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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우 Jul 15. 2016

마음과, 마음과 무관한 것들

눈물의 아이러니

근대 이후로 지금까지 스포츠는 여전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약간의 스토리텔링과 포장만 더해서 눈에 잘 띄도록 진열대에 늘어놓으면 되는 천연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행과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 아이템인 순수한 눈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가끔 웃음이 눈물보다 심각하고 복잡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인과와 우연만으로 만들어지는 순도 100%의 눈물은 그 어떤 것보다 이해하기 쉽고, 유통기한이 길다.


어느새 리우 올림픽 개막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뉴스를 듣고, 문득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영상 하나를 찾았다. 폐막식에서 싱어송라이터 에밀리 산데가 공연하던 장면이다. 그녀의 노래 <Read all about it>을 배경으로 무대 위의 대형 스크린에서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편집한 영상이 나오는데, 한국의 펜싱선수 신아람이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다른 선수들은 전부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잠깐씩 스쳐지나간 반면 신아람은 10초 가량의 롱샷으로 엔딩을 장식한다. 아마도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남았을, 예의 그 ‘1초 오심 사건’이 있었던 경기 장면이다.(영상 보기)


나는 그날 신아람의 경기를 생중계로 봤다. 밤부터 시작해서 동이 트기 직전까지 이어진 피 말리는 소모전을 빠짐없이 지켜보면서―안타깝다거나 초초하다거나 하는 감정보다도 먼저―이 사건의 파장은 꽤 클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기억이 난다. 펜싱경기장의 비주얼은 그 자체가 연극적이다. 어두운 실내, 조명이 비추어지는 14m의 피스트, 하얗게 빛나는 유니폼까지. 마치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이 칼을 들고 마주선 것 같다. 종목의 특성상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분위기가 실처럼 팽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울었다. 진이 빠질 정도로 눈물을 쏟고 망연자실한 채 한참 동안이나 홀로 피스트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자 경기장의 공기는 신아람의 편으로 완벽하게 돌아서 있었다. 물론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울지 않았더라면, 순순히 물러서서 공식적인 제소절차만을 따랐더라면, 혹은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항의했더라면, 싸움은 훨씬 일방적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얻은 게 아무것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날 모든 관객이 그녀의 편을 들었던 게 단지 판정이 부당하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을까. 그보다는 일종의 ‘사적인 공감’이 앞선 것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녀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것이고 그게 주위로 ‘전염’된 것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절박하게 울고 있는 걸 보면 일단 그 이유가 뭔지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 기묘하게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심지어 살짝 섹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위의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한 컷으로 남았다.(판정 이후 상대인 하이네만의 액션이 과했던 것도 사람들이 둘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여기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 같다. 하이네만은 겸연쩍음을 감추려고 그랬을 듯하지만.) 실제로 이후 신아람은 인터뷰에서 “내 경기 이후 아무도 한국팀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눈물은 어떤 트릭도 허세도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고, 그것은 논리적인 대화나 절차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강력한 효과로 돌아왔다. 판단이 듀얼코어의 속도라면 공감은 빛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은 종종 무언가의 상징이 된다. ‘1초 사건’은 단순한 오심이라는 하나의 현상이었지만, 신아람의 눈물로 인해 그것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상징으로 확산됐다. 누군가에게는 올림픽 정신이 땅에 떨어진 막장으로, 누군가에게는 동해물을 마셔버릴 애국심의 기폭제로, 누군가에게는 유럽 펜싱계의 편협함과 오만함이 하늘 아래 폭로된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공유와 확산의 속도가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미디어 시대의 특징인 것 같다. 개별적인 현상이 커지고 커져서 본질과는 상관없는 신호체계가 되는 것, 강한 동력인 한편 허상이기도 한 것.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충돌시켜서 의미가 있는 건 다른 사람의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규정이나 펜싱 룰 같은 시스템의 불합리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닌 논리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마음과 무관한 것을 움직이기 위해 마음을 내던져 충돌시켜야 한다. 희한한 아이러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항변해 봐도 원래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 올림픽 아닌 세상 어디서든 드물지 않은 케이스다.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고 한다. 통하긴 통한다. 가끔은 그 자리에서 통하고, 가끔은 화석이 되어 100년 후에 통해서 그렇지. 그리고 대체로 당신의 눈물 따위는 아랑곳없이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하긴 마음을 움직인다고 그게 꼭 좋은 건 아니겠지만. 독일인의 마음을 움직인 히틀러도 그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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