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맥주 한잔, 와인 한잔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러나 술에 엄청 약하다.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본다. “로란님은 술도 약한데 술을 좋아해요?. 아~ 술자리를 좋아하는구나?” 정답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먹는 것도, 뭐 가끔은 좋긴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것은 혼자 조용히 즐기는 것이다. 술자리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나보다 술을 잘 마시고, 일부는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기 때문에 나와 전혀 맞지 않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술을 맛으로 먹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맞는 술을 탐색하고 그 술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찾아 즐기고, 나에게 맞는 적당량으로 과식(과음) 하지 않는 절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깊고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술의 세계를 온전히 그리고 오랫동안 꾸준히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매번 적당히가 중요하다.
그런 내가 스페인에 오니, 올레~ 이렇게 술 마시기 좋은 나라가 있다니! 물론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레스토랑을 가보면 점심식사에도 모든 테이블에는 늘 와인이나 맥주잔이 올라와있다. 하루 5끼 중 점심을 가장 여유 있게 (2시간가량) 먹는 스페인이다 보니, 그 음식에 어울리는 적당한 알코올은 기본 옵션인 셈이다. 게다가 유럽에서 와인은 신성한 노동자의 음료가 아니던가? 배경이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긴 하지만, 에밀졸라의 책에서는 늘 와인 반 병과 빵, 콩수프, 혹은 고기를 먹는 노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포도주 반 병과 맛있는 식사는 당연하다!라는 식이다. 점심 식사 이후의 씨에스타가 있으니 나 같은 알코올쓰레기도 맥주 한잔 혹은 와인 한잔의 여유를 점심에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레스토랑에는 Cerveza sin alcohol 메뉴가 있다. 맥주를 마시되 취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무알콜 맥주가 적어도 한두 종류 이상은 꼭 있으니, 이처럼 술 마시기 좋은 환경이 또 있던가. 나처럼 술이 약한 사람도 어디서든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나라. 스페인 만세~!
그럼 점심만 그런가? 아니다 보통의 스페인 사람들은 이른 저녁으로 가볍게 샌드위치 같은 것을 먹고 8~9시경 간단하게 타파를 즐긴다고 한다. 이때 친구들과 가족들과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는데, 나와 친구는 점심 이후 저녁으로 타파스 바에 가서 와인이나 맥주를 즐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여행 중 나의 하루 식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8~10시 사이 근처 바, 카페에서 커피와 오렌지주스와 오믈렛이나 크로와상과 같은 것을 아침으로 먹는다. 오후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는데, 이때 호기롭게 맥주나 와인을 한잔 곁들인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쇼핑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타바스바에서 맥주나 와인과 함께 간단한 타파를 먹는다. 맛있는 음식과 한두 잔 곁들이는 술, 컨디션이나 상황에 따라 무알콜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진정 내가 원하는 음주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세비야의 숙소에 도착하니, 주방에 와인잔과 쿠키와 와인 한 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반면 생수는 500ml 하나도 없었다. 이게 바로 와인의 나라 스페인 스타일인가? 기대하지 않은 그 와인은 밤에 치즈와 곁들여 한잔하기 딱 좋은 탄닌과 바디감이었다. 괜찮은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해 보라는 호스트의 따뜻한 환대 같아 흐뭇해졌다.
시청 앞 공예품 아트페어를 구경하고 오면서,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타파를 먹기 싫었던 우리는 흡사 현지 젊은이들처럼 뉴욕피자와 맥주를 저녁으로 포장해 왔다. 세비야 로컬 맥주인 Cruzcampo 한 캔과 Sin Alcohol 한 캔이었다. 친구는 피자를 고르기도 전에 냉장고의 맥주부터 찾아보는 나를 보고 웃는다. “피자를 골라야지, 맥주부터 고르는 거야?” 어쩌겠어. 피자는 아는 맛이고, 로컬 맥주를 먹을지, 지난번에 맛있게 먹은 알함브라 맥주나 댐 맥주가 있다면 그걸 먹을지가 나에게는 더 심각한 고민거리인데 말이야. 다행히 냉장고에는 옵션이 별로 없어 로컬 맥주를 선택한 나는 그제야 피자로 눈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인스타그램을 들어가니, 음주와 치매 위험에 대한 릴스가 내 피드에 떴다. 과음이 아니라 조금만 먹어도 치매를 앞당기는 원인이 되니 술을 먹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와 타겟팅 정말 끝내주네. 그렇지만 뜨거운 태양 때문에, 여기저기 산책으로 목이 마르게 되면 나는 또다시 시원한 맥주를 찾을 듯하다. 해가 질 때쯤 날이 쌀쌀해지고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와인 한잔을 떠올릴 것 같다. 그럼 나는 그 영상을 본 것조차 잊어버리고, 혹은 기억나지만 애써 그 기억을 밀어내면서, 미래의 나의 건강을 담보로 지금 눈앞에 있는 시원하고 씁쓸하고 향긋하고 매력적인 이 음료를 입에 대고야 말겠지.
‘요번 여행까지만 술 마시고, 한국 돌아가면 열심히 운동하고 술도 다시 줄여야지. 뱃살이 나오기 전에 습관을 다시 바로 잡아야지.’라는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또 마음속으로 하고 있다. 나는 과연 노란 황금색 음료에서 하얀 거품이 올라오는 멋진 광경을 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잘 닦여져 반짝이는 와인잔에 혀와 생각을 살짝 마비시키는 매력적인 버건디 액체를 따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아니 나는 자신이 없다. 이 브런치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자신이 없다. 그래도 그냥 적당히 잘 마시면서 오래오래 즐거운 여행 하면서, 이렇게 글도 쓰면서 살고 싶다. 그래, 돌아가면 운동이나 해야겠다. 앗! 세비야 대성당 투어 예약한 시간이다! 그럼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