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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Sep 25.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57

@ Hoi An, Vietnam

에어컨 방을 괜히 온 걸까. 낮에는 더운데 밤에는 오히려 추워서 에어컨을 결국 끄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래도 일찍 잠이 든 탓에 6시쯤 잠에서 깨지만 딱히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안 든다. 정말 아무런 일정도 목표도 없는 하루다. 천천히 하루를 시작해보자.

8시쯤 되어서 밖으로 나서 본다. 드디어 어제 모든 옷을 빨래로 맡기는 바람에 옷은 달랑 하나 밖에 없다. 어제 입었던 같은 옷이지만 뭐 그런 게 하루 이틀인가. 이틀 남은 이제, 더 이상 빨래도 안 하려면 '땀복'을 하나 지정하고 어차피 땀 흘릴 거 같을 때는 그냥 주야장천 그 옷만 입어주는 게 효율적이지 싶다. 더러운 거 아니다, 효율적인 거다. 서울 갈 때는 데이브가 준 옷을 입고 갈려고 이미 정해놔서 아껴놓고 있다.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천천히 걸어본다. 혹시나 싶어 오토바이 빌리는걸 물어보니 5달러다. 자전거는 3만 동이다. 하지만 오늘은 빌릴 생각이 없다. 내일은 혹시 해변으로 가서 수영을 하기 위해 빌리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동네를 이 두발로 좀 돌아다녀봐야겠다.

어제 '빠이에서 만났던 베트남 여인'의 조언을 들어 Phuong이라는 빵집을 찾아간다. 헌데 나는 반미는 왜 계속 찾아가서 먹게 되는 인연인 걸까. 이거 자리 잡고 먹는 음식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면서 먹는 그런 가벼운 음식 아니었던가. 첫 번째 반미가 실망이었어서 그런지 큰 기대는 그다지 안든다.

이곳의 거리는 마음에 든다. 길거리 현지 식당들도 즐비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부자인데, 이런 서민들이 먹는 곳에서 먹어도 되려나. 한 끼에 무려 만원을 쓸 수 있는 진정 부자이다. 부자답게 어깨를 잔뜩 올리고 길을 걷는다.

길을 좀 헤매면서 걷고 있는데 사람이 몰려있는 반미집이 보인다. 이런 반미집이 한 동네에 두개 있을 수는 없지. 가까이 가보니 역시 그 반미집이다. 근데 여기 진짜 유명한가 보다. 여행자들이 아닌 동네 주민들이 잔뜩 줄을 서서 사가고 있다. 아무런 기대를 안 하던 마음이 갑자기 들뜨며 같이 줄을 선다.

고기가 들어간 반미와 두부가 들어간 반미가 있다. 고기는 언제나 진리다. 고기 들어간 반미와 옥수수우유라는 정체모를 우유를 하나 산다. 합해서 35,000동이다. 다들 포장해 가지만 나는 구석에서 자리 잡고 앉아서 먹어본다.

맛있다. 첫 번째 그 반미와 비교도 안되게 맛있다. 어떤 유럽의 유명 프로에서 이 식당을 소개하면서 베트남 최고의 반미집이 호이안에 있다고 했다던데, 허언이 아니었다. 옥수수 우유도 두유와는 다른 매력이 있고 이 반미와 무척 잘 어울린다. 아주 만족스럽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마친다. 헌데 결국 한끼로 2달러도 안 쓰고 말았다. 8달러의 여유가 추가로 더 생긴다. 거지처럼 살았어서 그런지 부자처럼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식사를 나와서 모닝 동네 트레킹을 해본다. 딱히 목적지 없이 그냥 걷는다. 이 동네에는 유독 맞춤옷점이 많이 보인다. 맞춤양복만 있는 게 아니라 각종 옷들이 모두 맞춤이다. 베트남의 동대문 같은 곳일려나 싶다.

걷다 보니 다리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여기 바다는 어디 있는 건지? 쭉 걷다 보면 뭔가 나올려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마냥 계속 걷는다. 중간에 괜찮은 카페가 몇 개 보인다. 나중에 돌아오면서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한참을 가니 이제 주변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냥 길만 남아있다. 햇볕이 강렬해졌다. 이제 돌아설 때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오다가 괜찮은 카페가 보여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할머니 한분이 혼자 있다. 가서 '카페스이다'를 달라고 얘기 한다. 베트남의 성조를 잘 굴려서 얘기하니 할머니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시더니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신다.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쓴다. 그늘이지만 좀 덥다.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날씨에 저 긴팔 옷을 입고 다니는 걸까? 미스터리다. 앉아있으니 젊은 처자 두 명이 카페 앞에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들어온다. 한 명은 반팔 위에 청자켓을 걸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긴 스웨터에 장갑까지 낀채로 온몸을 그냥 칭칭 감았다. 베트남에서 쉽게 보이는 풍경이다. 베트남인들은 모두 뱀파이어다. 타는 게 무서운 건 알겠는데, 정말 안 더울까? 여자들의 미에 대한 열정은 정말 무서울 정도다.

카페스이다의 단맛에 이제 좀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연유의 그 강한 단맛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일단 얼음이 좀 녹기를 기다린다. 연유맛도 그렇지만 커피맛이 너무 강해서 얼음이 좀 녹고 먹어야 먹을만하다. 이것도 한국 가면 그리워지겠지?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향한다. 사실 뭘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막판 여행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그냥 쉬자. 쉬는 것도 여행의 일부겠지. 그래도 오기는 있어서 지도를 안 피고 숙소를 찾아가본다. 아무리 막판이라도 이 정도 모험은 몸에 배었다.

길이 익숙한 거 같은데 익숙하지 않다. 좀 헤매려나. 좀 헤매었으면 좋겠다. 지쳐 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활력을 줄 무엇인가가 없을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너무 일찍 여행을 접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 이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가.

그래도 조금은 헤맬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내공이 쌓여서인지 생각보다 쉽게 숙소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2만 동 주고 파인애플도 두개 사온다. 저녁에 출출할 때 먹어야겠다. 뭐 땀은 충분히 흘렸으니 방에 가서 씻고 좀 쉬어야겠다.

방에 들어왔는데 전원이 안 들어온다. 물어보니 차단기를 내렸단다. 하긴 내가 에어컨을 키고 다니거나 할 수 있으니 그냥 차단을 내려버리는 게 비용 감소에 도움이 될 거다. 얘기해서 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에어컨을 킨다. 날씨가 선선해서 저녁에는 에어컨 틀일이 없으니 낮에 최대한 활용해야겠다. 이틀간 숙소에 있는 시간이 꽤 될듯하니 그래도 에어컨방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여행기를 올린다. 올리면서 난생 처음 온라인상의 사람들에게 이 여행이 끝나는 날에 만나자는 제의를 해본다. 이 여행기에 내 전부를 담아서인지 이걸 본 사람들은 왠지 남 같지 않다. 그래도 잘하는 건가 걱정은 된다. 뭐 근데 어차피 호응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는 거지. 언제 그런 고민하고 일 벌렸던가. 없으면 없는 데로 오랜만에 친구들 보면 되고, 있으면 있는 데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면 그뿐이다.

마음이 울적하니 괜히 노여사한테 심퉁이다. 남친 너무 관리 안 하는 거냐고 하니 무슨 소리냐며,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여친을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오히려 뭐라고 한다. 두 달이나 떠나 있었는데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없어서 섭섭해서 툴툴된 건데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인다. 어쨌든 간에 난 놀고 있고, 그녀는 일하고 있으니 내가 툴툴될 입장은 아니다. 이번 주면 어차피 만나게 된다.

게으르게 뒹굴거리가다 1시 반이 넘어서야 점심을 먹으러 나온다. 아까 오면서 보니 여기저기 로컬 식당들이 많이 보였다. 그냥 그중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가야겠다. 가는 길에 여행사에 한번 들려본다. 내일 마지막으로 투어를 하나 할지 말지 고민된다. 투어를 물어보니 아침 8시에 출발해서 한 섬으로 가서 2시에 돌아오는 게 21달러 정도다. 조금 덜 먹고 하면 감당은 될 돈인데, 이걸 할지 말지는 잘 모르겠다. 헌데, 여행사에서는 손님을 받기 싫은 걸까? 극도의 불친절함을 겪는다. 거의 쫓아내는듯한 눈빛을 뒤로 하며 나온다. 그래, 물어봐서 미안하다.

식당을 찾아 헤맨다. 큰 길에 있는 유명해 보이는 식당들 메뉴를 보니 로컬 음식인 Lau Cao가 5만 동이다. 도둑놈들. 요즘은 확실히 론리플레닛이 아닌 TripAdvisor가 대세인 게 다들 거기 나왔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유명한 곳은 싫다.

구석에 아무도 없는 빈 식당이 보인다. LauCao가 3만 동인걸 확인하고 자리에 앉는다. 웬 볶음 국수 3만 동짜리와, 코코아 3만 동, 그리고 옥수수 뭐시기를 1만 동을 주문한다. 이제 먹는데 돈 안 아낄 거다. 근데 내가 주문한 것 중에 들어보면 메뉴가 하나도 없다. 먹어보면 알겠지.

국수는, 뭔가 우리나라의 비빔냉면과 비슷한 느낌이다. 거기에 제육이 얹혀있다. 나쁘지 않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과자는 안 들어가 있다. 코코아는 그냥 코코아고, 옥수수 뭐시기는 약간 아이스크림 같은 거다. 헌데 코코아는 몇 모금 빠니 바닥이 드러난다. 씨엠립에서 먹었던 코코아의 반도 안된다. 이건 좀 돈이 아깝다.

앉아있으니 다른 현지인들이 우루루 들어온다. 주문해서 먹는 걸 보니 뭔 과자 같은 거를 반찬과 같이 먹는다. 여기는 저 과자가 메인인가 보다. 저건 내 취향이 아니다. 밥과 간식을 철저히 구분하자는 가치관이다.

덥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사장님이 뭔가를 트니 사방에 작은 물방울이 옅게 퍼진다. 근데 이게 은은한 안개가 아니라 진짜 가랑비가 오는듯한 정도의 물 굵기이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이거 위생적이긴 한 거야? 핸드폰이야 저렴하니 신경 안 쓰지만 카메라는 가방 안에 슬쩍 집어넣는다. 이미 물 많이 맞은 카메라다. 더 이상 맞게 할 수는 없다.

점심을 다 먹고 나오니 2시다. 좀 걸어볼까. 일단 강가길로 가서 한번 천천히 걸어본다. 확실히 강가 쪽이 여행자들이 집중되는 곳인가 보다. 유럽풍의 카페들이 늘어서 있고, 강 위에 레스토랑들이 눈에 띈다. 한 입간판을 보니 강을 유람하며 식사를 하는 게 20달러라고 적혀 있다. 이걸 한번 해볼까?

밥을 조금 저렴하게 먹으면 20달러 정도의 여유가 생길 듯하다. 지금 가진 돈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옵션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하루 투어를 하는 것, 두 번째는 수영장이 있는 호텔로 옮기는 거, 그리고 마지막은 정말 거한 식사를 하는 거다. 사람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 첫 번째 옵션은 재끼고, 남는 건 두 옵션이다. 이건 생각 좀 해봐야겠다.

뭘 할까. 그냥 들어가기는 좀 그렇고, 호이안에서의 시티 트래킹을 해보자 마음 먹는다. 트레킹이 꼭 정해놓은 길로만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지금이 2시니 한 시간을 무작정 걸어갔다 돌아와보자. 트레킹이 별건가, 그리하면 2시간 트레킹을 한 셈이 되는 거지. 

도시에서 벗어나는 방향쪽으로 한쪽을 정하고 걷기 시작한다. 강가길이 보이길래 그쪽으로 접어든다. 10분 걸으니 관광객의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10분 더 걸으니 호객하는 상인들의 소리가 없어진다. 10분을 더 걸어가니 사람의 소리가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만 고요하게 들린다. 그리고 거기서 10분을 더 걸어가니 인위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소리가 드디어 들려온다.

메인타운에서 30 분여를 벗어나서 베트남인들이 그냥 살아가는, 관광지가 아닌 진짜 동네와 마주한다. 이곳에서는 외국인도 안 보이고 상점도 안 보인다. 강가를 따라 걷던 길이 사라져서 안쪽으로 들어선다.

한 바 같은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당구를 치고 있다. 포켓볼은 아니고 우리나라 3구와 비슷한데 중간에 무엇인가가 장애물들이 잔뜩 있다. 당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스포츠 아니던가. 가만히 지켜본다. 지켜보는 나를 다른 젊은이들이 멀뚱멀뚱 지켜본다. 늘쌍 그러듯이 나만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게임의 법칙을 모르겠다.

돌아서서 조금 가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가보니 유치원이다. 고개를 스윽 들고 안에를 쳐다보다 유치원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다. 또 나만의 그 그윽한 미소를 지어준다. 이분은 같이 웃어주신다. 웃음이 돌아오니 기분이 좋아진다.

확실히 나는 독립적이지 않다. 오늘 뭔가 계속 우울했던 기분이 이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쉽사리 풀려버린다. 왜 그런지는 나도 설명을 못하겠지만 그냥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의 안정을 준다. 예전에 어떤 분이 그랬었다. 내 가장 큰 매력은 '인간적인'거라고. 이게 내 가장 큰 장점일까? 그렇다면 이걸 살리려면 난 뭘 해야 할까.

문득, NGO 단체를 좀 알아볼까 싶은 생각도 든다. 돈은 많이 못 벌겠지만 내 능력을 쓸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UN 같은 곳도 좋지만, 이건 경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쉽지 않겠지. 사실 그냥 사업을 하고 싶은데 이건 자금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 이 생각은 한국 가서 하자. 한국 돌아가서 할 생각도 좀 남겨놔야 심심하지 않지.

이제 다리가 아파온다. 방향을 돌려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봤던 호텔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슬쩍 보니 수영장이 보인다. 여기는 마을 중심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고 바로 앞에는 강이 있다. 여긴 얼마나 할까?

들어가서 물어본다. 1박에 30달러다. 역시 비싸다. 하지만 나 혼자니 좀 깎아줘. 이리저리 흥정을 해서 60만 동까지 내린다. 물론 그래도 비싸지만 어차피 지금 숙소가 12달러니 18달러 더 내는 거다. 결국 투어 가는 거와 같다. 이곳에서 조용히 마지막 날까지 쉴 수 있다면 좋을거 같긴 하다. 물어보니 떠나는 날 체크아웃 이후에도 수영장에서 놀다가 샤워하고 가도 된단다. 근데 돈이 어떻게 되지. 숙소 가서 계산 좀 해봐야겠다.

한 시간을 갔으니 다시 한 시간을 걸어서 돌아온다. 뭐 당연한 거다. 돌아오는 길에 과일 셰이크, 신또를 파는 곳을 발견한다. 저번에 어떤 분이 아보카도 신또를 추천해줬던 기억이 난다. 과연 아보카도로 만든 과일 주스가 맛이 있을 수 있을까?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돋아서 한번 사본다. 얘도 2만 동이다.

싱싱한 아보카도를 자르더니 서너 개를 긁어서 믹서기에 집어넣는다. 저 비싼 것을 아낌없이! 설탕을 넣고 연유를 넣고 얼음까지 넣은 후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 잔에 따라서 빨대를 꼽아서 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대를 품고 한 모금 빨아본다. 흠. 음. 응? 응... 요리 먹고 조리 먹어봐도 역시 그냥 아보카도다. 역시 주스의 세계는 깊고 사람 기호의 호불호는 넓다. 맛이 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아보카도다. 좀 달콤한 아보카도?

그래도 쪽쪽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면서 숙소로 돌아온다. 돌아오니 4시 반이다. 2시간 넘게 걸었으니 트레킹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씻고 자리에 누워서 키보드를 펴본다. 어제부터 글이 정말 안 써진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건데 지금은 마냥 신나게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자기가 좋다고 시작해놓고 마무리를 안 하는 건 무책임한 처사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업도 좋아서 시작하지만 망했을 때 정리를 잘하는 것도 그 사업의 일부다. 연애도 좋아서 시작하지만 백 년 만 년 마냥 좋을 수는 없다. 권태기가 올 때마다 헤어진다면 '사랑'이라는 단계까지 가기 힘들다. 이 여행기도 좋을 때만 쓸 수는 없다. 내가 시작한 건 내가 끝내야 한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 법이다. 서울 가면 등근육 운동도 좀 해볼까나.

하지만 영 글 쓰는게 안 내켜서 앉아서 돈 계산을 해본다. 내일 숙소 옮기고 다낭까지 가는 교통비까지 다 제외하니 약 110만 동이 남는다. 조식은 한번 포함이니 오늘 저녁까지 총 6끼다. 그렇다면 대략 한 끼에 18만 동을 쓰면 된다. 왜 이리 많지? 한끼에 9달러다. 이렇게 쓰고 싶어도 쉽지 않다. 분명 오늘 좀 쓴다고 쓴 거 같은데... 뭔가 희한하지만 몇 번을 세봐도 마찬가지다. 일단 내일 숙소를 좀 비싼 곳으로 옮겨도 되겠다.

내일 숙소를 옮기면 수영장에서 그냥 쉬면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책을 마저 다 보는걸 목표로 삼아야겠다. 여행이 꼭 어딘가를 가는 건 아니다. 책 안으로 떠나는 여행도 있다. 그 여행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거다.

7시가 되어서 식사를 하러 나온다. 오늘은 비싼걸 먹을 수 있다. 어딜 갈까 하다 옆에 식당으로 간다. 메뉴판을 보고 비싼걸 골라보지만, 워낙 거지처럼 생활했어서인지 10만 동 이상의 음식은 도저히 못 시키겠다. 6만 동짜리 닭고기와 밥 그리고 3천동짜리 생맥주를 주문한다. 이거 진짜 돈이 남아나겠다. 뭐 남으면 한국으로 가져가지 뭐.

음식을 기다리며 글을 쓴다. 쓰기 힘들어하지만 막상 쓸 때는 즐겁다. 한국 돌아가면 이 글 쓰는 것도 분명 그리울 거다. 한국에서는 이런 글을 쓸만한 주제가 없겠지? 정말 트루먼쇼처럼 내 삶을 매일 같이 연재해볼까? 그건 즐거운 게 아니라 괴로운 일일 거다. 하지만 확실히 글을 쓰면 누군가 본다는 생각 때문인지 내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행동하게 된다.

생맥주를 한잔 먹고 병맥주로 바꾼다. 베트남 생맥주는 너무 싱겁다. 비아흐이는 확실히 맛으로 먹은 게 아니었다. 병맥주에 얼음을 타서 먹는 게 진짜 동남아의 맥주맛이다. 닭고기도 꽤나 괜찮다. 간장조림 같은 느낌인데 매운 고추를 하나 달라고 해서 조금씩 베어 먹으니 느끼하지도 않고 좋다.

여기 직원이 내 키보드에 관심을 갖는다. 70달러면 베트남인들도 조금 무리하면 살 수 있을 돈 같다. 모델도 알려주고 아마존에서 사면된다고 가르쳐준다. 이 키보드도 이번 여행에서 내 신체의 일부처럼 어디든 함께 다녔었다. 배 위에서, 바닥에 앉아서,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산에서 항상 내 생각의 대변인이 되어주었다. 함부로 굴렸는지 뒤늦게 약간 반항하긴 하지만 이틀만 더 참아다오.

8시쯤 숙소로 돌아온다. 호이안의 야경이 좋다는데 오늘은 그다지 안 땡긴다. 내일이 마지막 날인데 야경을 볼 수 있으려나? 만약 오늘 본 그 강가의 호텔로 간다면 못 볼 거다. 그 호텔이 다 좋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문제다. 다른 것보다 마지막 날 공항 가는 셔틀버스가 거기까지 안 와서 짐을 메고 30분 정도 걸어나와야 한다는 점도 문제다. 내일 이쪽 근처에 수영장 있는 숙소도 한번 알아볼까 싶다.

샤워를 한 후 맥주 한 캔을 따고 자리에 눕는다. 여행 막판의 하루하루는 뭔가 여유를 가지기가 힘들다. 확실히 몸이 어디 있느냐보다 마음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이곳에 없다. 정신은 깼지만 몸이 안깬거와 마찬가지로 여행에서의 가위눌림 같은 날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저녁은 기분이 뭔가 나쁘지 않다. 이제 내일은 정말 하루를 온전히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물론 모레도 저녁까지 있긴 하지만 숙박을 하는 건 내일 밤이 마지막이다. 두 달 여행의 끝이 드디어 다가오고 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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