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사두고 읽는 것
새해를 맞이하여 대청소를 해서 상당히 깔끔해진 내 방이 다시 새로운 책들의 돌격으로 좁아지고 있다. 정말 깔끔한 사람이 본다면, 미니멀리스트가 본다면, '이게 무슨 깔끔이야?'라고 반문하겠지만, 나로서는 태어나 거의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짐을 단출하게 줄였었다. 100리터가 넘게 일반쓰레기를 버렸고, 엘리베이터를 세 번 이상 오가며 재활용쓰레기를 버렸고, 헌 옷 수거함에도 커다란 마트 쇼핑백으로 두어 번 다녀왔고, 알라딘 중고책 판매로 적립금도 두둑이 챙겼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어진 내 방을 보며 매우 상쾌해진 기분이었었다. 그랬다. 적어도 지난달까지는 말이다.
작년 말 읽게 된 에밀졸라의 <돈> 덕분에 나는 에밀졸라라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급기야 루공-마카르 총서를 다 읽어보겠노라고 (한국어 번역된 책만이라도) 혼자 다짐했고, 목로주점과 제르미날, 인간짐승과 같은 책들을 보이는 족족 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경리의 토지도 읽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왠 프랑스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연관성은.. 사실 거의 없다. 둘 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며 20권이나 되는 대작이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엄청난 작품이라는 점 외에는.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프랑스가 궁금하다면, 한국은 어땠을까? 20권을 읽을 작정이라면, 그 긴 호흡을 유지할 수 있다면, 토지를 읽어보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랬다. 그래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토지>는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연재와 상이한 내용이 조금씩 있다고 했다. 이왕 읽어볼꺼라면 가급적 작가가 쓴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간,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감정이 잘 담긴 책을 선택해야지 싶었다. 그러다 결정하게 된 것이 마로니에북스의 책이었고, 덜컥 전권을 사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부담스러워 당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주, 드디어 원하던 책을 발견했고, 일요일 밤 9시에 직접 찾아가 물건을 받아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권을 꽂을만한 책장 여유는 없었다. 책상아래에도 책들이 쌓여있었고, 소파 사이드 테이블에도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복층 계단에 10권씩 나눠 두게 되었고, 매일밤 토지(겉표지)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토지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 침실은 위층에 있다는 이야기다)
대청소를 하고 '더 이상 물건을 사지 않겠어! 당분간 책장 파먹기를 하겠어!' 라며 다잡았던 내 마음은 그렇게 그날 사라져 버렸다. 모든 책을 다 읽기 전에 새책을 사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사람 결심이 이렇게 가볍다니. 결국 토지 20권과 함께 나의 결심은 와르르 무너졌고, 결계가 무너진 이 방에는 다시 책이 넘쳐흐르게 되었다. 그렇게 산 책들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 친구들을 하나씩 끌고 들어오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책은 자가증식한다고.
"나 또 책 샀어. 안 읽은 책이 한가득인데, 또 샀어. 나 어쩌면 좋아."라고 친구 H에게 하소연했더니,
"그래도 소비하는 것 중에 가장 덜 미안하지 않아? 딴 건 죄책감 드는데, 책은 괜찮잖아. 책장에 꽂아두면 안 봐도 좀 뿌듯하고. 똑똑해진 거 같고. 그리고 가방이나 옷 사는 거보다 훨씬 싸고 말이야. 뭘 지르고 기분 좋아지는 데에는 책이 가성비가 젤 좋지!" 라며 내 소비를 지지해 줬다. 역시 유유상종이다. 이 친구도 마음이 허전하거나 불안할 때면 그 허기를 서점에 가서 채운다. 두 손 무겁게 책을 사 와서 뒤적거리며 불안감을 청소하고, 넘치는 책들을 보며 뿌듯해한다. 그런 친구에게 하소연하다니,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하소연이었다. 물론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다시 글을 써야겠다 생각한 후, 뭘 써야 할지 몰라 좀 망설였었다. 그러다 밀린 책 리뷰를 쓸까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나에게 글쓰기는 속에서부터 무언가 차올라와 슬그머니 넘치기 시작하면 그걸 받아 적는 것이기 때문이다. 흡사 가득 따른 맥주의 하얀 거품이 차가운 잔 외벽을 따라 흘러내리면 그것들을 입으로 후루룩 받아마시는 것이라고 할까. 그렇다 보니 읽은 지 며칠 몇 주가 지나버린 책들은 내용이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그때의 감동과 감흥이 조금 시들해져 버렸다. 오래 두어 식어버린 맥주처럼, 사라져 버린 하얀 거품처럼 쓰고자 하는 욕망도 조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럼 뭘 쓰나 하고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다 보니, 한 달 전만 해도 깔끔했지만 그새 겹겹이 쌓여 복잡해진 책장과 책상이 눈에 보였다. 아휴 저 책들은 또 언제 다 읽나 하는 한숨이 나다가도, 또 저 책들 언제 읽지 하는 설렘도 몽실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책을 많이 사는 것도 글 소재가 되는 걸 보니 이 또한 좋구나 싶다.
<토지>는 이제 겨우 2권을 읽고 있다.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긴장 넘치는 관계, 숨겨진 이야기들이 슬쩍슬쩍 드러나는 플롯이 책을 놓기 힘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침대에 책을 가져갔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 새벽이 되어버린다. 그게 두려워 분량을 정해놓고 조금씩 보는 수밖에 없다. 엄마 말로는 중반 넘어 조금 지루해질 수 있다고 하니, 글 읽는 호흡을 잘 조절해 봐야겠다. 그리고 이왕이면 책 사는 호흡도 조금 조절해 봐야겠다. 새 책들은 새 책대로 얼른 읽어달라고 재잘거리고, 읽던 책은 읽던 책대로 궁금해서 손을 떼기가 쉽지 않다. 흥미진진한 소설책도 좋고 솔직한 이야기에 울다 웃는 에세이도 좋고 주변을 다 물리고 혼자가 되는 시도 좋고 하루의 텐션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경제서적도 좋다. 뭐부터 읽을지, 책장과 테이블을 휘 둘러보는 시간은 그래서 언제나 설레기도 하고 고민스럽기도 하다. 아, 내가 이래서 책 사는 속도 조절을 실패하는 거지. 방금 결심해 놓고 또 바로 잊어버린다. 나는 이게 참 문제다. 그냥 결심을 말아야겠다. 꽂아두면 언젠가는 읽겠지. 원래 책은 사두고 읽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