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사랑하고, 정확하게 사랑받자

01. 이슬아 인터뷰 (만화가, 칼럼니스트)

by 최승우

이슬아와 처음 마주친 건 그녀가 월간지 <PAPER>의 대학생 리포터로 활동을 시작한 2011년 즈음이다. 내가 <PAPER>에 있던 시기와 미묘하게 어긋나서 접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유별난 기억력 덕분에 스무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그녀의 행보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친구와 팟캐스트를 제작하고, 누드모델을 하거나 구제 옷을 팔아서 생활비를 버는가 하면, 짧은 소설을 써서 문학상을 수상한 것 등등. 그리고 작년부터는 난데없이(는 당연히 아니었겠지만) 웹툰 작가라는 직업도 추가됐다. 이런 프로필만 보면 어디에나 있는 이십대라고 말하기엔 좀 무리가 따르지만, 아니 사실은 아주 흥미무쌍한 삶을 사는 사람인 게 맞을 텐데, 그래서 오히려 인터뷰 서문을 뭐라 써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리얼 월드의 이슬아에게는 그녀의 만화 <숏컷>만 보고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도발적인 아우라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오해에 대해 딱히 뾰족해지는 것 같지도 않으며, 즉흥적이라기보다 시간에 민감한 성실한 생활인이고, 어떤 과시의 뉘앙스나 겸연쩍음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의 만화나 글들은 모두 그녀의 자연스러운 외연이 가감 없이 확장된 것, 이라고 말하면 그럭저럭 적절한 표현이 될까.


Ⓒ김윤경

이슬아 페이스북

이슬아의 <숏컷>(레진코믹스) 보러 가기


요즘 일을 몇 개나 하고 있는 거야?

레진코믹스에 <숏컷> 주 2회(*얼마 전 연재 종료), 한국경제신문 스내커에 <어머님이 누구니> 주 2회 연재하고 있어. 오늘의 웹툰과 케이코믹스에서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라는 시트콤 만화 연재를 얼마 전에 시작했고, 한겨레21에 연재하던 칼럼 <연애인의 기쁨과 슬픔>은 최근에 끝났어. 주말에는 여수 내려가서 애들 글쓰기 가르치고. 만화는 일이 많은 달도 있고 적은 달도 있는데 글쓰기 수업은 고정이란 말이야. 나한테 이런 게 하나는 있어야지.(웃음)


너는 '연애인'이라 만화를 계속 그리려면 연애를 해야 할 텐데, 요즘처럼 바빠서 어떡해?

사람마다 우선순위라는 게 있잖아. 일하느라 연애는 후순위로 밀리거나 그 반대로 자기 시간이 우선인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일이 연애할 시간을 침범하도록 절대 두지 않는 것 같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데이트를 안 하잖아? 그러면 아무것도 못 쓰고 못 그려. 짜증나서. 그렇다고 연애를 엄청 잘 하냐, 이를테면 곽정은처럼 연애 자기계발서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웃음) 남에게 어떤 조언도 못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내 연애도 엉망일 때가 많은데 무슨 조언을 하겠어. 나는 그저 내가 하는 연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사랑에 자주 실패하고 또 다시 하고 지내는 보통사람이야. 점잖은 척 하던 남녀가 연애를 통해 어떻게 유치해지고 귀여워지는지에 관심이 많고.


인터뷰 하자고 했더니 “남이 해주는 건 다 좋다”고 했잖아. 그 말 듣고 어지간히 바쁘게 사는구나 싶었지. 그런 와중에 인터뷰에 응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기분이 어때?

음, 일단 지금 이 자리가 되게 편해. 오빠는 차분한 30대잖아.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다 밴드맨이야. 남동생도 밴드를 하고 남자친구도 밴드를 하고, 같이 사는 오빠들까지 밴드를 해. 주위에 있는 친한 남자들이 다 밴드를 하고 있는데, 가끔 그들의 자신감과 전투력에 내가 지칠 때가 있어. 그들을 보면 이십대 초반이랑 중반이랑 서른이랑 되게 다른 거 같아.


20대 초반은 어떤 이미지인지 왠지 알 것 같다.

초반에는 대개 전형적이잖아. 씨발, 내가 짱이다! 하는 하이스쿨 밴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없어.(웃음) 담배랑 술만 합법적으로 한다는 게 다르지. 그러다 이십대 중반에는 좀 차분해지고 후반이 되면서 좋은 노래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 같고. 심지어 남동생은 장르도 로큰롤이야. 이 시대에 로큰롤로 성공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 비틀즈가 짱이지! 같은 말을 맨날 하는 애들이 늘 주변에 있는데, 다들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로 안달이 나 있어. 나도 진심으로 걔들이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치기가 나한테 기쁨과 피곤함을 동시에 주거든. 그래서 서른 살 이후의 남자들을 만났을 때 마음이 편할 때가 있어. 이제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대충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 이십대 초반에는 다들 내가 우주의 대스타가 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식이라.(웃음) 사실 그런 면이 가끔은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남자친구는 그중에서 어느 단계야?

남자친구는 나랑 동갑이고 기질상 치기는 별로 없고 차분한 편인데, 얼마 전에 걔가 만든 노래들을 들었는데 되게 좋더라. 근데 재작년에 만든 노래는 그만큼 좋지 않았거든. 몇 년 지나서 만든 노래는 왜 이렇게 좋아졌을까를 자주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만든 만화나 글을 남자친구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어렵거든. 왜냐면 걔 안목이 제일 무서운 거 같아. 나는 걔가 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창작물에 대한 코멘트가 되게 정확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 그래서 걔가 나를 좋아해도 내 글이나 그림을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웃음) 그래서 엄청 부러웠어. 자기 노래를 나한테 거리낌 없이 들려줄 수 있다는 게.


그럼 너는 사람들이 네 작품 보고 좋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데?

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게 되게 별로인 거 같아. 그래도 계속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나마 두 가지 낙관을 하고 있어. 첫 번째는 계속 하다보면 나아진다. 두 번째는 구린 걸 하더라도 월세를 내고 있다. 그 정도를 위안으로 삼고 있는 거 같아. 근데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창작물에 대해서도 좋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내가 세상에 쌓아가고 있구나 싶어.


그냥 세상에 똥을 하나 더 싸지른다?

응. 레진코믹스에서 <미지의 세계> 같은 훌륭한 작품 보고 나서 내 만화 모니터하러 들어가 보면, 뭐 이런 시답잖은 걸 그리고 돈을 받나 싶고. 근데 다행히 인터넷 시대라서 종이를 낭비하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건 좀 좋은 것 같아.


“언니, 저는 돈 때문에 누드모델을 해요. 그려지는 게 황홀해서 누드모델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간 때문에 누드모델을 해요.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잖아요.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해도 생활비를 벌 수 있으니까.”

긴 머리의 언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간이 제일 비싸다는 거, 알고 있구나.”

저는 진작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상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빌딩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자동차를 가진 사람도 아닌, 시간을 가진 상인이라는 사실을 그때 막 실감했습니다. 시급 3만원짜리 모델들. 비참한 마음 없이 벗은 몸을 팔 수 있는 상인들. 우리는 서로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 <상인들> 중에서 (제5회 한겨레신문 손바닥문학상 가작 수상)


그래도 그림 좋아졌다고 다들 그러지 않아? 초반보다 선이 확연하게 깨끗해졌던데.

대부분 그렇게 말해. 실력이 0이었는데 1이 됐다고. <숏컷>의 초반 연재분을 생전 안 들여다보다가 오랜만에 봤는데, 지금도 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더 똥인 거야. 그 상태에서 연재를 시작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더 많이 정리해서 누가 연재를 하자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물론 그게 다케히코 이노우에 같은 작화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계속 단순하게 가되 적어도 지저분하지 않은 정도.


그런데 작화실력과 별개로, <숏컷>처럼 작가 본인과 캐릭터의 싱크로율 높은 경우도 드문 것 같아. 그건 ‘오너캐’ 수준이 아니라 그냥 너잖아. 누드모델을 했던 게 영향이 있나?

그럴 거야. 이 년 동안 했는데, 그때 남의 벗은 몸을 많이 보기도 했고. 다른 모델들을 보면서, 저 여자는 허리는 일자인데 다리는 끝내주는군, 저 남자는 진짜 말랐는데 고추가 크군, 하는 감상과 함께 그런 걸 다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누드모델은 엄청 고된 일이라, 옷을 벗는 것에 대한 긴장감과 홀가분함은 십 분이면 끝나. 그 다음부터 버티기 싸움이지. 같은 자세로 장시간 버텨야 하기 때문에 근육, 특히 등 근육이 엄청나게 발달해. 그리고 팬티를 잘 입어야 해. 모자 잘못 쓴 것처럼 체모가 접히고 엉킬 때가 있거든. 아무튼 그렇게 여러 사람이 나를 그리니까, 내 모습의 여러 버전을 볼 수 있는 거잖아. 당연히 나를 잘나게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나게 그리는 사람도 있어. 한마디로 평균치를 알 수 있는 거지. 내가 나를 사랑하느라 바쁘기만 했다면 스스로를 초미녀로 그려버릴 수도 있는데(웃음) 내 만화에 객관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 그림들을 봤기 때문일 거야.


작가들은 보통 퀄리티에 대한 무한집착 때문에 작업이 길어지게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포기가 빠른 편이야?

응. 빨리 놓는 편이야. 특히 <어머님이 누구니>는 정말 슉슉슉 하고 단숨에 그려버리는 거 같아. 그래서 마음의 짐은 없지만, 그 대신 어디 가서 그거 연재한다고 말을 잘 안 하게 돼. 내세우고 싶지 않으니까. 근데 이런 얘기 갑자기 하면 신빙성이 없겠지만, 난 꽤 성실하다고 생각하거든? 다만 욕심을 내는 부분이 다른 거지.


그럼 네가 욕심을 많이 내는 건 뭐야?

욕심… 하아, 요즘에는 욕심내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욕심내는 거라면 소설 쓰는 거. 글 쓰는 거. 등단한 작가가 되고 싶어. 근데 굳이 등단 안 하고 문단에 소속되지 않고도 글 잘 쓰는 사람 많잖아. 나는 왜 이렇게 등단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뭔가 인정받고 싶은 건가?

그런 거지. 몇 년 지나면 또 다르게 얘기할 것 같긴 한데… 노력해서 훨씬 잘 쓰게 된 뒤에 인정받고 싶어. 지금 인정받으면 거짓말이니까. 아무튼 나중에 좋은 힘을 가진 소설을 쓰고 단행본 내고 싶어. 그리고 내 소설집에 만약 단편 일곱 편이 있다 치면, 대체로 좋은 것 여섯 편이랑 아주 좋은 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만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네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거네?

엄청 뜬금없지. 갑자기 웬 만화야. 관심도 없었는데. 물론 시작해버린 이상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하고 싶지만.


그런데 생계형 작가라고 해도, 네가 어쨌든 지금 만화가로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아예 없지 않다는 뜻일 텐데?

욕망이야 많지. 아까 로큰롤 하는 남자애들 얘기했지만 나도 다를 게 없을 수 있지. 어쨌든 나는 이렇게 생각해. 소설을 쓰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잖아. 일단 읽고 써야 되니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한마디로 시간 대비 고수익이 필요하잖아. 그런데 카페 아르바이트보다는 만화 그리는 게 그런 일이란 말이지. 그런 점에서 만화 일이 있다는 게 고마워. 적어도 누드모델 할 때보다 좀 더 벌 수 있으니까.


Ⓒ신윤경

일단 만화에 전념해서 충분한 수입과 시간을 얻을 만큼의 위치에 오르고, 그만큼 생기는 여유를 글에 투자하는 건 어때?

내 계획이 정확히 그거거든. 근데 아직은 만화도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잖아. 그림을 너무 못 그려서 짜증나. 말로 하거나 글로 쓰면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림을 이 모양으로밖에 못 그려서.(웃음)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하면 더 잘할 수 있겠지만.


막상 잉여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오히려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원래 휴식을 오래 할 수 있는 체질이 아니야.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기를 무조건 돌리고 스트레칭을 하거든. 그렇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삶에 익숙해. 내 주위의 밴드 하는 남자애들이 보기엔 이런 내가 얼마나 지루하겠어? 걔네는 루틴이 있는 삶 자체를 시시하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나는 그런 생활에서 대단한 게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그럼 요즘 제일 절실한 게 뭐야?

절실한 거? 전셋집.(웃음) 어디 가서 이런 말 안 하는데, 맨날 집값을 검색해. 망원동 매매, 서교동 전세 같은 거. 연희동 쪽도 찾아보고. 난 속물인 거 같아.(웃음) 아무튼 전세로 옮기려면 저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저금이 가능한 만큼의 돈을 항상 벌고 싶은데, 내가 지금 스물다섯 살인데 주위의 스물다섯 먹은 애들 중에 저금하는 애 아무도 없더라.


그래도 보통의 서민적인 스물다섯 살 중에서 너는 상황이 나은 편 아니야?

응. 조금이긴 하지만. 그래서 친구들이, 이디야에서 일하는 나보다 네가 많이 버니까 밥 사라고 하면, 밥 사거든. 그런데 걔네들이 넌 편하게 돈 벌잖아, 하면 그건 참을 수 없는 거지. 그리고 그런 와중에 내가 내놓는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시무룩해하는 건 너무 사치라는 생각도 들어. 또 내 눈높이랑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수준이 달라서 오는 괴로움이 있지만, 감수할 만한 불편함인 것 같아. 겸손하게 닥치고 해야지.(웃음) 왜냐면 마감 안 넘기고 한다는 거 자체가 어쨌든 일을 완수하는 거니까. 이런 얘기를 남자친구한테 했더니, 네 분야에서는 겸손함이 득이 되지만 록 스타 되고 싶어 하는 애들한테는 겸손함이 독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인상적이었어. 아무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몇 년 지나면 더 잘할 거예요, 라는 느낌이랄까. 근데 이런 답변 너무 구차하지 않아? (웃음) 다른 걸로 바꿀까?


다 넣을 테니까 대답을 다른 버전으로 추가하든가.(웃음) 요즘 제일 절실한 게 뭐야?

필라테스 일대일 강습. 꼭 필라테스가 아니더라도 무슨 운동이든 일대일 강습.


왜?

존나 부자인 여자의 상징 같잖아.(웃음) 나는 왜 이렇게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많은지 모르겠어. 사실 이런 것도 되게 촌스러운 것 같은데.


신분상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막연하게 잘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뭔가 계획적인 생활습관이 몸에 밴 것 같긴 하다.

응. 어떻게 하면 계획적으로 윤택하게 살 수 있을까 늘 생각해. 또래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 졸업 앞둔 애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게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이해도 되지만… 나는 그런 고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 오히려 욕심나는 일들이 늘 눈앞에 너무 많이 보여서 괴로웠고, 뭘 해야 되는지를 먼저 생각했으니까.


저는 골목의 여러 상가들 중에서도 쓰리엠 양면테이프를 파는 상인들의 딸로 자랐습니다. 그 가게의 이름은 대훈실업이었습니다. 저의 아빠와 작은아빠와 삼촌인 그 상인들도 장사를 하려면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골목에서 누구를 만나도 허리 숙여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훈실업 건물도 할아버지의 것이었으니까요.

집안에는 네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경희와 이찬희와 이원희, 그리고 이슬아. 이름이 ‘희’자로 끝나는 그 손자들은 초등학생이 되자 양면테이프 가공 기술을 조금씩 가르침 받았습니다. 장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외였습니다. 양면테이프 자르는 걸 배워도 되고 안 배워도 되는 사람, 제사를 지낼 때 절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 저는 쓰리엠 테이프 가게에서 테이프를 포장하는 상인들 중 한 명에게 물었습니다. “삼촌, 왜 나한테는 일도 안 시키고 절도 안 시켜?” 귓등에 담배를 꽂은 삼촌이 말했습니다. “지지배야, 너는 꼬추가 없잖아.” 상인들은 대부분 입이 거칠었습니다. 저는 거친 말들이 제 몸에 눌어붙기 전에 흥, 하고 삼촌을 한 번 째려본 뒤 대훈실업을 나와 상인이 아닌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 <상인들> 중에서 (제5회 한겨레신문 손바닥문학상 가작 수상작)


<숏컷>이 정식 연재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야할지 기대했던 사람들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다.

응. 19금 딱지가 붙다보니. 나는 내 만화가 야하다고 생각을 안 하는데. 섹슈얼한 부분이 없어. 벗고 있다고 야한 게 아니잖아. 근데 유두와 성기가 나와서 19금을 붙여야 한다고 하시더라. 내 입장에서는 유두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포기하기 싫었던 거지.(웃음) 그리고 섹스 신을 안 그리는 이유는 안타깝게도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이야. 그건 인체비율과 동작과 체위를 잘 이해해야 그릴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았을 때 더 재밌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네가 생각하는 섹스라는 행위, 혹은 관계의 핵심은 뭐야?

예전 어느 모임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여자가 과격한 섹스 동영상을 봤다는 얘기를 했어.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런 걸 좋아하겠냐고 분개하더라.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데요”라고 말했다가 이상한 시선을 받았던 기억이 나. 슬아 씨, 그러면 안 돼요. 남녀가 사랑하면 건강한 섹스를 해야지, 라고 다들 나를 설득하려고 하더라. 그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된 기분이었어.(웃음)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게 건강한 섹스의 극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섹스라는 건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이제부터 나는 너를 어떻게 다루겠다, 하는 합의를 이루는 거잖아. 그러니 어떻게 보면 때리고 묶고 괴롭히는 쪽이 약자가 될 수 있는 거지. 상대가 진짜로 다치지 않을지 계속 신경 써야 되니까. 말하자면 섹스는 다양한 장르를 가진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이라고 생각해.


섹슈얼한 느낌을 깨닫게 된 생에 최초의 기억은 뭐였어?

<지구방위대 후레쉬맨> 봤을 때.(웃음) 남자 셋, 여자 둘이 전신 쫄쫄이 입고 나와서, 어울리지도 않는 로케이션에서 악당에게 당하는데, 남자가 악당을 물리치고 여자를 안는 거야. 대여섯 살 때 그 장면에서 뭔가 묘한 걸 느꼈어. 아랫배가 찌르르하면서 긴장되는 느낌. 내 생각에는 그게 성적인 케미스트리를 알아챈 최초의 단서였던 거 같아. 나는 부모님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가부장적인 대가족의 어린 손녀였고,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게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관찰하면서 자랐어. 그래서 뭔가 남자에게 구해지는 여자랄까? 그런 것에 대한 고전적인 판타지가 있었고, 아직도 있어.


마초한테 끌리나?

응. 자존감이 낮은 것과는 별개인데, 남자 같은 남자가 좋아. 마초의 좋은 예도 얼마나 많아? 예를 들어 우리 아빠는 되게 가정적이거든. 여성을 훌륭하게 대하고, 남동생과 나를 절대 차별하지 않고 키웠어. 그러면서 한편으로 남자라면 이래야지, 남자가 이 정도는 돼야지, 하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자주 어필하곤 했는데, 거기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미워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어. 엄마랑 아빠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서 엄청 젊어 보여. 그리고 지금도 서로한테 여자친구, 남자친구 같아. 엄마는 아빠한테 평생 여자야. 그런 부부가 흔치 않다는 걸 나는 다 커서야 알았거든.


마초의 좋은 예도 많다는 말에 100% 동의해.

나는 사촌들도 다 남자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 남자애들이랑 같이 자랐거든. 그래서 내가 홍일점인 게 익숙했어. 근데 홍일점으로 지낸다는 것의 핵심은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수없이 오가게 된다는 거야. 아주 주목받거나 아주 제외되거나. 그 양쪽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편해지는 거 같아. 지금 내가 남자 세 명이랑 한 집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유년기를 거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나는 이게 어떤 형태의 동거보다 편하거든. 그 세 명이 나랑 사귀게 될 가능성은 0%에 가깝고, 그 사람들한테 딱히 예쁨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자주 같이 노는 것도 아닌데, 하나도 불편하지가 않은 거야.


그런 자연스러운 밸런스가 이슬아라는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인 것 같다.

내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진짜 좋아하거든. 근데 내 친구 중에는 싫어하는 애들이 많아. 누구는 토할 거 같대.(웃음) 사람이 섹스를 해서 자손을 낳고, 낳고, 또 낳고 하는 얘기가 징그러워 죽겠대. 근데 나는 그게 좋거든. 고추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 보지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소설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게 너무 좋아.


흔히 말하는 '남성적인 것' 중에서 동경하거나 부러운 게 있다면?

예를 들어서 난 여자애들이 몸싸움을 잘 안 하는 게 아쉬울 때가 있어. 남자들은 빡치면 몸싸움하고 주먹 나가잖아. 나는 여자애들이랑 그러고 싶거든. 맨날 말로 투덜투덜하는데, 됐고, 한판 뜨자! 하고 싶어.(웃음) 전에 친한 여자애들 다섯이 목욕탕 간 적 있는데 우리 말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야, 냉탕으로 다 들어와라, 하고 씨름을 했어. 근데 내가 네 명을 다 물속에 처넣을 수 있었어. 그렇게 완력으로 겨루는 게 너무 좋거든. 어떤 계집애가 평소에 하던 똑똑한 소리들이 다 소용없어지는 순간, 맨몸으로 싸워서 힘으로 누르는 순간이 좋은 거야. 그런 점에서 순식간에 싸우고 순식간에 화해하는 남자들의 불알친구 관계를 좀 동경하는 거 같아. 영화 <파이트 클럽>도 되게 좋아한다.(웃음)


원래 마초들도 가슴에 여고생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으하하하하하. 그 말 너무 좋다. 전형적인 머스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통쾌함이 있잖아. 나도 전형적인 계집애들의 대화를 싫어해. 맨날 화장품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거. 나도 예뻐 보이는 거 좋아하고 화장품 같은 거 쓰고, 어느 제품이 좋은지도 알고 있지만, 그걸 구구절절 얘기하는 게 구리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 진짜 친한 애들은 그런 ‘계집애성’이 없어. 나는 늘 의연하고 무심한 여자애들한테 반했던 거 같아.

<숏컷> 49화 '분위기' 중에서

<숏컷> 49화에 나왔던, ‘무심하게 잘나 보이고 싶다’는 대사가 딱 너 같다고 생각했지.

근데 나 사실 무심하지 않아. 되게 유심해.(웃음) 무심한데 잘나 보이는 건 아무거나 걸쳤는데 멋있는 거잖아. 일단 잘생기고 예뻐야 돼. 난 안 그래.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안 하면 살이 많이 찌는 체질이거든. 그런데 무심한데 잘나 보이는 애들은 나처럼 맨날 러닝을 하면 안 돼. 무심하고 멋진 애들은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좆까, 하는 태도가 있는데, 나는 상대가 나 좋아하면 존나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할게요, 하는 태도가 된단 말이야.(웃음) 무심하게 잘나 보이는 사람은 내가 동경하는 사람 얘기인 거 같아.


하긴 무심하게 있어도 잘나 보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 김연아 정도나 가능할까.

옛날에 헬스클럽에서 달리는데 러닝머신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김연아가 나왔어. 갑자기 존나 빡쳐서 눈물이 나는 거야.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나 싶어서, 달리면서 존나 울었어. 트레이너가 와서, 왜 울어요? 부러워서요.(웃음) 그런데 우리는 김연아가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한 사람이라는 걸 알잖아.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내공이나 태도마저도 다 부러운 거야. 예를 들어 나는 아델이 너무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근데 아델의 노래 들으면서 좋아서 울지 부러워서 울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런데 김연아 같은 경우는 왜 그렇게 피부로 생생하게 다가왔을까. 같은 한국인이기도 하고 같은 90년대 태생 무꺼풀 여자라서 그런가.


그런데 엄청난 셀러브리티까지는 아니라 해도, 너도 어쨌든 사람들 앞에 노출된 작가잖아. SNS에서도 좀 알려졌고. 그럴수록 사람들에게 받는 오해의 폭도 넓어질 것 같은데.

응. 사람들을 만나면 직접 얘기할 수 있잖아. 그게 아니구요, 저는 이런 고민이 있고, 사실 그런 사람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스타그램에 너무 말도 안 되는 댓글이 달리면 일일이 대답할 수도 없고. 그냥 서로 다 오해하고 사는 거지.(웃음)


이런 인터뷰야말로 오해의 발상지가 되기 쉽지. 근데 인터뷰는 많이 안 했더라. 요청은 전에도 들어오지 않았어?

종종 들어왔는데, 일부러 안 했어. 뭐랄까, 그쪽에서 원하는 그림은 대부분 발칙하고 섹시하고 도도한 여자, 자유롭게 섹스를 즐기는 이십대 여자였거든. 그렇게 기사가 나가면 거짓말이잖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예를 들면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셀마 헤이엑이 거대한 구렁이를 둘러매고 뱀춤 추다가 다리에 맥주 붓고, 그걸 타란티노가 넋이 나가서 받아먹잖아. 아,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는 압도적인 섹시함인 거 같아. 근데 자라면서 알게 되잖아. 적어도 나는 그런 종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그런 유전자가 없다는 걸.(웃음) 내가 뭐가 되고 싶었는데 사실은 뭐가 아니다? 그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야겠다, 그래서 만화 그리고 글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엄마가 쉰 살이 된 봄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몸살을 앓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엄마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걸 알아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전화를 끊고 동생에게 전화해 속상하다고 말하며 훌쩍였다. 동생은 뭐 그런 일로 질질 짜냐는 식으로 심드렁해하며 말했다.

“돈 많이 벌자. 그럼 많은 게 괜찮아져.”

나는 너무 단순한 대답을 하는 동생이 미웠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면 엄마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지 생각했다. 가장 주고 싶은 것은 시간이었다. 쉴 시간이 조금 더 생긴다면 엄마는 산책을 자주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천천히 늙게 될지도 모른다.

- 한겨레21, <연애인의 기쁨과 슬픔>,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중에서


네가 부모님에게, 혹은 성장과정에서 습득한 건 뭐야?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우리 엄마랑 아빠는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직업을 스무 번 정도 바꿨거든.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식당 서빙, 대리운전, 보일러 설치, 산업잠수요원… 그런 걸 보면서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생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 같아. 그리고 직업과 환경을 바꿀 때마다 얼마나 유연하게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었는지도.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사의 딸이라면 평생직장이라는 게 있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되잖아.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매번 세상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를 매번 생각하면서 살았고, 나는 그걸 보고 자란 거지.


그 덕분에 어떻게든 네 몸 하나쯤은 간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렇지. 그게 밑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지금 하는 일이 다 끊겨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 아빠는 일 떨어지면 노가다 할 생각을 하라고 옛날부터 늘 강조했어. 나보고 1종 면허 따라고 했거든. 자기 일 도와줘야 할 수도 있고, 여차하면 배추장사라도 해야 된다고.(웃음) 다만 나는 엄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중년이 되어서도 날씬한 여자들 보면, 물론 태생적으로 마른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이 충분히 있어서 관리를 잘한 경우가 많잖아.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기억하기로는 너무 미인이었어. 지금도 여느 아줌마들보다 예쁜 편이지만. 엄마를 보면서 왜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살이 찔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수 없고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어.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배 나오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사는데. 엄마가 배가 나온 시기는 일만 해야 했던 시기와 맞아떨어지는데. 그런 게 슬프다는 생각을 했어. 물론 뚱뚱한 사람도 당연히 사랑받고 존중받아야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떻게 하면 일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지내야겠지.


아버지가 문예창작을 전공하셨잖아. 그렇게 생계에 치여 살지 않았다면 너처럼 작가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삶을 살지 못한 걸 아쉬워하시지는 않아?

왜냐면 아빠는 노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엄마아빠가 글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는데, 못 쓸 것 같아. 몇 십 년이 지났으니까. 엄마 옷가게에 오는 아줌마 아저씨들 보면,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장편 몇 권은 나온다는 식의 얘기를 자주 하거든.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 누구의 인생이든 소설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 근데 막상 직접 쓰라고 하면 못 쓰잖아. 글쓰기도 근육 같은 거라서, 써 버릇하면서 손에 익어야 써내는 거니까. 마지막에는 손이 쓰는 거잖아.


너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든 적어도 글은 손에서 놓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싶어. 그래서 계속 읽고 쓰고 하는 거 같아.


나중에 생계와 상관없이 결과물로 내놓고 싶은 뭔가가 생기게 되면…

그러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인풋을 성실하게 쌓고 싶어.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잖아. 밑천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게 내가 원하는 모습인 거 같아.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웃풋 안 해도 되고 인풋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내가 무언가의 덕후가 아닌 게 콤플렉스야. 무슨 얘기를 해도, 그거 재밌어요, 좋아요, 라고 적당히 말할 수 있는데, 진짜 덕후들이 할 수 있는 얘기는 어떤 분야에서도 못한다는 게 창피할 때가 있어. 너무 좋긴 좋았는데, 적확한 언어를 써서, 남들보다 잘 말할 자신이 없는 거야.


그 대신 너는 생활 덕후 아니야? 그런 생활밀착형 만화들은 너밖에 못 그릴 걸?

그런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냥 하는 거고, 나는 <왕좌의 게임> 같은 거 하고 싶다니까! 진짜야! 진짜니까 웃지 마! <왕좌의 게임> 볼 때마다 생각해. 씨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왜 나처럼 초라하고 구질구질한 얘기를 하고 있나. 스토리텔링의 모든 게 거기 있잖아. 예를 들어 조지 R.R. 마틴이 이십대 때 이런 생활밀착형 작품을 했다고 쳐. 그럼 위안이 될 거 같아. 근데 왠지 조지 R.R. 마틴은 이십대 때부터 판타지를 했을 것 같은 거야. 팽팽 놀다가 갑자기 소설을 존나 잘 쓴다던가 하는 천재들의 짜증나는 스토리 있잖아. 나는 판타지를 잘 쓰고 싶은데 한 문장도 못 쓰겠어. 일단 모르는 사람에 대해 한 문장도 못 쓰겠어. 너무 겁이 나고, 누구한테 보여줬을 때의 반응이 두렵고. 그래서 픽션을 연습하는 중이라고 맨날 얘기해. 야설 제안도 몇 번 왔었는데 안 해본 섹스에 대해서는 못 쓰겠더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10화 '예술과 투쟁' 중에서

그렇지만 뭔가 동경하면서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게 또 있잖아.

응. 뭔가가 되어버린 사람 말고 경계에 있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 다만 내가 생각하는 재능은 많이,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야. 신체능력 같은 물리적인 능력이 아니라, 오타쿠일 수 있는 집중력과 빠심 같은 것. 내 동생이 아무것도 안 하고 만화만 보면서 지내던 시절이 있었거든. 세상의 모든 만화를 다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몇 년을 그렇게 게으르게 지낼 동안 부모님도 걱정하고 나도 걱정했어. 그러다 밴드를 시작했는데, 너무 좋은 걸 내놓는 거야. 그런 잉여로운 시간들이 쌓인 다음에 나오는 게 좋을 때가 많은 거 같아. 그런데 나는 잉여롭게 살지 않고 그때그때의 과제가 항상 있었어.


그런 과제 하나하나가 동력이 되기도 하지 않나?

그 말 하니까 생각났는데, 매주 글쓰기 수업하면서 열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애들을 만나거든. 수업이 시작되면 먼저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다가, 오늘은 이런 걸 써보자, 하고 그날의 글감을 얘기해. 그런데 나는 그 시기의 애들은 어떤 폭력적인 문장을 쓰지 않는 이상 욕을 안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칭찬과 격려만 받아도 돼. 걔가 나중에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되면 어차피 가루가 되도록 깔 사람들은 세상에 널렸으니까. 나도 지금까지 왜 버티고 있나 생각해보면, 스무 살 때까지 들어왔던 칭찬 때문에 버티는 거 같더라. 그래서 애들이 글을 써오면 무조건 칭찬을 해. 40명의 애들한테 각자 다른 칭찬을 해야 돼.


아주 민감한 부분이지. 그래야 신빙성이 있으니까.

응. 그 많은 애들한테 각자 다른 칭찬을 하려면 너무, 라는 수식어를 줄이고 왜 좋았는지를 설명해야 해. 그러다보니 칭찬하기 위해 나의 온갖 경험과 상상력을 다 끌어오게 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내가 배우는 게 진짜 많아. 그 애들이 쓰는 글이 나한테는 인풋이 되는 셈이랄까. 그리고 애들이 정말 중요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써내는 것도 대단한 거 같아. 난 안 그래도 툭하면 우는 편인데, 애들이 쓴 글을 보고 너무 슬퍼서 검사하다 눈물을 훔칠 때가 있어.(웃음) 그런데 정작 걔들은 쓰면서 안 슬펐거든? 유년기의 아이들이 뭔가 자아를 파괴당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면서 청소년이 되어버리는 거지. 또 아이들이 마냥 순수할 거라는 환상이 있는데 그렇지 않잖아. 사실 걔네들이야말로 순수하게 악마잖아. 어쨌든 내가 앞으로도 그 수업에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 마무리를 할 때가 됐으니 마지막 질문. 끊임없이 연애를 하는 ‘연애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거야?

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그게 끊기면 안 된다는 위기감 때문에 일부러 만든 건 아니고, 늘 반할만한 사람이 있었어. 다들 내가 가진 것 중 많은 걸 걸어도 될 만큼 멋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 지금의 남자친구도 그렇고. 예전에는 나 좋다는 사람들이 전부 너무 황송하고 감사해서 가능하다면 그 사람들이랑 다 사귀고 싶었어. 그렇지만 그건 사실 누구에게도 예의가 아닌 데다, 나 좋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져서(웃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어. 모든 관계에 성실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몸은 한 개, 하루는 24시간이잖아. 그래서 한 사람과 오랜 연애를 잘 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그 사람을 계속 다시 보게 되는 끊임없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까? 반대로 만난 지 오래된 나를 상대가 새롭게 봐줄 때 느끼는 즐거움도 있어. 내가 평생 제일 잘 하고 싶은 게 그런 일이야. 좋은 안목으로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하는 것. 그리고 정확하게 사랑받는 것. 내게 연애 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지만, 연애가 주는 힘과 기쁨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것 같아.


이서영1.jpg Ⓒ이서영

진짜 마지막 질문. 행복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줘.

나는 워낙 일희일비의 아이콘인 사람이라 금방 불행해지고 금방 행복해져. 변덕도 심하고 자주 울고 자주 웃어. 그래서 내가 제일 자주 믿게 되는 사자성어가 새옹지마야. 사는 건 기쁘다가도 슬프고, 다시 기쁘다가도 좆같잖아. 행복도 불행도 끊임없이 지속되긴 어려운 것 같아. 그래서인지 딱히 행복이 화두인 적은 없었어. 다만 나는 감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아. 우선 멀쩡한 몸뚱이에 무척 감사해. 이 위험천만하고도 황홀한 세상에서 매일 달리기와 일과 데이트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그래서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건강을 잘 지키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것도 무척 고마운 일이야. 무언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게 바꿔 말하면 행복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최근에 행복던 일이 있다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으면서. 무척 슬프고 행복했어.


글_최승우 www.facebook.com/loonyt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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