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우 Nov 04. 2022

무관심의 미덕

“큰 쪽을 주는 사람이 꼭 다정하다고는 할 수 없죠.“

얼마 전에 유튜브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다가, 다비치가 나온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클립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15년 롱런의 비결을 묻는 유재석의 질문에 대한 멤버들의 대답이었다.


“서로 싫어하는 걸 안 해요.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게 아니고, 싫어하는 걸 안 해요.”

 

왜 이 대목이 그렇게 귀에 꽂혔을까. 관계에서 상대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과,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플러스 마이너스의 마진으로 보면 대충 비슷해 보일지는 모르겠는데, 다르다. 많이 다르다. 길게 보면 연탄재와 설탕만큼이나 다르다.


개인적인 생각이라 일반화까지는 못하겠지만, 전자, 그러니까 좋아하는 걸 하는 행동에는 의도가 많이 작용하곤 한다.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의외로 난이도가 높다. 본능과 오랜 습관에 가깝다. 즉, 자신이 당하기 싫은 걸 타인에게도 하지 않는 예민함에서 나오는, 일종의 배려다.


그런데 사적이든 공적이든 이런 테이스트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사람은 많다. 보통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차이를 모르면 펜스 룰처럼 다이아몬드를 줄로 갈아대는 듯한 짓을 하게 된다. ‘병 주고 약 준다’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같은 속담이 아주 직관적이고 적절한 교훈을 주지 않던가. 보통 이런 종류의 바보들이 겉치레와 생색을 좋아한다는 건 만국공통이다.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은 눈에 잘 안 띈다는 거다. 품을 들인 만큼 티가 안 나기 때문이다. 무신경한 사람들은 이런 행동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한 로직으로 작동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것’에 혹하거나 속아넘어간다. 타무라 유미의 만화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와요.
 

“반을 갈랐을 때 큰 쪽을 주는 사람이 꼭 다정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런 게 아무래도 좋은 사람도 있고, 죄책감에 그러는 사람도,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 


물론 타인에 대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한 발화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당장 다비치 멤버들만 해도 15년 동안 서로를 겪고 많은 걸 공유하면서 맞춘 균형일 터다. 


내가 생각하는 제일 간단한 방법은 타인에게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관심이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태도다. 유독 소비적이고 경쟁적인 이 땅에서, 많은 문제는 이런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된다. 온라인의 꽃인 악플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성별과 나이와 문화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히는 것, 다수의 익명성 뒤에 숨은 ‘정의로움의 과시’에 도취되는 것, 대중에게 노출된 인물의 사생활을 난도질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등.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알려지는 현대의 지옥에서, 이런 종류의 ‘무관심’은 그 자체로 배려가 된다고 본다. 우리가 좀 더 타인에게 무관심해진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숨 쉬고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경직된 이데올로기보다는 유용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