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해서 미안해, 플라멩코
플라멩코를 보았다. 공연 관계자가 주의사항 같은 것을 무대에서 간단히 이야기한 후, 관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자, 잔잔한 호숫가에 새 한 마리가 물 위로 착지하며 물살을 가르듯, 기타가 침묵을 가르는 멜로디를 조용히 시작했다. 기타에 온 신경을 집중한 그의 옆에는 칸타오르 (남자가수)가 멜로디만큼이나 조용한 손뼉으로 정박, 엇박의 변주를 만들면서 긴장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기타리스터와 눈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올레~ 같은 추임새로 연주를 돋우고 발을 굴렸다. 나도 모르게 무릎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시작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이내 웃음기 사라진 바일라오라 (여성 무용가)가 움직임을 시작했고, 정지와 움직임, 떨림과 강한 굴림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녀는 기타, 손뼉, 발 구르는 소리들을 장악하며 무대가 부서질 정도로 강렬하고 무거운 춤사위를 보였다. 그 움직임과 소리에 따라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전반적인 박자와 리듬은 동일했지만, 그 박자 안에 엇박과 강약 있었다. 소리와 춤이 기-승-전을 그리며 절정에 이르면, 가만 앉아있는 내 심장도 그 박자에 맞춰 같이 뛰었다. 공간을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바일라올라의 강렬한 몸짓과 화난 표정에 눈을 빼앗기다 모든 것이 갑자기 정지된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한숨을 쉬며 놀란 가슴을 쓰다듬고 박수를 쳤다.
사실, 플라멩코는 전혀 기대감이 없었던 계획이었다. 친구와 여행계획을 짤 때,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본다길래, 그냥 관광상품 정도의 가벼운 체험 정도로 생각했었다. 스페인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플라멩코와 투우는 그 이미지에 너무 자주 그리고 어설프게 노출되다 보니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할까.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경복궁과 서촌, 북촌에 외국 관광객들이 체험으로 입고 다니는 한복을 보면, 전통과 맞지 않게 화려하게 튜닝된 모습에, 저걸 진짜 한복으로 알겠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복식이란 시대에 맞춰 변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건 현재 생활과 시대에 맞는 흐름이 아니라, 관광객 체험을 위한, SNS 사진을 위한 변화다 보니 보는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다. 그리고 플라멩코 공연을 예약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봤더니 아니었다. 이상한 선입견을 가졌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친구의 의견대로 보러 가길 정말 잘했다는 안도감 마저 들었다. 첫눈에 플라멩코에 빠진 것은 그 자체의 강렬함도 있겠지만, 내가 국악을 배우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을 듯하다. 점점 고조되는 멜로디와 분위기는 내가 늘 공부하는 가야금 산조의 흐름과도 비슷했고, 기타리스터와 바일라올라, 칸타오르의 호흡과 추임새에서는 우리 국악에서 고수와 판소리, 가야금 연주의 그것과 매우 비슷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선율이나 춤사위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 같은 것이 노래와 춤을 통해 거칠게 튀어나오는 것도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칸타오르(남성 가수), 칸타오라(여성 가수)의 목소리가 우리의 판소리와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맑고 청량하고 깨끗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거칠거나 답답하거나 구슬픈 소리에 더 가깝다. 가사를 몰라도, 가수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애환, 한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은 달아오른 흥미를 감질맛 나게 하는 수준이었다.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플라멩코 공연을 한 번 더 관람했다. 두 번째 공연장은 조금 더 컸고, 이전 공연보다 출연진이 더 많았다. 남녀 무용가와 남녀 가수, 기타리스터 이렇게 총 5명이었다. 첫 번째 공연이 조금 더 작은 무대에서 진행되었고, 기타 연주를 하이라이트 했다면, 이번 공연은 전통 플라멩코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남녀 무용수가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며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남녀이지만 로맨틱한 분위기보다는 전투적이었고, 어떤 순간은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나서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이어 기타 솔로 연주가 있었고, 그 뒤로 여자 무용수 솔로, 남자 무용수 솔로 공연이 이어졌다. 처음보다 좀 더 다채로운 구성인 점이 좋았다. 너무 정렬적인 춤에 바일라오라 (여성 무용가)의 머리가 흐트러졌다. 바일라오르 (남성 무용가)가 턴을 할 때는 그의 머리칼에 맺힘 땀방울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면서 조명에 반짝였다.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고 어딘가에 소리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답답함이 있다면, 그게 만일 소리와 춤으로 표현한다면 플라멩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공연은 활활 타올랐고, 난방도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내 가슴이 뜨거워졌고 뒷목에서는 땀 흘렀다. 흡사 커다란 불 앞에서 뛰어들 것처럼 춤을 추고, 피를 토하듯 노래를 부르고, 홀린 듯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춤이 절정에 오르자 내 숨도 가쁘면서 폭발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날 나는 두엔데 (Duende)를 조금 느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부여잡고 공연장을 나와 어두운 밤 숙소로 향했다. 건물과 건물이 좁아 한두 사람 걸어갈 수 있는 그 좁은 길을 걸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앞서 걷고 있는 커플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로맨틱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공연을 못 본 친구의 방 문은 닫혀있었고, 거실은 조용했다. 그냥 바로 잠들기에는 조금 전 공연의 여운이 좀처럼 쉬이 사라지지 않아, 잠시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앙코르 공연에 찍은 사진이 잘 나오면 좋겠다. 본 공연에서 본 반짝이는 땀방울과 열기를 담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그 공연의 공기가 생각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