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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Oct 04.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1

적응의 시간

새로운 여행지를 가면 언제나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제주도. 꽤나 많이 와본 곳인데 여전히 이곳은 나에게 신선하고 새로움을 준다.

공항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흐리다. 화창한 좋은 날씨를 기대하고 왔는데 약간 실망스럽다. 짐 쌀 때 두꺼운 옷을 하나 더 챙긴 게 잘한 듯하다. 여자친구 말 듣기를 잘했다. 역시 엄마든 여자친구든 남자는 여자 말을 들어야 하나보다.


나오자마자 114로 전화부터 걸어서 핸드폰을 해지한다. 이번 여행은 단절이 주 목적이다. 항상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편리함을 느끼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못 찾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내 자신을 찾기를 바란다.


첫 번째 미션! 오늘 숙박을 할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야 한다. 제주도를 여러 번 왔지만 항상 렌트를 하고 편하게 다녔지 이렇게 해외 배낭여행처럼 다닌 적이 없어서 걱정이 된다. 사이트에서 미리 조사한 데로 공항 옆을 보니 다행히 예상한데로 버스 타는 곳이 보인다. 그 앞 앉아서 일기를 쓰고 책을 보면서 버스를 기다린다. 여행 다닐 때는 이런 소소한 기다림과 여유가 너무 좋다.

버스가 와서 올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말이 터미널이지 그냥 정류장 정도이다. 시외버스이지만 후불교통카드가 먹히고 심지어 환승할인도 된다! 역시 우리나라 만세다.

터미널에서 30분을 기다리고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면서 카드를 자연스럽게 찍었더니 삑 소리가 울리며 결제가 안된다. 왜 이러는 거지? 당황하며 조금 기다리니 기사님이 올라 타시더니 목적지부터 얘기하라고 하신다. 목적지를 얘기하면 그곳을 기사님이 입력하고 그 이후에 카드를 찍는 시스템이다. 아하! 시외버스라서 거리별로 요금이 다르니 이렇게 하는구나. 근데 좀 불편하네. 탈 때 찍고 내릴 때 찍으면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행 다닐 때는 이런 생각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서울과 다르게 제주도에서는 버스카드를 탈 때만 찍는다.


세천동에서 내리라는데 버스에 노선도가 안 나와있다. 초행이다 보니 긴장하며 앉아있는다. 책을 보려고 내 필살기인 코보를 꺼내지만 안드로이드를 올린 이후에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인 먹통이 되어 있다. 젠장. 똥꼬를 찔러서 리셋해야 하는데 핀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음악을 들으면서 버스에서 나오는 안내멘트에 집중한다. 아이폰의 배터리가 20%로 간당간당하다. 불안하다.


전화를 끊으니 3G, LTE가 안돼서 중간에 뭘 조사할 수가 없다. 다음부터는 버스 내리는 곳 뿐 아니라 그 전의 정거장들도 좀 미리 조사를 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서 내리는지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는 것이 영 피곤하다. 어쩔 수 없지 뭐.


드디어 세천동이라는 안내가 나온다. 그래도 안 놓치고 잘왔구나 싶으면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기사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내리니 허허벌판이다. 아, 여행 온 거 맞는구나. 지도에서 나온 표시를 보며 게스트하우스를 더듬더듬 찾아간다. 조금만 걸어가니 안내 표지가 나와 있어서 생각보다 허무하게 찾는다. 쉽게 찾으면 좋은 건데 뭔가 아쉽다. 뭘 기대한 거냐...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가니 스텝분이 한분 계신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 달째 머무르고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 제주+ 쿠폰으로 3일 동안 5만 원으로 예약을 한지라 얘기를 하고 쿠폰을 받는다. 숙소를 안내해서 같이 들어가서 오늘 묵을 도미토리와 화장실 샤워실을 본다. 도미토리에 누가 있으려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가보니, 내가 제일 먼저다. 나중에 아버지랑 아들 한팀이 온다고 스텝분이 말을 해준다. 아버지와 아들? 도미토리에서 보기에는 희한한 조합이네,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나름 기대도 해본다.


휴게실로 나와서 책을 본다. 다행히 이곳에는 압정이 있어서 (빨래 거는 용도인 듯?) 자랑스러운 코보의 똥꼬를 찌르고 리셋을 드디어 성공한다. 이번에 리디북스에서 할인하길래 잽싸게 구매한 탐스 스토리를 열어서 본다. 탐스 창업자에 대한 얘기인데 내용이 나름 괜찮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보고 있으니 여자 도미토리에 몇 분이 온다. 올라오시길래 인사를 한다. 여행 다니면서 인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항상 생각하곤 했다. 같이 인사를 하시는데 뭔가 서로 어색하다. 조금 계시더니 내려가신다. 뭐 조용한 평화를 원했기에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잠시 책을 본다.


그나저나 너무 춥다. 아마도 손님이 없을 때는 보일러를 안트나 보다. 살짝살짝 불이 올라오는 듯한데 한세월 걸릴 거 같다. 어느새 저녁 6시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해결해야겠다. 근데 걸어올 때 식당을 못 본거 같은데... 스텝한테 물어보니 가장 가까운 식당이 15분 거리에 있단다. 그러면 혹시 라면 같은 거 사와서 먹을 수 있나 취사를 물어보니 안된단다. 어쩌라는 거지? 뭐 어쩔 수 없이 식당을 찾아 나선다.

스텝분이 일러준 방향으로 대충 가본다. 가다 보니 뭔가 길을 잘못 든 거 같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여쭤보니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주신다. 다시 길을 찾고 가는데 한참을 걸어도 잘 안 나온다. 15분이라며! 30분은 걸어가서야 항구가 나타난다. 그런데 스탭이 얘기해준 그 식당은 문을 닫았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허무하다. 허무도 허무지만 내 저녁은 어찌 되는 걸까. 조용한 여행이 갑자기 스펙타클해진다.

다행히 앞에 회타운이 보인다. 회타운이라... 이름부터 비싼 느낌이 나는데 걱정된다. 일 3.5만 원 콘셉트의 여행인데, 오늘은 첫날이고 숙박도 좀 싸게 해서 만원 정도 여유가 있다. 용기를 내서 들어가본다.


안에는 가족 단위로 회를 즐기는 분들이 많다. 회센터가 다 그렇듯이 밑에서 회를 잡아서 위에 식당에서 먹는 시스템인 거 같다. 메뉴판을 보니 회덮밥이 만원이다. 조금 비싸지만 먹을만하다.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서 회덮밥을 시킨다. 사장님이 회덮밥은 1인분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 밥 먹을 수 있는 걸까?


그럼 1인분 되는 건 없냐고 물어본다. 해물뚝배기만 된단다. 이것도 만원이다. 그래도 있는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 뚝배기 달라고 한다. 앉아서 조금 기다리니 식사가 금방 나온다. 생각보다 괜찮다. 실한 전복이 3마리나 들어가 있고 새우도 한마리 보인다. 근데 새우 모양이 희한하다. 랍스타처럼 생겼는데 설마 랍스타는 아니겠지. 여하튼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 계산을 한다. 카드를 내니까 사장님이 살짝 언짢아하신다. 현금 없냐고 물어보신다. 그래, 여행지에서는 마음을 넓게 먹자 하고 현금을 내고 나온다.

나오니 깜깜하다. 큰일이다. 길도 모르는데... 특히나 아까 왔던 길은 완전 으슥한 곳이라 걱정이 된다. 그냥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앞이 안 보일 정도이다. 아이폰으로 플래시를 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길이 정말 어둡다. 중간에 갑자기 개가 짖어서 정말 깜짝! 놀란다. 뒤에서 귀신이 쫓아오는 느낌처럼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다. 겁나기 시작하면 겁 잡을 수 없을 듯해서 쿨한 척 걸어간다. 조금 걸어가니 숙소가 보인다. 그래도 길눈이 나쁘진 않은 듯해서 다행이다.

방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도미토리에는 나홀로 있다. 다른 일행은 오는 걸까? 그래도 방은 그동안 좀 따뜻해져서 앉아서 책을 본다. 휴게실에는 아까의 그 여자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 뭔가 내가 멋쩍어서 못 나가겠다. 그냥 방에서 책을 본다. 슬슬 잠이 온다. 자고 싶은데 불을 꺼버리면 다른 분들이 와서 불편할까봐 못 자고 좀 더 책을 보며 기다린다.


밖에서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 여행팀이 입장한다. 부자가 여행한다길래 아들이 초등학교 정도인가 싶었는데 26살 청년이다. 뭔가 아버지도 멋지고 아들도 멋져 보인다. 아들은 실제로도 꽤나 훈남이다.


인사를 하고 앉아있는데 아버님이 맥주 한잔 하겠냐고 물어보신다. 나쁘진 않지만 여기 주변에 식당도 없고 마트도 없는데 어떻게 구하실려고...? 말씀을 드리니 이미 사가지고 오셨단다. 여행 다닐 때는 술을 많이 안 마시려 하지만 가볍게 마시는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오케이를 한다.


아버님이 차에서 맥주 캔 10개를 꺼내시더니 무려 치킨도 배달을 시키셨단다. 역시 우리나라는 치느님의 왕국이다. 배달 안 되는 곳이 없다. 거기에 소주도 한병. 아버님이 소맥을 말아서 주신다. 공짜로 먹으면 안될 듯해서 돈을 건네드리는데 한사코 안받으신다. 돈을 아껴서 좋긴 한데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다. 뭐 그래도 어른이 주시는 거니 먹어도 괜찮겠지.


몇 잔 마시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아들은 뮤지컬 배우를 하고 싶어 한다. 근데 좀 늦게 시작해서 아버님이 좀 반대를 하시나 보다. 그래서 여행 다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려고 같이 오셨단다. 나는 첫날인데 두 분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이런 것도 나름 인연이지 싶다.


너무 늦게 자면 여행 패턴이 망가질까 봐 얘기를 좀 나누다 먼저 술자리를 파한다. 내일 두 분은 주상절리랑 몇 군대를 들렀다 공항으로 가신다며 오전에 같이 다니자는 제의를 한다.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지만 이것도 인연인 듯해서 그러자고 한다. 어차피 14일이나 남은 여행, 좋은 사람들을 사귄다면 그것도 또 여행의 일부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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