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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우 Nov 17. 2022

어떤 시간은 견뎌야 한다

시간을 공유한다는 뜻

아비정전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1990)


아비(장국영)가 죽은 뒤 양조위가 등장하는 엔딩은, 어디서 맥락 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누구는 이 장면 보고 뭐가 더 있나 싶어서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아비정전>은 원래 2부작으로 기획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잘 차려입고 머리 빗고 지폐뭉치 챙겨서 나가는 모양새가 여자 낚으러 가는 카사노바인가 싶었는데, 설정상 도박사였단다. 


어쨌든, <아비정전>의 속편은 무수한 추측과 소문만 떠다닌 채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여러 버전의 편집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체로 많이 알려져 있는 건 1995년에 왕가위가 직접 편집한 마지막 버전이다. 


1990년 국내에서 처음 개봉―그 유명한 집단 환불사태를 일으킨―했던 <아비정전>을 직접 보고 온 사람에게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들었다. 그때 그녀가 이야기해준 한 장면이 계속 잊히지 않았고, 그게 나중에 영화를 찾아서 본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장면은 없었다. 몇 번을 돌려봐도 찾지 못했다. 아비에게 버림받은 뒤 그를 잊지 못하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리진(장만옥)이 경찰관(유덕화)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경찰관은 그녀에게 가서 자라고, 푹 자고 나면 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날 밤에 둘은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마주친다. 경찰관은 수리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한다.

“어제 안 잤죠?”


모르겠다. 그녀의 기억이 부정확했는지,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판본이 달라지면서 잘려나갔는지. 그럼에도 어쨌든, 실제로 존재하든 안 하든, 이 장면은 잊히지 않는 한 컷의 그림처럼 남았다. 그 뒤로 <아비정전> 하면 그 유명한 ‘발 없는 새’ 이야기나 장국영의 맘보가 아닌, 보지도 않은 이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 




인간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덫,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공평하게 잔인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만수르의 둘째 아들이라 해도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견고한 마음이라도 시간 앞에서는 침식되고 바스러진다. 시간이란 흘러가고 흘려보내는 것이지만, 어떤 시간은 ‘time’이 아니라 ‘moment’가 되어 영원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런 시간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견뎌야 한다. 


그러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말에는 묘한 가정법의 올가미가 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경우에 한해서일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간은 특정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상처자국도 폼 난다고 자위하더라만, 상처자국도 어쨌든 사라지지 않는 시간의 흔적이다. ‘moment’가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타인과 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삶의 한 조각을 함께 가진다는 뜻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사소한 순간이라 해도, 1960년 4월 16일 3시 59분부터 4시까지 시계의 초침을 함께 바라본 고작 일 분 동안이라 해도, 그것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는 일 분이 된다. 참 돼먹지 못한 일이다. 그 시간은 머무를 테니까. 영원히 그 자리에서 주변을 맴돌 테니까.


누군가는 그 일 분을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실상은 그것이 잊지 않기 위한 발악이라는 걸 깨닫는다. 행여나 잠들면 진짜로 잊어버릴까봐, 자고 일어나면 그 일 분이 진짜로 생각나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잠조차 못 자는 심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란 온전히 사적인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게 공적인 영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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