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아버지의 분유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아버지의
달콤하고 비릿했던 따뜻한 분유 한 잔!
엄마 어릴 적, 외할아버지는 매일 새벽 다른 도시로 일을 하러 가야만 했어. 부모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이불속에서 서로만을 의지한 채 잠든 아이들만 남겨두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집을 나설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는 문득 그때의 외할아버지 마음이 궁금해지곤 한단다.
외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외삼촌과 엄마가 먹을 수 있도록 밥 두 공기와 약간의 생멸치 그리고 고추장으로 아침밥을 차려두곤 하셨어. 밥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전자레인지도 반찬을 저장해 두는 냉장고도 없던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 분명했지만, 외삼촌과 엄마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 밥에 물을 말아 한 입 가득 물고 생멸치에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살짝 비릿한 멸치 맛이 입 안에 싹 돌곤 했거든.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매일 아침 아이들이 찬밥을 먹게 한 미안함에 당신은 형벌처럼 늘 빈 속으로 일터로 향했다고 한다.
'흉년에 어른은 배고파 죽고 아이는 배 터져 죽는다'는 말처럼 자신은 굶어도 자식은 먹여야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란다. 가난하고 부유한 것과 상관없이 모든 부모는 자식을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힘듦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곤 해. 지금이야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지만, 엄마 어릴 적만 해도 아버지(남자)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편견의 시선으로 보기도 했고 양육에 대한 정보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어. 외할아버지의 고단하고 또 고단했을 싱글대디의 무게를 엄만 너를 낳고 기르면서 조금 알 수 있었다.
아빠, 여자인 나도 아이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데 아빤 우릴 어떻게 키웠어?
아빠, 키워줘서 고마워요.
네가 백일 무렵 외할아버지에 전화해서 한 말이야. 너무 이르게 또 너무 갑자기 떠안아야 했던 양육이었지만, 외삼촌과 엄마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외할아버진 자신의 살을 파고 뼈를 깎고 마음을 더해 키운 것은 분명하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삼촌은 늘 또래보다 한 뼘이 작았고, 엄만 모든 부분에서 또래보다 발달이 더뎠어(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소변을 못 가려 매일 이불에 지도를 그렸던 게 생각난다 ^^)
영양가가 있어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우유를 먹이면 좋겠다 생각하셨단다. 여유 있는 집처럼 매일 우유를 배달해 먹일 수 없어 떠오른 게 분유! 그렇게 외삼촌과 엄마는 매일 밤 따뜻한 물에 분유와 약간의 설탕을 섞은 외할아버지 분유를 먹고 자랐단다.
엄만 늘 외할아버지가 퇴근해서 집에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곤 했어. 그러다 기다림에 지쳐 몰래~(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단다) 가루 분유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침으로 살살 녹여 먹기도 했었지. 매사 모범생인 외삼촌과 달리 엄만 '목이 아프다', '배가 아프다' 꾀병을 부리며 분유 한 잔 더 마시기도 했던 것 같아.
가격이 비싸고 특별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이런 보통의 음식이 위로와 치유,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단다. 엄마에게 힘이 된 음식은 바로 외할아버지가 매일 밤 타 주던 분유 한 잔이란다. 언젠가 그 비슷한 맛을 커피 자판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데일리 아침방송 구성작가 시절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던 그때 엄마를 위로한 건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던 우유(전지분유)였단다. 자판기에 기대 쪼그려 앉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곤 했었거든.
감정이 스며들고 이야기가 담긴 음식은 단순히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치유와 힐링이 되는 음식이 된다. 그 음식이 바로 너에게는 김치찜인가 보다. 네가 집으로 오는 날 김치찜을 만드는 날이 많아졌거든. 올해 여름 역시 마치 공룡 입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열기와 습기가 대단했었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잠깐의 외출에도 이마와 등이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단다. 이렇게 유난스러운 날에는 부쩍 너의 안부가 더욱 궁금했단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아픈 건 아니겠지', '학교생활은 잘 적응 중인지'...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하는 게 부모라고 하던데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외할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엄마에게 분유를 타 주었듯이 이제 나도 집으로 돌아오는 너를 기다리며 김치찜을 만들고 있다. 보통의 김치찜이지만 이 음식을 먹고 너의 몸에 흡수되어 언젠가 닥치게 될 어려움과 힘듦에 위로와 치유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