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대평리
비가 온다. 제주도 온 이후 맞이하는 첫 비다. 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하필 이동하는 날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다. 7시쯤 남자 의사분은 공항에 가기 위해 일어나서 먼저 일찍 나간다.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을 시간이라 슬쩍 몸만 일으켜서 조용히 눈빛으로 배웅해준다.
오전 8시쯤 되니 모든 사람들이 일어난다. 나도 일어나서 짐을 대충 정리하고 조식 먹을 준비를 한다. 조식을 먹은 후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해야겠다. 밖을 보니 비가 온다. 내가 원했던 대평리와의 조용한 이별은 힘들 거 같다. 대평이는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은데. 얘는 비 오면 어디 숨어있을까나.
도미토리에 앉아있으니 사장누님이 도미토리로 들어오신다. 자연스레 사장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만난 동생 얘기를 하니 잘 안다며 무척 반가워하신다. 어제 그 아버님도 대화에 껴서 이런 저런 얘기를 같이 한다. 아버님이 어제에 이어 또 다시 여행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신다. 나를 보며 뭔가 이런 여유를 부리면서 다니는 게 보기 좋단다. 부끄럽다. 사실 난 여행자에 끼기도 힘들다. 정말 제대로 여행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여행은 일종의 마약 같다. 중독성은 있지만 거기 빠진다고 현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여행 자체를 삶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면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한 달이고 1년이고 아무리 밖으로 다녀도 돌아오면 현실은 내가 놔둔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여행은 너무 깊이 빠지기 보다는, 정신 없이 내 자신을 잃어갈때 여유를 즐기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쓴다면 충분하다. 물론 여행 자체가 삶인 사람들은 예외다.
아버님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자식들한테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내 생각에 경험이란 시켜주는 게 아니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체험하는 거다. 때가 되면 알아서 경험할 거고 설사 안 한다 해도 그 또한 자기 자신의 삶이다.
예전에는 꿈이 없는 사람이 안타까웠다. "나는 꿈이 있어!"라는 일종의 우월의식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훈계를 하고 바꾸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게 지금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사람 사는 거에는 옳고 그른 게 없으며, 더 멋진 삶이란 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이 그냥 자기 자신의 삶이고, 자기가 선택하는 삶만 있을 뿐이다. 꿈과 선택이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꿈 없이 사는 거, 일반적인 가정을 가지고 사는 거, 모두 자기 선택이면서 그 또한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다. 물론 선택 자체가 없는 건 문제가 조금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작고 큰 선택을 하니 그 또한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한마디로 닥치고 자기 인생만 잘 살면 된다. 여행 와서 얘기를 하며 오랜만에 이런 생각의 정리를 하니 좋다.
어느새 10시라 이제 가야 한다. 얘기가 길어졌다. 시간이 부족해서 안타깝게도 조식을 못 먹을 듯하다. 뭐 대신 점심을 맛있는 거 먹으면 되지. 대화를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확실히 이 티벳풍경은 도미토리 중앙에 큰 테이블이 핵심이다. 하나의 넓은 테이블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대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이곳만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여행 5일 차가 지나니 이곳저곳에 말썽이 나기 시작한다. 손에는 이상한 종기 같은 게 났고 피부에도 트러블이 좀 생겼다. 다음 게스트하우스 가는 길에 서귀포에 들러서 피부과를 가야겠다. 유일하게 가지고 온 바지인 청바지는 커다랗게 구멍이 났다. 지금 바지를 사기도 그렇고 사장누님한테 부탁해서 바늘과 실을 빌린다. 대충의 땜질(?)을 한다. 아 없어 뵌다. 뭐 좀 없어 뵈면 어떠리. 그래도 기능적으로는 괜찮다.
이제 인사를 하고 가야 한다. 부자 3인에게 인사를 하고 거실로 간다. 사장누님과 그 마성의 여자스텝분이 앉아있다. 인사를 하면서 그 마성녀에게 그때 불렀던 그 인상 깊었던 노래의 제목을 물어본다. '바람이 나무에게'란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내용이 정말 감명 깊었다. 인사를 하고 다음에 여자친구랑 같이 오겠다고 얘기한다.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심정이 그러하긴 하다. 좋아할 거다. 사장누님이 비가 오니 우산을 가져가라고 한다. 괜찮다며 그냥 돌아선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된다. 나는 과연 이곳에 좋은 인상을 남겼을까?
티벳풍경, 처음에는 다소 안 좋은 인식도 있었지만 이제 왜 사람들이 그렇게 추천을 많이 하는지 알겠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바로 이곳으로 와서 머물다, 떠나는 날 아침에 다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바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티벳풍경만을 위해서 제주도를 오는 거다. 여기는 편하거나 아늑하진 않지만 '사람'이 있는 곳이다. 사장누님과도 아침에 얘기를 많이 해보니 뭔가 정겹고 좋다. 기본적으로 정이 많으신 분 같다. 게다가 보통은 스태프를 두고 일하면서 게스트하우스 또한 사업처럼 생각하는데 이분은 투숙객이 많아지고 잘 운영돼도 직접 나와서 이곳에서 실제로 생활하신다. 저녁 술자리의 음악들, 사람들과의 교류, 그 모든 것을 즐기시는 분 같다. 이곳이 잘된다는건 그만큼 사람들이 사람에 굶주려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한테 100이 될 수는 없는 곳이지만, 일부 맞는 사람들한테는 분명히 120 이상의 뭔가를 주는 곳이다. 난 다시 온다면 이곳으로 올 것 같다.
나와서 버스 타러 가기 전에 혹시 대평이가 있을까 싶어서 슬쩍 이응에 들러본다. 역시 없다. 아쉽다. 비 오는데 어디 있는 걸까. 그래도 끼 부리는 게 밥 굶고 살지는 않을 거 같다. 제대로 된 이별도 좋지만 이런 이별도 괜찮다. 평소에 잘해줬으니 된 거다. 좋은 이별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있을때 후회 없도록 평소에 잘해주는 거다. 집에 가면 효도해야겠다. 그래도 한번 보고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긴 하다.
1. 4일을 전부 티벳풍경에 있을 거다. 이응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나한테는 여기가 더 맞는 듯하다. 사람들도 정감이 있어서 좋다.
2. 오전에 일어나면 조식을 먹고 대평이 밥을 주러 갈 거다. 아침마다 바다 산책을 하고 아지트에 가서 책을 보고 글 정리를 할 듯하다.
3. 점심은 사소한 골목과 용왕난드르 둘 다 갈 거 같다. 사실 이외에는 갈곳도 마땅치 않다.
4. 점심 먹고는 선자네쌀롱 가서 멍 때리며 있겠다. 생각도 하고 정리도 하면서. 사소한 골목에서 3시까지 커피를 마시면서 있는 것도 좋겠다.
5. 6시 10분 되면 일몰을 보러 바다로 간다. 너무 일찍 나가면 추우니 최대한 늦게. 바닷가 근처에 심심해하는 강아지들과 좀 놀아준다.
6. 저녁이 사실 제일 애매하다. 저녁에는 이응 카페에서의 식사다 나쁘지 않은 듯하다. 식사를 하고 앉아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에는 괜찮다.
7. 저녁의 술자리는 이틀에 하루 정도가 좋겠다. 첫날과 셋째 날이 좋을 듯하다. 술을 안 마시는 날은 사람들이 술 마시러 떠난 빈 도미토리에서 조용하게 책을 읽고 생각을 하겠다. 도미토리에서 바라보는 바다뷰가 정말 멋지다.
지금은 서귀포 쪽에서 글을 쓰는 중인데 대평리 생각을 하니 벌써 추억을 하게 된다. 매력적인 동네다. 하지만 원래 추억이란 결국 나만의 경험이 중요하다. 나한테 의미 있었다고 해서 남한테 추천하지는 않겠다. 반대로 다른 사람한테 의미 있는 곳이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제 또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 또다시 낯설음과 소외감, 이어지는 적응과 편안함, 그리고 또다시 이별이 기다리고 있겠지.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자.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어제 조사한 바로는 100번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피부과가 하나 있다. 중간에 내려서 피부과를 찾아간다. 비가 꽤 온다. 아까 주신다던 우산을 받아올걸 그랬나? 뭐 이미 늦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병원으로 뛰어간다.
병원이 꽤나 화려하다. 피부과는 성형 목적으로도 많이 와서 그런가? 기다려서 진찰을 받는다. 의사선생님 말투가 특이하다. 노래를 부르시는듯한 느낌? 진찰 결과는 그냥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란다. 연고와 약을 처방받고 나온다. 약국에 들러서 약을 받고 다시 100번 버스에 올라탄다.
여기서는 금방이다. 20분도 채 안가서 내린다. 이번에 가는 곳은 넙빌레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이다. 급하게 예약을 한 곳이라 어떤지는 모르겠다. 내가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한분이 추천하길래 무턱대고 예약을 해버렸다. 지도에서 볼 때는 꽤나 큰 마을이었던 거 같은데 버스에서 내리니 허허벌판이다. 이거 괜찮으려나. 첫날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생각이 나면서 살짝 걱정이 된다.
비가 이제 좀 많이 온다. 하지만 여전히 우산이 없다. 주변에 살 곳도 없다. 그래도 지도 상으로 봤을때 걸어서 200미터 정도였으니 급할 필요는 없다. 후드로 써서 머리를 보호하고 주변을 보며 걸어간다. 중간에 한번 정도 헤매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찾는다.
게스트하우스가 꽤 크다. 약간 펜션 같은 느낌도 난다. 근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일단 짐도 맡기고 우산도 빌릴 겸 게스트하우스 입구로 가본다. 들어오는 입구나 정경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카페도 같이 하고 있고 그곳에서 샌드위치 판매도 하는 듯하다. 입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4시일테니 그때까지 카페에서 버티면 되겠다.
문이 잠겨 있다. 안에 불은 켜져 있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4시 오픈이라지만 그래도 카페도 있는데 왜 아예 잠가놓은 거지. 우산도 빌려야 하는데. 입구 옆에 장우산이 하나 보인다. 잠시 무허가로 빌리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만 그냥 놔둔다. 어딘가에서 밥이라도 먹고 다시 돌아와야겠다. 주변을 좀 둘러봐야겠다.
일단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왼쪽 길로 가본다. 바다라 역시 바람이 매섭다. 우산이 없으니 당연히 쫄딱 젖어버린다. 청바지도 젖어가고 신발에서도 물이 느껴진다. 괴롭다. 발걸음을 빨리 해본다. 내려오니 바다에 남탕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그 와중에도 궁금해진다. 비를 맞고는 있지만 이런 건 그래도 가서 호기심을 풀어야 한다. 가보니 바닷물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노천탕 같은 곳이다. 뭐지? 모르겠다. 일단 계속 왼쪽 길로 들어가본다.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웬 한국문화연구소(?)라는 화려한 건물이 나온다. 문화 연구도 좋지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차라리 컵라면 한 그릇이다. 그 앞은 길이 막혀있다. 저기 들어가서 밥 달라고 얘기를 해볼까? 아서라. 그냥 돌아선다.
주변에 먹을 곳을 못 찾겠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돌아와서 잠시 고민한다. 버스 타고 다른 곳으로 갔다 돌아와야 하나? 문을 다시 한번 두드려보지만 역시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안 느껴진다. 옆에 놓여있는 우산에 다시 눈길이 간다. 티벳풍경 사장누님이 우산 준다고 할 때 가져갈걸 그 호의를 왜 거절한걸까. 우산 앞에서 잠시 고뇌에 빠져 고민하다 결국 집어든다. 이거 엄밀히 따지면 도둑질 일려나? 잘 쓰고 갖다 놓겠습니다. 설사 이걸로 경찰서를 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쫄닥 젖어서 계속 다닐 수는 없는 거다.
아까 왼쪽으로 가서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반대쪽인 오른쪽으로 가본다. 여행에서는 여유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온몸이 젖은 지금은 여유고 뭐고 없다. 멀리서 마을 같은 보이는 곳이 있어 희망을 가지고 급히 가본다. 카페라고 쓰여 있는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카페든 뭐든 가릴 때가 아닌다. 빵만이라도 팔면 빵에 커피만큼 좋은 한 끼 식사도 없는 법이다. 열려있다. 들어간다. 오 은근히 분위기 좋은 카페다. 메뉴판을 보니 커피 종류와 와플이 보인다. 와플이 만원이 넘는다. 아무리 내가 급하지만 이건 아니지. 사장님한테 물어보니 200미터 더 가면 식당이 있단다. 그래? 그럼 가봐야지 하고 다시 밖으로 나선다.
얘기한 200미터를 가지만 식당이 안 보인다. 민박 몇 개만 있을 뿐. 이거 나오긴 하는 걸까? 그래도 착하게 생긴 아저씬데 설마 사기꾼이겠어? 나한테 거짓말해서 얻을게 뭐 있다고. 믿고 계속 가본다. 안 보인다. 이 아저씨 사기꾼인가 보다. 물질적으로 얻을 건 없겠지만 속이는거에서 본인만의 희열이 느껴지나? 배트맨의 조커 뭐 이런 거 말이다. 에잇.
앞에 웬 정자가 보인다. 이 근처에서는 이상하게 정자가 많이 보인다. 이 정자는 근데 다른 곳과 다르게 유리문과 여닫이문으로 닫을 수 있게 되어있다. 가까이 가보니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놨다고 쓰여있다. 마을 인심 좋네. 물론 올레길 사람들이 와야 마을이 활성화되는 거겠지만 그런 상업적인 생각은 안 하기로 한다. 이따 아무것도 못 찾으면 저기서 잠깐 비를 피하며 몸 좀 녹여야겠다.
밥집이 하나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한 달 휴가란다.
횟집이 보인다. 다가서니, 잠겨 있다.
바닷길은 끝까지 다 갔는데 역시 먹을 곳이 없다. 사람도 안 보인다. 유령도시다. 오다가 큰길 방향으로 어렴풋이 김밥, 컵라면이라고 쓰여있는걸 본 기억이 난다. 아까는 컵라면이라 그냥 지나쳤지만 지금은 이것도 아쉽다. 다시 길을 돌아가 그쪽으로 향한다.
가보니 슈퍼다. 편의점이 찾기 힘드니 슈퍼라도 있어야겠지. 그래도 이제 뭐라도 먹을 수 있겠구나. 여행지에서 이 정도 비 좀 맞고 컵라면 먹는 것도 하나의 추억이지. 문이 잠겨있다. 훗. 그럼 그렇지. 오늘 쉰다고 쓰여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우산을 쓰고 있지만 이제 양말까지 젖었다. 바닷길은 희망이 안보여서 큰길로 나서본다. 티벳풍경에서 조식을 안 먹은 게 너무 후회된다. 이 모든 게 그 부자 3인의 여행자 때문이다. 큰길로 가다 보니 중국집이 보인다. 음헤헤. 다시 마음이 너그러워지며 가본다.
정기휴일이란다. 월요일은 힘든 날이구나. 만약 다음에 이동을 하는데 모르는 동네로 가면 기존 동네에서 버티다 4시에 맞춰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별 수 없지. 계속 걷는다. 이쯤 되니 첫 카페의 만원짜리 와플이 머리 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안돼!
원래 새로운 마을을 가면 항상 마을 한바퀴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한다. 아지트도 찾고 동네도 조금 익숙해지기 위함이다. 오늘도 비만 안 왔음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다녔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제 마을 둘러보기가 되어버렸다. 뭐 덕분에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구조를 어느 정도 익혔다. 지나가다 헤이메이라는 게스트하우스가 꽤나 예뻐 보이길래 기억해둔다. 일박만 넙빌레에서 하고 나머지는 여기서 할걸 그랬나. 여하튼 이건 다 나중 문제고 지금은 밥 먹고 비를 피하는 게 먼저다.
아까 지나쳤던 '올레길 여행자를 위한 정자'로 다시 간다. 여유를 좀 갖고자 일단 올라가서 안으로 들어간다. 방명록이 보여서 펴보니 다들 이 공간이 고맙다는 말 천지다. 나도 정말 고맙다. 이거 만든 마을 사람들 복 받을 거다. 그래도 비와 바람을 피하니 조금 여유가 생긴다.
그래. 와플을 먹자. 이런 사치도 한 번쯤은 부려야지. 지금 한 시간 이상을 헤매고 있다. 2시간인가. 시간 감각도 없다. 마음을 먹으니 편해진다. 정자에 앉아서 좀 쉬다 내려와서 카페로 향한다.
왼쪽에 네온사인이 켜진 게 보이기에 얼핏 보니 아까 지나오면서 봤던 민박이다. 계속 걸어가니 멀리 처음의 그와플 카페가 보인다. 근데 아까 그 민박이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유심히 보니 민박 밑에 칼국수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젠장. XX. 여길 아까 분명 지나갔는데 왜 저 글자를 못 봤지? 처음 카페에서 여기까지가 약 200미터 거리다. 아 처음에 아저씨가 말한 근처의 식당이 여기였구나!
그래, 아저씨 사기꾼 아니었다. 욕해서 미안하다. 그냥 내가 등신 천치 바보였다. 이걸 그냥 지나쳐서 한 시간을 헤매다니. 하지만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만 중요할 뿐. 와플이 아닌 따뜻한 칼국수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식당에 들어서니 엑소의 으르렁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주머니 신식인데? 메뉴를 보니 라면과 보말칼국수, 성게칼국수가 보인다. 여기는 어디처럼 라면에 마늘 한글자 붙이고 4000원 받는 만행은 안 한다. 그냥 3천 원이다. 칼국수는 두 종류가 전부 6000원이다. 고생했으니 조금 더 비싼 칼국수를 먹자. 보말은 대평리에서 하도 먹어서 이제 지겹다. 성게칼국수를 시킨다.
벽을 보니 온 벽이 고맙다는 말 천지다. 내 그 마음 이해한다. 이 식당의 존재 자체가 눈물 나게 고맙다. 칼국수가 나오고 나서 뜨뜻한 국물을 한 숫갈 뜨니 천국이 따로 없다.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진다. 세상, 살만한 곳이다. 앉아서 이 맛과 기분을 음미한다.
아까 '으르렁'이 나온 건 라디오에서였나 보다. 지금은 갑자기 군가가 나온다. 엥? 자세히 들어보니 병영라디오다. 뭐지? 이 아주머니 밀리터리 마니아인가? 사람의 취향은 넓고도 넓다.
혼자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우비를 쓰고 올레길을 걷는듯한 여학생 3명이 들어온다. 밥 되냐고 물어본다. 물어보는 이유를 내 이해하지. 얘네도 많이 해맸을거다. 된다는 말에 신나게 들어와 앉더니 셋이 메뉴가 뭐 있냐고 물어본다. 메뉴판이 바로 앞에 3개나 붙어있는데, 왜 안 보는 걸까. 3명이서 2그릇을 먹을지 3그릇을 먹을지에 대해 심층적이고도 깊은 토론을 나눈다. 다이어트를 한단다. 그러다 3개 시킨다. 내 여자친구를 보는 것 같다. 성게 2, 보말 1. 아주머니가 성게 2개는 그럼 같은 그릇에 주시겠다고 하니 알겠단다.
그러다 갑자기 양심에 걸렸는지 2개로 줄인다. 성게 2개를 달라고 한다. 아주머니가 "그럼 따로 따로?" 했더니 여자애 중 하나가 "네?" 한다. 그랬는데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더니 "성게만요"이란다. 아주머니는 성게 2개를 같은 그릇에 주느냐 다른 그릇에 주냐고 물은듯한데. 이 사오정들의 대화는 뭐지? 간섭할까 하다 내버려둔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겠지.
조금 있으니 다른 팀이 또 들어온다. 어느새 만석이다. 남은 음식을 후딱 비우고 자리를 비켜드린다. 장사 잘된다. 역시 수요 공급의 법칙은 영원하다. 수요가 많지는 않지만 공급이 0에 수렴하니 잘될 수밖에. 한 끼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해준데 감사하며 나와서 원래 목적지였던 카페로 향한다.
카페에도 사람이 많다. 역시 분위기 좋다. 이제 와플을 안 시켜도 되니 거들떠도 안 보고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제주도 다니면서 느끼는 건데 커피 가격은 서울과 큰 차이가 안 난다. 가격이랑 비용보다는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이겠지.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을 하니 마음이 평온하다. 비록 양말도 젖고 바지도 젖고 온통 다 축축하지만 이제서야 내 마음까지 이 마을에 온 느낌이다. 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이제부터 좋은 추억을 같이 많이 쌓아보자꾸나.
조금 있으니 손님이 꽤 많이 온다. 여기 우리 홍대 카페보다 장사 잘되는 거 같다. 하긴 뭐 워낙 경쟁자가 없으니. 자리가 금새 꽉 찬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비켜줄 수가 없다. 밖이 너무 춥다. 2인용 바에 앉아있으니 나름 괜찮다고 위로한다. 자리가 없으니 긴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던 여성분이 자리를 양보하면서 내 옆 자리로 온다. 옆에 앉아도 괜찮냐고 물어본다. 이런 거 안 괜찮아할 내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래도 여행지라 대화를 끌어볼까 한 건데 단답형 대답을 하고 댜대화를 닫으신다. 이놈 뭐야 라는 눈빛으로 보신다. 이런. 그런 부류가 아니군. 잘됐지 뭐. 나도 편하다. 신경 끄고 책을 보면서 정리를 한다.
카페불패 책을 여기서 다 본다. 여행하면서 완결을 본 3번째 책이다. 처음에 읽을 때는 좀 안 좋게 봤는데 끝까지 보니 또 나쁘지 않다. 누군가한테 강력추천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비추천할 정도도 아니다. 나름 배운 바도 많다.
여기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다. 커피소년의 노래들, 내 인생 베스트 드라마의 수록곡인 '만약에 우리', 나희경님이 부른 '춘천 가는 기차', 그리고 정엽 노래 중 수 없이 들어본 'Nothing Better' 마저도 여기서 들으니 분위기가 다르다. 돌아가면 우리 카페 음악 좀 내 스타일로 선곡해봐야겠다.
4시가 다 되어가서 숙소로 이동을 한다. 따뜻한 곳에서 나오니 날씨가 겁나 춥다. 게스트하우스로 걸어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진다. 이렇게 멀었었나. 원래 가는 길이 멀고 돌아오는 길은 짧게 느껴져야 정상인데, 춥고 축축하니 그냥 만사가 괴롭다. 뭐 어쩌겠나. 꿋꿋하게 걸어간다.
드디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시간이 되서인지 문도 다행히 열려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성분 두 분이 로비에 이미 앉아있다. 딱 보니 스텝이나 사장님은 아닌 듯하고 여행자 같다. 스텝분 혹시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어보니 자기들도 모른다며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옆에 앉아서 기다린다.
조금 있다 웬 훈남이 나타난다. 이거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건가? 풍기는 분위기가 스텝이 아닌 사장님 같은데, 이렇게 화려한 건물의 사장이 저런 훈남이라니. 분명 발가락은 못 생겼을거다. 먼저 여성분들을 안내하기를 기다렸다가 나도 안내를 받는다. 남자는 1층, 여자는 2층을 쓰는 분리된 구조이다.
방에 들어오니 또 다시 낯설음이 찾아온다. 티벳풍경에서는 이응이 그립더니 넙빌레를 오니 이번에는 티벳풍경이 그립다. 이곳은 모든 것이 겁나 깨끗하다. 흰색 페인트에 흰색 침대, 모텔 같은 분위기다. 벽도 얇아서 옆방에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진짜 모텔스럽다. 물론 난 가본적 없으니 잘 모른다.
침대에 누워보고 깜짝 놀란다. 이거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 맞나? 고급 호텔 침구의 느낌이다. 매트리스뿐만 아니라 이불도 그런 느낌이다. 시설은 지금까지 다녀본 게스트하우스 중 최고다. 근데 그럼에도 뭔가 정이 안 간다. 너무 깔끔한걸까.
화장실과 샤워실을 둘러본다. 역시 깔끔하다. 샤워실은 몇 명이서 같이 쓰는 공중목욕탕의 구조로 되어 있다. 오랜만에 찰진 상황을 맞이하게 되겠군.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일단 오전부터 계속 미뤄뒀던 큰일을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온다.
방문을 여니 남자 여행자가 한 명 기다리고 있다. 인사를 건넨다. 이제 인사를 건네는 건 너무 익숙해졌다. 이분 좀 무뚝뚝해 보인다. 얘기를 들어보니 여자친구랑 같이 왔단다. 아니 그런데 웬 도미토리? 여자친구가 같이 도미토리 다니면서 여행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고 했단다. 이 남자, 갑자기 뭔가 측은해 보인다. 그래서 뭔가 저런 뚱한 표정이었나.
왠지 이곳에서의 이틀은 굉장히 조용할 듯하다. 인도에서 서울로, 과거에서 현대로 돌아온 느낌이다. 방의 룸메도 어차피 여자친구가 있으니 같이 어울려 놀 분위기는 아니다. 나도 이틀 동안 차분하게, 지금까지 못했던 사색을 이어서 해야겠다. 그런 의미로 리디북스에 들어가서 다음에 읽을 책을 찾아본다. 연쇄할인마답게 또 겁나 할인하고 있다. 이미 스팀라이브러리가 엉망인데 리디북스한테까지 말릴 수는 없다. 과감하게 할인 안 하는 미리 찜해놓은 책을 지른다. (근데 이러면 꼭 조만간 할인하더라.) 언젠가 보려고 찜해놓은 책인데 이거 페이지수가 1000장이 넘는다. 좀 보다 다른 책을 볼까나...
책을 좀 보다가 찌뿌둥 해서 일단 샤워를 하러 간다. 비를 오지게 맞았더니 영 찝찝하다. 아까 본 이곳의 샤워실, 귀찮다는 핑계로 씻지 않을 수 없도록 시설이 무척 잘 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한다. 뜨뜻한 물이 나오는 따뜻한 샤워실에서 여유를 즐기며 목욕을 하니 문명으로 돌아온 듯하다. 무슨 오지에 있다 온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다. 뜨거운 물로 한참을 지지다 나온다.
과학은 계속 인간의 편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막상 인간이 원하는 것은 인간다움이 아닌가 싶다. 편리함은 절대로 인간다움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가끔은 약간의 제약이 오히려 내가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솔직히 지금 보다 삐삐 시절이 그립다. 뭐 요즘 애들도 나중에는 홀로그램도 아닌 화면으로 보는 핸드폰이 낭만 있었다는 얘기를 하며 추억을 떠올리겠지.
배도 좀 고프고 숙소에 있자니 영 여행 느낌이 안 나서 숙소에 딸려 있는 카페로 나온다. 룸메가 여자친구랑 같이 앉아있다. 이거 아는척하기가 민망하다. 서로 모른척하고 자리를 잡는다. 책을 보며 생각 정리를 좀 하다 저녁을 시킨다.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여기 훈남 사장님 알고 보니 품절남이었다. 어여쁜 딸도 돌아다닌다. 근데 훈남이든 뭐든 남자는 결국 여자에게 이길 수 없나 보다. 모든 일은 부인이 다 하고 훈남 사장님은 잡거리만 하고 있다. 여사장님은 뭔가 당당한데 이 훈남 사장님은 어깨가 무겁게 처져있다. 우리나라 가장들 힘내자!
이곳은 게스트하우스라기 보다는 숙소다. 게스트하우스라는 개념이 사실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 이 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내 개념에서는 그렇다. 분위기가 카페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하는 거 자체가 어색하다. 혼자 앉아서 먹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마저 느껴진다. 여긴 혼자 여행 오는 사람이 없나? 뭐 오늘만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는 아니지만 나름 이틀 동안 휴식하고 정리하기에는 괜찮은 곳 같다. 다른 신경 쓰이는 게 별로 없으니 생각이 오히려 잘된다.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한다. 최근 중 오늘이 가장 집중력이 좋다.
오늘은 빨래도 좀 하려 한다. 원래는 여행기간 동안 한 번도 안 하고 갈까 했는데 이제는 입은 옷이 육안으로 구분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무리다. 시설 좋은데서 빨래도 하고 건강도 좀 추스르고 움직여야겠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온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앉아서 마저 책을 읽는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안 난다. 새로운 게스트하우스의 첫날은 항상 뭔가 소외된 느낌과 함께한다. 기분이 안날때 앉아있어봤자 뭐하랴. 정리하고 도미토리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빨래를 깨끗이 하고 이를 닦고 눕는다. 이제 저녁 8시다. 저녁에는 복잡한 책 말고 판타지나 무협지 같은 그냥 킬링타임용 책을 하나 편다. 옆방에서 소리가 난다. 분명히 1층은 남자 도미토리, 2층은 여자였다고 들은 거 같은데 커플의 소리가 들린다. 여기 벽이 얇아서 내용까지 다 들린다. 조금 므흣하다. 갑자기 저녁이 걱정된다. 인간들이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예의는 지킬 것이라 믿어보자. 흠 뭐 안 지켜도 그만...?
핸드폰을 끊고 왔으니 걱정하실 듯하여 3일에 한번 정도는 부모님께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서귀포 사진을 하나 찍어서 걱정하지 말라고 같이 보내드린다. 밥 잘 먹고 다니라는 답장이 온다. 어머니는 언제나 밥 걱정이다. 뭘 해도 밥만 먹으면 괜찮고, 또 밥을 안 먹으면 뭘 해도 괜찮지 않다. 아늑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확실히 여행지 느낌이 잘 안 난다. 이어폰을 꼽고 어바웃 타임 OST를 듣는다. 이제 조금 느낌이 난다. 확실히 여행지에서의 음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내일은 건축학개론에 나와서 유명해진 서연의 집에 가볼까 한다. 관광지라 안에까지 들어가서 보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오전에 산책 겸 슬쩍 한번 갔다 와야겠다. 오늘 저녁도 그렇지만 내일도 뭔가 다소 지루한 하루가 될 거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곳에서 아무것도 안하며 사색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한 부분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다른 외부적인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틀을 보내봐야겠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여행은 계속된다. 근데 갑자기 또 대평이가 보고 싶다.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고 왔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