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리해고 메일을 받았던 작년 오늘을 회상하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11월 10일? 글쎄, 부부의 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럼 무슨 날인데?"
"오늘 내가 레이오프 (lay-off, 정리해고) 메일 받은 지 1년 된 날이야."
"아... 옷 사러 갈까? 그때 사고 싶었다는 그 재킷 사줄게. 그리고 오늘 뭐 먹고 싶어? 오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남자친구와 나 사이의 특별한 기념일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라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기억해 둘 만큼 좋은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날을 앞으로 10년, 20년, 아니 어쩌면 영영에 가까운 시간만큼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쌀쌀한 날씨, 백화점을 더 예쁘게 꾸며주는 크리스마스트리, 두툼한 옷을 입은 사람들, 길거리는 일 년 전과 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달라졌다. 작년에는 못 느꼈던 추위를 다시 느끼고 있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얼마 전부터 듣기 시작했다. 얼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평일인지 주말인지 구분 없이 시간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있고, 책을 읽으며,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 감정은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고 있고, 가끔은 마음 가득히 차 오르다가 슬그머니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새로운 상상과 계획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을 방문했다가 떠났다.
일 년 전 오늘을 잊지 못한다는 건, 그날 아침 회사의 통보 메일을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나 분노 때문은 아니다. 처음 며칠은 울컥 차올라오는 눈물 때문에 힘들었고, 그 후 몇 주는 잠을 설치고 밥을 잘 못 먹을 정도로 불편한 감정상태였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잘 이겨냈고, 글을 쓰면서 흘려보내고 나니, 비로소 회사가 사라진 '나'만 남게 되었다. 외롭거나 막막하거나 부끄러울 수도 있을 알몸 같은 상태였지만, 조금 지나니 그 느낌은 오히려 '홀가분'에 가까웠다. 자유로웠고, 나를 이해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은 이제 나에게 전화위복의 날이고,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내 인생이 기대되는 만큼, 나는 그날을 더 기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월이 지나 살아온 시간을 돌아봤을 때, 아쉬움보다 만족감이 더 든다면, 아마도 나는 그날을 더 감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링크드인에서는 내 프로필이 조회가 되고 있고, 가끔씩 헤드헌터나 리크루터에게서 메시지가 오곤 한다. 반갑고 감사한 연락이지만, 그 메시지를 열어보고 답변할 자신은 아직 없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그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남아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면, 내 앞에 보이는 커리어패스 (Career Path, 경력 진로)가 길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헤드헌터의 메시지에 흥미를 보이면서 당장 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사를 나와 딴짓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상황이 되어보니, 사실 길은 내 눈앞에 있던 그것이 아니라, 주위 모든 것이 다 길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 너무 궁금해서, 원래 가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가 주저되었다.
일 년이면 쉴 만큼 쉬고, 쉬는 것도 지루해져서 다시 일을 찾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바깥세상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눈앞에 보이는 두어 개의 문만 열어보고 구경해 보는 데에 일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조만간 내 맘에 쏙 드는 문을 열고, 단단히 채비하고 길을 나서봐야겠다. 여러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학교와 학과에 대한 소개 자료를 보고, 드디어 결정한 곳에 입학지원서를 냈던 19살 그 시절이 생각났다. 가보지 않은 길이어서 두려웠지만,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기대되어 설레는 마음이 더 컸던 풋풋했던 시절. 다시 그때로 돌아가 제2의 인생을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해 봐야지. 10년, 20년 후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