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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우 Nov 11. 2022

멈추지 않으면 너는

가는 데까지 가보자

사람이 공포에 몰릴 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아무 생각 없어지거나, 반대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거나. 그는 차라리 전자였으면 했다. 정신줄을 놓고 트랜스 상태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기절했다 깨어나면 뭐가 됐든 다 끝나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지금 그의 앞에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이 주어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에게 얼마나 더 시간이 주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가 라이더들 사이에서 ‘통곡의 벽’이고 불리는 고개를 넘어온 건, 막 해가 질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는 다 순조로웠다. 숙소를 잡기에는 뭔가 애매한 시간이었고, 힘든 고비를 넘었다는 성취감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게다가 지금 자전거를 멈추기엔 숲 사이로 비치는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어차피 실연 당하고 홧김에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모르겠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덮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가기 나오겠거니 하고 방심하고 달린 게 화근이었다. 이제 와서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것도 무리였다. 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 뒤 두 시간은 족히 달렸는데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물도 떨어졌고, 체력도 한계였다. 희미하게 연명해오던 자전거 렌턴은 결국 숨을 거두었고, 30분이 지나자 MP3 플레이어가 꺼졌다. 노라 존스의 온화한 목소리가 사라지자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성큼 다가왔다. 오싹함이 전신을 엄습했다. 어둠보다도 무서운 건 그를 집어삼킬 듯한 적막이었다.


그때, 갑자기 전방에 뭔가 희끄무레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것이 움직이는 물체, 그리고 사람임이 점점 확실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흰 교복 블라우스를 입고, 단발머리에, 그 즈음 십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스트팩 백팩을 메고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녀를 보고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그렇게 반가워본 적은 처음이었다. 저 아이는 집이 멀어서 학교 끝나고 지금 돌아가는 길이고, 그러니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사람 사는 동네가 나올 것이라고, 그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주 비합리적인 생각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그 역시 어렸을 때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다. 


똑같은 교복과 머리와 가방,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걷는 여중생을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는 표현에 일말의 과장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몇 백 미터를 더 가서 한 번 더 소녀를 보았을 때, 그가 기절해서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지는 대신, 초인적인 힘으로 페달을 밟은 건 기적이었다. 그거 하나는 칭찬해줄 만했다. 온몸의 땀구멍이 순식간에 막히는 기분이었다.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소녀의 옆을 지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소녀의 얼굴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150도 이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닌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을 것 같았다.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지경까지 달리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속도를 줄였다. 더 달리다가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때 뭔가 이상한 기척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마치 누군가가 등 뒤에 붙어서 차가운 입김을 부는 듯한, 한 번 접촉하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싸늘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는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공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전신에 얼음장 같은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똑똑히 들었다. 틀림없이 소녀의 그것이었지만, 억양도 음색도 없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그리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어디 가?


신기하게도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몸을 짓눌러 오히려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대로 발을 움직였다.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머리에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양 옆에 날개가 있었다면 그대로 이륙했을 정도로 달렸다.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다. 엄청나게 가파른 급경사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요동치는 자전거를 간신히 제어했다. 그때 다시 한 번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멈추지 않으면 너는 앞으로 키가 크지 않을 것이다.


웃기게도, 그 와중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그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그는 키가 꽤 컸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2cm가 자라면서 180cm를 돌파했다. 안 됐네, 너의 그 저주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별 것 아니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조금이나마 공포가 희석됐다. 그는 브레이킹을 하며 속도를 줄였다. 그때,


멈추지 않으면 너는 앞으로 섹스를 하지 못할 것이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이 밤하늘의 적막을 찢고 귀를 때렸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그 순간 그나마 희미하게 길을 비춰주던 달이 울창한 숲에 가려 사라져버렸다. 그 시점에서 그는 머리가 마비되었고, 그대로 풀 브레이킹을 했다. 그러나 자전거는 멈추지 않고 바퀴가 잠긴 채 미끄러졌다.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과 함께 바퀴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브레이크를 당겼지만 관성을 이용한 장치 특유의 탄력이 전해지지 않았고, 힘없이 덜렁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눈앞에는 손도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어둠과 적막,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는 급경사가 있었다. 그는 차라리 몸을 던져버릴까 생각했다. 재수 없으면 팔 하나쯤 부러지겠지만, 어쨌든 멈춰야…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겁나서가 아니라, 도저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속 붙은 자전거는 롤러코스터처럼 가공할 속도로 하강했다. 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있을지를 생각해봤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 위에서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달리거나, 멈추거나. 그저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핸들을 움켜쥐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주마등(走馬燈)의 사전적 의미가 문득 궁금해졌다. 모르겠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 인생이 기담이자 괴담인 친구 B의 실화를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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