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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Oct 17. 2015

나홀로 14일 제주 여행 - Day 5

여행의 목적

날이 밝았다. 어제 밤에 이 층 침대에 계신 분이 갑자기 별그대를 다운받아 스피커로 저녁에 보시는 바람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새벽 1시가 지나니 소리를 줄이셔서 그럭저럭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잠은 잘 잔 듯하다. 역시나 코 고는 사람은 존재했지만... 0.3%의 확률을 기대하면 안되지. 여자분들은 그래도 다 코를 안 고셨다. 남자만 해서 확률을 갱신하면... 지금까지 방을 쉐어한 6명 중에 5명이 코를 곤 거니, 83%의 높은 확률을 자랑한다. 우리나라 남자들 대단하다.

일어나서 침대에 앉은채로 도미토리 사람들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 이 곳 도미토리는 그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제공한다. 뭔가 친숙한 느낌. 어제의 그 낯설음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하다. 확실히 하룻밤을 자야 익숙해지면서 그 곳이 내 숙소 같아진다. 아침이 되니 이상하게 어제와 달리 이응보다 이곳, 티벳풍경이 더 나의 보금자리 같이 느껴진다.


서로의 꿈을 물어본다. 오랜만에 내 꿈을 다시 한번 얘기한다. 처음에는 단순했지만 갈수록 살이 붙어 복잡해져가고 있는 나의 꿈. 여행 다닐 때는 이런 것이 좋다. 꿈을 물어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고, 또 그걸 존중해주는 것.


어제의 그 어여쁜 아가씨는 확실히 오늘도 인기가 많다. 내가 그 실글의 무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임자가 있는 상태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이성간의 텐션들이 다 보이는 것이 재미있다. 여자들, 본인이 예쁘다고 생각하면 여행 오면 조심해라. 흠 사실 조심할 필요는 없나? 오히려 더 올지도. 사실 훈남도 많긴 하다. 나 같은 아저씨들만 있는 곳에 떨어지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중간에 조식을 먹고 온다. 여기는 조식이 있다! 내가 무슨 거창한 조식을 원한 게 아니다. 이렇게 조촐한 빵과 커피 한잔이면 하루의 시작이 행복해진다. 일어나니 씻기 귀찮아져서 그냥 이만 간단히 닦고 대충 세수만 한다. 원래 남자들은 일주일도 안 씻고 다닐 수 있다. 다 깨끗한 것 같지만 실상은 다 이렇다. 나만 그런 거 아니다. 확실하다. 사실 빨래도 해야 하는데 귀찮다. 


이럴 때 쓰는 나만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이미 한번 입은 속옷과 양말을 새것처럼 개서 가방에 다시 집어넣는다. 이 간단한 동작 하나에, 모든 옷들이 내 머리 속에서는 새거가 된다. 다시 꺼낼때 대충 입으면 어떤 게 새건지 모른다. 그럼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여행 기간 내내 빨래를 안 하고 살 수 있다. 아 이 노하우 전수되면 안되는데. 여친은 이미 알고 있다. 캡쳐해서 알려준다고 해봤자 협박 안된다.

방에서 침대에 앉아 사람들과 7시부터 11시까지 수다를 떤다. 딱히 특별한 얘기는 없고, 그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 뿐인데 기분이 좋다. 도미토리의 장점이다. 티벳풍경의 구조는 그걸 더  극대화시키고 그래서 사람들의 추천이 많은 것 같다. 모두 여러번 온 사람들이고, 처음 온 사람은 그 예쁜 아가씨와 나 둘 뿐이다.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거지 흑심 있는 거 절대 아니다.) 여러 번 온 사람들이 많으니 새로운 사람으로서는 위화감도 들지만 또 그렇게 사람들이 계속 돌아오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힘들다는 그 스텝도 여기는 3명이나 있다. 여행 목적만 맞다면 나도 다른 이들에게 이곳을 추천해주고 싶다. 하지만 홀로 사색하고 싶어 이곳을 온 나한테는 아직까지는 조금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나와서 혼자 돌아다닐까 하는데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분위기다. 낄까 말까 고민에 빠진다. 사실 빠진다고 해서 싫어할 사람도 나쁘게 생각할 사람도 없다. 근데 나도 오늘은 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얘기를 하고 싶어 진다. 진짜 예전에 인도 여행 다닐 때 생각이 난다.

여론이 사소한 골목으로 향한다. 4일째 되니 대평리의 모든 식당을 다 한 번씩은 가봤다. 동네 곳곳이 익숙하다. 오늘은 이 동네에서의 마지막 날이니 사람들한테 인사도 하고 그러려 했는데 사소한 골목으로 간다니 잘됐다. 그곳의 여유 넘치는 사장님에게도 인사를 해야겠다. 같이 일어나서 그쪽으로 향한다. 2층 침대의 아저씨(?), 어린 예쁜 친구, 남녀 커플 이렇게 총 5명이다. 예쁜 친구는 나랑 동갑이고 (띠동갑.........) 남녀 커플은 83년생 동갑이다. 아저씨는 42살이다. 원래 여행 다닐 때 서로 나이를 잘 안 묻는데 어쩌다 서로 얘기하게 됐다.

사소한 골목으로 가서 가서 어제 먹은 백반 대신 오늘은 카레를 주문한다. 역시 여기 음식 괜찮다. 5명이라 4인 테이블 두개를 붙인다. 자리를 너무 차지하고 있으니 뭔가 미안해진다. 직업병이다. 사장님은 괜찮다고 하시며 자기들은 손님이 없는 게 더 좋다고 한다. 거짓말. 4대 거짓말 중에 하나에 포함시켜야겠다. 그래도 인상 참 좋으시다. 대평리 오는 사람들한테는 이곳을 꼭 추천한다.

맛있게 먹고 다 같이 단체 사진도 찍고 하면서 논다. 견빈 하고도 같이 놀아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여기서 찍은 사진이 유일하다. 어린 친구는 내가 들고 올까 말까 고민했던 맥북프로 레티나 15인치에, 올림푸스 미러리스 pen 까지 들고 왔다. 가방이 어마어마했던 이유가 있었다. 대단하다. 거기다가 제주공항에서 나눠줬다는 지킴이라는 것도 있다.  지킴이가 뭔가 했더니, 작고 앙증맞은 장치에 카메라가 달려 있고 거기 버튼을 누르면 경찰서로 신호가 바로 가게 해놨다. 3G 칩이 있는 걸까? 급 호기심이 든다. 무료인데 동영상 송출까지는 과할 거 같고 아마 영상은 안에 메모리에 저장돼서 나중에 증거자료로 쓰던가 그럴 거 같다. 호기심에 받아서 살펴보니 KT 올레 마크가 있다. 이놈들 이 추노마크는 아이폰 빼고는 다 찍는구나. 자세히 보니 3G로 구동되는 거 맞나 보다. 기지국만으로 위치추적을 하면 너무 부정확할 테고, GPS도 들어있을 거 같은데 그럼 배터리 문제는 어찌 해결한 건지도 궁금하다. 뭐 알아서 했겠지. 내 알바 아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어쩌다 얘기 나온 여자친구를 궁금해한다. 5년 전에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던 인도에서 사진을 보여준다.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사귀기 전에 같이 일몰을 보고 있는데 같은 여행객 하나가 몰래 찍어준 사진이다. 내 가보다. 갑자기 여자친구는 지금 뭐하고 있나 궁금해진다. 주말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겠지 뭐. 5년 차면 일주일 없다고 그리워할 거 같지 않다. 그냥 확 한 달을 사라져버려?

식사를 하고 나서 또 고민한다. 이쯤에서 빠질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좋지만 책도 보고 사색도 하고 글도 쓰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근데 이제와서 빠지기가 좀 애매하다. 한 친구가 이쪽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가자고 해서 결국 같이 간다.

선자네 쌀롱이라는 특이한 카페, 이거 티벳풍경과 세트다. 여기가 더 인도의 분위기가 난다. 짜이도 꽤나 괜찮게 현지 스타일로 나온다. 여기 사장님이 인도 여행 좀 하신 티가 난다. 역시 배낭여행객의 시작은 인도인가 보다. 직접 만든 아기자기한 도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문을 열면 자동으로 울리는 종이라던가, 이상한 바이크라던가. 다 남자친구분이 만드셨단다. 소품들은 직접 다 사방에서 주워 오신 거란다. 제주도 폐가에 가면 주워 올 게 꽤나 있단다. 폐가라니. 그런 게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희한한 소품들이 여기저기 있는데 이게 또 은근히 조화롭다. 매력 있는 곳이다. 이곳의 존재를 진작 알았으면 자주 왔을 거 같다. 하지만 속으로 영업허가 받기는 어려웠을 텐데...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아 직업병....

확실히 여행은 게스트하우스,  밍그적거릴 카페나 아지트, 그리고 같이 다니는 여행자의 3 박자가 잘 맞아야 완성된다. 그중에 게스트하우스가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카페가 어플, 그리고 여행자가 유저나 데이터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덕후 같다고 이런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직업병이 아니라 전공병인가. 사실 전공도 전자 쪽인데... 여하튼.

이곳에 앉아서 또  밍그적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니 그 남녀 커플(?)은 실제로 현실에서도 서로 아는 사이란다. 대학 동기인데 같이 온건 아니고 따로 와서 이곳에서 만났단다. 연인은 절대 아니라는데, 15년 알고 지냈으니 좀 더 두고 봐야 알듯하다. 근데 둘 다 의사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는 참 알 수 없다. 원래 여행지에서는 출신, 배경, 학벌 이런 거 안 물어보는데 친해지면 스리슬쩍 알게 되는 거 같다. 게다가 알고보니 다 내 대학 후배들이다. 헐. 갑자기 학연이 시작되고 잠깐 학교 얘기를 한다. 그러다 주제를 의식적으로 바꾼다. 잠시 반가웠지만 그래도 여행지에서 이런 얘기 오래 해서 좋을 건 없다.

생각해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른다. 어린 친구가 갑자기 자기 이름을 스케치북에 쓰더니 돌리면서 쓰라고 한다. 나도 같이 쓴다. 이렇게 만난지 만 하루만의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다. 하지만 3시간 후면 어차피 다 헤어진다. 뭐 그게 여행이겠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들은 이런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 같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막상 더 힘들 거다.

몇 시간  밍그적거리다 여의사분의 비행기표 시간이 다가와서 다 같이 일어선다. 2층 침대의 아저씨가 여의사분과 어린 친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시기로 한다. 셋다 오늘 이곳을 떠난다. 오늘은 남의사분과 나만 남는다. 일요일이라 아마 새로운 사람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3시쯤 돼서 일단 다 같이 티벳풍경으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갔을 때도 그렇고 돌아올 때 잠깐 들렸는데도 대평이가 안 보인다. 이놈 어디 간 거지. 밥그릇에 보니 소시지가 잘려져 놓여 있다. 나 말고도 다른 주는 사람이 생겼나 보다.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그래도 내일 가기 전에 한번은 더 보고 싶다. 이번에 보이면 참치캔 하나 까서 줄까 생각해본다.

티벳풍경의 좋은 점은 다른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처럼 칼같이 4시 반 전에는 입실금지! 이 딴 게 없다. 저게 진짜 난 개인적으로 너무, 너무, 너무 싫다. 게스트하우스에 왔으면 방에서 책도 보고 밍그적거리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 방에서 다 같이 수다를 좀 떨다가 시간에 임박해서 3명을 이제 떠나 보낸다. 만났으니 헤어짐이 있는 법.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하루가 한 달과 같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하루 만에 깊숙히 친해지기 때문이다. 어제는 다 남남이었는데 오늘은 다 친구가 되어있다. 작별 인사를 한다. 연락처를 물어볼까 하다가 만다. 여행지에서 만나서 거기서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 그것도 인연의 한 방식이다. 그래도 사진은 받기 위해서 이메일 주소는 알려준다. 누구든 연락처를 물어보면 줄텐데 또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다.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 안 좋았던 사람, 모두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니 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된다. 사실 그렇다고 하루만에 또 얼마나 이해하겠냐만은 그래도 일단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도 없다. 그저 서로 다를 뿐이다.


모두 다 떠나 보내고 도미토리에 혼자 조용히 돌아온다. 갑자기 이 넓은 곳이 휑하게 느껴진다. 어제는 이곳에 혼자 있을 때 뭔가 삭막하고 외로웠는데 오늘은 혼자 있으니 또 나름의 적막감이 좋다. 이제 진짜 이곳도 나의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다음에 제주도에 다시 오면 대평리로 다시 돌아오게 될까 생각했었는데 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사람들이 티벳풍경을 계속 찾는 이유가 분명 있다. 여자친구랑 같이 이곳의 도미토리를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홀로 앉아서 책을 보며 글을 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여행객도 거의 없을 거다. 없으면 또 없는 데로의 매력이 있겠지.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을 너무 가지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결국 나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혼자 온 여행에서 아쉬운 건 사실 혼자만의 시간이 아닌 함께 하는 시간이다.


하루종일 책도 못 보고 생각도 못해서 도미토리에 혼자 앉아 시간을 갖는다. 그때 갑자기 반가운 카톡이 울린다. 이전에 인도에서 만났던 동생이 제주도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일주일 전 쯤에 연락했는데 이제서야 답장이 왔다. 전화를 끊어서 전화는 못하고 카톡으로 서로 얘기를 하다 보니 외국 여행을 갔다 지금 돌어왔단다. 내가 티벳풍경에 있다고 하니 여기 사람들과는 꽤나 친한 사이라며 무척 반가워한다. 사장누님부터 스텝까지 다 잘 안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된다. 아까까지 거의 모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친한 동생 하나를 거치니 갑자기 다 아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친구는 지금 제주도에서 식당을 준비 중이란다. 있는 위치를 물어보고 일정을 체크한다. 월화수목 게스트하우스는 이틀씩 두 군데를 예약해놓은 상태라 금요일에 만나기로 한다. 그쪽에서 이틀을 보내고 제주에서 마지막 3일은 또 그때 가서 결정하기로 마음 먹는다. 동네에 아는 게스트하우스 예약을 부탁한다. 꽤나 친한 동생이라 목요일이 기대된다.


책을 읽고 있으니 스텝분이 새로운 남자 3명을 안내해서 들어온다. 보아하니 또 아버지와 아들 팀이다. 고등학생 아들 2명과 아버지다. 들어오는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하다. 


"아 이런데도 있구나. 재미있네."


 들어와서 처음 하신 말이다. 게스트하우스를 처음 오신 듯해서 이런 저런 설명을 드린다. 어제는 내가 들어오는 쪽이었는데 오늘은 내가 받는 쪽이다. 어색하실 듯해서 대화도 나눠드린다. 올레길을 걷고 계신데 하루에 2코스를 걷고 계시단다. 강철체력이다. 극기훈련의 느낌이다. 원래 항상 펜션이나 민박만 하시다가 게스트하우스는 이번에 처음 오셨다고 한다. 근데 말하시는 부분 중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 아들들한테 얘기하시는데,"이런데도 경험해봐야 한다. 재미있네" 같은 말들이다. 나쁜 뜻이 없는 건 아는데 순식간에 동물원 우리 안에 동물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나쁜 뜻이 없으신 건 알기에 신경 안쓰고 주변 식당과 동네에 대해 내가 아는 몇 가지를 안내해 드린다.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대평이한테 다시 한번 가본다. 아까 두 번 갔을 때 못 봤더니 은근 걱정이 된다. 다행히 이번에는 있다. 역시 반갑다.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꺼내서 준다. 이제 곧 이별이구나. 넌 나 없어도 잘 얻어먹고 굳건히 살아 남아야 한다. 알아서 잘 할듯하긴 한데 뭔가 걱정된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놈은 소시지에 환장하여 정신없이 달려들어서 먹는다. 맨날 소시지만 줘서 갑자기 좀 미안해진다. 내일은 떠나기 전에 기회가 있으면 참치캔 하나 따줘야겠다.

대평리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나선다. 오늘은 예산을 꽤나 넘길 거 같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용왕난드르로 간다. 오자마자 처음 왔던 그 식당이다. 이번에는 가서 저번에 못 먹었던 수제비를 먹어야겠다.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보니 부자 3인 일행이 뒤에 오고 있다. 이거 애매하네. 혼자서 느긋하게 먹고 싶었는데... 내가 식당에 들어가니 그분들도 따라 들어오신다. 이미 인사를 한 사이에 모른척하는 것이 더 어색할 듯해서 인사하고 합석해서 앉는다.

수제비를 주문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그분들이 게스트하우스 여행자가 낯설듯이 나도 그분들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래서 티벳풍경에서는 처음에 사람이 오면 서로 편하게 얘기를 안 하게 되나 보다. 사실 굳이 여행을 다니면서까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얘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다. 합석이긴 하지만 테이블이 따로 세팅되어 있어서 다 먹은 후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선다. 용왕난드르는 대평리에서 카드가 허용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마지막 밤이다.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 밤 바닷길로 나서 본다. 어둡다. 첫날의 무서웠던 밤길이 떠오른다. 오늘도 어둠이 역시 무섭다. 돌아설까 하다가 기분을 내고 싶어서 용기 내어 계속 걸어간다. 이런 거, 그냥 공포를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왜 뒷덜미가 간질간질한걸까. 좀 걷다가 그냥 도미토리로 돌아온다.

오늘은 여자팀도 없고 도미토리에 남자만 있다. 내가 이제 2층 침대로 옮기고 밑에 부자 3분이 자리를 잡았다. 방에는 어제 나와 남은 커플 중 남자분 한분과 방금 새로 오셔서 얘기를 많이 못해본 남자분, 그리고 3분의 부자, 이렇게 총 6명이다. 오늘도 막걸리 파티를 하려나? 하면 하는 데로 좋을 거 같고 안 하면 또 조용하게 저녁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그 나름대로 좋다. 저녁에 술자리가 가끔 있다는 말을 들은 아버님이 또 "그런 것도 경험해봐야지"라고 하시며 하자고 한다. 저 말이 또 거슬린다. 게다가 이건 내가 결정할 것도 아니고 스텝분들이 하자고 하면 참여할까 말까만 고민하면 되는 문제다.


오늘은 패스하는 분위기다. 최근 며칠 달린 듯한데 이런 날도 있어야 스텝들과 사장누님의 위를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나름 조용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다. 내일은 대평이 한데 마지막 선물로 참치캔을 하나 따주고 동네를 한바퀴 돌며 차분하게 대평리와 이별을 고해야겠다. 책을 좀 보다 이른 10시에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 왠지 오늘 밤은 잘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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