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내게 된다고?

버킷리스트의 마지막 페이지

by 두세아


내가 왜 한다고 했지. 후회를 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닿은 독서모임 식구들 중 공저에세이를 지도하시는 작가님이 계셨고, 친한 지인들이 이번 에세이집에 공저로 참여하게 된 소식을 듣던 중이었다. 너무도 좋은 소식에 남의 일처럼 축하하던 나는, 이들이 나도 함께 했으면 하고 슬쩍 언급한 신호를 놓치지 않고 말았다. 그걸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나는 위험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내가 그러겠다고 하고 대답을 한 것이 그 카페를 나서기 전이엇으니, 성급해도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버킷리스트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주 예전부터 꿈꾸었던 나만의 버킷리스트가 있다. 대학을 휴학하고,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방황의 시기였다. 한 치 앞을 모르는 막막한 앞날만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식을 고민하던 나는,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 결국은 어떤 사람으로 죽고 싶냐는 생각을 하기에 다다랐다. 그것을 정한다면, 앞으로 내가 내릴 수많은 결정에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생각한 것이 버킷리스트였다. 거창한 이름이지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래도 태어났으니 이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의 잔잔한 나열이였다. 첫 번째는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 두 번째는 여행을 원 없이 많이 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이어진 수십 개의 항목 중에는 누군가는 비웃을 정도로 소박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만한 허무맹랑한 것들이 이어졌다. 인도에서 카레 먹기, 터키에서 아이스크림 접시에 담아 썰어먹기 같은 것들. 그리고 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목록이 줄줄이 이어졌다. 마지막쯤이었을 거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어보고 싶다고 쓴 것이.



놀랍게도 나는 황당무계한 일들을 하나둘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배낭하나 메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많이도 다녔다. 그 당시 나에게 여행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내 몸뚱이는 건장했고, 식당, 농장,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하여 숙식을 제공받고 청소했던 게스트하우스까지, 열심히 일하면 벌 수 있는 모든 돈을 여행에 쏟아부었다. 피라미드와 타지마할을 다녀왔고, 남극의 빙하를 걸었다.

그러나 책만은 예외였다. 나는 글을 쓰는 재주도 없었고, 글을 쓰는 방법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다른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뤄가면서도, 책을 쓴다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범접할 수 없다는 생각에 꿈을 꿔보지도 않았다. 내가 감히, 책이란 것을 만들어서 지구의 나무를 베어내어 환경을 오염시켜도 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도 몰랐었다.


그랬던 내가 평범한 삼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기록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내 가난한 여행이야기였다. 스물세 살 철없던 나이에, 나는 단돈 오십만원과 편도 비행기표를 가지고 호주로 갔다. 새로운 나라와 낯선 언어, 가슴이 터질듯한 설렘,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유난히 초록빛이었던 잔디가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같이, 그곳에서 했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만원짜리 텐트에서 여러 밤을 잤고, 삼일을 아파 누웠어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갔으며, 당장 호주머니에 몇만 원이 안남은채로 귀국하는 비행기표를 살 걱정하는 날들이 몇 밤이었던가.

그러나 호주에서의 일은, 그 이후에 겪은 일에 비해면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는 대신 산티아고로 가는 표를 샀기 때문이다. 그 후 호주행 편도표로 시작된 나의 여행이 지구 한바퀴를 돌아 한국으로 돌아오는 데는 1년 하고도 10개월이 걸렸다.


끝없는 도전과 좌절,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얻은 기회들과 소박한 행복, 그리고 그때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내 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을 한가득 품에 주어와 힘들 때마다 꺼내어 닦아보던, 그렇게도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했던 기억들이었는데, 현실을 살아가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시간이라는 강력한 지우개에 풍화되어 잊어져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한국사회 어디서나 있는 흔한 중년이 되어버렸다. 흐릿해지는 내 머리가 아닌 어디라도 내 기억을 담아 놓아야 했다. 한 해가 갈수록 잊혀지는 기억들의 끝을 겨우 묶어 놓기 위해 귀국한 지 무려 십 년 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글이라는 것을 써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낭만적이게 들릴 ‘세계일주’ 여행기를 말이다.



나의 시시한 기록과도 같은 여행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땐 불특정한 다수가 그 글을 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나는 언젠가 내 딸이 자랐을 때 그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고, 나의 마흔 살에, 나의 쉰 살에, 그리고 내가 늙어서 죽기 전 그 여행의 기억이 모두 잊혀졌을 때에 다시 읽어보기 위한 기록 같은 것을 남기고 싶었다.

나는 그 기록을 ‘23살 소녀의 아날로그 세계일주’라 이름 붙였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정보를 찾아보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지도를 보기 위해 사전처럼 두꺼운 여행책 한 권을 배낭에 넣고 여행하던 시대였다. 한 달에 한두 번 부모님께 생존을 신고하듯 메일을 보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피시방을 찾아다녀야 했던 무렵이다. 몇 번은 죽을 뻔했고, 여러 번 강도와 도둑질을 당했으며, 하루하루를 견디다 겨우겨우 살아서 돌아온 이야기들이 한편씩 차곡차곡 채워졌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가며 정성스럽게 남긴 사진들도 여행기에 담았다.

나의 글에는 세계 일주를 떠난 이유와, 그 여행에서 돌아와 얻어진 성장에 대한 내면적인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글들은 정리되지 않은 메모, 혹은 일기 수준에 그쳤다. 그것은 당연하다. 나는 모든 글을 퇴고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라인에 나만의 공간을 작게 꾸며나가던 날, 어느 순간 한두 명씩 나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나의 여행기에 공감하기도 하고 응원을 보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내가 썼던 글에 사람들이 남기는 반응을 보고 쑥스러워진 나는, 엉망으로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 여행기들에는 필력의 부족함이 글 전체에 낯 부끄럽게 박제되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점점 글을 올리기가 무서워졌다. 누가 읽을 글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글을 쓰는 게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 시작하고서는 세 달 동안 장작 스물여섯 편의 글을 썼지만, 사람들이 내 글을 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도무지 더 이상 내 의지대로 글이 써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쩔 없이, 미완성본인 상태 그대로 여행기의 끝을 올리지 못한 상태로 남겨두고야 말았다.

글이 너무 쓰기 싫어서, 가슴에 뭐가 체한 사람처럼 거의 일 년을 끙끙거렸다. 몇 개월이 지나 언제나 내 마음에 숙제로 남아있던 여행기를, 그래도 시작한 거 끝내자는 마음으로 마지막 귀국까지 요약하듯 꾸역꾸역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데에만도 무려 한편 당 몇 달이 걸렸다.

마저 쓰고 보니 첫 글을 쓰기 시작한 뒤 거의 2년 지난 뒤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글을 쓰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내가 여행기를 쓰던 시기에 글을 못 읽던 내 아이는 이제 곧 사춘기가 된다. 나는 이 소식을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했다. 몇 년간 글 한자도 쓰지 않던 내가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거 같냐며 걱정만 하던 나와는 달리, 내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던 남편은 내가 다시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내가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처음 한 일은, 글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공저 에세이집에 들어갈 내 예명을 짓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글을 내 이름으로 출판하기가 너무 창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라한 내가 뭘 쓸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지 너무도 무섭다. 두렵고 떨린다.

이런 걸 설렘이라고 하나?

나는 지금 또다시 성급한 결정을 내려버린 철없는 나로 돌아가 덜덜 떨리는 손에 호주행 편도표 한 장을 들고 공항에 서있다.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