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여행하기

40대가 되어 달라진 여행의 모습

by 니나

“나가서 먹을까? 배달시킬까?” 걸어서 15분 거리의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의 카레 레스토랑도 난 괜찮았다. 거리를 좀 걷는 것도 좋았고 (비록 성탄절 당일이라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을지라도) 오랜만에 타파스가 아닌 메뉴라서 더 좋았다. 고민하다 결국은 중국음식을 배달시키기로 했다. 완탕수프면 따뜻하게 몸을 데울 수 있을 것 같고, 배달 중에 좀 퍼져도 괜찮을 듯싶었다. 스페인 세비야에 와서 중국 음식 배달이라고? 놀라지 마시라. 세비야에서 지금 우리는 눈곱 세수만 하고 아침부터 넷플릭스의 데이비드베컴 다큐멘터리를 세 시간째 보고 있다. (나는 그 옆에서 티브이를 힐끗거리며 브런치를 쓰고 있고) 친구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핸드폰과 티브이를 번갈아 보고 있다. 방금은 “이러다 나 축구팬이 되겠어” 라며 박장대소하고 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중국배달음식이라고? 유럽까지 가서 아깝게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젠 이런 여행도 좋다. 20대였다면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있는 친구가 미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행에서 많이 보고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컨디션 유지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빠르게 일상에 복귀할 수 있는 체력이라는 걸 깨달은 지 좀 되었다.


나의 20대 여행에서는 자는 시간을 아껴서 즐겼다. 술을 마시고 야시장을 돌아다니고 호텔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10시면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이른 잠을 청한다. 20대엔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는 잠을 자기 위한 곳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전에 외출했다가 잠시 들어와 쉬다가 다시 오후에 외출하는 패턴이다. 그렇다 보니 스페인의 시에스타가 우리 여행엔 딱이었다. 문을 닫는 레스토랑이나 가게가 많으니 반강제로 숙소에 와서 차를 마시고 낮잠을 자며 쉬곤 했는데, 그게 저녁 여행을 위한 충전이 되어 오히려 좋았다. 그래서 숙소는 베이스캠프가 되었고 밤에는 와인이나 맥주를 한잔 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바(Bar)가 되기도 했다. 전자레인지와 세탁기도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편안하고 넓고 쾌적한 숙소가 중요해졌다. 그렇게 나의 40대 여행 모습은 20대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달라진 나의 여행 모습만큼이나 캐리어에 챙기는 짐도 달라졌다. 어릴 땐 옷 몇 가지면 충분했다. 샴푸 린스 바디클렌저 같은 것들은 숙소나 호텔에 구비된 것을 썼고, 화장품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20대 후반, 열흘이나 터키에 가면서 회사 서랍 안에 있던 스킨로션 샘플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샘플)만 챙겼으니 당시 내 여행 준비가 어느 수준인지 설명이 더 필요 없을 수준이다. 스킨로션 샘플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나는 얼굴이 사막처럼 갈라지고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남은 여행을 했다. 시내 나가서 화장품을 사면 되는데, 관광지를 돌아보느라 그 시간조차 내질 못했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24인치 캐리어 가득 짐을 챙기고도 모자란다. 여행을 다니며 불편했던 것이 생길 때마다 그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감기약 (알약, 물에 타마시는 가루약, 캔디형)과 소화제 (마찬가지로 알약과 가루약), 진통제 (이부프로펜 계열과 아세트 아미노산 계열)는 물론이고 연고와 반창고, 비염약과 피부 알레르기 크림, 홍삼과 밀크시슬까지 가방 한가득 챙겼다. 내 피부와 머릿결에 맞는 제품을 쓰지 않으면 건조해지거나 뻣뻣해져서 종일 불편하다. 그래서 화장품 가방도 점점 커졌다. 단, 씻는 건 샴푸, 린스, 바디클렌저, 페이션 클렌저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비누만 하나 챙겼다. 석회가 많은 물은 피부를 거칠게 하니 필터가 들어있는 샤워기 헤드도 사고, 난방이 시원찮은 유럽의 겨울이 걱정되어 여행용 전기장판과 커피포트도 추가했다. 비가 오거나 추울 때를 대비해 기모가 들어간 부츠도 하나 챙겼다. 유럽에는 배드버그가 있을 수 있으니, 500ml 대용량 배드버그 퇴치제도 샀다. 렌터카에서 쓸 핸드폰 거치대와 여행지에서 읽을 책도 필요했다. 게다가 나는 필름사진을 찍고 브런치를 쓸 예정이니, 아이패드와 키보드, 카메라와 필름 한가득도 챙겼다. 이쯤 되니 24인치 캐리어에 옷 넣을 공간이 부족했다. 짐을 좀 줄여볼 요량으로 출발 이틀 전부터 모든 짐을 꺼내서 다시 싸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두고 갈 짐이 없다는 걸 매번 깨닫는다. 그 결과 스페인의 돌길에서 옛날 건물 숙소 계단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제발 바퀴야 버텨줘라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며, 짐을 끌고 다녔다.


그런 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이젠 이런 여행이 좋다. 나의 일상을 모두 버리지 않고 여행에서도 계속 챙기게 된다. 내가 나로서 있을 때 필요한 것들을 챙기다 보니, 낯선 여행지에서도 집과 같은 안락함을 조금 느낄 수 있다. 늘 쓰던 물건을 볼 때, 늘 하던 리추얼을 챙기고 있을 때가 그렇다. 친구가 보는 넷플릭스를 힐끔거리며 시작한 이 글을 이제는 밤이 되어 와인 한잔 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물론 그 사이 세비야의 명물인 메트로폴 파라솔 (세비야의 버섯)에서 야경도 보고, 타파스와 맥주도 한잔 하고, 골목을 걸어 다니고, 근처 공연장에서 플라멩코 공연도 봤다. 하루종일 한 거라곤 그거뿐이라 아쉬울지 몰라도, 브런치 글도 쓰고 친구의 살아온 이야기도 들으며 여행을 좀 더 깊고 진하게 즐기고 있다. 특별한 활동이 있지 않아도, 낯선 장소가 주는 가벼운 긴장감과 설렘은 내 속의 다른 생각을 끌어내기도 하고, 함께한 친구와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어느 광고에서 그런 슬로건을 내세운 적이 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나는 지금 여기 스페인에서도 살아보고 있는 중이다. 보고 즐기는 것으로 과식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내 체력대로 천천히 씹어 깊게 음미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삐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느끼는 여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는 내 느린 여행도 괜찮다고 괜히 여기다가 항변하고 있는 거다. 서울에서도 느리게 살기를 시연하고 있으니, 느리게 여행하기도 하는 셈이지. 오늘은 휴식했으니, 내일은 세비야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계획이다. 감동적인 플라멩코 공연도 다른 곳을 찾아 한번 더 느껴볼 생각이고. 이 여행도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이 아쉬워 천천히 스월링 하고 입에 머금다가 아주 조금씩 목구멍으로 흘러 보낸다. 남은 여행도 그렇게 천천히 흐르도록 두다가 가야지. 벌써 스페인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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