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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Sep 27.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58

@ Hoi An, Vietnam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 눈을 뜸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건 내일이 마지막이다.

여행 다닐 때는 진짜 술을 달고 살게 된다. 과음은 안 하지만 항상 조금씩은 마신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하루 마시면 이틀은 쉬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게 쉽지 않다. 그런데 현지인들 보면 거의 맨날 마시던데, 이들은 간에 이상이 없는 걸까. 간한테 휴식을 좀 주고 싶지만 오늘은 이곳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긴 평화를 줄 테니 오늘까지만 이해해다오.

아침을 먹기 위해 씻고 나오니 8시 반이다. 확실히 초기에 비해 여행 막판에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내일은 마지막 날이니까 좀 일찍 일어나 볼까. 이곳에서 해돋이를 보는 건 어떤 감상일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을런지.

나와서 일단 근처 호텔을 좀 찾아본다. 어제 강가에서 발견한 그 호텔이 정말 마음에 들긴 한데 내일 떠날 때가 좀 걸려서 근처에 다른 옵션이 혹시 있는지 좀 둘러 봐야겠다. 첫날에 이곳 바로 옆 호텔이 수영장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얼핏 나서 한번 가본다.

이 호텔은 인기가 많은가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직원 또한 매우 친절하다. 일단 가격을 물으니 30달러라고 한다. 뭐 언제나 시작은 이렇지. 나 혼자라고 할인을 좀 부탁하니 27달러까지 내려온다. 여기서 동으로 환전하면서 할인을 더 해서 58만 동으로 합의 본다. 어제 그 강가 호텔이 60만 동이었으니 가격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수영장을 가본다. 여기 수영장은 옥상에 있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확실히 조용하고 강이 앞에 있는 어제 수영장이 더 끌리긴 한다. 이 곳은 여행자 거리 근처라 그런지 머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데 의외로 또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 걸까.

방은 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궁궐이다. 어제 호텔은 굳이 방까지 확인 안 하긴 했지만 아마 비슷할 거다. 어쩔까. 고민이다.

장단점이 있다. 어제 그 강가 호텔로 가면 정말 조용한 마지막 날을 보낼 수가 있을 거다. 대신 내일이 좀 힘들 거다. 여기 호텔에 머물면 조금 번잡하긴 하겠지만 내일이 편하다. 게다가 호이안의 야경을 보며 마지막 저녁을 제대로 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일단 모르겠다. 아침부터 먹어야겠다. 어제 계산한 바로는 한 끼에 18만 동을 쓸 수 있지만 내 생각에 저거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아끼다가 오늘 저녁에 제대로 비싼 식사를 먹는 게 낫지 싶다.

아침으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막상 찾아보니 일반 길거리 식당이 안보이기에 좀 돌아다녀본다. 한쪽에서 내가 원하던 그런 느낌의 식당을 발견한다. 퍼보를 판매하고 있다. 물어보니 3만 동이다. 적절하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터보가 약간 호이안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주어진 야채를 집어넣고 약간 매운 간을 한다. 국물이 시원하니 좋다. 그래, 내 입맛은 이런 길거리에 길들여져 있다. 훌륭한 레스토랑에서 먹은 것보다 이런 맛이 나중에 기억 많이 날 거다.

식사를 마치고 옆에 카페로 와서 버릇처럼 카페스이다를 주문한다. 그리고 자리를 펴서 글을 올리고, 오늘의 글을 쓴다.

계획했던 한국에서의 모임은 성사될 듯하다. 지금까지 3분이 참석하기로 했으니 나까지 4명이다. 이번 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나름 괜찮은 마무리가 될 거 같다. 그 모임에 여행 다닐 때 그대로의 복장으로, 바지, 티셔츠, 신발을 입고 카오산에서 산 이 가방도 들고 갈 생각이다. 이 옷을 입고 서울에서 지하철 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시포에서 어렵게 들고 온 녹차도 조금씩 나눠 드릴까 싶다. 가방에서 한 달 반을 있었던 놈이라 괜찮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념품이 어째 그거 하나 밖에 없다.

커피를 마시고 일단 숙소로 돌아온다. 올라오는데 여사장님이 하루 더 있을 거냐고 묻길래 미안하지만 떠날 생각이라고 얘기한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잠시 고민하다, 수영장이 있는 호텔로 옮길거라고 당당히 얘기한다. 죄짓는 것도 아닌데 왜 지금까지 이렇게 얘기를 못 했을까. 여사장님도 마지막 날이라 그렇다니 이해를 해주며 작은 호텔은 물을 안 바꾸니 큰 호텔로 가는 게 좋다는 조언까지 해주신다.

방값을 계산하고 방으로 와서 잠시 침대에 눕는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문득 여행 초기에 가졌던 생각이 떠오른다. 어디로 가는 게 뭐에 중요하냐. 어디로 가든 거기서 차분히 내 자신만 정리하면 되는 거다. 이런 고민은 쓸데없다. 정리하는 건 내 자신이지, 호텔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가깝고 싸고 내일 이동하기에도 편한 옆에 호텔로 가자.

11시까지 에어컨을 쐬며 늘어져 있다가 일어난다. 짐을 싼다. 바로 옆으로 갈거니 잘 쌀 필요도 없다. 그냥 큰 가방에 전부 쑤셔 넣는다. 이제 짐 싸는 것도 몇 번 안 남았다. 얼마 안 남으니 자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러지 말자. 여행이 끝나는 거지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짐을 싸들고 나온다. 여사장님한테 인사를 한다. 멋진 외관에 이끌려 들어왔고 나름 만족스러웠던 숙소였다. 딱히 정이 많이 든 건 아니지만 싫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냥 낸 돈 만큼의 추억을 안고 떠나는 기분이다.

2분 걸어 옆의 호텔로 간다. 아까 들렸을때 나를 안내했었던 여직원이 나를 보더니 함박 웃음을 짓는다. 자기 영업이 먹혔다는 거겠지. 네가 날 유혹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야! 뭐 그게 그거다.

체크인을 하는 와중에도 손님이 계속 드나든다. 여기 유명한가 보다. 58만 동에 계약하면서 아까 직원이 온라인으로 찾아보면 70만 동이라고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정말일까? 굳이 안 찾아볼련다. 이미 계약한 상황에서 부질없다.

방을 안내 받는다. 방이 정말 화려하다. 물론 30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들어온 곳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대단하다. 3만 원이 이리 큰 돈이었나? 공유기가 매 방마다 있고, 한쪽 벽에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하늘에서부터 햇볕이 들어와서 작품들을 돋보이게 해놓았다. 침대 쿠션도 화장실도 모두 A급이다. 여행자 거리에서 30달러를 쓰면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 처음 깨닫는다.

원래는 가방만 던져놓고 바로 나오려고 했지만 아늑한 실내의 유혹을 못 견디고 한 시간가량 또 머문다. 여행 막판에 정말 게을러지고 있다. 인터넷 속도가 꽤 나오기에 사진 백업도 좀 해둔다. 용량이 부족해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한번 지워야겠다.

1시가 넘어서야 어슬렁거리며 나온다.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옥상의 수영장을 한번 슬쩍 가보니 역시 사람이 많다. 그래도 내 자리 하나는 있을 거 같다. 그러면 되었다.

점심은 어디로 갈까? 멀리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호이안의 전통 별미라고 한분이 댓글로 알려준 반바오박과 환탄을 찾아본다. 가장 유명한 라오카우는 별로였는데, 얘네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찾을 것도 없다. 바로 앞에 식당을 보니 있다. 여행자 식당이긴 하지만 어차피 지금 한두 푼 아낄 필요가 그리 없기에 그냥 들어가서 앉는다. 반바오박이 45,000동이다. 퍼보가 3만 동이니 좀 비싸긴 한데 아마 여행자 식당이라 이럴 듯하다. 일단 이거 하나와 망고주스를 주문한다. 역시 주스는 망고 주스다.

조금 기다리니 망고주스가 나오고, 반바오박이 나온다. 이게 뭐야. 이게 밥이야? 이건 간식이지, 이게 어떻게 밥이냐. 보자마자 당황해버린다. 하지만 잘 되었다. 다른 하나 전통식이라는 환탄도 먹어보고 싶었으니 바로 시켜버린다. 두 접시면 그래도 배는 부르겠지.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10만 동 이상을 식사에 쓰는 것 같다.

반바오박의 맛은 나쁘지 않다. 그냥 작은 만두다. 헌데 이게 45,000동이라는 게 문제다. 현지 식당 가면 절대 이 가격이 아니겠지? 이때 환탄도 나온다.

흠 그렇군. 이 사람들은 이걸 식사로 먹는다는 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간식 중에서도 간식이다. 게다가 환탄, 이거는 내가 싫어하던 그 과자 덩어리이다. 내 10만 동 내놔!

그래도 꼴에 음식이라고 과자 안에 고기가 들어가 있다. 과자 안에 뭐가 있어도 과자다. 삼겹살을 다 먹은 이후에도 밥을 먹는 우리나라 문화에서 이런걸 아무리 먹어봤자 배부르다는 생각은 안 들 거 같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시키는 건 이제 진짜 못하겠다. 저녁을 제대로 먹자. 여행 최고의 호화로운 만찬이 될 오늘 저녁을 기대하며 만족 못해 성난 배를 어루만져준다.

여기도 직원들이 키보드에 관심을 갖는다. 이거 엄청 험하게 쓴 건데 팔고 가버릴까? 그럴 수는 없지. 그러기에는 너무 정이 들었다. 혹시 다음에 여행 가게 돼도 반드시 이 키보드를 들고 갈 거다. 헌데 다음 여행 때 또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번에 너무 온 마음을 바쳐 글을 썼더니 더 이상 쓸 말이 남아있나 싶기도 하다. 두 달 동안 정말 원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동안 살아가면서 하고 싶었던 얘기, 나만의 생각들, 세상에 대한 비판, 모두 어딘가에 표출할 곳이 없어서  가슴속에 담아두고 답답해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가감 없이 펼쳐놨다는 것만 해도 이번 여행은 나한테 정말 의미가 크다. 뭔가 속 시원하다. 내 생각이 정리되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충만한 만족감을 준다. 정말 이래서 사람들이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원래 하얀색이었던 수영복이 갈색이다. 다크케이브의 후유증이 강렬하다. 원래 흰색이었냐 갈색이었냐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제 그냥 갈색이 된 거다. 나는 원래 무슨 색이었으며, 이번 여행으로 어떤 색으로 변했을까. 단 하나 확실한 건 절대 인천을 떠나 올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지는 않다는 거다.

수영장으로 오니 한 가족이 있다. 여기 은근히 누울 장소가 4개 밖에 없는데 이 네 자리를 이 가족이 독차지하고 있다. 별 수 없이 한쪽 구석에 있는 비치베드에 자리를 잡는다. 막상 나쁘지 않다. 오히려 운치 있기도 하다.

짐을 던져놓고 바로 수영장에 띄어 든다. 햇볕이 강렬해서 그런지 물이 미지근하다. 머리까지 물에 담그고 잠시 수영하다 나온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다시 키보드를 핀다.

수영장이 있는 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물은 사람에게 평온함을 선물로 준다. 모든 사람은 엄마의 양수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이 옆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니 이곳에서 여행을 정리하기로 한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끼리 한바탕 놀더니 들어간다. 수영장은 이제 내 독차지다. 물에 잠시 한번 들어갔다 온 이후, 내 여행의 마무리를 장식할 '모리와 함께 화요일'을 편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이 수차례 바뀐다. 다들 와서 한 번씩 수영을 하고는 내려간다. 그러는걸 보면서 졸려서 살짝 잠이 든다.

깨서 다시 책을 본다. 커다란 파라솔이 무색하게 내 몸을 더 태우기 위해 노력하던 햇볕이 시간이 지나면서 벽에 부딪치며 슬그머니 물러난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혼자 다이빙도 하고, 잠수도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여행이 정리된다. 한번 본 책이라고 재껴놓았던 이 책을 무조건 다시 보라고 추천했던 꼬리뻬에서 만났던 말레이시아 여인네에게 감사한다.

책의 구절 몇 개를 곱씹어본다.




Once you learn how to die, you learn how to live.



죽는 방법을 배우면 사는 방법을 배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게 죽음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죽음이지만, 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행복을 논할 수가 없다. 당장 오늘 죽는다면, 지금 나는 행복한가? 내가 노여사한테 끌린 것도 이러한 행복과 죽음에 대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모르는 듯 하지만 질투 나는 재능이다.

모리는 불교의 일화를 인용해서 어깨 위에 한 새가 매일 같이 '죽을 준비가 되었냐'라고 묻는걸 상상하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매일 같이 생각하는 건 현대인으로서는 너무 피곤한 일일 거다. 하지만 조금 순화해서 앞으로 나한테 남은 인생이  3년이다,라는 가정을 한다면 어느 정도 현재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여행이 끝나도, 다음 내 삶에서도 이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가져가고 싶다.




Aging is not just decay, it's growth.



30살이 지나면서, 그리고 다시 35살이 지나면서 나이에 대한 압박감이 생겼다. 나이가 먹는 게 무섭다는 게 아니라,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적어진다는 것이 무섭다.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일에서 신입으로 들어가기도 애매하고, 20대 때처럼 흥청망청 놀러 다닐 수도 없다. 어릴 때 돈이 없는 건 벌면 되지만 지금 나이에 돈이 없는 것은 한심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데이브는 70살임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 일도 여전히 하고 있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호주로 가서 생활비를 번다는 것을 들어보니 그리 풍족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 나이에 일을 하는 게 어찌 보면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 행복을 희생하는 일이 아닌, 행복을 도와주는 일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이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는 길을 벗어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구직에서 나이 제한을 걸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길을 벗아나 볼까? 벗어날 수 있을까?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You let the experience penetrate you fully. That's how you are able to leave it.



이번 여행에서 내가 또 하나 얻은 깨달음이다. 집착을 벗어나는 거는 외면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거다.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 집착은 갈수록 커져서 결국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다. 하지만 차라리 인정을 하고 상대방에게도 그걸 알린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걸쇠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뒤로 도망가지 말고 앞으로 도망가는 거다. 뒤로 도망간다면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하니 그 문제가 계속 남아있지만 앞으로 도망간다면 어찌 되었든 문제는 사라진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자. 그리고 표현하자. 그리고 그 결과에 무서워하지 말자.



길지 않은 책이라 앉아서 반 이상을 봤다. 다음 얘기는 돈에 대한 얘기라 무척 흥미가 가지만 내일을 위해 남겨둔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오늘이 아닌 내일이다.

숙소로 내려와서 수영복을 빨아서 널어놓는다. 오늘은 정말 거한 만찬을 먹을 생각으로 TripAdvisor에서 식당도 하나 찾아놓는다. 내일 저녁이 남아있긴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먹을 수 있는 저녁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의식을 치르듯, 정말 즐거운 저녁을 나홀로 하고 싶다.

7시쯤 방을 나선다. TripAdvisor에서 찾은 그 식당은 내일 점심을 위해 아껴둔다. 오늘은 그 예쁘다는 강의 야경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싶다.

강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길거리 식당들이 유혹한다. 이런 곳에서 베트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한 번쯤은 비싼 음식도 먹어보고 싶다. 맛있어 보이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테다! 봐서 돌아갈 때나 몇 개 사가지고 호텔에 와서 먹을까 싶다.

강으로 들어서니 작은 전등들이 반딧불처럼 사방 팔방을 비추고 있다. 강 위에 마저 연꽃에 담긴 전등들이 떠다닌다. 호이안의 야경이 예쁘다더니 정말 예쁘다. 이곳을 왜 3일 만에 왔을까? 이곳의 밤은 낮보다 훨씬 아름답다.

어디로 갈까? 사실 경치가 좋은 곳 보다, 정말 맛있는 곳을 가고 싶다.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영업을 하는 선상 레스토랑도 살짝 유혹적이긴 하지만 저런 곳은 맛으로 승부하지는 않을 거다. 일단 거리를 한번 돌아본다.

레스토랑의 메뉴 중 20만 동 정도 하는 세트메뉴 같은 비싼 메뉴 위주로 보니 직원들의 친절함이 달라진다. 할인도 막 해준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무심코 본 한 식당에 사람이 많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물론 다 외국인이지만 이 거리에서 이런 비싼 곳은 어차피 다 외국인 대상이다. 여기 들어갈까? 그래도 사람이 많은 거 보니 괜찮지 않을까?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굉장히 배가 고프지만 일단 지나친다. 일단 거리의 끝까지 걸어간 다음에 다시 돌아와 봐야겠다.

길 끝에 도착한다. 옆에 식당에는 손님이 딱 두 팀인데 거기 커플 중 여자가 "여기 정말 맛있다"라며 탄성을 지어낸다. 갑자기 눈이 확 간다. 예전에 노여사와 이대에서 지나가는데 어떤 남자가 케밥집에서 나오면서 "야 여기 졸X 맛있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 얘기에 결국 참지 못하고 먹은 적이 있다. 그때와 같다. 먹고 있는 고객이 저런 얘기를 한다면 일단 실패는 안 할 거 같다.

자세히 보니 쿠킹클래스도 운영하고 있다. 더 신뢰가 간다. 메뉴판을 보니 생선이 들어간 무슨 세트메뉴가 195,000동이다. 이거 땡긴다. 아까 다른 식당에서는 먼저 할인을 제시하길래 여기도 혹시 할인은 안되냐고 하니 당황하며 생선이라 할인 안되고 대신 음료를 할인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말에 더 믿음이 간다. 비아사이공이 1.5만 동인데 이걸 1만 동에 하기로 한다. 나 많이 마실지도 모르는데, 하며 짓궂게 쳐다보니 먹어봤자 10병 아니냐며 호탕하게 웃으신다. 여기로 결정한다. 마음에 든다.

맥주를 가져다주는데 얼음이 없다. 맥주가 충분히 시원하긴 하지만 얼음이 없으면 왠지 기분이 안 산다. 확실히 음식은 어떤 추억이 있냐는 게 중요한 게, 펑냐에서 그 현지분들과 술 파티를 벌인 후에 비아사이공이 무척 좋아졌다. 입맛에 쫙쫙 맞는다. 하지만 얼음은 있어야 한다. '다'를 달라고 하니 사장님이 이놈 맥주 먹을 줄 아네, 하는 표정으로 가져다준다. 한국에서 맥주 마실 때 얼음 달라고 하면 어떻게 바라보려나. 

세트 메뉴의 첫 번째 애피타이져로 점심에 먹었던 그 꽃 모양 만두가 나온다. 그래, 이건 애피타이져지, 이걸 메인으로 먹은 내가 잘못한 거다. 나름 맥주와 함께 먹으니 괜찮다. 사람에게 모두 자기 자리가 있듯이 음식도 자기 자리가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건 해산물 수프다. 코스요리에 수프가 빠지면 섭섭하지. 이거 맛있다! 생선살에 치즈와 옥수수로 요리를 한 거 같은데, 간도 맞으면서 식감도 훌륭하다. 역시 식당을 선택하는 내 안목이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왜 손님은 없는 거지? 생선살, 게살, 새우 등 바다에서 자란 각종 애들의 살이 골고루 느껴진다. 그러면서 비리지 않다. 은은하게 퍼지는 고수의 향도 좋다. 벌써 첫 번째 맥주병의 마지막 잔을 따랐다. 아 오늘 과음하겠는걸. 좋은 친구도 술을 부르지만 좋은 음식은 술과 함께해야 더 맛있는 법이다.

옥수수가 이 지방 특산물이라고 했던가? 수프 하나에 감탄하면서 또 혼잣말로 "야 이거 맛있다"를 자연스레 내뱉는다. 원래 모든 음식은 맵게 먹는 게 버릇이지만 얘는 맵게 하면 원래의 맛을 해칠 거 같아서 있는 그대로 먹는다. 근데 왜 벌써 배가 부르지? 아직 메인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요즘 계속 조금 먹다 보니 위가 줄어들었나?

조금 있으니 메인 요리가 바나나 잎에 조신하게 쌓여서 나타난다. 조심스레 잎을 벗기니 생선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홍고추와 파를 써서 비주얼이 먹음직스럽다. 두 번째 맥주병을 주문한다.

기대를 너무 한 걸까? 생선의 맛이 나쁘지는 않은데 감동적이지는 않다. 예전에 노여사와 태국 꼬창 갔을 때 먹었던 그 엄청난 맛의 생선구이를 예상했는데 그건 아니다. 바나나 잎으로 싸서 굽는 이유는 뭘까? 향을 입히기 위함이겠지? 비린내는 안 느껴지긴 하는데 아무런 향이 없는 게 좀 아쉽다. 차라리 고수향이 좀 스며들었으면 어떨까 싶다.

이곳에서는 마늘보다 생강을 주로 사용하나 보다. 그런 맛이 느껴진다. 에잇, 지금 뭐한 거지. 내가 맛집 평론가도 아니고 그냥 먹고 즐거우면 그뿐인데. 코스요리를 오래간만에 먹더니 머릿속에 허영심이 가득 찼나 보다. 그냥 먹고 즐기자. 분석은 이제 그만.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 행복한 거 같다. 이제 된 거 같다. 여행지에 있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떠날 때가 되면 자연스레 느낌이 온다. 지금은 여행을 끝낼 때다.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 느낀다. 뭘 위한 준비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 온다. 어떤 가혹한 현실이든 다 달려들어라. 나는 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라는 것만 잊지 말자. 그러면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

이곳에서는 손님을 앞에 태우고 다니는 작지만 화려한 인력거가 유행인가 보다. 길이 평지라 굳이 인력거를 탈 필요가 없다 여겨서 그러는지 모두 좋은 노래를 선곡해서 틀고 다니며 손님을 유혹한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이 자전거들의 종점인가 보다. 하긴 길의 끝이니까. 모두 여기서 멈춘다. 이 인력거 위에는 여행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베트남 현지인들이다. 한 커플이 있는 인력거에는 발라드가 울려퍼지고고, 엄마와 아이가 탄 인력거에는 우리나라 뽀로로 같은 동아가 흘러나온다.

이들을 보고 있는데 뭔가 흐뭇해진다. 왜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미얀마에 처음 가서 그 식당의 종업원을 봤을 때의 그 감정이 갑자기 울컥하며 올라온다. 행복이란 그리 큰 게 아니다.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내 자신을 알리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작은 거에 고마워할 줄 알고,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고 행복이 아닌가 싶다. 급하게 마신 술 때문에 취한 걸까, 울려 퍼지는 발라드에 취한 걸까, 아니면 여행 마지막 저녁이라 감상적이 된 걸까. 그렇다고 여기서 눈물을 흘리자니 뭔가 부끄럽다. 난 아직 멀었다. 감정은 숨기지 않고 표현해야 한다고 그리 얘기했으면서도 나는 못 그런다. 하지만 지금의 이 감정을 잊지 말자. 그러면 이번 여행이 헛되지는 않을 거다.

모리에게 예전의 제자가 나이 드는 거에 대한 고민을 물으며, '그러면 왜 나이 든 사람들은 젊어지고 싶어하냐'고 물으니 모리가 그건 그 사람들이 그 시절을 만족하지 못하고 지내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현재를 못 사니 과거를 살고 미래를 사는 거다. 60일 여행이 끝나가지만 아쉬워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말 원없이 현재에 존재했기 때문이겠지.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았다. 이런 여행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인생을 못 살 이유는 없다.

215,000동을 계산하고 일어선다. 명부상실 이번 여행에서 한 끼에 쓴 가장 큰 돈이다. 하지만 아깝지는 않다. 엄청나게 맛있는 식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 간다. 왜일까. 괜찮은 줄 알았는데 자꾸 뭔가 울컥울컥 한다. 미련이 안남은 건 맞다. 이 감정은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었지만 길을 틀어 반대쪽으로 걸어가 본다. 뭔지 모르지만 아직 남은 게 있나 보다. 쭉 길을 걸어가니 바다가 나온다. 바다가 이리 가까이에 있었구나. 저번에 찾을 때는 그리 안보이더니. 그 앞에 잠시 앉아서 밤 바다를 멍하니 바라본다.

10분 정도 멍하니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지막 그 감정이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사라졌다. 이제는 진짜 미련이 없다. 발길을 돌려 숙소로 향한다.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을 지나간다. 이번 여행에서의 깨달음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품을 하나 살까. 살짝 둘러보지만 역시 이건 아니다. 내가 느낀걸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필요하지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리고 기념품은 사는 게 아니라 생기는 거다. 이번 여행에서의 내 유일한 기념품은 데이브가 준 해진 티셔츠다. 앞으로 오랜 기간 내 잠옷이 될 거다.

밤 하늘을 보며 숙소로 천천히 걸어오는데 갑자기 방광에 신호가 온다. 맥주를 너무 급하게 마셨나? 천천히 가고 싶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갈수록 신호가 강렬해진다. 어쩔 수 없다. 발걸음을 빨리 하다 거의 뛰기 시작한다. 여행은 원래 싸고, 먹고, 자고의 흐름이다. 뭔가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마지막 귀갓길로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급한일부터 처리하고 샤워를 한다. 자, 이제 진짜 마지막 시간이다. 내일 이 시간이면 비행기에 올라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대한항공 타는 게 얼마만이지?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베트남 출장 왔을 때가 마지막 같다. 막상 내일 귀갓길도 신날 거 같다. 그 유명한 대한항공의 무료 와인을 무한으로 마셔줘야겠다.

맥주 한 캔을 까고 책을 핀다. 모리는 내일 보기 위해 아껴두고 왕좌의 게임을 이어서 본다. 마지막 날이라고 별다를 거 없다. 그냥 하루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국 가서도 이렇게 똑같이 살아가는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궁극 아닐까. 평소와 같이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밤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다음 글은 한국에 있는 내 방에서 올리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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