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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Sep 28.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59

Last Day. Back to Seoul, Korea

여행을 시작한 이후 59번째로 아침에 눈을 뜬다. 이제 마지막이다. 60번째는 없다. 내일이면 카운트는 다시 1일로 리셋될 거다. 그 '1'이 무엇을 위한 카운트인지를 찾는 것은 내 몫이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다. 비싼 호텔 조식이니 먹는 건 좋은데, 이러다 퍼보를 못 먹고 떠나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된다. 사람들이 이미 한켠에서 조식을 먹고 있는 게 보인다. 왠지 다른 이들과 엮이기 싫어서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는다. 연주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조금 덥긴 하지만 이 평화로움이 좋다.  

아침을 가지러 가본다. 다행히 메뉴 중에 퍼보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면은 다 미리 담아놓고 국물만 얹어서 먹는 퍼보를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먹는 퍼보로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억지로 찾아갈 생각도 없다. 오늘 하루는 자연스레 흘러가는 데로, 내 마음이 이끄는 데로 있어보자.

자리를 잡고 아침을 먹으면서 글을 쓸려고 핸드폰을 열어보니 댓글 알람이 꽤 많이 와있다. 어제 저녁 잠들기 직전에 올렸는데 언제들 보신거지? 아마 출근할 때 많이들 보시는 거 같다. 하나하나 읽어본다.


이번 여행에서 글이 큰 부분을 차지했듯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루만 여행기를 못 올려도 걱정해주고, 매번 'Have a safe trip'이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힘들고 지칠 때, 그리고 외로울 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냥 내 감정을 기록하고자 시작한 여행기였지만 사람들과도 감정을 교류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모임을 하는 게 잘하는 건가,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 걱정을 했었지만, 이런 이유로 그리 해야만 진짜 여행이 끝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어제 여행기에 한분이 댓글로 적어주신 게 이번 여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을 한 번에 정리하는 거 같아서 마음을 울린다.


별거 아닌 걸로 행복함을 느끼는 게 진정 행복인 거 같아요.  어제저녁에 갈증이 나서 시원한 게 먹고 싶더라고요. 와이프가 커피 한잔 줄까? 라고 하길래 잘 밤인데... 라 하다가 디카페인 캡슐을 찾아내고선 두 잔 내려서 아이스로 마시는데, 행복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게 참 좋더라고요. 가까이 있는데 그걸 느낄 여유가 부족하다는 게 아이러니 같습니다.


파랑새를 찾아 이 먼 곳까지 왔지만 막상 파랑새는 역시나 언제나 그렇듯 내 안에 있었다. 그 파랑새가 '여유'라는 걸 두 달 동안 다니면서 깨닫는다. 여행과 일상에 가장 큰 차이는 여유이다. 일상에서는 단 5분도 뭔가를 안 하고는 못 버틴다. 쓸모없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누군가와 별 의미 없는 잡담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서 막상 중요한 내 자신은 돌아보지 못한다. 갈증이 날 때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여행은 필요 없다. 출근하는 길에 새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면, 지하철의 작은 덜컹거림에서 음악이 느껴진다면,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볕에서 가로수가 만드는 작은 그늘이 고맙다면, 그리고 와이프가 타주는 디카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여행 중인 거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는 거가 이런 거일 거다.


여행 마지막 날에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고맙다. 기승전, 그리고 '결'이 있음이 감사하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가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내가 할 일은 이제 저쪽 현실에 존재한다. 가서 부딪쳐보자. 그 악명 높은 현실이라는 놈, 어디 한번 와보라고 해봐라. 맷집을 쌓고 내공을 쌓았으니 이제 진정한 맞짱을 떠주겠다.


나는 특별하다. 모든 '나'는 특별하다. 예전에 한 여인에게 '나 똑똑하지 않냐'고 철없는 질문을 한적이 있다.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그 여인은 '모든 사람은 똑똑하다, 단지 그 똑똑한 게 사회가 원하는 방향이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다'라는 우문현답을 해줬다. 그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영재는 없다. 그리고 모두가 다 영재다. 자기가 '똑똑한', 본인이 '영재'인 그 부분을 찾는 사람이 성공한 자이고 행복한 자이다.


나는 특별하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가면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 모두가 나는 특별하지 않다고, 나도 별 수 없다고 끊임없이 시련을 줄 거다. 돈이 그러할 것이고, 사회가 그러할 것이고, 부모님이 그러할 것이며 심지어 여자친구마저 그러할 것이다. 이 세상에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특별하다는 걸 잊지 말자. 이 세상에 태어나 이곳에 있는 '나'를 느끼고, 그 위대함을 깨닫자. 우리에게 단 한번 주어진 인생, 남의 눈치를 보며, 남을 따라가며 살 필요 없다. 모든 정답은 내 안에 있다.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다시 한번 무너질 때, 그때 이 여행기를 다시 한번 펼치고 작은 여행을 떠나 보자.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어가기 전에 오늘 저녁, 공항으로 나를 태워다 줄 버스를 예약한다. 지금 호텔에서 예약하면 15달러라고 하기에 옆에 호텔로 가서 1/3 가격인 5달러, 11만 동에 셔틀버스를 예약한다. 7시 출발이다.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타서 8시에 공항에 도착하면 비행 시간까지 3시간 정도가 남으니 충분하다.

숙박비 계산도 끝낸다. 이제 남은 돈은 정말 먹는데 전부 쓰면 된다. 남은 돈이 60만 동이 넘는다. 한 끼에 30만 동이라... 역시 불가능하다. 혹시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과소비를 하면 오히려 분명히 만족스럽지 않을 거다. 그냥 돈을 신경 안쓰면서 먹되, 쓸려고 먹는 주객전도의 상황은 피해야겠다.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마지막으로 에어컨 바람을 즐겨보자. 한국 가면 보나 마나 연중 정말 더운 날 하루 이틀만 에어컨 틀 것이 확실하다.

방에서 나도 모르게 스쿠터 검색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스쿠터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예전부터 눈여겨 보던 '줌머'가 땡기지만 시속 60을 못 낸다니 서울에서 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걸 떠나서 스쿠터를 과연 돌아가서도 타게 될까? 난 항상 두 다리와 대중교통이 가장 좋은 이동수단이라 믿어왔다. 특히 지하철은 항상 나에게 또 하나의 독서실이 되어주었다. 책 읽는 시간을 찾기 힘든 우리에게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물론 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은 예외겠지만.


12시다. 체크아웃의 시간이다.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체크아웃이다. 아침 먹으면서 마음 정리가 이미 끝났나 보다. 지금은 진짜 아무 감정이 없다. 짐을 싸고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점심을 먹은 이후 수영장에서 모리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다. 이따 갈아입을 옷을 맨 위에 담고 나머지는 또 다시 가방에 대충 쑤셔 넣는다. 이번에 체크아웃하면 다음 체크인은 서울 강동구 명일동이다.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둘러본다. 이 방은 비싼 방 답게 모든 것이 좋았지만 딱 하나, 수동비데가 없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이런 선진 기술이 고급 호텔에는 다 빠져있는 걸까. 잠깐, 서울에서 이거 설치 사업이나 해볼까? 순식간에 망하겠지.


내려와서 체크아웃을 하며 메인가방을 로비에 맡기고 마지막 점심을 먹으러 간다.  어제저녁에 가려다가 안 간 Streets Restaurant  Cafe라는 곳으로 향한다. 주소가 17 Le Loi 이길래 지도를 안 피고 그냥 걸어간다. 지나가다 저 길은 이미 본 적이 있다. 길만 찾으면 나머지는 어려울게 없다. 역시나 단 한번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서 들어간다.  

근데 여기 유명한 곳 아니었나? 불안하게시리 손님이 하나도 없다. 벽에는 여기저기 잡지에 소개된 내용이 붙어있지만 정작 앉아 있는 손님은 없다. 메뉴판을 받아보니 알겠다. 이 동네 특산 요리인 Lau Cao가 7.5만 동이다. 다른 곳의 두배가 넘는다. 평소라면 그냥 나왔겠지만 오늘은 사실 쓸 수 있는 돈이 꽤나 되기에 그냥 앉아서 메뉴를 흝어본다.


메뉴를 보고 있는데 그 쌀과자와 찍어먹을 카레 비슷한걸 기본 요리로 제공해준다. 비싼 곳이라 확실히 다르긴 하다. 뭘 먹을지 모르겠어서 직원한테 내 마지막 점심이라며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My Quang'을 추천한다. 뭔지 모르지만 9만 동짜리 현지 로컬 음식을 주문한다. 무려 6만 동의 망고주스도 주문한다. 가격이 미쳤다. 그런 만큼 맛은 있겠지.

망고주스는 그냥 망고주스다. 길거리에서 파는 2만 동짜리와 똑같다. 이건 자리세군. 미쾅은, 확실히 맛은 있다. 고급스러운 재료들도 많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9만 동의 값어치는 잘 안 느껴진다. 서비스업은 보면 가격과 퀄리티가 일차방적식의 곡선이 아닌 로그 방정식의 곡선을 따르는 거 같다. 어느 순간까지는 낸 만큼 퀄리티가 올라가나 일정 수준 이후에는 퀄리티를 조금 올리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내 입맛은 가성비에 길들여졌는지 이런 고급스러운 음식에서는 만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 저녁으로는 억지로 돈 쓸 생각 안 하고, 원래 먹던 식으로 먹어야겠다.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니, 디저트를 권한다. 뭐가 있나 메뉴를 보니 또 모든 음식이 기본 6만 동이다. 안 먹어. 망고주스를 다 먹으니 한잔 더 먹겠냐고 권한다. 보통 이러면 공짜 아니야? 공짜 아닌걸 왜 이리 권유한다냐. 게다가 여기 왜 이렇게 더운 건지. 이 정도 가격을 받으려면 에어컨은 기본적으로 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막판에 괜히 투덜 투덜이다. 그래도 메인 요리는 확실히 맛있었으니 된 거지 뭐.    


그리 생각하려 하는데, 빌지를 달라고 하니 10% tax까지 추가로 붙여서 가지고 온다. 이번 여행 중에 부가세 별도는 처음 본다. 이래서 사람은 자기 행동 패턴을 벗어나면 안되는 거다. 잊자, 밥은 맛있었잖아. 이것으로 이제 이번 여행에서의 식사는 단 한 끼가 남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어차피 수영복을 계속 입고 있었기에 바로 옥상 수영장으로 직행한다. 아무도 없다. 벌써 1시가 넘었는데 다들 어디 갔나? 뭐 나야 이런 것이 더 좋다. 신난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며 앞으로 덤블링을 해서 수영장에 뛰어든다. 난 역시 물이 좋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영이라기보다는 물놀이에 가까운 행위를 실컷 즐기다 가장 좋은 비치베드에 누워 자리를 잡고 모리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제 진짜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한참 독서에 빠져 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성 두 분이 들어온다. 그리고 곧이어 서양분들도 몇 합류한다.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오면 이 시간인가 보다. 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앉아야 하는 자리이기에 미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여성 두 분은 한국분 맞다. 둘이서 한국말 하는걸 들으며 아는 척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 말을 건넨다. 내가 한국인처럼 안보이기에 얘기를 안하면 두 분이서 한국말로 무슨 말을 하실지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미리 한국인임을 알려드리는 게 예의다. 한국말로 말을 거니 역시나 깜짝 놀라신다. 한분은 수영하다 놀라셔서 물 속에 잠기더니 물을 좀 먹고 콜록이며 나오신다. 뭐 그리 놀랄 일이라고.


말을 건김에 얘기를 좀 나눈다.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쌍둥이란다. 그것도 일란성이시란다. 그러고 보니 닮았다. 후천적인 차이가 외모의 차이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참고로 나는 관상을 믿는다. 물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관상은 아니고,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그 표정들이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항상 웃으며 살고 싶다.


두 분은 여행한지 15일이고 앞으로 한 달이 남았단다. 너무 깨끗해 보이셔서 안 그럴 줄 알았더니 장기 여행자다. 다 나 같이 더러워지는 건 아닌가 보다. 난 마지막 날이라고 일러 드리고 역시나 미얀마 홍보를 잠시 한다. 하지만 어린 분들은 아닌 듯 하니 본인의 길을 잘 가실 거 같다. 여행은 원래 남의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다시 비치베드에 누워서 책에 집중한다. 한참 읽다 보니 두 분은 어느새 사라지셨다. 다시금 책에 집중한다. 이 책으로의 여행이 이번에 내가 가는 마지막 투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오후 4시다. 모리의 죽음에 안타깝다기보다는 막판에 저런 심적인 평온함을 얻었다는 게 부럽다. 하지만 남의 깨달음을 부러워하는 것 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게다가 사실 모리의 모든 얘기가 나와 가치관이 같지도 않았다. 나는 나의 길을 가자.


오늘도 몇 마디를 역시나 곱씹어본다. 모리의 말을 매개체 삼아 생각을 정리해본다.




Status will get you nowhere. Only an open heart will allow you to float equally between everyone.



돈에 관련된 얘기다. 보통 우리는 상류층에 들기 위하여, 그들과 동격으로 되기 위해 노력해서 돈을 모으려고 한다. 하지만 진정 우리를 그들과 또한 다른 누구와 동격으로 만드는 건 돈이 아닌 우리 자신의 열린 마음이다.





I believe in being fully present.



현재에 존재해야 후회가 안 남는다. 현재에 존재하고 지금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행복을 향한 길이다.




If you don't respect the other person, you're gonna have a lot of troube. If you don't know how to compromise, you're gonna have a lot of trouble. If you can't talk openly about what goes on between you, you're gonna have a lot of trouble. And if you don't have a common set of values in life, you're gonna have a lot of trouble. Your values must be alike.


배우자는, 자신의 진정한 짝은 소위 말하는 단순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욕망에 기초한 사랑은 아름다움이 식으면, 익숙해지면, 같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보다 깊은 영혼 간의 교류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하고,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중의 핵심 가치관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다.




But the big things -- how we think, what we value -- those you must choose yourself.



진정한 '나만의' 생각은 무엇일까? 우리는 부모로부터 교육받고, 사회로부터 길들여지며,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매체로부터 수많은 정보를 입수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남은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라고 했지만 그게 가능할까? 그리고 진짜 그 부정을 했다는 것은 어찌 알 수 있을까?


어차피 인간은 홀로 설 수 없기에 독립적으로 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선택'이라고 믿는다. 여러 가지 길에서 모든 것을 의심한 후에 내 가치관, 그리고 내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본인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결과가 같아도 조금 혹은 많이 돌아가야 진정한 내 선택이 된다.





여행 다닐 때 보기에 'Tuesday with Morrie'만큼 좋은 책은 없다. 물론 모든 말을 동의하는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내 가치관은 이분보다 세상에 조금 더 비판적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생각을 시작하고 정리하기에는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하는 이 책이 더할 나위 없다. 다음 여행 때도 반드시 이 책과 함께하리라 다짐해본다.


수영장에서 나와 로비로 내려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시간이 좀 남기에 2.5만 동 아이스크림을 하나 달라고 하고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컵에 담아주는 예쁜 디저트를 상상했지만 하드를 하나 준다. 뭐 하드라고 맛이 없는 건 아니니 맛있게 빨아먹는다.

샤워를 한 게 무색하게도 앉아있으니 땀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확실히 베트남은 직접적인 더위보다는 불쾌지수가 높은 나라다. 땀이 흐를 정도의 날씨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도 이렇다. 하지만 베트남은 또 배려의 나라이기도하다. 난 가만히 있었음에도 직원들이 뭔가를 느꼈는지 내쪽으로 선풍기를 틀어준다.

앉아있는데 아까 한국 분들이 식사를 하러 가시는지 내려온다.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나를 못 보시고 지나치신다. 눈길이 분명 내가 있는 쪽을 한번 스윽 향했는데 못 알아보신다. 누가 그랬더라. 맞다, 루앙프라방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이 그랬었다. 나는 배경 같단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눈에 안 들어온단다. 까만 피부에 갈색 티셔츠, 갈색 바지를 입고 있어서일 거다. 나는 지각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 느낌은 뭔가 나쁘지 않다.


5시가 지나서 이번 여행에서의 진정한 최후의 만찬을 먹으러 길을 나선다. 7시에 버스를 타야 하니 여유 있게 먹으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마지막 식사는 검색해서 가지 않고, 그냥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먹기로 결심한다. 돈이 있다고 내 여행 스타일을 바꾸려고 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는 나한테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어제 큰 길에서 지나가며 살짝 봤었던 숯불구이를 판매하던 곳이 생각나서 그쪽으로 향해본다. 역시 내 기억력은 틀리지 않았다. 한 번에 찾는다. 그쪽에 길거리 음식점이 여러 개가 쭉 늘어서 있다. 퍼도 먹고 싶긴 하지만 고기가 역시 진리일 듯하여 숯불구이 집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하나에 1만 동이란다. 저거 몇 개 먹어야 하는 거지? 옆에 사람을 보니 둘이서 8개를 먹고 있다. 저게 기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4개를 시킨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퍼도 먹고 싶어 져서 배를 좀 남겨놓고 싶어진다.

옆에 있는 사람의 음식이 먼저 나오기에 유심히 지켜본다. 라이스페이퍼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축축한 어떤 쌈을 올린 후에 그 안에 야채를 원하는 만큼 담는다. 그리고 그 위에 숯불구이로 구운 고기를 넣고 돌돌 말아서 스프링롤로 만든 후에 꽉 잡고 꼬치만 스윽 뺀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프링롤은 주어진 특제 양념에 찍어먹는다. 별거 아니네.


조금 있으니 내 것도 나온다. 아주머니가 굳이 앉아서 시범을 보여주신다. 나 다 할 줄 아는데. 그래도 유심히 본다. 아 꼬치 끝에 묶어놓은 바나나줄기 빼는 것을 아까 그 총각이 빼먹었었다. 어쩐지 고기 빼는 게 고생하더라니. 역시 배움은 정석으로 배우는 게 좋다.

혼자 만들어 먹어본다. 이거 마음에 든다.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 것도 마음에 들고, 실제 맛도 훌륭하다. 맥주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살짝 들지만 패스한다. 오늘은 맨정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다.

맛은 있지만 역시 4개로는 부족하다. 계산을 하고 자연스럽게 옆의 퍼 가게로 이동한다. 옆을 보니 아까 내 옆에 있던 그 총각도 여기로 와있다. 이곳을 순회하면서 밥을 먹는 것도 하나의 식사 방법인가 보다.


3만 동짜리 퍼를 주문한다. 주문하자 옆에서 금방 만들어준다. 이건 진짜 내 마지막 퍼다. 제발 맛있기를 바래본다. 사장님이 가져다 주는 퍼를 보니 지금까지 내가 먹던 일반적으로 먹은 퍼와 살짝 다르다. 호이안식 일려나.

익숙하게 라임을 두개 짜서 집어넣고, 고수잎을 따서 넣는다. 고추도 손으로 집어서 몇 개 국수에 던져 넣는다. 휙휙 비빈 후에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서 숟가락 위에 올리고 국물을 조금 담아 같이 입으로 가져간다. 생긴 건 어떨지 몰라도 내가 아는 그 퍼의 맛이다. 마음에 든다. 다행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퍼를 정신없이 먹는다. 훌쩍이는 콧물을 오른손으로 스윽 닦아내며 먹는다. 길거리 식당에서는 종이를 휴지로 주는데 이게 영 불편하다. 그리고 어차피 깨끗함과는 담 쌓은지 오래다.

마지막 국물을 천천히 음미하려 하는데 갑자기 코가 쎄하다. 쎄한 정도가 심해지더니 확 달아오른다. 아까 고추를 손으로 집고 그 손으로 코를 만져서 그런가 보다. 이거 견디기 힘들다. 남은 국물을 원샷하고 계산을 하고 급하게 호텔로 귀가한다. 왜 호텔로 귀가할 때면 항상 이런 식인 거니.

호텔로 와서 화장실로 직행 후 얼굴을 찬물에 벅벅 씻는다. 이거 근데 만질수록 더 화끈거린다. 그냥 참고 놔둬야겠다. 그래도 씻고 좀 놔두니 괜찮아졌다.


6시다. 이제 1시간 후면 공항 가는 버스를 탄다. 앉아서 남은 돈을 한번 세 본다. 10달러와 55만 동 그리고 잔돈으로 7천동이 남았다. 한국돈으로 치면 약 4만 원이 남은 셈이다. 한국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버스비는 걱정할 필요 없겠다. 혹시 이 복장으로 지하철 타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아, 어차피 내일 이 복장으로 종로를 가기로 했구나. 뭐 민망함은 즐기면 즐거움이 된다.  

7시가 되어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호텔 스태프들한테 작별인사를 한다. 여기분들 정말 친절했다. 하루 밖에 숙박을 안 했고, 어차피 떠나는 사람임에도 끝까지 물을 주고 선풍기를 돌려주며 챙겨주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저런 친절은 내가 뭔가를 주었기 때문에 돌려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저 사람을 위하는 행동이다. 누가 베트남 사람이 불친절하다고 했더냐.

버스 타는 곳에서 잠시 앉아있는다. 7시 버스이지만 절대 7시에 오지는 않을 거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뒤적이며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본다. 그러다 문득 놀래서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벌써 문명으로 돌아온 걸까. 내가 가장 꺼려하는, 아무 이유 없이 핸드폰을 보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하늘을 보며 멍 때리는 게 낫다.


문득 시간이 지난 후에 내 지난 두 달이 다 기억이 날까 싶다. 그러면서 또 기억이 안나도 된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곳에서 가져가는 건 추억이나 기억이 아니다. 나 자신이다. 변화된 내 자신, 이건 어디 가든 나와 함께 간다. 이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버스는 역시 7시 반이 되어서야 온다. 가방을 트렁크에 던지고 버스에 올라타니 동양여성분이 한분 있다. 한국분 같다. 맞는 거 같은데...

버스가 출발하고 슬쩍 한국말로 말을 걸어본다. 역시나 화들짝 놀라신다. 한국인인 줄 몰랐단다. 그런 거지 뭐. 그러고 보면 태국에서 초창기에 한국인을 만나고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 스트레스 받았던 게 참 옛날일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스트레스는 받으라고 해도 못 받겠다.


이분은 5일 일정으로 다낭과 호이안을 오셨단다. 그런데 오늘 목요일 아닌가? 주말이 목전인데 어쩌다...? 물어보니 원래 내일까지 휴가인데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불려간단다. 정말로 우리나라 기업은 이래서 안된다. 진정 그 한 사람이 하루 없다고 업무가 마비될까? 장담하건데 어떻게든 돌아간다. 그냥 그 조금의 희생이 싫어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휴가를 붙여 쓰기 눈치 보인다는 얘기를 했을 때 라셸과 데이브의 황당해하던 눈빛이 생각난다.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보고 싶어 져서 내 첫 번째 여행기를 한번 열어서 본다. 느낌이 생소하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닌 거 같다. 이번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이 변화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세상의 잔소리 속에서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공항에 도착하니 8시다. 시간이 아직 많다. 갑자기 댓글로 한분이 추천했던 베트남 술인 '넴무이'를 안사온 것이 생각났다. 이거 사가고 싶은데... 같이 온 여성분한테 인사 후 공항의 기념품샵을 가서 물어본다. 넴무이를 못 알아듣는다. 뻔하다. 발음의 성조가 틀려서 못 알아듣는 걸거다. 여하튼 냉장고 안에를 보지만 안 보인다. 그 술은 나와 인연이 없나 보다.

티켓팅을 하기 위해 대한항공 카운터를 찾는다. 역시 대한항공이라 중심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은 나도 대한항공을 탄다. 땅콩항공이라 무시받지만 막상 이걸 탈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한다. 어쩔 수 없는 허영심 덩어리다.


줄을 서서 기다리니 곧 내 차례다. 여기는 줄도 길지 않다. 하긴 다낭에서 가는 비행기표는 아마 꽤나 비쌀 거라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다. 나야 마일리지로 가는 거니 전혀 상관없다.


항공권 번호와 예약번호를 알려주고 여권을 건넨다. 이제 진짜 마지막 비행이다. 직원이 표를 끊어주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카드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아니 카드번호를 왜? 결제 다 된 건데 왜 필요하냐고 하니 필요하단다. 뭐지? 미얀마에서 내 카드를 다 정지시켜서 이거 결제는 친구한테 부탁했었다. 그러니 카드 번호를 알 턱이 없다. 일단 급하게 친구한테 카톡을 보내 놓고 좀 따져본다. 예약은 내 이름으로 되었고, 결제는 인터넷으로 된 건데 왜 또 다시 카드 번호가 필요한 걸까.

자기들은 방법이 없다며 갑자기 매니저를 부르겠단다. 친구한테 보내놓은 카톡에서는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 시간이 몇 시지? 10시 반이다. 애 둘 키우는 친구니 애들 목욕시키고 있거나 재우고 있으면 연락이 안될게 뻔하다. 이거 여행이 마지막에 내가 지루할까 봐 한번 더 이야기를 던져주는구나.


한참을 따지고 있는데 한국인 매니저가 나타난다. 역시 한국말이 편하다.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여차 저차 해서 친구가 대신 결제해줬고, 그리고 그 친구가 지금 연락이 안돼서 카드번호를 모른다고 자초지정을 설명드린다. 얘기를 듣더니 자기 전화기로 친구한테 전화해보라고 하신다. 그래, 혹시 모르니 해보자.


안받는다. 혹시나 해서  제수씨한테 전화를 걸어봐도 안받는다. 이제 살짝 불안해진다. 근데 진짜 왜 카드 번호가 필요한 거야? 혹시나 해서 노여사한테 카톡을 해보지만 역시나 답장이 없다. 일단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에 그 친구랑 연락을 좀 해달라고, 비상이라고 부탁을 하고 매니저한테 얘기를 들어본다. 뭐 잃어버린 카드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단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지만 사실 말도 안된다. 한번 결제한걸 다시 확인한다니. 이건 인터넷의 결제 보안 시스템을 믿지 않는 거다. 이런 식이면 인터넷 쇼핑몰은 문 다 닫아야 한다. 이미 정당한 시스템을 통해서 인증을 다 받은 것을 왜 현장에서 다시 인증을 받는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니 어찌할 수가 없다. 이때 친구 하나가 그 결제한 친구와 연락이 되었단다. 하 다행이다. 카톡으로 드디어 답장이 와서 왜 전화를 안받았냐고 하니 자기 런던에 출장 와있단다. 그래, 그래도 카드번호만 알면 된다. 헌데 설상가상으로... 그 친구, 지금 콘퍼런스에 들어가서 4시간 동안 못 나온단다. 이거 뭐 일이 이리 꼬인다냐.


친구에게 혹시 그 카드로 결제한 다른 영수증 없냐고 묻는다. 찾아보면 거기 카드번호가 나오지 않을까? 영국의 인터넷이 느려서 그것도 쉽지가 않단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지나서 이제 1시간 50분이 남았다. 그래도 일찍 와서 아직 시간은 있다. 침착해지자.


혹시 카드를 바꾸면 안될까? 직원한테 그 친구의 카드를 다른 친구들의 카드로 바꾸면 안되냐고 물어본다. 카톡방에서 도와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직원이 좋은 생각이라는 표정으로 가능하다며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전화로 모든 변경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제 드디어 일이 풀리려나보다.

이거 채팅으로 진행할 사항이 아니다. 결국 키보드를 펴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본다. 일단 대기하고 있는 친구 중 하나한테 부탁을 한다. 이 친구 좀 해보더니 카드에 문제가 있어서 안된단다. 아주 그냥 만사가 꼬인다. 하지만 다시 해보겠다고 한다. 역시 친구가 최고다. 헌데 통화 대기량이 많다며 기다리란다. 이제 1시간 40분이 남았다. 국제항공이라 시간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연결이 되었단다. 취소하고 새로 결제하는 금액이 다른지 확인하는데 또 10분이 걸린단다. 뭐 이리 모든 것이 시간을 먹는다냐. 이 사람들 비행기 시간은 알고 있는 걸까? 기다리는 10분이 한 시간 같다. 기다리는데 카톡이 온다. 취소를 하려면 이번에는 고객센터에서 나와 직접 통화를 해야 한단다. 그래 어쩌겠어. 해야 하는 건 해야지. 내 베트남 번호를 알려준다.


또 다시 한 시간 같은 5분이 지나간 후 전화가 온다. 이제 진짜 된 건가? 일단 취소는 확정한다. 그리고 결제는 그럼 되는 거냐고 물으니 결제는 그 친구가 인터넷으로 해야만 한단다. 이건 전화로 결제가 안된단다. 이건 아까 못 들은 애기 같은데. 고객센터 직원에게 아까 그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냐고 하니까 에약번호와 방법을 다 설명해 줬다고 한다. 그럼 뭐 된 거겠지. 이 시간에 인터넷을 하게 만들기 영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국 가면 한턱 쏴야겠다. 무슨 돈으로?


전화를 끊고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얘기를 한다. 친구가 예약번호를 들었다고 한다. 그럼 그걸로 인터넷 들어가서 결제하면 된다니까 친구가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야! 나 인터넷 안돼!" 아주 그냥 꼬일려니 끝이 없다. 하필이면 어제인가 인터넷을 잠시 끊었단다.


노여사와 모든 친구들이 대기 중인데 이제 또 방법이 없다. 이제 1시간 남았는데 이름을 또 바꾸기도 힘들다. 마지막으로 직원한테 전화로 결제를 예외적으로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까 직원이 전화로 된다고 한 거였으니 약간의 책임도 있다.


수중에 돈이 3만 원가량 있다. 이 비행기를 놓치면 사실 좀 큰일이다. 매우 급박한 상황이고 불안하긴 한데, 생각만큼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이 기회에 그냥 인도를 가버려?' 이런 생각마저 든다. 생각해보면 뭔가 웃긴 상황이다. 처음에 결제를 노여사가 했다면, 그 친구가 런던을 안 갔다면, 아니면 갔어도 지갑을 들고 세미나를 갔다면, 그리고 방금 그 친구네 집에 인터넷만 된다면 문제는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이게 연금술사 책에서 강조하던 그 '징조'는 혹시 아닐가? 사실, 연금술사 책은 그 운명론 때문에 싫었다. 물론 시크릿 같은 사이비 종교보다는 낫지만 말이다.


이제 직원에게 공이 넘어갔으니 알아서 하겠지. 이 상황에서 걱정보다 여유를 갖는걸 보니 확실히 내가 변했음을 느낀다. 걱정을 해서 뭐하나. 설마 노숙하다 얼어 죽기야 하겠어.


직원이 한참 본사와 전화하더니 나보고 그냥 티켓팅을 하란다. 어찌 된 걸까? 아까 고객센터에서 베트남까지 국제 전화를 하며 본인 인증하고 결제 취소했던 것을 다시 무효화했단다.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럼 카드번호는 어찌 하려고? 자기 권한으로 책임지겠단다. 현지 직원이 승인 화면에서 주춤하고 있으니 직원이 자기가 책임진다며 진행시키라고 한다.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아서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나 보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되잖아! 라는 생각보다는 그래도 책임을 져주는 모습에 감사하다. 물론 절차에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건 시스템의 문제지 직원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은 조금만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어도 자기가 짊어질 필요 없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맙다. 혹시 어디 칭찬하기 위해 올릴 일이 없으려나 싶어서 명함을 받아간다.

이제 뛸 차례다. 제주도에서도 마지막에 돌아올 때 공항에서 뛰더니 여기도 마찬가지다. 메인 가방은 부쳐버리고 서브 가방을 들고 출국 수속으로 뛰어간다. 다행히 앞에 사람이 없다. 여권을 제출한다. 아 맞다, 출국신고서는 어디 갔지? 이거 지금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권을 돌려준다. 간단하네?


이번에는 시큐리티 체크다. 사실 이거 때문에 혹시 모를 시간의 지연을 방지하고자 메인짐을 부쳐버렸다. 그러니 이것도 무사통과.


출국 수속부터 탑승게이트까지 10분도 안 걸려서 통과한다. 이거 기록이다. 대한항공의 위력은 아닐 거고, 작은 공항이라 그런가? 일단 그래도 마음 놓지 않고 화장실부터 후딱 다녀온다. 그리고 환전 센터로 간다. 라오스 돈은 깜박하고 아직도 못 바꿨지만 베트남 동은 바꿔야 한다. 한국돈으로 바꿀 수 있냐고 하니 된단다. 있는 베트남동을 탈탈 털어서 주고 얼마를 줄 수 있냐고 하니 25,000원이란다. 나쁘지 않다. 달라고 한다.

한국돈을 받으니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난다. 이 돈이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한국돈을 받아 들고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환전하는 애가 뭐하나 보길래 2달만에 보는 한국 돈이 신기해서 그렇다고 얘기해준다.


이제 자리에 앉는다. 다른 절차가 금방 끝나는 바람에 보딩이 아직 20분가량 남아 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보딩 절차만 남으니 갑자기 헛웃음이 난다. 원래는 일찍 와서 마지막 여행기도 정리하고, 여행이 끝나기 전 이곳에서 그냥 올려버리려고 데이터도 아껴놨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럴 여력도 없었고, 여행의 마지막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냥 또 다른 하루임을 깨달으라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너무 감상적 일려나.

잠시 앉아있으니 바로 보딩 안내가 나온다. 일어나서 줄을 선다. 앞에도 한국인, 뒤에도 한국인, 옆에도 한국인이다. 보딩 할 때 직원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알면 어쩌지 하고 살짝 고민하는데 모두 한국말로 해준다. 여권을 들고 있잖아. 바보 같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자리를 찾아간다.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는데 앞에 베트남으로 보이는 한 중년부부가 쭉 들어가다 잠깐 멈춘다. 뭔가 헤매고 있는 게 자리를 찾고 있나 보다. 뒤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데 내 뒤에서 갑자기 짜증 섞인 소리가 들린다.


"아, 저 아저씨 뭐하고 있는 거야!"      


돌아보니 애기를 데리고 있는 신혼부부의 남편이다. 앞에 베트남 부부가 멈춘지 1분도 안되었다. 갑자기 무안할까 봐 내가 영어로 도와드리려고 하니 베트남 부부중 부인이 눈치가 보이는지 아저씨를 막 구박하더니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 짧은 1분도 못 기다리는구나. 이제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구나.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들이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하며 정말 친절하게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 친절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게 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속에서 나오는 친절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기능으로서의 친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돈을 내면 친절이 돌아온다. 우리나라 만큼 자본주의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이곳에서는 진정한 미소가 안 보인다.


갑자기 암담해진다. 2달만에 접한 한국은 내가 예전에 알던 한국과 다르다. 한국이 변한 게 아니니 내가 변한 거겠지. 이런 곳에서 내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이곳에서 내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아침까지만 해도 백 퍼센트 확신이 들었는데 이제는 또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본다. 나 자신을 지켜보자.


어쨌든, 내 59일간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물론, 진정한 여행은 지금부터다. 지금까지가 쉬운 여행이었다면, 앞으로는 처절하고 괴로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있다면, 어떤 고난에서도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이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던 그 여유, 그 여유만은 꼭 간직하고 싶다. 나는 나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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