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있어 선택은 곧 어떤 기회비용을 지불할지에 대한 선택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얻고 가졌던 그 모든 물건과 경험은 분명 금전, 혹은 시간 등 복합적인 것을 지불하고 얻어낸 산물이다. 나에게도 안정적인 삶과 더 나은 노후는 중요한 것이지만, 나와 같은 부류의 방랑자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은 이것을 여행, 요즘에는 한 달 살기와 맞바꾸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책임져야 할 생명'이 없는 자유로운 미혼 시절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하는 게 보편적일 거다. 그래서 결혼이나 출산을 미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내 인생에서 세계일주를 다녀온 순간은 어떻게 보면 인생의 찰나와 같은 일탈의 시간이었고, 일상으로 돌아온 삶에서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회사생활과 결혼,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를 낳으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아이를 낳고서는 당연히, 내가 배낭여행이나 한 달 살기를 다시 떠나는 건 아이가 성인인 된 이십 년 후나 되어서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내 인생을 포기할 만큼,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정말 무겁게 다가왔으니까.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였던 내가 사라지고 아이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면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배경의 조연 같이, 혹은 잊혀진 추억같이 희미해지는, 다시 말하면 내 인생의 의미가 아이를 뒷받침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 말이다. 그건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자존감의 상실 기간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희생하는 삶을 살다 보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저절로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몸은 빠르게 나이 들어가면서 장년을 향해 가지만 마음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것에 희생적인 인간으로, 어떠한 욕심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행복했지만, 그로 인해서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 아니 우리 부부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항상 여행에 목말라 있었다. 고작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휴가를 내어, 짧은 비행시간의 리조트에서 아이와 적당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휴가를 다녀오면서도 오랜 시간 한 달 살기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단지 희망사항, 혹은 허왕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만 생각하자면 사회생활의 커리어와 기회비용을 지불할 마음가짐이 오래전부터 되어있었지만, 그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아이를 위해서도 옳은가 하는 것에서 대해서는 당연히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더더욱 여행은 짧고 돌아와 이어질 인생은 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우려에 대한 답은 어느 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곧 일곱 살이 되는 여섯 살배기 아이와 거제도에 놀러 갔을 때 야자수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저건 여름나라 나무지? 따뜻한 여름나라에 가고 싶어. 수영을 실컷 할 수 있는 여름나라에 살고 싶어. "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 부부 모두 회사의 이직 시기가 겹치면서 어학연수 혹은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기회가 생겼다. 그때, 자연스럽게 여름나라에 살고 싶다는 아이의 말이 다시 생각이 났다. 그저 흘려한 말인데 왜 그렇게 기억에 남았을까. 내가 낳은 아이가 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동질감을 느껴서 그랬던 걸까.
그러나 내가 단지 그 이야기만 가지고 '역시 우리 딸, 아싸! 그래 다 때려치우고 한 달 살기나 하러 세계일주를 가자!'라고 생각 한건 아니다. 여섯 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디 어린 나이. 한창 세상을 보는 시선이 커지고,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사상을 흡수하면서 자기주장이 엄청나게 강해질 그런 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고집만 셀 뿐 여섯 살은 자기 신발끈을 묶을 수도 없는, 어리고 미숙한 나이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리고 미숙하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는 어른에 속해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자라나는 동안 장차 남을 배려할 줄 알고,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생 선배의 입장에서 조언해주고 가르쳐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미숙한 생명체인 아이에게도 분명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하고 싶은 일이 존재'한다. 아이도 살고 싶은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아이가 부모의 라이프스타일에 끌려서 떠나는 게 아닐까 오랜 시간을 고민하면서 세계일주에서 자연스럽게 한 달 살기로 바꾸며 아이와 함께 계획하는 과정을 거쳤다. 먼저 세계일주가 뭔지 가르쳐 주기 위하여 지구본을 샀다. 그리고 아이에게 우리가 앞으로 어떤 하루를, 그리고 한 달을, 일 년 동안 보낼 것인지 아이의 눈높이에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리고 천천히 몇 주에 걸쳐서 설명을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유치원을 그만두고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 한번 경험해봤던 '이사'를 낯선 동네로 다시 가야 하는 것, 한 달 살기에 대해서는 소위 '우리 집이 아닌 빌린 집'에서 잠깐씩 거주하는 것을 꽤나 자세히 설명했다. 그 사실을 아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또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과 놀기 위하여 잠깐 동안은 외국에서 영어유치원을 다닐 의지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유난히 호기심 많고, 당찬 성격의 아이는 처음부터 긍정적이었고, 무엇보다 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름 나라'에서 수영을 실컷 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큰 기대감을 품은 채로, 장난감 등 아이 본인의 짐 처분과 여행 준비에 즐겁게 동참해 주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유치원에 다녀야 한다는 것에는 조금의 걱정은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어딜 보나 우리 딸인 것 같다.
이렇게 아이와 함께 우리 부부의 세계일주, 한 달 살기가 확정되었다. 아이가 있고 방랑의 영혼을 가지신 분들은 이 글을 보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도 여행 때문에 결혼을 고민하는 과거의 나 같은 분들도 그나마 우리를 보며 희망찬 미래를 조금 엿보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