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진보음악계의 보석
돈 벌면 죄다 만화에 퍼붓는 누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에 파묻혀 살았다. 그래서 한국의 출판만화 전성기에 나왔던 잡지는 최소한 한 권씩은 있다. 그중에 화이트라는 순정만화 월간지가 있었다. 소년만화보다 수위나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순정만화 중에서도 소재나 표현이 상당히 과감한 잡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연재 작품 외에 기획기사의 퀄리티도 좋았다.
그 화이트에서 하루는 <왕립우주군>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도 극찬을 해서 엄청나게 궁금증을 유발했는데, 그때만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합법적으로 볼 길은 전무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 ‘뒷문’이었던 테크노마트 불법 복사판 VHS로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년 뒤에 MBC가 주최했던 서울 애니메이션 엑스포에서 제대로 볼 수 있었다.(대체 이 시기에 이런 행사가 어떻게 열렸는지 미스터리다)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 건 2000년대 중반쯤이다. 물론 지금은 블루레이도 있으니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왕립우주군>은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보편적으로 재미가 있는 작품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다는 대답이 쉽게 안 나온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상업 애니메이션의 왕도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 작품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같은 거 기대하는 사람에게 추천했다가는 뺨 맞기 좋다는 뜻이다. 다만 완성도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이걸 넘어서는 작품이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CG가 철저하게 배제된 셀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단언컨대 정점에 오른 작품이다. 어떻게 1987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이럴 수가 있었는지, 지금 다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비화는 꽤 유명하다. 제작사인 가이낙스는 첫 작품인 이 한 편에 말 그대로 모든 걸 갈아넣었고, 흥행에서는 장렬하게 망했다. 결국 빚더미에 올라 데뷔작으로 공중분해가 될 뻔했다가 이후 돈 되는 프로젝트를 필사적으로 하면서 버텼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신세계 에반게리온>으로 연타석 히트를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오타쿠들의 청춘을 털어넣은, 오타쿠들이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그리고 두 번은 절대로 못 만들 무모한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이낙스 내부에서 상당히 애지중지하는 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애니메이션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가 있다. 내가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바로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화이트의 기사에 '일본 진보음악계의 보석'이라고 소개됐던 문구가 생생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가 커리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작업한 애니메이션 음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