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파란펜 선생님

by 김 과장
(C) monami


새해를 일주일 앞둔 12월의 마지막 월요일 새벽에 비서실 출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화문 풍경을 등에 대고 일하는 곳이었지만 늘 긴장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침일찍 대변인실에서 스크랩되어 올라온 우리 부 관련 기사들을 훑고, 기사의 주요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도록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보아야 하는 장관께서 짧은 시간 안에 핵심 내용을 빠르게 파악하실 수 있도록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사 검토가 끝나게 되면, 전날 오후부터 밤사이에 실국에서 들어온 보고서들을 확인하는 일이 남습니다. 간단한 상황 보고나 회의 결과에서부터 주요 정책과 관련한 쟁점들을 정리하고 방침을 받기 위한 보고까지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보고서를 최대한 빠르게 읽고 시급한 방침 등이 필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나눴습니다. 내용이 어려운 보고서의 경우에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설명을 듣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해가 어려운 보고서의 경우에는 장관께서 일단 저에게 내용을 물었기 때문에 보고서에 담긴 핵심 내용과 관련 배경 등에 대해서는 미리 파악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장관에게 올리는 보고서라는 점 때문인지 보고서 분량을 1-2장 분량으로 압축해서 보고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고서를 핵심 위주로 간결하게 작성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보고서를 받아든 수요자의 시간과 수고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단지 짧은 보고서가 정답은 아닙니다. 1-2장 안에 모든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때문에 이해에 필요한 중요한 맥락들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무담당자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만 사용하는 용어를 부연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공급자 중심의 보고서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고서를 다시 해당 부서로 돌려보내서 내용과 쟁점을 이해하기 쉽도록 보완해 달라는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후배들의 걱정스러운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이 것이 정답입니다.' 라고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올라오는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보고서들을 보며 느낀 것은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이해되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그 입장이 명확히 드러나는 보고서가 좋은 보고서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보고를 받는 사람이 “보고서 내용을 보니 내가 이렇게 해야겠구나”라는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고는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알고 합리적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주는 일’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예로 들자면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은 과장, 국장, 실장, 차관, 장관입니다.

그 책임지는 사람의 합리적 결정에 도움이 되기 위한 정보는 크게 2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첫째는 정확한 정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팩트’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보고하는 내용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리적 결정도 가능합니다. 사실과 다른 정보에 기초한 결정은 당연히 합리성과 타당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시의 적절한 정보여야 합니다. 이는 정보 제공의 시점에 관한 사항입니다. 결정이 임박했거나 이미 결정이 끝난 시점에 알게 된 정보는 합리적 결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에 기반한 정확한 정보가 시의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이제는 이 정보를 책임지는 위치에있는 사람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 남습니다. 담당자가 파악한 정보를 책임지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보고서에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보고서를 통해 상대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내용과 표현이 쉬워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가 되는 상황이 무엇이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이러한 일(조치)을 해왔고, 앞으로는 이런 방향으로 처리하겠다.’라는 흐름에 따라 작성하면 무난합니다.

보고서를 작성한 뒤에는 그 보고서를 말로 설명해보세요.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흐름이나 내용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보고서의 작성순서에 따라 설명을 하는 것이 매끄럽지 못하고 중언부언하고 있다면 그 보고서는 어딘가 보완되어야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 저의 손을 거쳐 매일 아침 20개 정도의 보고서가 장관의 책상에 올려졌습니다. 재난, 지방자치, 정부혁신, 조직, 지방재정, 디지털 정부 등 분야도 다양했습니다. 보고의 대상이었던 장관께서는 너무나도 꼼꼼한 분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다 소화되지 않는 보고서들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까지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직접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손을 거친 보고서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파란색 플러스펜으로 당신의 입장과 의견을 달아 돌려주었습니다. 장관께서 꼼꼼하게 챙기는 만큼 일선 부서의 부담감은 당연히 컸습니다.


그의 파란 펜은 말씀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초안으로 올려진 말씀자료 초안에는 한동안 파란 펜으로 적힌 수정사항이 가득했습니다. 언론 인터뷰 자료, 각종 연설문, 외부 토론회에 보내는 서면 축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으로 나가는 메시지에는 핵심이 분명하게 담긴 살아있는 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분의 스타일에 맞는 글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 만들고 다듬기 위해 고심하고, 어떤날엔 부족한 제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를 따라 다닌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살아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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