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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Oct 12.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4

또 다시 새로운 적응

네 번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이응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는 그냥 스쳐지나 가는 곳이었다는 느낌이라 실제 체감하는 숙소의 이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이동이 몇 발자국 옆에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여행을 다닐 때 게스트하우스는 그 여행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응에서는 그래도 조용하고 편안하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에 감사한다.

이응에서의 마지막 룸메에게도 감사한다. 룸메는 어제 감기가 있어서인지 8시에 일찍 잠들었고 나도 덕분에 불을 끄고 일찍 누울 수 있었다. 게다가 코를 골지 않았다! 지금까지 5명 중에 4명이 코를 곤 거니 통계적으로 계산하면 성인 남성의 80%가 코를 고는 셈이 된다. 오늘은 6인실에 들어가니까 표본이 더 넓어질 거다. 아 두렵다. 지금까지 경험적 통계로 봤을 때 나를 제외한 5명 중에 한 명도 코를 골지 않을 확률은  (1/5)^5이니 0.032%가 나온다. 뭐 절대적으로 한 명 이상은 코를 곤다는 얘기다. 여하튼 아푼 룸메 덕분에 어제는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가 있었다. 여행 떠나기 전날에도 잠을 잘 못 잤으니 대략 4일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잔거다.

8시쯤 일어나서 씻고 룸메에게 인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선다. 아무래도 바로 옆으로 가는 거니 많이 감상적이 되지는 않는다. 오랜만에 가방이 풀세트로 가득 찼다. 오늘 다닐려면 짐을 맡기긴 해야 하는데... 일단 다음 목적지인 티벳풍경 옆을 한번 슬쩍 지나가 본다. 아 여긴 뭔가 다른 곳과 분위기가 다르다. 첫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다. 일단은 원래 계획대로 나만의 아지트로 나서본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과하게 좋다. 제주도를 몇 번이나 왔지만 이런 날씨를 접하는 건 정말 손에 꼽는다. 오늘 잘하면 일몰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지트에 앉아서 책을 펼치고 읽는다. 어제 탐스 스토리를 다 봐서 새로운 책은 뭘 볼까 고민하다 'HTML5'를 연다. 여행지에서 읽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긴 한데 저렴하게 풀렸었고 한번 읽어두고 싶었던 터라 리디북스에서 질러났었다.

개론적인 이야기라 페이지를 슥슥 넘긴다. 이런 내용을 원했던 게 아닌데. 앉아있으니 조금 춥지만 계속 책을 읽는다. 어차피 150 페이지 정도 밖에 안된다. 이 정도는 한자리에서 읽고 일어나야 여행자라 할만하지.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일어난다. 나쁜 책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추천할만한 책도 아니다.


이제 10시 정도 됐으니 다시 티벳풍경으로 향한다. 여전히 뭔가 포스를 풍기고 있지만 용기를 내서 들어선다. 몇 명이 앉아있는데 다 사장님 같고 다 여행자 같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사장님을 찾는다. 그 소리에 저쪽에 여행자들과 앉아있던 포스 있는 여자분 한분이 일어서신다. 어? 지난번에 지나갈 때 머리 긴 남자분을 봐서 그분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부부신가? 뭐 있다 보면 알게 되겠지. 오늘 숙박객이라고 하니 리스트를 체크하시더니 일단 방으로 안내한다. 짐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사물함은 없다며 쿨하게 그냥 의자에 던져놓으라고 하신다.


방에 들어가니 역시 소문에 듣던 남녀 혼숙인 듯하다. 룸메이트 한 명은 옆에서 기타를 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여기저기 너부러져 누워있다. 아 이게 내가 원하던 게스트하우스의 정경이다. 많은걸 바란 게 아니다. 그냥 멍 때릴만한 곳을 원했을 뿐. 자세한 건 나중에 와서 보기로 하고 옷가지를 몇 개 꺼내놓는다. 차마 속옷은 꺼내기 뭐해서 세면도구와 옷을 좀 꺼내 가방을 가볍게 한다.


오늘은 일몰을 볼 때 항상 배경으로 보이던 그 절벽을 올라 가보려 한다. 여기저기 물어봐서 박수기정이라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사장님한테 가는 방법을 한번 물어본다. 내 얘기를 듣던 투숙객 중에 한분이 갑자기 오늘 자기들도 그곳을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한다. 역시 여긴 좀 다르군. 하지만 왠지 오늘 저녁부터는 조금 시끄러운(?) 여행이 될 듯해서 낮까지는 혼자 있고 싶다.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오늘은 혼자 가겠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는 언제까지 들어오면 되냐고 하니까 "뭐 3시 이후 적당할 때 와" 이러시는 게 시크하시다. 자고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이래야 한다.

박수기정을 향해 길을 나선다. 대략 길을 듣긴 했지만 근처를 가니 이거 뭐 영 헷갈린다. 길치인 내 여자친구는 절대 못 찾아갈 곳이다. 길을 찾아서 가다 보니 올레길 표지판이 보인다. 이거 저 절벽을 올라가는 길 맞나? 올레길이 저런 산을 지나가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래도 한번 가본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이 길이 아니면 그만이다. 돌아오면 그뿐이다.

올라가다 보니 맞는 듯하다. 올레 9길이라는데 진짜 올레길이 산길도 있구나. 다음주 월요일쯤에 올레길을 걸어서 다음 동네로 이동을 할까 했는데 이 길을 다시 걷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침이라 그런지 길에 아무도 없다. 산길이라 어찌 보면 무서울 수도 있지만 새 소리와 바람소리가 너무 좋다. 이어폰을 빼고 자연 소리를 걸으며 걷는다. 최고의 음악은 언제나 새들이 들려준다.

가다가 쉬다가, 또 가다가 하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산이 꽤 높아 보였는데 얼마 안 올라갔는데 동네가 다 보이는 게 거의 정상에 다 온듯하다. 생각보다 낮아서 등산할만한 산은 아닌 것 같다. 올레길이라 그런지 표지판도 잘되어 있고 길을 안 잃어버리게 바닥도 잘 트여있다.

가다 보니 이상하게 갈래 길이 나타난다. 사실 작은 갈래 길이라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올레길은 큰길이라 이쪽이 아닌 게 확실한데, 문득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건 무조건 가보는 성격이다. 다시 한번 아니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샛길로 들어서 본다.

좁은 길을 들어서자마자 넓게 펼쳐지는 풍경에 깜짝 놀란다. 예상하지 못한 광활한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완전 득템 한 기분이다. 판타지 소설에서 벽장 문을 열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밖에서는 이런 곳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다. 자세히 보니 무밭인 듯하다. 무도 꽃이 피는구나, 처음 알았다.

꽤 넓게 펼쳐져 있어서 걸어서 쭈욱 들어가본다. 끝이 없다. 이 산 꼭대기에서도 밭이 있을 수 있구나. 들어가 보니 무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농작물이 보인다. 밭주인이 나름 부자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서 좀 가다 돌아선다. 너무 들어가면 왠지 나올 길을 못 찾을 거 같다.

이제 다시 나가려고 하는 들어온 길을 못 찾겠다. 헐. 분명히 큰길을 따라 왔는데 길이 안보이고 새로운 풍경이 연이어 나타난다. 살짝 걱정이 되면서 왔던 길을 주시하면서 다시 돌아간다. 오른쪽에 샛길 하나가 자그마하게 보인다. 주의 안 하면 안 보일 정도이다. 그 틈새로 나가니 광활한 밭이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좁은 올레길이 펼쳐진다. 밖의 길로 나가서 뒤를 돌아보니 역시 안에 있는 밭은 낌새도 안 보인다. 나만 아는 뭔가를 찾은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근데 사실 다 아는 걸 지도 모르겠다. 기분 망치기 싫으니 인터넷 검색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아직 정상에 오르지는 않은 듯해서 더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니 반대로 내려 오는 여행자들을 몇 명 만난다. 눈빛이 마주치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여기가 정상인가? 이거 뭐 전망대 같은 게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정상이라 추측되는 곳에서 좀 앉아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까 티벳풍경에서 같이 가자고 했던 분과 그 일행이다. 이거 쑥스럽구먼. 역시 인사를 하고 정상이 어디냐며 괜시리 한번 물어본다. 물어보니 정상은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어차피 전망대 같은 건 없단다. 이쯤에서 다시 내려가기로 한다. 점심 먹을 때도 됐다.


내려가다 보니 아까 올라갈 때 반대로 마주친 한 여성분이 또 보인다. 산길을 코트 입고 핸드백까지 들고 가는지라 안 알아볼 수가 없다. 앞에 서서 혼자 셀카를 찍고 계신다. 여자들과 셀카란... 나와 눈이 마주치니 민망해하시며 안 찍은 척 하신다. 이미 다 봤는데. 내려가시는데 민망하실까 봐 살짝 인사하고 얼른 추월한다. 배려의 아이콘 같으니라고.


다 내려와서 동네 쪽을 향한다. 오늘 점심으로는 미리 점 찍어둔 곳이 있다. 그쪽으로 향하는데 스쿠버다이빙 영업점이 보인다. 앞에 시베리안 허스키도 한마리 있다. 개가 보이면 몸이 움직인다. 일단 가본다.

이 개, 크기는 큰데 매우 순하다. 나중에 물어보니 1살이란다. 애기 구먼. 개를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있지만 원래 목적도 있었기에 영업하시는 분한테 이것저것 물어본다. 대충 들어보니 장비 임대료를 포함하여 섬 근처 다이빙 3회에 대략 20만 원이란다. 예전에 오픈워터 다이빙 자격증을 따놔서 함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오면 20이고 누군가와 같이 오면 한 사람당 10% 정도 할인을 해준단다. 고민된다. 일단 사람을 더 모아보든가 해야겠다. 제주도 물속이 그리 볼게 많을 거 같지는 않은데...


나와서 동네로 향하는데 아까 그 핸드백, 코트, 셀카 여성분이 앞에 보인다. 이번이 3번째 마주치는거다. 누가 그랬더라. 약속 없이 하루에 세번 마주치면 인연이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앞에서 다른 길로 빠지신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여자한테 먼저 말 걸었다가는 내 머리 다 뜯기는 거 예약되어 있다.


월개 계획했던 식당인 '사소한 골목'으로 온다. 여기 지나 다닐때마다 분위기가 좋아서 눈여겨 봤었는데 가게가 배짱인지 평일에 이틀이나 쉬어서 아직 못 오고 있었다. 오늘은 다행히 문을 열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마당 앞에 진돗개가 한 마리 있는데 겁나 잘 생겼다. 제주도에서 진돗개는 처음 보는 거 같다. 진돗개는 사나울 수 있어서 조심스레 접근하니 이놈이 의외로 무척 순하다. 너 그래서 집 지킬 수 있겠냐. 게다가 겁나 잘 생겼다. 견빈을 여기서 보다니.

이곳 식당은 화장실도 깨끗하고 사람도 그다지 없고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 1000원 할인까지도 해준단다. 딱이다. 들어가서 매일 메뉴가 바뀐다는 가정식 백반을 하나 주문한다. 백반이라 금방 나오는데 정말 집밥 같은 느낌의 기분 좋은 식사다. 밥과 반찬을 더 주신다고 해서 밥 두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 원래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밥 남기는 걸 싫어한다. 우리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세뇌시키기를 죽으면 사후 세계에서 자기가 평생 남긴 밥을 다 먹어야 한단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니까 그 밥들을 다 섞어서 준단다. 그때부터 밥을 안 남기고 있다.

먹다 보니 사람들이 계속 들어온다. 여기 은근 인기 있나 보다. 안되는데... 근데 들어온 일행 중 커플 하나가 뭔가 낯이 익다. 맞나?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조용히 "맞지 않아?" "맞아, 맞아~"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티벳풍경 숙박객 중 한 명인가 보다. 아 애매하게 됐다. 이런 거 싫어하는데. 지금 아는척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쿨하게 생깐다. 이럴 때는 눈을 마주치면 안된다. 나도 모르게 속이 드러나게 된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 가서 "아 아까 식당에 그분!" 하면 된다. 시나리오 다 짜 놓고 나니 마음도 편해진다.

밥을 다 먹고 식기를 다 치우고 직접 카운터로 갖다 드린다. 별거 아니지만 이런 행동이 주인분들의 호감을 사고 얼굴도장 찍기에 좋다. 서로 배려해서 나쁠 거 하나도 없다. 커피를 한잔 시키고 자리로 돌아온다. 근데 큰일 났다. 사람이 슬금슬금 들어오더니 금새 만석이 된다. 여기 인기 있는 곳인가 보다.

눈치 보며 있는데 만석인 상황에서 결국 한 팀이 더 온다. 이제 자리가 없다. 동종업계인으로서 이런 거 못 버틴다. 주인분이 그냥 있으라고 눈치를 주시는데 내가 바깥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하고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다. 나가서 키보드를 꺼내서 글을 쓰는데 날씨가 좋긴 좋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너무 춥다. 아 추워... 하지만 더 버텨야 한다. 아직 안에 자리가 안 났다.

조금 있다 보니 한 팀 두 팀 가면서 자리가 생겼기에 시크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온다. 완벽했어. 아무도 눈치 못 챘을 거야.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서 마저 글을 쓴다. 시간이 두시가 되니 모든 팀이 다 나간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낮에는 3시까지만 영업한다고 한다. 이 식당은 친구 둘이서 하는데 하루 판매량을 정하고 다 판매되면 그냥 문을 닫아버린다고 한다. 오늘도 1시 이후에 온 사람들은 재료가 없다는 말에 다 그냥 돌아갔다.

나 혼자 남게 되니 뭔가 나 때문에 문을 못 닫고 있는듯해서 나도 나온다. 나와서 해변 따라 산책을 좀 하다 티벳풍경으로 돌아간다. 약간의 설렘을 안고.

들어가서 다시 사장님께 인사하고 숙소 안내를 받는다. 이미 얘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여기는 도미토리가 남녀 혼숙으로 총 7명이 같이 방을 공유한다. 사실 혼숙이라는 말이 므흣한 느낌을 줘서 그렇지 아무 느낌도 없다. 어차피 방에서 다 입고 다니지 않나. 옷 갈아 입을 때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것만 좀 불편할 듯하다. 특히 그 화장실이 내 침대 바로 옆인 것은 조금 걱정이다. 이거 큰일 보면서 소리 나면 완전 서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텐데. 야외에 화장실이 하나 더 있는데 아까 설명할 때 야외 화장실을 강조한 거 보니 XX는 그쪽에서 해결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나 보다. 하긴 자기들이 제일 잘 알 테지...

들어가니 역시 아까 식당에서 만났던 커플 중 여자분이 있다. 먼저 말을 걸고 아까 그분 맞지 않냐고 웃으면서 물어본다. 조금 있다 남자분도 오길래 역시 웃음으로 얘기를 나눈다. 근데 뭔가 어색하다. 오늘 하루 3번이나 만났는데 제대로 된 인사를 이제야 해서 그런가? 이 둘은 친하게 같이 다니긴 하는데 여행 일정이 다른 거 보니 일행은 아닌 듯하다. 대화를 나누다 어색했는지 둘이 먼저 자리를 비운다.


도미토리에 결국 나 혼자다. 뭔가 기분이 묘하다. 나름 기대를 하고 와서인가. 희한하게 그리 반갑지 않던 이응이 그립다. 우리 대평이가 보고 싶어 진다. 헛생각 그만해야지 하면서 자리 잡고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한다. 탁자에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관련 책이 하나 놓여있다. 꺼내서 앞으로 갈곳들을 노트에 메모해둔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근데 월요일에는 진짜 어디로 가지? 이제 내일이면 진짜 결정해야 한다. 정리를 다 하고 코보를 꺼내 리디북스를 켠다.

이번에 읽는 책은 '카페불패'라는 책이다. 드디어 내 본업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 괜찮게 본 옥루몽 사장님이 쓰신 책인데 나오자마자 읽어봐야지 하고 찜해놨던 책이다. 근데 열어보니 이게 epub가 아니라 pdf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러면 전자책 리더에서 읽기가 엄청 불편하다. 그래도 어쩌리. 만원이나 주고 샀으니 눈 부릅뜨고 읽어봐야지.


책은 읽어보니 생각보다 다소 실망이다. 싫어하는 책 1위가 자기 잘났다며 강의하는 책인데 약간 그런 느낌이 난다. 뭐 아직 초반이니 다 읽어봐야 알겠지.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들어오신다. 아저씨라고 한 거 아시면 싫어하시려나. 근데 그 아저씨도 들어오면서 웬 아저씨가 앉아있네 생각했을 거다. 쌤쌤이지 뭐.

말을 걸어보니 굉장히 시크하시다. 아까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이 곳의 느낌이 안 좋다. 공간은 다 친숙해지라고 만들어놨는데 뭔가 사람들이 친숙하지 못하다. 도미토리는 어떤 사람이랑 있느냐가 정말 80%의 영향을 주는 듯하다. 그래도 속단은 하지 말아야지. 첫날은 항상 탐색전 때문에 어색하고 둘째 날이 되어야 완전히 적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유없이 뭔가 서럽다.


아이폰을 충전하려고 꼽아놨는데 봤더니 충전이 안되고 있다. 이거 뭐지? 하면서 선을 따라 가보니 내 선이 뽑혀있다. 위에 아저씨가 빼서 자기 걸 충전하고 있다. 아니 이 선은 아래층 사람들이 모두 쓰는 거라고! 대범하게 한소리 해야지! 


"아저씨 밑에 선이 안 들어오는데... 이 선이 그 선인 듯한데..."


그 아저씨가 시크하게 "아 그래요?" 하며 별거 아니게 대답하는데 뭔가 당황했다. 아 이럴 때 당황하면 안되는데. 그래도 계속 있으니 착하신 아저씨께서 이거 빼드릴게 쓰세요, 라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뭐 나도 충전을 해야 하니 마다하지 않고 넙죽 받아쓴다.


6시 정도 되니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뭔가 여기 분위기에 눌린 듯 아무런 의욕이 없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 날씨가 좋았던 게 생각난다. 오늘 일몰을 볼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밥 먹고 가려면 서둘러야지 싶어서 뛰쳐나간다. 오늘도 역시나 예산은 빠듯하다. 햄버거집부터 가보니 시간이 늦어서인지 역시 문이 닫혀있다. 아저씨 오늘은 장사 좀 되셨나 보다. 돈 좀 써야겠네 싶어 향토음식점도 가보니 왠일인지 오늘따라 거기도 문 닫았다. 오늘 일진이 서러운데 왜 이리 더 꼬인다냐. 결국 일몰을 먼저 보러 가기로 마음 먹는다. 가는 길에 그래도 슈퍼에 들려서 대평이 소시지는 사둔다. 내가 서럽다고 얘까지 서럽게 할 수는 없지.

일몰 보러 바다로 가니 장관이다. 날씨가 좋더니 역시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져 있다. 그림이 좋아서 그런지 사진을 찍으러 온 찍사분들도 많이 보인다. 해가 지기 직전이라 마음이 급하다. 어서 자리를 잡고 음악을 틀고 분위기를 잡는다. 여행은 기분과 기세와 분위기다. 일몰을 보면서 감정을 좀 잡고 다시 기운내서 여행을 이어나가자.

제주도 와서 본 일몰 중에는 당연히 최고고, 한국에서 본 일몰 중에서도 최고인 듯하다. 물론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아니니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좀 울적하다고 이런 선물을 준 해님이 고맙다. 감사합니다.

돌아서서 오는 길에 어제 봤던 강아지를 보러 간다. 가는 길에 다른 강아지도 하나 보여서 다가서보니, 이놈 무지하게 못생겼다. 근데 또 은근 귀엽다. 조금 만져주니 주인이 나타나서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저 개장수 아니에요... 그래, 큰 개보다 원래 강아지가 예쁜 법이지. 어제 강아지한테 간다. 얘도 자주 볼듯한데 이름 붙여줘야 하나. 부르기 어렵네. 어제 그 자리에 가도 얘가 안보이더니 내가 가까이 가니 어디선가 튀쳐나온다. 날 알아보나? 그냥 누군가 왔으니 나온거겠지. 좀 만져주고 놀아주다보니 또 주머니에 있는 소시지 2개를 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주인 있는 개한테 아무거나 주면 안되지. 매너를 지키자.

개랑 인사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간다. 선택권이 없다. 다시 이응 카페로 가서 라면이나 시켜먹어야겠다. 이응에 거의 다 와가는데 앞에 시커먼 자그마한 생물체가 보인다. 대평이가 왜 여기 나와있지? 진심 반가워서 육성으로 "대평아~!" 하고 부른다. 역시 이곳에서 날 그리워해 주는 애는 대평이밖에 없다. 근데 이놈이 나한테 안 온다. 어쭈? 주머니에서 소시지를 꺼낸다. 갑자기 날 알아보고 "이웅이웅"거리며 다가온다. 진작 그럴 것이지. 역시 날 알아주는 건 대평이 밖에 없다. 소시지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대평이를 보면서 애써 그리 생각하며 소시지를 까서 준다.

역시나 잘 먹는다. 얘 하루에 도대체 어느 정도를 먹는 건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몰카라도 설치해놔야 하나. 근데 뒤를 돌아보니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보인다. 자세히 보니 이건 대평이 엄마다. 엄마일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저렇게 닮을 수가 없는 거다. 대평이 이놈, 엄마한테 하나도 안 주고 지 혼자만 계속 먹다니. 엄마는 지붕 위에 있다가 내가 다가서니 도망간다. 그래 고양이는 사실 저래야지. 내일은 소시지를 하나 더 가지고 나와야 하나. 그나저나 얘는 왜 이 앞쪽에 나와있는지 모르겠네. 또 스텝 언니가 쫓아냈나...

티벳풍경에 돌아가서 가방을 다시 가지고 나온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오늘 만석이라는데 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걸까. 여기 갈 데도 없는데. 이응 카페로 들어가니 어제의 룸메가 혼자 앉아서 라면을 먹고 있다. 오 반갑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구나. 스텝분도 뭔가 반갑고, 그분도 날 반가워하 하는 거 같....긴 한데 워낙 무뚝뚝해서 잘은 모르겠다. 나도 라면 하나요,라고 얘기하고 자리에 앉는다.

오늘 결산을 해보니 라면값까지 해서 총 34,500원을 썼다. 그래도 선방했네. 라면은 역시나 맛있다. 하지만 내일은 이 동네에서 마지막 날이니 비싼 것들 좀 챙겨먹어야겠다. 앉아서 룸메랑 이런 저런 얘기를 정겹게 나누다가 핸드폰을 빌린다. 월요일부터 게스트하우스 예약이 안되어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전화로만 예약이 된단다. 고양이를 좋아하니 아예 고양이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위주로 선정을 해버렸다. 남들이 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난 고양이 마니아다. 근데 전화해보니 방이 없단다. 젠장. 다른 한 곳도 없단다. 이러다가 대평리에 눌러 앉아서 대평이 아빠 되겠다. 일단 그래도 나와서 티벳풍경으로 돌아간다. 어떻게든 바뀐 숙소에 정 붙여야 한다.


도미토리에는 아직까지도 아무도 없다. 정 붙이고 싶다. 원래는 혼자 있는걸 더 좋아하는데 여긴 이상하게 혼자 있으면 뭔가 서럽다. 분위기가 그런가? 앉아서 하루를 정리하면서 글을 쓴다. 밖에서 소리가 나길래 뭔가 긴장하면서 더 열심히 글을 쓴다. 문이 열리더니 스텝분이 새로오신 분을 데리고 들어온다.


여자분이신데 들어오시더니 역시나 "혼숙이구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나를 보고 많이 당황하셨나. 인상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스텝분이 나가고 그래도 먼저 말을 걸면서 얘기를 좀 해본다. 예쁘장하게 생긴 분인데 완전 어려 보인다. 얘기를 들어보니 90년생 말띠란다. 나도 말띠라고 얘기해준다. 훗.


그러고 있는데 아까 커플 중 남자분이 들어오더니 곧 막걸리 파티를 시작하니 생각 있으면 참여하라고 한다. 그래 뭐 여기 있어봤자 뭐 하겠, 생각하며 그 여자분과 같이 거실로 넘어간다. 거실에는 이미 대여섯 명이 앉아서 조촐하게 한잔을 하고 있다. 원래 이런 분위기인가 보다. 사실 억지로 만든 자리보다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자리를 더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그래도 7명이 같이 자는 곳에서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근데 누가 스텝이고 누가 여행자인지 알 수가 없다. 뭔가 다 나름의 포스를 풍기고 있어서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진다.


술잔이 몇 번 돈다. 여행 시작 날 아버지 아들 커플 이후 첫 술자리라 나름 술이 당긴다. 막걸리를 받는다. 홀짝 홀짝 마시면서 분위기를 본다. 조금 있다가 한 신혼부부와 처형이 합류한다. 셋이 같이 한방을 쓴단다. 처형이 눈치가 없는 거겠지. 완전 신혼이라던데. 7년 사귀고 결혼하셨단다. 어마어마하다. 5년 이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당당히 얘기하신다. 난 5년이라 다행이다.


술이 몇 바퀴 돌고 사장님이 몇 명 한테 노래를 시키신다. 여기 사장님은 처음 보자마자 반말을 하시는데 이게 은근히 기분이 나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노래를 빼는 사람이 없다. 시키면 바로 바로 한다. 스텝 분들도 그렇고 여행자 분들도 그렇고 여기 분위기에 너무 다들 익숙해있다. 내가 느낀 위화감이 이건가보다. 다들 이곳만의 느낌에 동화되어 있어서 외지인은 쉽게 적응하기 힘든 뭔가가 있다. 좋게 얘기하면 이곳만의 특징이 강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배타적이라고나 할까. 근데 배타적이지는 않다. 마음만 열면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다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나한테도 시키는데 뭔가 애매하다. 오늘은 그냥 듣고 싶다. 그래도 잘하는 노래와 기타 하나는 준비해두면 확실히 여행 다닐 때는 도움이 될거 같다. 노래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니 또 분위기에 동화된다. 한 여성 스텝이신듯한 분이 계속 노래를 안 하시다가 막바지에 기타를 잡으신다. 묘한 분위기에 어두운 그늘이 있어서 계속 눈길이 가던 분이다. 딱히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매력이 느껴지는 분이다. 노래를 시작하는데 숨이 막힌다. 노래 제목은 모르겠지만 또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이게 바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를 들으니 뭔가 크나큰 아픔이 있는 분 같고, 갑자기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노래 테마가 "바람은 머물면 바람이 아니다"이다. 이 노래를 찾고 싶어 기록해 놓지만 결국 무슨 노래인지 찾을 수가 없다. 마지막 노래였지만 잊지 못할 노래였다. 여성들이 모성애가 있다면 남자들은 일종의 보호본능? 백마 탄 왕자 콤플렉스? 이런 게 내재되어 있는 거 같다.


11시가 되면서 술자리를 파한다. 거실 바로 옆이 도미토리이고 술도 안마시는 분들도 있어서 이에 대한 배려다. 다들 뭔가 분위기에 취해있다. 설거지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는데 한번에 이겨서 나는 방으로 그냥 들어온다. 씻어야 하는데 뭔가 귀찮다. 그냥 이만 닦고 누워서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까 그 여성분이 여기에 굉장히 오래 머무시는 분인데 인기가 장난이 아니란다. 몇 년 동안 대시한 남자가 어마어마하단다. 어쩐지... 근데 그분이 오늘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얘기해서 다들 난리가 났단다. 그것도그 여성분이 먼저 대시를 하셨다니... 그 때문에 남자들이 그리 술을 마시고 했나 보다. 어딜 가나 이성 간의 텐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자극제가 된다. 이런 긴장감에서 해방시켜준 여친이 고맙다.(?)


누워서 오늘의 정리를 해본다. 확실히 하루로는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를 알 수가 없다. 물론 이틀이라고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이튿날부터는 조금 다르다. 이곳의 분위기에 이제 좀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티벳풍경은 제주도에서도 독립된 하나의 자치지구 느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곳만의 분위기에 당황스러움과 낯설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변화가 왔을 때 역류하지 않고 흐름을 받아들이면 자신도 그 물결이 일부가 된다. 가끔은 저항해야 하겠지만 그 흐름을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자체의 게스트하우스에 더 마음이 가지만 이런 느낌으로 이틀도 나쁘지 않다. 5년 전의 여자친구를 만났던 인도 여행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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