으로 돌아와서 기다린다. 가장 잘하는 걸로 달라고 한다.


이곳에서 바텐더와 얘기하고 있는데 피자 냄새가 여기까지 퍼진다. 이 바텐더는 스페인에서 왔단다. 내일 또 올지도 몰라서 좀 친숙해지고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피자가 나왔다고 가져다준다. 식당에 130바트, 그리고 피자 값으로 100바트를 지불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그래도 해변인데 바깥에 앉아서 먹을까? 하지만 모기가 너무 무섭다. 오늘 모기를 30방 이상은 물린 듯하다. 그냥 샤워를 하고 편하게 방에서 먹는다. 차가운 맥주 한잔과 짭짜르한 피자 한입이 매우 잘 어울린다. 책을 보며 한입 두입 먹다 보니 피자는 다 먹고 맥주는 3캔을 다 비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침대에 누우니 익숙하지가 않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맥주를 3캔이나 먹었는데 그다지 취하지를 않는다. 오늘은 여행 와서 최대한의 사치를 부린 날이며 최대한의 휴식을 취한 날이다. 오늘과 내일은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재충전의 날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쉬고, 최대한 누리고, 최대한 즐겨보도록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