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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우 Aug 14. 2021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고, 있어도 되고, 있어야만 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까


“조금 슬펐던 순간은 세르비아와의 3~4위전을 준비할 때다. 그 전날 미팅을 했는데, 전력 분석을 하면서 세르비아에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다. 감독님이 분석 데이터를 공개하면서 ‘현실이 다가왔다’고 말하자 선수들이 오열할 정도였다.”     


유독 인상적인 순간이 많았던 이번 올림픽에서도, 김연경이 귀국 인터뷰에서 한 말은 한 컷의 그림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한계라는 게 있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있어도 되고, 있어야만 한다. 나는 영원히 나를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처절하게 발악을 해봤자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의 영역 안에 있고, 결국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니 우리가 만들어낸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의지와 우연과 한계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명성과 업적을 거머쥔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멘텀이 몸에 배어버린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그런 한계를 마주치며 매번 새로운 숙제를 받곤 한다. 나 자신을 찾을 것, 그리고 동시에 나를 잊어버릴 것. 이런 이상한 선문답은 인생의 비의 그 자체를 담고 있다. 자신의 유령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직업적인 운동선수들에게는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생물학적, 정신적으로 인간의 끝에 다다른 그들의 삶은 온통 싸움과 극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승부는 해봐야 아는 거라거나, 노력하면 안 될 게 없다거나,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아 한다거나 하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런 허울 좋은 관념들이 세상에서 실상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인간의 한계라는 이면을 보지 않은 채 그런 말밖에 못하는 것은 집단에서 관성적으로 유지되어온 정서적 게으름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비의 따위는 절대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물론 각자 그 비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아사이 료의 소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와 그걸 영화화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를 보면 이 지점에 대해 꽤 요긴한 힌트를 알려준다.     


그래서 세르비아전 미팅 직후 어떻게 다음날을 준비했는지, 선수 한 명씩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한계와 공포를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불필요한 투기(鬥氣)를 거둘 수 있었고, 그래서 담담하게 코트로 나설 수 있었을까. 적어도 선수들의 표정을 보니 절망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것 같지 않아서,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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