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예전에 거스 히딩크가 강조한 게 있다. 거품 물고 쓰러질 때까지 무식하게 뛰는 게 정신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고. 아마도 다분히 ‘한국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콕 집어서 말한 것일 거다. 그리고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평정심을 유지하는 마인드 컨트롤, 패한 다음에도 빠르게 회복하는 정신적 회복(Mental recovery)이야말로 정신력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며칠 전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러시아 선수 옐레나 오시포바의 마지막 샷이었다. 그야말로 살이 떨리고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슛오프 상황에서 안산이 먼저 10점을 쏘았다. 그리고 내내 안정적이었던 오시포바는 멘탈이 흔들렸는지 8점을 쏘는 실수를 했다. 끝나고 말하기를, 솔직히 금메달을 정말 따고 싶었는데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서 빗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중계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마지막 샷이 손에서 떠나자마자 오시포바는 웃었다. 정말로 푸핫, 하고 웃었다. 아마도 이 웃음에는 ‘에이씨, 좆 됐다’는 겸연쩍음 10%,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의 허탈함 20%, 순수한 아쉬움 30%, ‘좋은 게임이었다’는 자기만족 20%, 그리고 압박감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 15%와 그 외의 것 5% 정도가 섞여 있지 않았을까 한다. 전 유도선수 조준호의 이야기에 따르면, 유도에서 한판으로 이길 때뿐만 아니라 한판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다고 한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싶어서.
오시포바는 이번 올림픽에서 단체전 포함해서 은메달 두 개를 땄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돼지 저금통에 은화 두 개를 넣게 됐는데 어떻게 불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또 “양궁은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든다”고도 했다. 남자대표팀의 김우진은 개인전 8강에서 패한 뒤 마지막 샷에 대한 질문에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쏜 화살이다. 한 번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 준결승이 생각난다. 한일전이었는데, 스포츠만화 설정에서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요소가 전부 나온 경기였다. 당시 일본의 스킵 후지사와 사츠키는 다른 선수들이 막판에 말아먹을 뻔했던 경기를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연장까지 끌고 갔고, 연장전에서의 마지막 샷으로 한국의 팀 킴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때 후지사와의 샷은 그 상황에서 더 이상 잘할 수 없는 베스트 샷이었다.
그런 플레이를 한 뒤 그녀의 표정에서는 승부처의 무거운 긴장감이 아닌, 아무래도 다 좋다는 초연함과 홀가분함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의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 표정이 꽤 오랫동안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팀 킴은 다시 말도 안 되는 샷을 만들어내면서 경기를 끝냈다.
우리가 흔히 멘탈리티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사실 다면체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전부 죽여 없애서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마이클 조던의 투쟁심 같은 게 멘탈리티의 한 단면이라면, 오시포바와 후지사와의 표정은 그것과 정반대의 지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감정이 있는 인간에게 감정 없는 냉정함만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이다.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고, 있을 수밖에 없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봤자 결국 되는 건 나 자신이다.
스포츠를 보면서 응원이라는 걸 안 한지 오래됐다. 원래 팬심이 희박한 사람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몸을 갈아가면서 뛰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면, 보통사람은 생각조차 못할 잔인하고 슬프고 복잡한 속성을 목격하게 되면, 더 이상 특정한 쪽을 편드는 건 불가능해진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그녀들의 표정 같은, 흔적처럼 찍혀 있는 미묘한 무언가에 대해 언제부터인가 더 많이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