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써 이곳 사람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줄을 서있어. 오늘 무슨 날인가? 백화점 세일인가? 뭐지? 백화점 사이트라도 찾아봐야겠어! “
아침 달리기를 하러 갔던 친구는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며, 본인이 본 광경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솔(Sol)광장과 마요르(Mayor)광장을 달렸고, 새로운 풍경에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지 않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했다. 쌀쌀한 날씨에 바람막이와 장갑까지 제대로 챙겨 달린 그녀는 마드리드까지 섭렵한 전문 러너의 모습이었다. 달리기 덕분인지, 신기한 장면을 발견한 덕분인지, 발갛게 상기된 표정이 활기 넘쳤다.
“이 나라 사람들도 연말 세일에는 사죽을 못쓰나 보다~. “ 무슨 연유인지는 나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웃어 보였다.
오늘은 친구가 달리다 발견한 동네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먹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북적여서 뭘 파는지,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는 친구를 따라 그곳을 갔다. 나는 하몽과 또르띠야 빠따따 (Tortilla Patata,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 샌드위치와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아담한 카페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옆자리의 할아버지는 신문을 펼쳐놓고 빵과 오렌지 주스, 커피를 즐기고 있었고, 가게 안은 어두운 색상의 패딩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를 찾느라 서성이는 사람들과 유리 진열대 안을 들여다보며 빵을 고르는 사람,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 그리고 그 주문을 받는 직원과 커피를 만드는 직원들로 가게 안은 에너지가 가득 찼다. 바깥공기는 조금 쌀쌀했지만, 이곳은 노란 조명이 테이블과 사람들 머리를 비추고 있어 두툼한 패딩과는 대조적으로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동시에 차분한 아침 기운이 이곳저곳에 내려앉은 듯, 복잡했지만 시끄럽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신문을 넘기는 소리와 수다 소리 사이로 우리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Dos Cappucinos~(카푸치노 두 잔이요)”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로 위와 마음이 따뜻해지자,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여유가 생겼다. 두어 걸음에 하나씩 나오는 창문을 슬쩍 들여다보며, 가게 안의 풍경을 구경했다.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며 입간판을 정리하는 사람, 아침식사를 배달하는 사람, 주문한 커피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곁눈으로 구경했다. 그러다 어제는 몰랐던 향신료 가게를 발견했는데,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병과 통들이 있었다. 그 병에는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맵고 시고 고소하고 달달하고 향긋한 가루들이 있을 것 같았다. 점원들은 똑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들이 기리키는 것들을 종이봉투에 담고 있었다. 가지런한 물품들과 이것저것 고르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도 호기심이 일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낯선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첫걸음에는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새로운 세계에는 내게 익숙한 냄새와 풍경이 있을 리 없으니. 반갑게 조우한 작은 낯선 세계를 우리는 천천히 탐험했다. “우와~ 로란, 여기 쿠키도 있어.” 가게 중앙에는 이름과 생김새로는 언뜻 알기 힘든 가루와 곡물들이 있었고, 한쪽 벽에는 견과류, 건과일, 초콜릿, 쿠키들이 순서대로 벽 앞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사진도 찍으면서 구경하다 우리는 ’Gochugaru (Corea)’라는 종이가 있는 유리병을 발견했다. 고춧가루였다! 특별할 것 없는, 한국에서는 매일 먹는 그 재료를 먼 스페인의 한 골목 가게에서 발견하다니! 스페인 식으로 변경해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춧가루 한글 발음 그대로 적어둔 것이 왠지 좋았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발음하기 어려운 내 한글이름을 외국인 친구가 신경 써서 불러주는 기분까지 조금 들었다. 낯설었던 이 장소는 그렇게 나에게 익숙한 곳이 되어갔다. 신나게 구경하던 우리는 견과류와 말린 망고, 초콜릿을 조금씩 사서 나왔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 우리의 일용한 주전부리가 될 것들이었다.
숙소에서 외출준비를 끝내고 프라도 미술관을 가기 위해 큰길로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넓은 인도는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깨나 소매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소매치기를 조심하기 위해 크로스가방을 앞으로 돌리고 핸드폰이 잘 있나 다시 확인했다.
“내가 아침에 본 줄이 이 줄이야! “ 친구의 외침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거기엔 3층 건물의 큰 서점이 있었고, 서점 입구에서 시작한 줄은 건물을 돌아가며 길게 늘어서있었다. 서점 입구 옆의 유리창에는 사람들이 붙어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에서 스페인의 유명작가 사인회가 있었고, 건물 외벽에는 그 작가와 발간 소설을 홍보하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얼마나 재밌길래!‘ 한글 번역본이 있나 찾아봤지만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SNS에서 작가를 찾아 팔로우했다. ‘아침부터 줄을 설 정도로 유명한가? 스페인 사람들은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것인가?’ 한국의 독서량과 도서 매출이 점차 하락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이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이 (그게 책에 대한 것이든, 작가에 대한 것이든) 부럽고 질투 났다.
본격적으로 프라도를 향하기 전에 근처 전자상가를 찾았다. 유심카드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그 근처에는 또 다른 기다란 줄이 있었다. 설마 아까 그 서점줄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긴데? 궁금해진 나는 친구에게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이 줄의 끝이 어딘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 줄은 잠시 끊어졌다가 찻길 횡단보도 너머로 이어져있었고, 그럴 때마다 줄 서기를 도와주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분들이 보였다. 그분들을 몇 명 지나치니 이번에는 커다란 판에 종이를 줄지어 붙여 팔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다 어느 골목을 도는 순간, 이 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줄은 복권 줄이었다! 작은 복권가게가 있었고, 간판 아래 오른쪽 벽에는 오래된 복권가게라는 것을 증명하는 옛날 신문기사가 액자에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스페인어가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고 거기서부터 긴 줄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와 대박이야! 그 줄의 정체를 알았어. 한번 맞추어봐. 스무고개 할까?” 흥분한 나는 한달음에 전자상가까지 뛰어갔고, 친구와 마주치자마자 이 줄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은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별한 복권을 파는데, 같은 번호를 사서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며 우정을 나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줄만 이렇게 길지 않았다면, 나도 한번 그 대열에 서서 인생역전을 노려볼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토요일이면 로또를 한 장씩 사는 나나 여기 스페인 사람이나 다를 게 없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침에는 동네 카페에서 잡지를 보며 커피와 파타타를 먹고, 주말이면 갖가지 향신료로 맘에 드는 요리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느긋하게 보면서 씨에스타를 즐기고, 연말이면 복권을 사서 나누면서 우리 같이 부자가 되면 뭘 할까? 를 수다 떠는 사람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생김새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스페인 친구도 없으면서, 나는 왠지 내가 마주친 이곳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 거라는 상상을 했다. 왠지 나와 취향도 통하고, 말이 통할 것 같은, 그래서 쉬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상상. 그런 상상은 아주 작은 단서로 시작되고, 아주 작은 공통점이나 연결점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스페인 여행 간다는 이야기에 가족들과 친구들은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나는 벌써 이곳 사람들이 좋아지고 있다. 이러다 너무 마음 뻇겨 나도 이곳에 살고싶다는 소리 나올지도 모르겠다. 남은 기간 소매치기한테 당하지 않게, 너무 마음 몰랑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텐데. 아무튼 나는 또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