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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Oct 07.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3

적응의 완료...?

벌써 3일째구나. 아니 아직 3일밖에 안된 건가? 며칠 안지났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 듯하기도 하고 짧은 거 같기도 한게 시간의 흐름이 여행 중에서는 다르게 느껴진다. 하나 확실한 건 그래도 이제는 낯선 느낌은 많이 없어졌다. 여행에 드디어 물들어가나 보다.


이응 게스트하우스는 조식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식은 내 여행에 있어서 핵심이다. 그렇다고 사먹으면 뭔가 그 조식의 느낌이 안난다. 조식을 안 먹으니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안 좋다. 그래도 10시에는 어차피 나가야 하니 어제 조사한 천제연 폭포를 가기 위해 씻고 나와본다.

마당으로 나와보니 어제 그 고양이가 또 나타났다. 그럼 그렇지 네가 어딜 가겠냐. 어제 안 주고 쟁여놓은 소시지를 꺼내 준다. 역시 이웅이웅 거리면서 잘 먹는다. 밥을 주고 있으니 사람들이 좀 몰려와서 자리를 피한다. 근데 뒤편에 보니 얘 그릇에 누가 사료를 넣어놨다. 너 왜 이건 안 먹고 있었니. 밥보다는 떡볶이를 좋아하는 뭐 그런 고양이인 건가. 저렴한 사료라 맛이 없을지도. 여하튼 그래도 있는 동안 하루에 소시지 하나씩은 줘야겠다.



버스 타러 가다 편의점을 보니 초콜릿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아 오늘 밸런타인 데이지. 어쩐지 제주도 여행 간다니 여친이 즐거이 보내주더라. 20만 원 용돈도 따로 건네 주고. 괜찮다. 나도 화이트데이 때 복수하면 된다.

100번 버스를 타고 천제연 폭포로 간다. 며칠 지나니 이제 버스는 익숙해졌다. 배차간격이 30분이라서 문제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어려울 거 없다. 제주도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특히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들이 많이 보인다. 마을에 장수하시는 분이 많은 건지 젊은이가 없는 건지 헷갈린다. 근데 왜 할아버지들은 없지? 나도 장수하고 싶은데... 여친이 나보다 많이 어린데 나중에 홀로 살아갈 생각하니 안쓰럽다. 보신 잘하고 오래 살아서 내가 더 오래 살아야겠다. 훗.

버스에서 내려 폭포로 입장하려고 하니 입장료가 있다. 2500원. 아 오늘 예산이 불안하다. 아까 물과 휴지도 사고 입장료도 있고. 어제랑 그제 선방했으니 오늘은 예산을 좀 넘겨도 괜찮으려나. 돈을 내고 들어가는데 여긴 청소년이 24살까지다. 희한한 시스템이다. 살짝 청소년이라고 사기 쳐볼까 하다가 그냥 낸다. 어차피 안됐을 거다.



들어가서 보니 천제연 폭포는 1폭포, 2폭포, 3폭포로 나누어져 있다. 일단 1폭포로 가본다. 최근 비가 안 와서인지 물은 별로 없지만 뭔가 지긋이 보고 있으니 장관이다. 별거 아닌 것에 감동받는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서 감상을 하다 일어난다. 혼자 여행 다닐 때의 좋은 점은 그 누구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거다.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면 된다.

2폭포로 향하는데 안내 문구가 보인다. 'You can be died' 아 진지하게 우리나라는 영어 검수를 안 하는 걸까. 나름 관광지인데 이게 뭐시다냐. 중학교 영어만 마스터해도 알 텐데.

2폭포에 도착한다. 사실 1폭포보다 이곳이 경치는 더 좋은데 이상하게 별 감흥이 없다. 역시 사람은 첫 경험이 중요하다. 1폭포에서 이미 감탄을 한번 해서 그런지 그냥 폭포인 듯한 감정만 있어서 조금 앉아있다 바로 일어선다. 근데 이곳까지 오는데 계속해서 3폭포는 올라가기 어렵다는 경고 안내가 눈에 보인다. 이거 올라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너무 나오니 오히려 호기심이 든다.

3폭포로 향하는 길에 선지교라는 게 있다. 급할 것도 없겠다 갈림길이란 갈림길은 다 들어가 본다. 앞에 할머니가 귤을 파시길래 귤도 한 봉지 산다. 한 봉지에 무려 천 원 밖에 안한다. 제주가 귤이 유명하다더니 가격도 싼가 보다. 이따 숙소에서 컬링을 보면서 먹어야겠다.

선지교에 올라서니 정말 장관이다. 높아서 아찔한 것도 있지만 제주도 전체가 한 시야에 들어오는 듯하다. 저 멀리 한라산도 보인다. 이번에 한라산에도 꼭 가보고 싶은데 갈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럴줄 알았으면 등산장비도 좀 챙겨올걸.

뷰를 가만히 보며 멍 때리고 있다 보니 갑자기 울컥한다. 왜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힘들기도 했었나 보다. 그래도 울컥한 이후에는 뭔가 뻥 뚫리는 느낌도 난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다짐을 해본다.

3폭포로 향한다. 하도 사람들한테 겁을 줘서 그런지 가는 길에 사람이 확실히 없다. 음악은 안 듣고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역시 최고의 음악은 자연의 소리이다. 근데 여기 왜 이리 겁을 준건지 모르겠다. 그냥 계단이고 그리 길지도 않구먼. 뭐 그래도 덕분에 사람이 없어서 나홀로 걸으니 기분이 좋다. 중간에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익숙한 기구를 발견한다. 우리나라 공원에는 운동기구가 반드시 꼭, 기필코 있어야만 하는 걸까? 놀이터에 있어야 할 저 운동기구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몹시 궁급해진다.

폭포에 도착해서 보니 3개 폭포 중 제일 작긴 한데 나름 멋지고 소리도 좋다. 한동안 앉아서 소리를 들어본다. 사람들은 왜 폭포를 좋아하는 걸까? 물이 기운차게 내려오는 것이 뭔가 막힌걸 뚫은 거 같아서 그런가? 현대인들은 다 뭔가 아픔을 안고 사는 거 같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

일어나서 다시 길을 내려와 입구 근처로 나온다. 나가기 전에 있는 공원에 테이블(?)이 하나 보인다. 점심시간도 여유가 있겠다, 키보드를 꺼내고 자리 잡고 앉아서 글을 쓴다. 햇빛이 있을 때는 따스하고 없을 때는 춥다. 그래도 글 쓰기에는 적합한 장소다.

앉아서 있다 보니 옆에 사진사의 사기행각(?)이 계속 들린다. "어머니, 제가 원래 이 액자는 농담 아니고 절대 서비스로 안 드리는데 진짜 어머니한테만 드리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5분 동안 4번 들었다. 먹고살기 힘들구나. 그래도 열심히 사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근데 요즘도 사진 찍고 액자로 만들고 하는구나. 근데 왜 기껏 폭포에 와서 폭포가 아닌 돌 하루방 앞에서 사진 찍고 액자를 만드는 걸까? 역시 사람들을 다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 다 이유가 있겠지 뭐. 돌하루방 마니아라던가...?

여기까지 글을 쓰고 추워서 길을 나선다. 어제 밤에 인터넷 되는 곳에서 조사한 바로는 여기가 나름(?) 유명 관광지라 그래도 맛집이 좀 있단다. 지난번에 제주도 왔을 때 먹고 반한 고기국수를 먹고 싶어서 유명하다는 국수바다를 찾아간다. 바로 앞인지 알았더니 아니다. 이럴 줄 알고 어제 네이버 지도에서 오프라인에서도 볼 수 있게 다운받아놓았지요. 자신 있게 지도를 열고 찾아본다. 1키로란다. 생각보다 좀 되는군. 하지만 뭐 남는 게 시간이니... 길을 나선다.


걷다 보니 이곳에는 피시방도 있고 빵집도 있고 나름 번화가다. 왼쪽에는 예쁘장한 성당이 하나 보인다. 지금은 무교지만 예전에 복사부터 주일학교 선생님까지 꽤나 오랜 시간 신자였던지라 흥미가 간다. (무교가 된 이유는 진화론을 믿기 시작해서...) 밥 먹고 시간 되면 들러야지 생각을 하고 식당을 계속 찾아간다.

조금 걷다 보니 식당이 드디어 나타난다. 사실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작아서 무심코 지나칠뻔했다. 확실히 블로그 사진과 이력서 사진은 믿을게 못 된다. 다행히 안 지나치고 찾아서 들어간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옆에 어떤 커플이 앉는다. 오늘따라 커플들이 다 얄밉다. 나도 여자친구 있다고!!


메뉴가 다양한데 고기국수를 시킨다. 옆 커플은 몸국(?)인가 하는 처음 듣는 음식과 고기국수를 시킨다. 국수가 나오고 사진을 찍고 먹으려고 했는데 부침개랑 나온 밑반찬이 꽤나 맛있어 보인다. 오늘은 조식마저 못 먹었더니 식욕이 폭발한다. 결국 사진 찍기 전에 먹고 만다. 이게 다 이응 게스트하우스 때문이다. 젠장.

반찬을 다 먹고 나니 국수가 나온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먹어보니 내가 기억하던 예전의 그 맛이 난다. 급 기대감이 폭발한다. 면을 듬뿍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어본다. 흠... 굵은 짬뽕면이다. 이게 원래 이랬나?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한번 짬뽕면이라고 생각하니 짬뽕 생각만 난다. 짬뽕에 고기육수를 부은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건 그거고 맛있게 먹는다. 무려 7천 원을 줬는데 당연하지.


옆의 커플은 서로 조금씩 떠주면서 나눠 먹고 있다. 너네가 한 그릇을 통째로 먹는 맛을 알아? 이래서 자고로 맛난 거는 혼자 가서 먹는 게 최고다. 보란 듯이 그릇을 들고 국물을 사발채 시원하게 비운다. 분명 내가 더 맛있게 먹었을 거다.


오늘은 이래저래 지출이 많다. 귤도 샀고, 입장료도 있고. 3.5만 원 제한은 이미 포기했다. 그래도 이틀 동안 아낀 거 생각하면 일 3.5만 원은 지킨 거다,라고 합리화를 해본다. 다 먹고 계산을 한다. 역시 유명한 집이라 그런지 카드계산이 된다. 훌륭하다.


나와서 시간을 보니 1시다. 아까는 성당 가서 나름 심신의 정화를 하려 했는데 밥 먹고 나니 뭔가 감상적인 기분이 사라졌다. 그래도 '순수' 코스프레라도 하자 싶어서 성당을 찾아간다. 생각보다 거리가 되지만 잘 찾아간다.

성당에 들어서니 확실히 옛날 생각이 난다. 성당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는다. 지나가던 신자들이 언제든지 편하게 들어와서 명상을 할 수 있게 말이다. 난 성당의 이런 점이 참 좋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고 앞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약간 기분이 들랑 말랑 하다가 만다. 아무래도 종교에 빠지기에는 이제 머리가 너무 굳었나 보다. 그래도 경건한 느낌에 조금이나마 명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성당에 들린 게 화장실을 가기 위함도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인간의 기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명상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잘 먹는 건 언제나 잘하지만 잘 싸고 잘 자는 건 쉽지 않다. 자는 건 특히 우리나라 성인 남성의 100%가 코를 고는데 별 수 없다. 화장실을 찾아보는데 안 보인다. 어쩔 수 없지. 나온다.


나와서 보니 버스정거장을 지나온 듯하다. 다시 되돌아갈까 하다가 행선지 없는 여행의 매력을 느끼고 싶어진다.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가본다. 언젠가 정거장이 나오겠지.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데로 뭐라도 나오겠지.


올레길을 걷는듯한 여행자들이 길에 여럿 보인다. 여기 올레길인가 보다. 근데 그냥 일반적인 4차선길인데? 어제에 이어 올레길에 대한 환상이 조금 사그라든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음악은 신기하다. 주변이 아무리 허해도 음악과 함께라면 갑자기 감상적인 풍경으로 변화한다.


가다가 구름다리가 보여서 밑에 보니 고양이가 보인다. 고양이 마니아 답게 유심히 관찰을 한다. 한놈이 갑자기 흙 바닥에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뭐하는 거지? 궁금해서 잠시 지켜본다. 열심히 파더니 그 구멍은 무시하고 옆에 또 다른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엥?? 근데 두 번째 판 구멍에는 엉덩이를 들이미고 앉는다. 우리 고양이들은 집에 있는 화장실에서 싸고 난 후에 덮더니 야생에서는 파고 싼 다음에 덮나 보다. 시원하게 싸고 나서 열심히 덮고 있는 그놈과 우연히 서로 눈이 마주친다. 뭔가 겸연쩍어서 못 본척하고 가던 길을 간다.

이거 버스 정거장 한정거장 거리일 텐데. 아무리 걸어도 정거장이 안 나온다. 주변의 아무 카페나 들어갈까 싶어서 둘러봐도 없다. 뭔가 감상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렇게 아쉬워하려는 순간 정거장이 보인다. 다행이다.


정거장에서 또 한참을 기다려서 버스를 탄다. 제주도에서 버스를 타는 거는 이제 익숙해졌는데 과하게 긴 배차 간격은 영 적응이 안된다. 사는 사람들은 짜증 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목적지는 어차피 종점이고 몇 번 가본 곳이라 이제는 안내 메시지에 신경 안 쓰고 음악을 들으면서 편하게 앉아 있는다. 중간에 멋진 풍경이 몇 번 나와서 충동적으로 내려볼까 싶다가도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고 마음 먹는다.


대평리에 도착해서 내리니 집에 온 느낌이다. 이틀 있었을 뿐인데. 이제 진짜 여행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나 보다. 아지트로 갈까 했는데 날씨가 생각보다 좀 쌀쌀하다. 고민 안 하고 어제 갔던 기다림 카페로 다시 간다. 아까 폭포에서 1000원 주고 샀던 귤을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좀 드릴까 싶어서다. 사람은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카페 들어가기 전에 보니 앞에 수제 버거 가겟집이 문을 열었다. 이틀 동안 오가며 있는 것은 쭈욱 봤지만 막상 문을 연것은 처음 본다! 제주도 흑돼지로 만든 수제버거라니. 이거 뭐 생각만 해도 맛있어 보이지 않나? 게다가 5천 원이다. 들어가서 아저씨한테 언제까지 영업하시냐고 물어본다. 대충 5시인데 그냥 다 팔리면 닫으신단다. 쿨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4시 반쯤에 올테니 그때까지만 있어달라고 부탁해본다. 물론 다 팔면 가시겠지만.


기다림 카페에 들어가니 어제 그 주인 아주머니가 안 계신다. 며느리 같은 분이 있으니 이게 또 애매해진다. 여하튼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는다. 오늘은 커피를 하루종일 못 마셔서 커피를 시킨다. (이게 다 조식 없는 이응 게스트하우스 때문이다. 쩝.) 충전을 하면서 아까 쓴 어제의 여행기에 사진을 추가해서 올린다.


오늘은 이곳에서 '탐스 스토리' 책을 다 볼 예정이다. 앉아서 코보를 킨다. 안 켜진다. 재부팅해본다. 안된다. 갖다 버려! 또 먹통이군. 카운터로 가서 이쑤시개가 있는지 물어본다. 카페에서 웬 이쑤시개를 찾느냐는 표정이지만 역시 친절하셔서 다른 송곳 같은걸 주신다. 똥꼬를 찔러 리셋한다. 이쑤시개를 하나 구해서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드디어 독서를 시작한다. 헌데 와이파이가 연결되어 있으니 카톡이 울리고 자꾸 인터넷을 하게 돼서 집중이 안된다. 끊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놔둔다. 뭔가 이것마저 끊기는 싫다.


여행 와서 드디어 첫 번째 책을 다 봤다. 이 책 훌륭하다. 오늘 저녁에 따로 감상문을 쓰자고 마음 먹는다.  지난번에 읽었던 아마존 얘기 원클릭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도 많이 했고 느낀 바도 많다. 노트에 필기한 내용을 나중에 다시 한번 봐야겠다.


생각해보니 4시 반이라 버거 아저씨가 퇴근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급 들어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급하게 튀어나온다. 다행히 아직 문을 안 닫으셨다. 확인해보니 아직 패티가 많이 남으셨다. 오늘은 장사가 잘 안되셨나 보다. 아님 오늘따라 많이 만들어오신 건가? 메뉴를 물어보니 어차피 한종류만 있다. 포장해 달라고 하면서 내일도 아마 올 거라고 말씀을 드린다. 나보고 여기 사냐고 해서 여행 중인데 4일 정도 이 동네에 머물 거라고 하니 어디 머무냐고 물으신다. (조식 안주는) 이응  게스트하우스요,라고 하니 거기 뭐 쿠폰 풀었냐고 요즘 사람이 많아 보인다 하신다. 친절히 제주+ 쿠폰에 대해 설명을 드린다. 내가 대답을 잘 해 드려서인가? 갑자기 좀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안에서 한라봉을 하나 꺼내와서 서비스로 주신다. 5천 원에 버거, 그리고 한라봉이라니. 이거 횡재한 느낌이지만 표정에 안 드러나게 쿨하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나온다. 의리상 내일 또 와야겠다. 5천 원에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한 한 끼 식사다.

버거를 사고 나니 콜라의 압박이 강해진다. 하지만 계산해보니 오늘은 이미 3.5만 원을 넘겼다. 에잇 그냥 물이랑 처먹자. 버거가 맛있어서 콜라랑 안 먹어도 충분히 맛날 거야 라고 혼자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어제 냥이한테 줄 소시지는 또 사러 간다. 소시지 2개를 천 원 주고 사온다.


게스트하우스로 가보니 아직 4시 40분 정도인데 오늘은 의외로 열려있다. 카페로 들어가면 왠지 고양이 밥 주는 게 눈치 보일 것 같아서 뒷문으로 들어간다. 이 고양이 녀석 역시나 어제 그 자리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다. 이놈(놈 맞나?) 영특하다.  밥을 두 번 줬더니 이제 날 알아본다. 날 보자마자 달려오더니 끼를 부린다. 너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소시지를 하나 까서 내어 주니 또 "이웅이웅"거리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하나를 금방 해치워버린다. 배고팠나. 들어오면서 보니 사료는 좀 남았던데. 사료가 맛이 없나보다. 다 먹고 더 달라고 끼를 부리며 자꾸 보챈다. 하지만 안된다. 내 콜라도 못 먹는데... 하루에 두개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앞으로 며칠 얘를 더 보려면 이름을 붙여야 하나 고민된다. 여기가 대평리니까 대평이라고 부를까 한다. 나 혼자 부르는 거니 내 멋대로 해도 된다. 앞으로 넌 대평이야. 이렇게 너무 친해지면 나 간 다음에도 날 찾을까 걱정도 된다. 하긴 이놈이 그럴 리 없을 거다. 고양이들은 그리 의리 깊은 동물이 아니다. 괜히 혼자 슬쩍 울적해진 게 억울하다.

좀 쓰담쓰담해주고 카페로 들어와 손을 씻는다. 물어보니 외부에서 사온 음식도 여기서 먹어도 된단다. (물론 4시 반 이후겠지만) 글을 쓰며 하루를 정리하며 사소한 고민을 해본다. 이 버거를 지금 먹을까 해지는 것을 보고 와서 먹을까. 지금 먹으면 뜨끈할 텐데... 하지만 해지는 것을 제대로 본 이후에 먹기로 한다. 어제 실패한 일몰을 오늘은 기필코 보리라. 그래도 여행의 백미인데. 조식과 일몰, 이 두개 일과마저 없으면 여행이 너무 방만(?)해진다. 오늘은 어제의 실패를 교훈 삼아 6시 30분쯤 나가야겠다. 슬쩍 밖을 쳐다 보다가 해가 수평선에 걸리면 뛰쳐나가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내 룸메들은 오늘 아침에 다 퇴실했다. 아침에 물어봤을 때 오늘 예약된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오늘 밤은 혹시 혼자 쓰게 되려나? 하루라도 푹 자고 싶어서 그랬으면 하는 소원도 있지만 예약 없이 그냥 오는 사람도 꽤 있어서 안되지 싶다. 뭐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버거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숨겨놓는다. 내 버거는 소중하니까. 가는 길에 두리번거려보지만 대평이가 안 보인다. 이놈 그랫 다른 호구 찾아 떠났나 보다. 쳇.


방에 있으니 아니나 다르게 룸메 한 명이 도착한다. 역시 혼자 자는 호사란  없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6박 일정으로 엊그제 왔고 성산일출봉에서 넘어오는 길이란다. 혼자 오는 여행은 처음이라 성산에서는 독실을 썼고 도미토리는 오늘이 첫 경험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어색해하는 표정이 여실하다. 내가 조금 챙겨줘야 하나?


밖을 보니 그새 어두워지고, 해도 곧 질듯해서 일몰을 보러 밖으로 나간다. 가는 길에 보니 노을이 예쁘게 져있어서 기대를 품어본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나가보니 바람이 꽤나 쌀쌀하다.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고 바닷가로 간다. 일몰의 분위기가 다 좋은데 구름의 위치가 아쉽게도 에러다. 아니 왜 구름이 하필 저기 있단 말인가. 넌 굳이 꼭 거기 있어야 하겠냐. 이 곳을 떠날 때까지 대평리에서 일몰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망하고 앉아있는데 갑자기 개가 한 마리 보인다. 강아지인가? 여하튼 큰 개인데 애가 얌전해 보인다. 나는 고양잇과라 배신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슬쩍 다가선다. 이놈, 금방 앵긴다. 심심했나 보다. 옆에 앉아 만져주면서 놀아준다. 살짝 소시지를 줄까 고민된다. 안돼 이놈아. 이건 우리 대평이 꺼야. 어떻게 산 건데. 어차피 주인도 있어 보여서 아마 평소에 잘 먹고 있을 거다.

얘랑 놀고 있는데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옆을 보니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 개가 한 마리 더 있다. 우리가 노는 것을 보더니 자기도 굳이 놀겠다며 나오기 위해 저 좁은 틈으로 얼굴을 낑낄거리며 들이민다. 너 거기로 못 나와. 살짝 열어서 놀아줄까 싶다가 주인 있는 개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돌아선다.

돌아서 보니 예상치 못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도미토리에서 인사한 룸메다. 아마 여행 초보라 혼자 있는 게 편하지 못한가 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나를 찾아 오다니. 아니면 그냥 자기도 일몰 보러 왔는데 우연히 만난 걸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일몰은 볼 환경이 아니라서 잠시 같이 앉아 있다 돌아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의외로 달이 예쁘다. 룸메가 얘기하길 오늘 대보름이란다. 대보름에다가 밸런타인데이라. 오늘 마법사들 좀 많이 나오지 싶다. 난 여친 있으니까 괜찮아.

이제 대망의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 근데 룸메가 저녁을 안 먹었단다. 이거 애매하다. 나눠주기에는 조금 거시기하고 혼자 먹자니 치사해 보이고. 돌려서 말하고자, 버거집이랑 주변에 먹을 거 있는 곳들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버거를 가지고 카페로 나오니 룸메도 밥을 먹는다고 따라온다. 진짜 혼자 있는 게 아직은 불편한가보다. 룸메는 와서 밥을 시켜 먹는다. 밥 나오는 동안 혼자 버거를 먹는다. 사방에서 눈치가 보이지만 역시 생각만큼 맛있다. 이건 식어도 맛있다. 난 역시 모든 게 맛있나 보다. 내일 또 가야겠다.

버거를 다 먹고 뭔가 미안해져서 아저씨한테 서비스로 받은 한라봉을 까서 반을 룸메에게 나눠준다. '여행에서는 베풀어야 하는데 버거는 주기가 좀 그랬어. 이해하길 바래'라고 속으로만 얘기한다. 술을 한잔 하자고 할까 하다 오늘 예산도 넘기고 좀 애매해서 만다. 이거 예산 정해놓고 있자니 내가 너무 치사해지는 거 같다. 근데 보아하니 이 친구 감기 걸렸다. 감기 걸렸을 때는 술을 마시면 안되지. 물 많이 먹으라고 하고 몸도 안좋은데 일찍 들어가서 자라고 얘기해준다.

룸메는 방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아 오늘 다 읽은 '탐스 스토리'의 독후감(?)을 쓴다. 글을 쓰면 내 생각도 정리가 돼서 좋다. 혼자 온 사람들이 (여자 사람들) 와서 밥을 먹는다. 말을 걸고 친해져 볼까 하다가 여친이 바람나면 죽인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바람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근처도 가지 말아야겠다. 용돈까지 받은 주제에 그러면 인간이 아닌 거다.

생각난 김에 여자친구한테 엽서도 쓴다. 이응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엽서를 쓰면 보내는 게 공짜다. 이 공짜 엽서에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마크가 있으니 자연스러우면서도 훌륭한 마케팅이다. 엽서를 다 쓰고 네이트온으로 회사 주소를 물어본다. 이왕 보내는 거 회사로 보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여자 남친 있음을 천명해야 한다. 부끄럽다며 집으로 보내라고 한다. 어라, 이러면 안되는데. 설득해보지만 진다. 남자는 여자를 이길 수가 없다. 집 주소를 엽서에 쓰고 우체통에 집어 넣는다. 회사 주소를 외워놨어야 했다. 안타깝구먼.


오늘이 이 게스트하우스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또 뭔가 아쉽다. 항상 모든 것은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무뚝뚝해 보이던 스텝도 계속 보다 보니 은근히 정이 많아 보이고 생각보다 친절하기도 하다. 부족해 보이던 숙소도 그새 뭔가 편해졌다. 바라는 게 많으면 실망도 크지만 흘러가는 데로 두면 만사가 편해지고 행복해진다.


여행 3일 만의 일종의 스케줄이 생겼다.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그 이후 점심 먹고 카페에서 책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기, 그리고 저녁에는 일몰을 본 후 저녁을 먹는다. 저녁까지 다 먹으면 글을 쓰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방으로 가서는 책을 좀 읽으면서 일찍 취침하여 내일을 대비한다. 여행 중에 생기는 이런 일정한 스케줄이 좋다. 혼돈 속에 질서라고나 할까? 대평리 마을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이제 적응기는 지났나 보다. 내일은 옆에 티벳풍경으로 옮긴다. 나름 기대되고 설렌다. 일정한 것도 좋지만 설렘도 좋다. 그냥 여행이 좋은 가보다.


오늘 쓴 돈은 37,400원. 예산에서 2400원을 드디어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이틀 동안 약 6천 원을 세이브했으니 아직은 계획대로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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