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템플스테이를 다녀오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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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백양사 홈페이지에서 템플 스테이를 예약하고 토요일 아침 7시 반 집에서 출발했다. 잠을 깨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텀블러에 넣고 조금 큰 물통에 마실 물을 가득 담았다. 내비게이션으로 경로를 찾아보니, 4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중간에 친구를 태울 거고 휴게소를 한두 번쯤 들르면 그래도 5시간 반~6시간이면 도착하겠지 싶었다. 시동을 거니 기름이 모자라 근처 주유소를 들렀고, 친구를 태우고 출발하니 고속도로는 초입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역시 새벽에 출발했어야 했나 하고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여행인데 어때~ 천천히 놀며 쉬며 가자."라는 친구 말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 '그래, 일도 아니고 아직 여유 있어.'라고 생각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30분 정도 시간을 쓴 것과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를 사 먹은 시간을 포함해 총 8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우리는 백양사에 겨우 도착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운전에 지칠 만도 했는데, 절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니 금세 괜찮아졌다. 처음 해보는 템플스테이에 설렜던 건지, 맑은 공기와 짙푸른 숲에 벌써 힐링이 된 건지, 발걸음은 가벼웠고 눈은 밝았다. 사무실에서 이불과 베개커버 그리고 청청 패션의 천연 염색옷을 한벌 받았다. 알려준 방으로 가서 그곳에 먼저 와있는 다른 여성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받은 옷을 갈아입었다. 살짝 빛바랜 듯 한 파란색의 면바지는 발목 부분에 시보레가 있고 허리는 편안한 고무줄로 되어 입고 벗기 편했다. 같은 색 상의는 조끼 형태라 입던 티셔츠 위에 걸쳤다. 좌우 앞부분에 큰 주머니가 있어 손수건이나 핸드폰 넣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앞섭을 여미는 단추는 면소재를 매듭지어 열매나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처럼 생겼다.
이어 마당에 모여 담당자로부터 1박 2일 동안의 프로그램과 주의사항을 안내받았다. 경내를 돌아다니며 사천왕문과 대웅전, 칠성전, 큰 종과 북, 마당 한복판에 있는 보리수까지 설명을 듣다 보니, 유럽여행에서 종종 하던 관광지 일일투어 단체여행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다른 건 우리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해져 버렸다는 것. 유럽 단체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커플룩을 입은 커플이나 가족, 편안한 여행복차림의 무리, 좋아하는 옷으로 한껏 치장한 사람들, 각자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다양한 모습이었다. 언뜻 보이는 옷과 가방 브랜드, 머리스타일과 패션 감각에서 풍기는 사회 계층을 나도 모르게 발견하기도 하고, 괜스레 내 복장을 비교해 점검해보기도 했다.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교하는 내 모습이 속물스럽다 생각하면서도 유난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런데 이 옷을 입으니 우리 모두가 똑같아져 버렸다. 얼핏 보면 나이를 알아채기도 조금 어려웠다. 부부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가 나중에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소개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내 눈썰미의 문제인지, 같은 옷의 효과인지.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마주쳤고 인사를 나눴다. 모두 비슷해 보였고, 나도 그렇게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자 편안해졌다. 같은 옷을 입었다는 소속감보다는 그 안에 숨어버려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옷이 여름에 입긴 더웠지만 퍽이나 맘에 들었다.
오리엔테이션 마지막에는 명상이나 차담 같은 프로그램을 위해 마련된 커다란 공간에서 아주 간단한 법당 예절과 삼배 방법을 배웠다. 양말을 신어야 하고 들고 나올 때는 옆문을 통하고 (중앙 문은 스님 다니시는 문이다) 들어가면 우선 반배를 한다. 그리고 방석 매트를 가져와 깔고 삼배를 한다. 담당자분의 시범을 보고 따라 하다 보니, 스님들은 코어힘이 장난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을 합창한 채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건 생각보다 꽤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성당에서 미사를 처음 겪어본 사람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꾸 앉았다 일어났다를 해야 하니 무릎이 불편하다고. 왜 자꾸 일어나라 그러냐고. 그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누가 보면 절하다 웃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나는 종교라는 것을 이해하고 선택할만한 의식이 없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다녔다.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았고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영성체를 했다. 요즘은 마음이 힘들 때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큰 명절 때나 성당을 찾고 있는 불량 신자지만, 어릴 때를 회상하면 몽글몽글한 비누거품처럼 기분 좋은 기억들이 있다. 성당 하면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추억 중 하나는 첫 영성체 하는 날이었는데, 이날 나와 내 또래 친구들은 하얀색 원피스나 하얀 셔츠에 바지를 입고 미사를 봤다. 신도 자리 맨 앞에 줄지어 앉았고, 한 줄로 서서 납작하고 하얀 밀떡이라는 것을 입안에 넣는, 영성체 모시는 것을 처음 해본 날이었다. 이 날을 위해 우리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주의 기도나 성모송, 묵주기도 같은 기본적인 기도문을 외우고 미사방법을 배우고 교리 수업을 들었다.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그날은 예쁜 원피스를 입고 많은 어른들 앞에서 예쁨 받고 미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이나 친척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는데, 미사포와 천주머니, 그리고 묵주반지나 묵주 같은 것들이었다. 색깔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파스텔 톤의 천 주머니에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여리여리한 새하얀 미사포가 접어져 들어있었다. 묵주는 비비탄보다 약간 큰 사이즈 알을 엮은 기다란 목걸이처럼 생겼는데, 햇빛을 받았다가 손 사이에 넣고 오므려 깜깜하게 만든 후 눈을 대고 보면 옅은 민트색 빛이 나는 형광 묵주였다. 은으로 된 묵주반지도 처음 가지게 되었는데, 목걸이와 반지에 새하얀 미사포를 머리에 얹고 예쁜 새 원피스와 양말과 구두를 신으니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성당은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 같은, 아름답고 웅장하고 성스러운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절도 좋아한다. 백양사처럼 대체로 절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위치하니 여행처럼 갈 수 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는 딸랑딸랑하는 풍경소리가 있고 경내는 조용하고 법당 외벽의 그림과 처마는 화려하고 아름답다. 깊은 산속이 아닌 절이라도 문을 지나 들어가는 순간 나무와 향내음 가득한 성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말소리를 줄이고 조용하게 된다. 공기가 다른 듯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오면 내 속에 깨끗하고 새로운 물질이 가득 채워져 전과는 조금 달라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좁은 산길을 따라 덜컹거리는 차를 몰며 우리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아. 우리는 이제 행방불명될 거야."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시간도 다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의 시간은 영원히 멈춰 차단되고 이곳만의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프로그램을 참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이지만, 모두 멈춘 시간 안에 머무는 듯했다. 곧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시시해졌다.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핸드폰을 종종 꺼내들 긴 했지만, 늘 나를 유혹하며 괴롭게 만들던 숏폼콘텐츠와 가십거리들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오래된 법당, 똑같은 옷, 나무향기, 바람, 풍경소리, 새소리, 침묵. 그 안에서 멈추었으면 하는 시간이 사실은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마다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