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스페인 여행 시작

내 실수들을 덮어준 소소하고 따뜻한 선물 같은 순간들

by 니나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10분, 20분 만에 오는 시내버스가 아니라, 70-80분 간격으로 오는 공항행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다. 버스시간을 잘 몰랐던 것도 아니고, 늑장 부려 늦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버스정류소에서 10분 넘게 아침 부슬비를 맞아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나는 중앙차선의 버스 정류장에 있었고, 공항버스는 맞은 편의 마을버스 정류소에 정차했다. 내 실수를 깨닫고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빨간색 신호등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고, 지나는 차가 별로 없어 무단횡단하려 했지만, 아이들 등굣길의 교통안전을 도와주는 초록어머니의 만류에 발만 동동 굴렸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 거리를 두고 버스는 무심하게도 나를 두고 떠나버렸다. 잠시 허탈함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다고 20kg이 넘는 캐리어를 끌고 출근길 서울역을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를 타기엔 카드값이 너무 무서웠다. 결국은 조금 늦기로 결정했다. ‘그래 뭐~ 워낙 일찍 서둘렀으니, 아직 여유가 있어.’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는 시간 동안 청소를 했다. 부랴부랴 준비하고 나가느라 여기저기 남아있던 부산스러움의 흔적을 깨끗이 치웠다. 청소기를 돌리고, 욕실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남은 쓰레기를 분리수거했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 냉장고에 하나 남아있던 요구르트에 꿀과 그레놀라를 얹어 아침을 해결했다. 텔레비전을 켜고 기억나지 않는 예능을 보며 낄낄거렸다. 버스를 놓쳐 황망했지만, 덕분에 집은 더 깔끔해졌고, 돌아오는 날 문을 열었을 때 기분이 조금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요구르트를 발견해 쓰레기통에 넣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짐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이번엔 버스를 놓치지 않았고, 차는 그리 밀리지 않았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공항에 3시간 반 전에 도착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2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하물 붙이는 것도 짐 검사도 줄이 길지 않았고, 환전과 면세품 찾기라는 미션도 수월하게 클리어했다. 게다가 먼저 라운지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친구를 만나 따뜻한 라테도 한잔 하는 여유도 즐기고, 적당히 지루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나는 기다리던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성공적으로 탑승했다.


나는 오늘부터 2주간 마드리드와 남부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이다. 두 달 전 비행기를 예약하면서 오늘이 오기는 오는 걸까 라는 희미한 현실감에

긴가민가 했었는데,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드디어 스페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날은 마음이 공중에 조금 떠 있는 기분이라 발바닥 전체가 아닌 발끝으로 여기저기를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내 소매치기가 득실거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갭이어(Gap year)라고 명명하고 먹고 놀고 즐기고 있는 일 년이지만 이렇게 놀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할 땐, 어깨에 묵직한 가방을 멘 것처럼 두 다리가 묵직해지기도 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준비하는 감도 많이 떨어졌다. 마지막 날까지 필요한 것들은 계속 생겼고,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했다. 짐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기, 핸드폰과 지갑, 현금을 길에서 꺼내지 않기, 가방은 꼭 지퍼가 있는 것으로 앞으로 메고 다니기, 자물쇠를 꼭 달고 핸드폰은 줄을 달아 목에 매거나 가방에 연결해 두기 등등 소매치기로부터 안전한 여행을 위한 지침도 계속 머릿속에 되뇌었다. 하지만 웬걸,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내리면서 환전한 현금 봉투를 길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행히 택시 바로 뒤를 따르던 오토바이 기사가 알려줘 금세 찾긴 했지만, 마침 그 오토바이나 택시 기사가 친절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는 첫날부터 현금을 몽땅 잃어버린 실수를 자책하며 여행을 시작했을 터였다.


게다가 도착한 숙소에서는 현관 열쇠가 돌아가지 않아 호스트가 올 때까지 30분을 밖에서 기다렸다. ‘열쇠가 바뀌었나 보다, 호스트가 실수했나 보다, 아무래도 이건 옆집 거인 것 같다’라는 다양한 추측을 하며 투덜거렸는데, 막상 호스트가 열쇠를 돌리니 바로 문이 열렸다. 그때 나와 친구의 황망한 표정이란! 14시간의 비행으로 지친 몸뚱이로 30분을 밖에서 기다린 억울함, 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문을 직접 열어준 호스트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였다. 내가 수십 번 돌릴 때는 열리지 않았던 키가 호스트 손에서 스르륵 열릴 때는 정말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오토바이로 20분을 달려온 호스트는 헬멧을 쓴 채로 문을 열어주고, 문 여는 요령을 우리가 익히는 동안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더니,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 후로 열쇠와 아주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는 무사히 문을 열고 닫으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아찔한 실수의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실수는 다행히도 한적한 공항이나, 친절한 스페인 아저씨들 덕분에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맥주 한잔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마무리되었다. 운이 참 좋았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소매치기로 무섭다는 스페인이 좀 더 따뜻하게 보였다. 물론 그런 실수는 지금 생각해도 등뼈와 뒷목이 오싹해지지만, 그럼에도 스페인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유럽이구나 싶은 옛날 건물들, 로터리의 분수대와 조각상, 맛있는 요리와 와인보다도,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했던 스페인 아저씨들 덕분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다음날 아침 어스름히 밝아오는 빛에 맞은편 건물 외벽이 회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카메라를 들고 잠옷을 여미고 테라스를 나갔다. 잠결에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어둠과 밝음의 중간즈음에 있는 하늘이 사랑스러웠다. 건너편 벽의 그라피티들이 벽에 낙서한 아이들 그림처럼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분주히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차들의 소리가 경쾌했다. 내 샤워차례를 기다리며 글을 쓰니 어디서든 오롯이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캄캄하고 까맣던 거리가 이내 회색이 되었다가, 옅은 하늘색과 핑크색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듯 나의 우여곡절 많았던 24시간이 흘러갔다. 앞으로 스페인에서의 2주가 또 어떻게 변하고 흘러갈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나의 실수들이 포근하게 덮였던 것처럼 또 따뜻한 선물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아침 기도를 올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