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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장
삶을 지탱해 주는 나의 역할들에 관하여
by
김 과장
Feb 8. 2024
운좋게 표를 구해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왔다.
따땃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서는
오늘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 챙겨 온
책을 열어본다.
아궁이에 불을지펴얻은
순수한 온기는 아니지만
기분은 그 시절 그 느낌과 얼추 비슷하다.
일을 잘하지만,
더 잘하고 싶어 하는
회사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기가 얼마나 뼈를 갈아서
일하고 있는데, 과장이나 국장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아 속상하다고 말한다.
명절을 코앞에 둔 오늘
,
내가 저녁을 먹고 배를 튕기며
한량짓을 하는 동안에도
,
그 친구는 여전히 사무실에서
남은 뼈를 갈아대고 있었다.
남은 일은 명절 후에 돌아와 하라고 권했지만,
더 잘 해내고 싶고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의 맘과 발길을 붙들어 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는 회사에서 팀장이
지
만,
누군가의
아내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회사에서 팀장이라고 말한다.
내 눈엔 그에게서 팀장외의 다른 역할은 보이질 않았다.
잊고 살기 쉽지만,
삶은 우리가 해야 할
여러 역할들의 꾸러미다.
꾸러미들의 개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여러 꾸러미들의 무게가 적절하게
나뉘어
있어야
삶이 안정적으로 지탱된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안정적'이란 말보다
'무사하게'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한 바구니에 담긴 계란보다
여러 바구니에
나뉘어 담긴 계란이 안전하다고 말하듯
온통 회사에서의 역할만으로 가득 찬 삶의 바구니는
회사에서의 역할이 삐끗하거나 타격을 받을 때
그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반대로, 회사에서의 역할 외에
다른 역할들도 균형 있게 유지될 땐
회사로부터 받는 충격들이 있더라도,
다른 역할들이 그것들을 상쇄하고 흡수하며
삶이 무사하게 굴러갈 수 있게 된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회사에서의 역할이 전부인 양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빨리 승진을 하는 것이
나를 증명하는 인생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나를 몰아세웠었다.
그리곤, 회사일에서 오는 고통과 자괴감으로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운 좋게도 그 어떤 계기를 만나,
회사에서의 나 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나의 역할이 많다는 것을 알고
지금을 살고 있다.
사실, 그렇게 살아도
회사에서의 역할에 그리 큰 부족함은 나타나지 않는다.
강박을 벗어던지면, 나의 존재가치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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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과장
커리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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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중앙부처 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볕이 좋은 툇마루에 말랑한 바람과 마주앉아 정감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그립니다. 언젠가는 그런 시간이 일상이 되는 순간이 올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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