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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Aug 02.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30

@ Ko Lipe, Thailand

대망의 30일이다. 언제 30일이 흘렀지? 헌데 막상 이곳, 꼬리뻬에 온지는 3일 밖에 안되다 보니 여행 온지 3일 된 느낌이다. 빠이는 아득하니 옛날 일 가고, 미얀마의 시포도 벌써 추억이 된 듯하다. 현재를 산다는 건 이런 의미인 걸까.

오랜만에 눕는 편한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어제 여행 와서 정말 오래간만에 불면증에 시달렸다. 언제나처럼 10시에 자리에 누웠지만 뜬눈으로 시간을 세다가 2시쯤 되서야 겨우 잠든 거 같다. 그 이후에도 수차례 잠이 깼다.

갑자기 왠 불면증일까. 이곳의 깔끔한 환경이 현실을 떠올리게 했나 보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슬슬 현실에 대한 압박이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늦게 잠든다 해도 일어나는 시간은 습관적으로 항상 같다. 6시에 일어나서 조금 더 자려고 시도하다가 7시에 일어난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아침을 먹으러 간다. 400밧짜리 아침,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봐주겠어!


서너 커플이 먼저 와 있다. 역시나 모두 커플이다. 표를 제출하니 한 명이냐고 되묻는다. 그래 한 명이다. 당당하게 바다가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오랜만에 보는 뷔페식 조식이다! 먼저 찬찬히 돌아다니며 살피면서 먹을 계획(?)을 잡는다. 태국 답게 팟타이와 볶음밥도 포함되어 있다. 일단 볶음밥, 팟타이, 시리얼을 먹고 빵 4조각을 구워서 버터와 잼을 바른 후 계란과 햄을 올려서 먹어야겠다. 오렌지 주스와 커피를 마시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으면 조식의 완성! 물론 배가 안차면 다시 한번 더!


여기 있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큰 지출을 감수하고 이 리조트에 온 거니 최대한 읅어먹어야 한다. 어제 보니 이 호텔에 머무는 사람은 많아도 막상 수영장까지 나오는 사람은 극소수다. 아마 조식도 스킵하는 사람이 꽤나 있을 거다. 배부른 사람들 같으니라고. 여기서 최대한 버티면서 배 꺼지고 점심까지 먹으면 진상이겠지? 물론 그런 짓은 안 한다.


새삼스럽지만 바다가 참 예쁘다. 저런 에메랄드 빛은 어찌하면 나는 걸까. 이런 바다를 앞에 두고 안 들어가는 것은 죄악이다. 원래는 스노클링하면서 사진도 찍으려고 노트4용 방수팩까지 챙겨 왔는데 노트4는 미얀마에서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오후에는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서 바다를 좀 들어가봐야겠다.


계획대로 한상 푸짐하게 먹은 후 배가 부르지만 디저트로 요플레와 과일을 추가로 가져온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태국의 노래가 파도소리와 어울려 흥겹다. 요플레 뚜껑을 따고 익숙하게 뚜껑에 묻은 진액을 핥아먹는다. 파인애플 맨 위에는 죽은 개미가 한 마리가 보이길래 스윽 덜어내고 나머지를 먹는다.


이 정도면 그래도 적당히 배 부르다. 일단 방으로 돌아간다. 조금 쉬다가 나올 생각이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조금 쉬려고 하는 순간에 똑똑 소리가 나더니 청소를 해야 한다며 스태프가 방을 잠시 비워달라고 한다.

뭐 잘됐다 싶다. 수영복을 입고 짐을 챙겨가지고 나온다. 나오는 길에 리셉션에 들려서 스노클링 장비를 50바트에 빌린다. 온 김에 내일 떠나는 차편도 예약한다.

리셉션에 들려서야 내가 지금까지 와이파이 주소를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와이파이가 안 되는 줄 알았더니 수영장 부근에서는 되는 거였다. 사진을 찍은 후 수영장으로 향한다.

인터넷이 된다! 느리지만 된다! 하지만 느려서 글은 올라갈지 모르겠다. 시도를 한번 해보지만 사진 하나 올라가는데 10분 이상이 걸리고 그마저도 두 번째부터는 에러가 뜬다. 그냥 방콕 가서 올리는 게 최선이지 싶다.

비치베드에 잠시 앉아서 책을 보다 좀 더워지길래 대여한 마스크를 쓰고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확실히 마스크가 있으니 훨씬 편하다. 물 속에서 물구나무도 서고, 잠수도 하면서 혼자 잘 논다. 잠수할 때 하나의 팁이라면 완전히 가라앉기 위해서는 숨을 뱉어내야 한다. 이건 다이빙할 때 처음 배우는 기초이기도 하다. 공기가 문제가 아니라 폐로 인한 부피가 문제인 거 같다. 아닌가.

아무도 없으니 혼자 별짓을 다 한다. 물구나무도 서고 뒤로 텀블링도 한다. 물구나무 서다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다. 어푸푸 거리며 일어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내 체면은 지켜졌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번에는 바다로 향한다. 아직 수위가 많이 높지는 않지만 스노클링 하기에는 충분하다. 바다로 들어가 마스크를 끼고 물 속을 바라보니 눈 앞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어쩜 색이 이렇게 예쁠까. 너무 깨끗해서 내가 과연 바다를 보고 있는 건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다.


어제 봤던 그 기다란 물고기가 여기서도 보인다. 바닥에도 물고기가 있고, 깊이 안 들어가도 사방에 물고기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산호초에서 처럼 많이 있지는 않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잠시 물고기를 따라가며 논다. 이 넓은 해수욕장에 지금은 나 혼자다. 오전이라 약간 차가운 물이 몸에 기분 좋게 전달된다.


일단 맛만 조금 보고 나온다. 이따 오후에 제대로 즐길 예정이다. 리조트 앞에 샤워시설에서 몸을 간단히 씻고 다시 자리로 와서 책을 보면서 방콕에서 지낼 호텔도 좀 찾아본다.

날이 더워지니 점심 먹기 전에 잠시 쉴까 싶다. 짐을 싸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문을 여는데 잠겨있다. 아까 청소를 하고 잠궜나 보다. 수영복만 입은 채로 리셉션으로  간다. 여기서는 그냥 거의 벗고 다닌다. 너무 안구에 테러를 하고 다니나.


방으로 돌아와서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며 잠시 쉰다. 오늘 점심은 그냥 리조트에서 먹을 생각이다. 아침 먹으면서 메뉴를 봤는데 큰 차이가 안 나는 것이 여기서 먹어도 될듯하다. 어제 괜히 150달러를 환전했나 싶은 게 생각보다 은근히 돈을 안 쓰게 된다. 남으면 막판에 머니 버닝 호화 저녁식사 한번 하지 뭐.

이번에 나갈 때 방수팩을 사용해볼까 싶어서 그 안에 카메라를 넣어본다. 노트4용이지만 카메라도 그럭저럭 들어간다. 설마 물이 세거나 그러진 않겠지? 수영장에서 테스트를 한번 해보고 바다로 들어가야겠다. 일단 세컨백에 던져 넣는다.


12시쯤 돼서 슬슬 나온다. 이거 뭐 쉬다 수영하다 또 쉬고, 한량이 따로 없다. 그러려고 비싼 돈 주고 온 거니 최대한 그래야 하는 것도 맞다. 리조트에 있는 식당으로 오니 아무도 없다. 영업 안하나? 물어보니 비수기라 안 한단다. 그럼 아까 오전에 메뉴 보여달라고 할 때 왜 보여준 건데.


그래도 굶을 수는 없어서 1시쯤 Walking Street로 간다. 가는 길에 어제 다이빙 같이 했던 말레이시아 커플이 셀카봉을 이용해서 열심히 셀카를 찍는 장면을 목격한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니 들키면 안되는 장면을 들킨듯이 민망해한다. 그러더니 왜 메일을 안 보냈냐고 한다. 고프로로 찍은 다이빙 사진을 받으려고 내가 먼저 메일을 보내기로 했는데 오늘에서야 와이파이가 돼서 전송이 가능했다. 그리 얘기해주니 오늘 자기들 간다고 내일에나 보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렴, take your time!

어차피 밥만 후딱 먹고 올 건지라 불친절 No. 1 식당으로 그냥 향한다. 팟타이 배달 오는걸 본 후 이제 태국 음식은 여기서 못 시키겠다. 대충 햄버거 아무거나 시킨다. 정말 각오하고 있음에도 어마어마한 불친절을 다시금 느끼지만 이제는 내성이 생겨서 그러려니 한다.


아, 천하에  다시없을 맛없는 햄버거다. 롯데리아 제일 싼 햄버거보다도 맛이 없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식량이야. 계속 되뇌이며 콜라와 함께 삼킨다. 운동하려면 먹어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100바트 밖에 안 한다. 진짜 돈이 남을 듯하다. 이따 오후에 한번 셈을 해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말이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물이 더 들어왔다. 바다가 정말 아름답다. 그냥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이 바다한테 실례일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바다가 지구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냥 대충 찍어도 모두가 그림이다. 갑자기 이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돌아온다.


리조트의 식당에서는 와이파이가 그래도 조금은 되기에 그곳에 자리를 잡고 일단 글을 좀 쓴다. 여기다 가방을 놓고 물에 들어가면 위험하려나. 여기는 비싼 관광지라 그런지 도둑은 없는 듯해도 조금 불안하다. 하지만 어쨌든 가방을 어딘가에 둬야 한다. 사실 며칠 계속 이런 식으로 놔두고 다녔음에도 문제가 없어서 그다지 불안하진 않지만 만약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또 큰일이다. 에이 몰러.

일단 방수팩에 카메라를 넣고 수영장부터 들어가본다.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물 속에 넣어보니 방수가 정상적으로 된다. 괜찮으려나? 아예 확 들어가서 잠수도 해본다. 괜찮다. 방수팩이 카메라용은 아닌지라 렌즈가 나올 때 약간의 어색함은 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바다로 가보자. 목에 카메라를 넣은 방수팩을 두르고 위풍당당하게 바다로 향한다. 조금 촌스러운 모습이지만 어차피 바다에는 지금 딱 한명만 있는지라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방수팩에 들어간 공기가 카메라를 물에 띄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편하다. 뭘 찍는지 잘 보이지는 않으니 일단 그냥 대충 셔터를 눌러댄다. 이거 잘 찍히고 있는 거는 맞을까.

저놈의 기다란 물고기는 오늘도 또 보인다. 여기 메인 어종인가 보다. 이번에도 따라가며 카메라에 담아보려 노력한다. 얘는 다가가도 도망을 안 간다. 확 잡아버릴까 보다. 구워먹으면 딱 제주 갈치 맛이 날듯한 생김새이다.

잘 찍혔으려나? 궁금해서 카메라를 들고 다시 뭍으로 나온다. 샤워기로 대충 소금물을 씻어내고 자리에 와서 들뜬 마음으로 찍은 사진들을 본다.


푸르딩딩.... 이 사진들은 뭐지. 내가 원했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 사진은 좀 힘들려나. 에잇 김샜다. 뭐 내 마음속에 잔뜩 담아주지 뭐.

일단 좀 쉴 겸 앉아서 내일 방콕에서의 숙소를 좀 찾아본다. 내일은 돈므앙 공항에 저녁 7시 넘어서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6시 반 비행기로 베트남으로 넘어가는지라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공항 근처 숙소의 숙소를 예약해야 할 듯하다. 보통 공항과 가까우면 비싸긴 한데 시간 버리는 것도 그렇고 지하철 왕복 표도 그렇고 그냥 근처가 더 효율적일 듯하다. 게다가 어차피 바트 남겨봤자 쓸데도 없다.

돈 계산을 좀 해보려 하는데 살짝 화장실을 갔다 오고 싶어 진다. 물을 자꾸 봐서 그런지... 숙소에 갔다 오기는 영 귀찮고 그냥 스윽 바다에 한번 들어갔다 온다. 좋은 영양분을 바다에 제공하고 왔다. 이것이 진정한 자연인으로 사는 법!

자, 이제 몸도 편해졌으니 돈 계산을 좀 해보자. 어제 150달러 환전한 걸 포함해서 현재 남은 바트가 4,350바트이다. 이중 2,750바트는 호텔비, 스노클링 대여비, 그리고 내일 공항까지 가는 비용으로 빼야 한다. 거기에 오늘 저녁 식사로 대략 300바트를 빼놓는다. 그러면 정확히 1300바트가 남는다. 이걸로 내일 점심, 저녁, 그리고 숙박을 해결하면 된다. 나쁘지 않다.

어떻게 쓰면 이 돈을 알차게 잘 썼다고 소문 날까. 오래간만에 태사랑에 들어가서 검색도 하고 여기저기 리뷰도 본다. 결국 숙소는 공항 근처에 있는 750바트짜리 'Gems Park'로 결정한다. 좀 비싸긴 한데 남은 돈을 어차피 다 쓰는 거니 괜찮다. 대충 찾아보니 갈 때는 택시를 타고 150바트이며, 올 때는 호텔에서 운영하는 50바트 짜리 셔틀이 있다. 그러면 대충 1000바트라고 치고 나은 300바트로 점심 저녁을 해결하면 된다. 꼬리뻬가 아니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는 예약을 할 차례이다. 카드가 없으니 아고다 같은 사이트는 못 쓴다. Booking.com을 이용한다. 얘는 좋은 게 예약할 때 돈을 안 낸다. 대신 취소 수수료는 있는 거 같다. 카드 등록은 해야 하기에 노여사 카드를 살짝 등록한다. 대금은 내일 가서 지불하면 되니 나한테 딱이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서도 상황에 따라 이용해야겠다.

리조트의 식당에 앉아서 계획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우당탕탕" 소리가 난다. 뭐지? 옆에 공사장을 쳐다보니 사람 둘이 바닥에 떨어졌다. 헉. 급하게 달려가려 하니 이미 사람들이 달려오기에 지켜본다. 꽤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3층 정도 높이인데 괜찮으려나. 한 명은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한 명은 조금 심하게 다친 듯하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혀서 안쪽으로 옮긴다.


인력이 저렴한 나라에서는 안전불감증이 심하다. 계속 지켜 봤는데 저 높이에서 안전장비 없이 아슬아슬하게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불안 불안했다. 방금 다쳤는데 또 금세 한 명이 올라가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사람이 제일 중요한데 사람 값이 싸지면 사람들이 그 목숨 값도 싸다는 심각한 착각을 하기 시작한다. 개개인의 생명은 절대 돈으로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내 삶과 여행이 의미가 있듯이 모든 개개인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영화이고 드라마다.

요즘 Good Earth 책을 보면서 한 인간이 자본을 어찌 얻게 되고, 그 자본으로 또 계속 다른 자본을 축적하는지를 한눈에 보게 되었다. 괜히 노벨상을 탄 작가가 아니다. 책에 있는 내용 중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면 세상이 바뀐다."라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부의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얘기와도 같은 얘기일 거다.

'21세기 자본론'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된 것이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한다. 여전히 부자는 부를 더 축적하고 있지만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가난한 자도 그럭저럭 부를 얻고 있기에 혁명까지 가지 않게 되는 거다. 혁명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난다. 굶주리지 않고 눈앞에 큰 불만이 없으면 사람들은 굳이 어려운 생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가 부를 가져오는 것이 노동이 부를 가져오는 것 보다 과한 것은 분명 문제가 된다. 불평등은 계속 심화될 것이고 언젠가는 곪은 부분이 터질 수밖에 없다. 뭐 요즘은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수정 자본주의 등으로 이런 문제가 많이 없어졌다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이 보인다.

대학교 졸업할 때 내 꿈은 끝없는 부를 축적해서 내 자신이 부를 선회하는 역할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현재의 이데올로기를 바꿀 대체안이 없다면 전체가 아닌 개인이 변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갑부들이 그러하듯 우리나라에서도 부를 선회시키는 일종의 '부의 풍차' 역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업 망하고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의미 없다. 아 부질없어라. 그나저나 어째 여행 중에 갈수록 더 빨갱이가 돼가는 거 같다. 난 중도좌파를 지향하는데. 흠.

이것저것 하다 보니 4시가 다가온다. 자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바다를 즐겨봐야겠다. 가방까지 방에 놔두고 오로지 카메라와 스노클링 장비를 들고 바다로 향한다. 5시까지는 나오지 않을 테다!

비장한 각오로 바다로 향한다. 4시지만 아직 바닷물이 따뜻하다. 그새 물이 좀 빠졌는지 아무래도 아까보다는 수위가 낮아졌다. 뭐 조금 더 걸어들어가면 된다.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니 물이 허리까지 오고, 대기하고 있던 마스크와 호흡기를 착용한다. 장비를 착용했으니 물 속으로 들어간다.


아까보다 물고기는 더 많아졌다. 조금 들어가니 왠 물고기 한 마리가 보이는데, 이놈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다가가면 자꾸 내쪽으로 몸을 휙 돌리면서 오히려 나를 위협한다. 그렇다고 자기 집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이런다. 참 까칠한 놈이다. 그냥 이 바다를 네가 다 가져라 이놈아. 


조금 가니 아까 그 물고기와 같은 종류를 또 마주친다. 얘도 약간 그런 성향이 있긴 한데 아까 애처럼 심하지는 않다. 개인차, 개견차, 개묘차가 있듯이 개어차도 있나 보다. 개묘차야 많이 체험했지만 개어차는 또 신선하다. 얘네도 성격이 있다는 거에서 자연의 신비를 체험한다.

앞에서 그러고 놀고 있는데 어떤 현지인 같이 생긴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건다. 어이쿠 놀래라. 옆에 있는지도 몰랐다. 생뚱맞게 나보고 '네모'가 저기 있단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네모난 물고기가 있다는 말 같다. 근데 내가 한국인인건 어찌 알았지? 가이드인가?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따라오란다. 뭐 좋은 구경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 없다. 장비를 다시 착용하고 아저씨를 따라 깊은 곳으로 간다. 발이 안 닿을 정도의 깊이지만 뭐 그런 거야 익숙하다.

조금 가니 산호초 같은 게 나온다. 아 여기 이런 게 있었나? 아저씨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니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 '네모'가 아니라 '니모'였구나!



이런 볼만한 곳이 지천에 있었는데 몰랐다니. 아저씨한테 넙죽 절이라도 해야겠다. 이 아저씨 내가 카메라 들고 있으니 잠수해서 포즈 잡고 난리 나셨다. 근데 사진을 달라는 얘기도 안 하신다. 일단 포즈를 잡으니 난 찍는다. 순간 무슨 찍사가 된 느낌이다.


아저씨를 따라 돌아다녀보니 여기가 바로 스노클링의 보물 같은 곳이다. 산호초를 따라 온갖 어종들이 보인다. 정말 자그마한 애들도 있고, 해마, 커다란 놈, 이름을 알 수 없는 희한하게 생긴 놈, 색깔이 알록달록한 놈, 여하튼 별의 별 애들이 다 있다. 생각해보니 처음에 수영하러 들어왔을 때 수영에 방해된다고 투덜거렸던 그 돌멩이들이 다 산호초였나 보다. 이 귀욤이들의 집을 가지고 내가 뭐라고 투덜거렸구나. 미안하다. 근데 너네는 썰물 되면 다 어디로 가는 거니?

아저씨랑 다니니 좀 정신이 없어서 살짝 거리를 둔다. 이제 좀 천천히 즐기면서 다닌다. 아 멋진 장면이 너무 많다. 사진을 마구 찍지만 내가 절실히 아끼는 리코 GR은 단 하나의 단점이 있으니 바로 포커스가 엉망이라는 거다. 그런 놈에게 비닐까지 씌우고 물 속으로 들어갔으니 당연히 초점이 잘 잡힐 리가 없다. 일단 찍고 본다. 100장 찍으면 한장은 건지겠지.


한 곳에 니모 3 가족이 이웃처럼 지내고 있는 곳을 발견한다. 그 옆에는 또 이름 모를 희한한 애들이 성게 주위에 살고 있다. 일종의 서민용 아파트 같은 건가? 그 앞에서 애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가족에서 니모 아빠가 자꾸 나를 공격한다. 야 난 그냥 보는 거야. 아마도 자기 가족을 지키려는 거 같다. 하지만 웃긴 게 또 멀리 나오지는 못한다. 딱 앞마당까지 우렁차게 으르르 하며 나오다가 선을 지나면 깨갱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거 은근 재미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스트레스를 주면 안될 거 같아서 옆에 다른 가족으로 넘어간다.


여기는 니모 아빠가 조금 소심하다. 슬쩍 나오는 시늉만 하다가 쫄래쫄래 돌아간다. 진짜 개어차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증명됐다. 다른 쪽에 있는 니모가족도 보니 아빠가 그리 적극적으로 수비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아빠를 이 시대의 가장으로 임명하노라.

산호초가 워낙 많으니 좀 가다 보면 니모는 그냥 마구 나온다. 한 곳에서는 니모 어른은 없고 애기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아원 같은 건가. 안쓰럽다. 가까이 가도 위협도 못하고 그냥 그 안에 숨는다. 쟤네 근데 나오지도 않으면 밥은 뭘 먹는 걸까. 먹이라도 주고 싶지만 뭘 먹는지도 모르고, 이곳에는 먹이 주는 것도 불법이기에 넘어간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여기, 봐도 봐도 끝이 없다. 다이빙 보다 여기가 천배 만배 볼만하다. 물론 다이빙은 거시적인 매력이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광경은 여기만으로 충분하다. 파타야 해변이 별로라고 했던 말은 완전히 취소한다. 수영하기에도 좋고 구경하기에도 좋은 천연의 해수욕장이다. 첫날은 썰물이라 진짜 일부분만 체험했다.


근데 이 아저씨 사람이 너무 좋다. 자꾸 사람들을 부른다. 뭐 같이 보는 거니 나쁠 건 당연히 없지. 하지만 자꾸 사람이 많아져서 다른 곳으로 슬그머니 피한다. 사람 많은 곳은 어디든 싫다.



다른 곳도 뭐 볼게 많다. 꼭 니모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큰 물고기도 발견하고, 해마도 자세히 좀 관찰한다. 물고기 하나를 잡고 쭉 지켜보면 진짜 이들의 성격이 느껴지는 거 같다.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 보니 어언 5시다. 시간이 늦은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새 물이 다시 빠지기 시작한다. 너무 빠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게 잘못하면 수면이 낮아져서 산호초 위를 걸어서 지나가야 할지도 모르기에 가는 길이 어려워진다.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가고 나 혼자 있다. 언제들 갔지. 나도 아쉽지만 뭍으로 향한다.


해변으로 돌아오지만 나가자니 뭔가 아쉽다. 잠시 앉아서 바라본다. 아 정말 아름답다. 여기는 태국이니 그래도 다시 한번 올 수 있겠지? 이런 곳은 노여사와 함께 와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든다. 휴양지라 그런가 보다. 여기도 좋지만 사실 노여사와는 무인도로 알려진 꼬수린으로 다음번에 꼭 가보고 싶다. 바다거북이가 해변을 거닌다는 그곳! 한 곳만 노린다면 5일 정도의 휴가로도 충분히 올 수 있으니 크게 아쉬워하지 말자.


옆에 커플이 해변에서 그냥 수영만 하고 놀고 있는걸 보니 지금이라도 물안경을 건네주고 저 안쪽에 스노클링을 해보라고 하고 싶어진다. '파타야 해변을 왔으면 꼭 스노클링 장비를 대여해서 산호초를 찾아보도록!' 어딘가에 써놓고 싶다. 물론 방콕 근처 파타야 가서 니모 찾으면 밤새 찾아도 안 나올 거다. 꼬리뻬에서의 파타야에 밑줄 쫙!

이제 그만 돌아가자. 사진도 궁금하다. 5시가 넘었으므로 수영장으로 안 가고 그냥 바로 방으로 와서 씻는다. 소금물은 잘 씻어야지 안 그러면 독이 오른다. 수영복도 잘 빨아서 널어놓는다. 내일 아침에 수영을 하게 될까? 이게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수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에서 수영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후딱 씻고 엄청난 기대심을 품고 사진을 본다. 엄청나게 많이 찍었다. 지금 용량 부족으로 허덕이는데 큰 일이다. 묵묵히 혼자 일하고 있는 내 방의 월E, 나스에게 사진을 백업해야 지우는데 와이파이가 이 모양이니 괴롭다. 핸드폰도 8기가, 카메라도 8기가라 하나 찍고 하나 지우는 하루살이 신세다.

사진은 그래도 진짜 내 말 맞다나 100장 중에 한장은 건지는 듯하다. 총 건진 사진이 10장 정도는 될러나 모르겠다. 중간에 동영상으로 잠깐 찍은 게 있는데 얘는 초첨이 의미 없으니 그나마 잘 나왔다. 수중에서 찍을 때는 핸드폰 카메라의 스냅샷으로 찍는 게 가장 좋은 거 같다. 그래도 일단 사진을 7만 원짜리 스마트폰으로 전송하며 침대에 앉아 글을 쓴다. 편한 곳에서 시원하게 모기 걱정 없이 글 쓸 때가 글도 제일 잘 써진다.


자 꼬리뻬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먹으러 가보자꾸나. 6시가 되니 살살 배고 고파와서 Walking Street로 향한다. 아침은 제대로 먹었지만 점심은 맛없는 버거로 간단히 해결했고 그 이후 하루 종일 수영을 빡세게 했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하다.


아직 7시 전이라 그런지 해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다. 저녁의 꼬리뻬 해변은 묘하게 푸른 색을 띤다. 에메랄드빛 물 때문이겠지. 커플 단위 또는 가족 단위로 삼삼오오 모여 해변에 앉아서 노닥이고 있다.

Walking Street로 들어가니 역시 초입에 있는 다이빙 샵에서 미녀 강사가 홀로 외로이 앉아있다. 지나가면서 살짝 보니 눈이 마주친다. 인사를 한다. 미녀강사 갑자기  반가워하더니 나보고 뭐라 한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오늘 저녁 다이빙은 자기랑 할거란다. 무슨 소리지. 나 오늘 다이빙해? 공짜야? 금방 다른 사람하고 헷갈렸다면서 여기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헤헤 웃는다. 하긴 하루에 지나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 이해한다. 수 많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여행지의 사람들은 정을 나누기도 참 고달프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Walking Street지만 그다지 감흥이 없다. 이 거리는 처음부터 그다지 정을 많이 느끼지 못했다. 헤매지 않고 바로 어제 갔던 Rainforest 바로 간다. 300바트 내로 해결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맛도 좋았어서 굳이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스페인 바텐더분은 나를 못 알아보는 듯하다. 아님 알아보는데 그냥 모르는척하는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하루에 한두 명을 보는 게 아닐 테니 이해한다. 조용히 앉아서 맥주 한 병과 음식을 시킨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매콤하게 해 달라고 한다. 맛있겠지 뭐.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키보드를 핀다. 원래 내일 한국으로 가기로 되어 있어서 비행기를 노쇼해야 하는데 괜찮은지 문득 걱정된다. 인터넷은 여기서 안되니 노여사한테 한번 알아봐달라고 한다. 상관없겠지?


음식은 역시나 맛이 좋다. 헌데 이틀을 같은 곳에서 먹으니 재료가 슬슬 눈에 들어온다. 야채는 당근, 양배추 등 쓰는 것만 쓰는 거 같고, 고기도 종류가 같다. 메뉴에 따라 양념만 다르게 나온다. 이렇게 원가절감을 하여 메뉴 가격을 저렴하게 가져갈 수 있나보다. 매일 먹으면 질리겠지만 하루 이틀 있는 여행자한테는 나쁘지 않다.

창맥주 하나까지 해서 160바트를 지불하고 나온다. 300바트 예산이니 아직 140바트나 여유가 있다. 오늘은 간식으로 팬케이크를 먹어볼까? 이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유혹하는 할머니가 항상 궁금했는데 한번 가봐야겠다.

좀 올라가니 역시 뭐라 뭐라 하시면서 날 부른다. 맨날 무시하고 지나갔는데 오늘은 실제로 먹을 거니 다가선다. 다가서는 나를 보시더니 더 신나서 뭐라 뭐라 하시는데 미안하지만 못 알아듣겠다. 뭐 먹지? 언제나 그렇듯이 "뭐가 맛있나요?"라고 물어보니 "아, 치즈 팬케이크?" 하시더니 바로 제조에 들어가신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들리지. 뭐 어때. 그래, 치즈 먹자. 메뉴를 보니 40바트라 가격은 괜찮다.


뚝딱뚝딱 만드시는데 체다치즈 슬라이스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넣으신다. 체다 치즈라, 이게 아닌데... 옆에 믹스드후르츠를 주문한 사람들을 보니 바나나에 코코아 안에도 긁어서 넣으면서 같은 40바트다. 아까 잘못 알아들으신 게 아니라 원가가 가장 싼 걸로 유도하신걸까.


금방 나와서 먹으면서 내려간다. 맛없다. 저번에 노여사와 함께 동남아 왔을 때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서 산 건데 맛없다. 진심 맛없다. 할머니가 문제인지 치즈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맛 없다.

내려오는데 다이빙할 때 처음에 인사를 나눴던 말레이시아 여인과 홍콩 남자 커플과 마주친다. 나는 모르고 지나갔는데 뒤에서 날 잡아서 발견한다. 역시 좁은 동네에 있으면 사람들을 꼭 한두 번은 만나게 된다. 가는 곳이 뻔하니 어쩔 수 없다. 미얀마에서도 두세 번 마주친 사람들이 있고, 인도라는 큰 나라에서도 서너 번씩 마주치는데 이 작은 섬에서 안 마주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밥을 먹었냐고 나에게 묻는다. 아 미안, 먹었다고 한다. 먹었어도 괜찮으니 가서 얘기나 하잖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날 원하는 애들은 처음인데? 뭔가 신기하게 반갑다. 원래 8시면 귀가하지만 오늘은 좀 늦게 가지 뭐. 100바트의 여유도 있으니 맥주 한 병 더 마시면 딱이겠다.

식당에 들어가서 얘네는 밥을 시키고 나는 60바트 맥주 하나를 시킨다. 그래도 아직 원래 저녁 예산에서 40바트가 남았다. 밥 먹으면서 얘기를 좀 나누니 남자애는 8시 반에 야간 다이빙을 간단다. 아까 미녀강사가 헷갈린 게 너였구나. 둘다 동양인이니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다.

뭔가 이 들하고 말이 잘 통한다. 내가 노여사와 그랬듯이 얘네도 인도에서 만나서 그런 걸까? 조금 얘기를 하다 보니 남자애는 다이빙을 갈 시간이다. 같이 일어날까 하는데 남자애가 둘이 더 얘기하라고 한다. 그럼 그럴까나? 뭔가 말이 잘 통해서 그런지 나도 의외로 좀 더 있고 싶다. 여행 와서 이런건 또 처음인 거 같네.

남자애가 가고 말레이시아 여자애와 둘이 여러 얘기를 나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갠지스 강을 헤엄쳐서 건넌 얘기를 하니 역시나 놀란다. 그때 관광객들이 강이 더럽다고 안전한 배 위에 올라탄채, 수영하고 목욕하는 현지인들을 관광하듯이 구경하는 것이 너무 꼴보기 싫었다. 물에 손이 조금만 닿아도 병이라도 걸릴 듯이 행동하는 모습들에 억화심정으로 날을 잡고 강에 들어갔다. 내가 강에 들어가자마자 물에 있던 모든 인도 현지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고 배도 공짜로 태워줬던 기억이 난다. 나를 보고 한 서양인 친구들도 같이 물에 뛰어들었었다. 사람은 다 똑같다. 사람은 관광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이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얘기가 묘하게 잘 통한다. 30살의 어린(?) 아이인데 얘기하다 보니 인생 상담, 연애 상담, 진로 상담까지 해주게 된다. 장기 여행자에게 대놓고 중독적인 장기 여행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라고 얘기를 해도 자기도 그리 생각한다고 인정하는 게 쿨하다. 나 또한 나의 얘기를 한다. 이번 여행에서 많이 생각 중인 현재를 살기, 자본주의 안에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법, 죽음에 대한 거까지 정말 포괄적으로 얘기를 나눈다.

이 친구, 내가 노여사 얘기를 할 때면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난다고 한다. 그런가? 한 달 안 봤음에도 신경조차 안 쓰는 여자친구가 뭐가 좋다고. 나보고 인연인 줄 어찌 아냐고 묻는다. 난 운명을 안 믿는다. 인연은 자기가 만드는 거라는 얘기를 한다. 좀 생뚱맞지만 운명은 안 믿되 평행우주를 믿는다고 한다. 선택지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어떤 선택이든 자기 본연의 선택을 하면 된다. 운명과 우연은 수많은 우주 중에 하나일 뿐 그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내 길을 내가 선택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 선택이 맞다면 평행우주안의 모든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모두 와 있을거다. 뭔가 즉흥적으로 생각난 평행우주의 나만의 해석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길래, 노여사가 나한테 가끔 해주는 말을 한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믿음을 가지고 얘기해준다. 걱정마, 넌 절대 굶어 죽지 않을 거야. 직업도 무엇이든 찾게 될 거야. 결혼을 원한다면 결혼도 하게 될 거야. 걱정한다고 더 나아지는 건 없어. 여행에서 현재에 충실하듯, 현실에서도 그냥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돼. 이건 얘한테 한 얘기일까 나한테 한 얘기일까.

둘이서 2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여행 다니다 보면 마음 맞는 사람은 항상 좀 막판에 만나는 느낌이다. 인도가 다른 나라보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이유가, 동남아에서는 나라를 이동하며 다니기에 일정 변경이 쉽지 않지만 인도는 한나라를 3달 이상 다니는 자들이 대부분이기에 마음만 맞으면 바로 일행이 된다. 이 친구도 다른 상황에서 만났으면 일행이 됐을 수도 있겠다 쉽다. 하지만 여자라 안돼, 미안.

가게가 문을 닫는 듯해서 일어난다. 야간 다이빙은 끝났으려나? 여자애는 원래 남자를 기다리며 마사지 받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나 때문에 못 받은 거 아니냐니까 훨씬 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어서 오히려 좋았다고 대답해준다. 사람들과 나누는 이런 대화는 좋다.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쓸데없이 술 마시고 하루 만에 이별하는 그런 만남이 싫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포에서의 프랑스 친구 두 명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숙소까지 데려다 준다. 데려다 준다고 하기에는 어차피 내 숙소 가는 길이다. 여행에서 처음으로 내 페이스북을 먼저 알려준다. 오늘의 대화로는 연락처를 주고받을만하다. 노여사를 너무 궁금해하기에 한국 오면 보여준다고 한다. 너도 지금 그 남자가 네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과 잘 만나기를 바래.

숙소로 돌아오니 10시 반이다. 의도하지 않게 꽤 늦은 귀가를 했다. 오늘은 사실 큰 이벤트 없이 지낼 예정이었기에 여행기에 쓸만한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꽤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정말로, 아무리 평온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글로 적으면 꽤나 멋진 드라마가 되는 거 같다. 세상에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듯이, 여행에서도 단순한 하루는 없다. 내 공식적인 31일 일정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끝났다. 내일부터는 '덤'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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