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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13. 2024

2년전에 멈춘 시간

오랜만에 방문한 옛 회사의 정취

부재중 전화가 왔던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늦은 밤이라 어쩌지 하다가 내일 전화해야겠다며 일단 1이라는 숫자를 무시했다. 다음날이 되어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는다. 당연하다. 상대는 직장인이니까, 지금은 회의 중이거나 이메일을 쓰느라 바쁘거나 아무튼 일에 몰두해서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참 후 전화가 다시 왔다. 앗 그러나 이제는 내가 바쁘다.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부재중전화가 쌓여가는 것만큼 마음에 부채감이 쌓였다. 이럴 때는 그냥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는 게 좋다. 그래서 점심 약속을 잡고 오랜만에 역삼역에 갔다.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은 내 마지막 직장생활 동료 C였다. 


정말 오랜만에 전 직장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거라 옷차림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얼마 전 아는 동생으로부터 "언니, 언니는 갈수록 히피가 되어가고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던 게 조금 신경 쓰였다. 히피의 옷차림이 어떤 건지 영화나 사진에서는 봤지만, 그때 내 옷차림에서 그게 연상될 줄은 몰랐다. 그 말이 충격이라거나 실망이라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히피만큼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뜻으로 이해했으니까 오히려 좀 좋았다. 하지만 역삼 직장인들 사이에서 너무 튀지 않으려면 히피스러운 것보다는 깔끔한 비즈니스 캐주얼이 좋겠다 싶었다. 아이보리 바지에 흰 셔츠를 꺼내 입었는데, 집을 나서니 아차 싶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도착이 늦어지겠지만 흙탕물에 흰 바지 밑단이 얼룩지는 건 더 싫었다. 비를 맞아도 구정물이 튀어도 티 안 날 검은색 옷으로 위아래 맞춰 입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사실 히피 같아 보이지 않고 싶다거나 하는 건 모두 내 마음을 외면하기 위한 핑계다. 회사를 나온 지 일 년 반이 되어가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내 시간은 그때에 멈춰있으니 그게 문제인 거다. 시간이 그리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고 여전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문제는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라는 것. 일 년 반동안 열심히 놀았고 탐험했고 즐거웠고 내 생활과 성격, 주변이 모두 변했다. 그동안 내 시간은 잘 흘러갔다. 그런데도 남들의 시선을 아직 신경 쓴다는 점, 그게 문제인 거다. 나는 변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히피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은근히 좋아할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건 문제다. 아니 그게 문제일까? 사실 신경 쓰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말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이니 타인이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걸 텐데. 내 브런치 글도 읽어주는 독자가 있기에 비로소 살아있으니까. 물론 보상 없이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것이 허락하는 것은 어디까지 일지, 그걸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는 고민이다. 그리고 내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라는 건 두 번째 문제에서 다시 드러난다. 


두 번째 문제는 오늘 만날 지인들인 직장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직을 한 것도 아니고, 사업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뭔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회사를 나온 경험으로 책을 내겠다는 원대한 꿈은 투고 이후 애매해졌다. 내 원고를 원하는 출판사가 없다는 실망, 작가가 되기 부족한가 라는 좌절, 하지만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열정, 꾸준히 쓰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일 년 반동안 뭔가를 많이 하고 변했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것이다. 매년 경영기획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고 연말이 되면 그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받고 그걸로 연봉이 결정되는 쳇바퀴를 20년 돌았던 직장인 관점에서는, 작년과 올해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이다. 년 단위 성과로 책정하기 힘든 목표인지 몰랐다는 점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책을 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온몸으로 알지는 못했다는 것도 문제다. 성과측정이라는 구조에 여전히 메어있는 것도 문제다.


정리하자면 '로란님 오랜만이에요. 요새 뭐 하고 지내요?'라고 하면 한마디로 답할 만한 게 없다는 게 걱정인 거다. 회사를 나간 만큼 번듯하게 자랑할 그 한마디가 없다는 것, 그게 내 옷차림을 돌아보게 한 것이었다. 


아무튼 역삼으로 갔다. 방문자 등록을 하고 식당으로 가서 '어머~'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오늘 점심 맛은 중간은 하는 거 같아 라는 평가를 들으며 멕시칸 요리와 샐러드를 먹었다. 하이톤이 되어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티키타카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를 예능처럼 보다가 웃어버렸다. "여기는 일 년 반 전에서 변한 게 없네요." 식당에서 바라보는 도시뷰는 여전히 끝내줬고 (비가 와서 멀리 남산타워가 뿌옇게 보이는 게 아쉬웠다) 복도 벽면을 가득 채운 회사 포스터도 여전했고, 방문객들이 방명록처럼 낙서하는 큰 화이트보드 벽면도 그대로였다. 무엇보다도 약간 살이 빠지거나 찌거나 잔주름이 조금 늘었거나 하는 것 말고는 똑같은 복장에 같은 표정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2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함께 일하는 팀과 파트너는 자주 바뀐다고 하지만, 하는 일도 똑같고,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도 그다지 많이 달라지지 않았고, 키친을 담당하는 여사님도 여전했고, 밥을 먹으면 아래층에 내려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똑같고, 쉬지 않고 오가는 말들의 핑퐁도 여전했다. 다른 게 있다면 좀 느려진 나는 대화에 치고 빠지는 것이 어색해서 그저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경제활동 없이, 뭔가 뚜렷하게 하는 것 없이 일 년 반이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신기해했다. "로란님, 심심하지 않아요?"라든가 "이제 슬슬 취업할 때가 온 거 같아 분위기가 달라."라든가 "돈이 많나 봐." 라거나 "아이가 없잖아. 싱글만세." 라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직장인을 오래 해서 월급의 노예가 되면 혼자 노는 법을 잘 모른다. 하라는 것만 열심히 하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걸 잊어버리기도 하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다 보니 주위 경치를 놓치기도 한다. 회사-집-회사-집을 반복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쳐내듯이 살아가다 보면 회사가 빠진 텅 빈 시간을 뭘로 채울지 막막해진다. 그러니 쉬면서 여행하는 것도 한두 달이고, 노는 것도 잠시다. 결국 회사를 다니면서 틈나서 쉬는 게 진짜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안정감을 주고, 좋은 옷과 여행을 선물해 주고, 그러다 그 세상이 전부인 것 같은 생각. 


떠들썩한 수다 사이에 나는 나대로 그런 생각을 혼자 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유쾌한 그들은 시간이 되자 한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 또한 이후 일정이 있어서 식사와 커피타임은 한 시간을 조금 넘어 종료되었다. 부재중전화의 주인공이자 회사로 나를 초대한 C가 건물 1층까지 함께 내려왔다. 그는 이직하라는 잔소리를 이제부터 할 거라며, 엄청 쪼아댈 거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걱정을 농으로 받아치고 우리는 헤어졌다.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점심시간으로 그들에게 내가 뭐 하고 지내는지, 그 많은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어떻게 채우는지에 대해 다 알려줄 수는 없었다. 왜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기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 건지도 다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설명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들 거다. 직장인이었던 내가 그랬으니까. 


회사 건물을 나와 택시가 잡히지 않아 역삼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산을 쓰고 비가 만든 웅덩이를 피하고 찰박찰박 소리 내 걸으며 2년 전의 시간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가야금 선생님 댁에 가서 레슨을 받고 다음 달에 있을 대회를 대비해 연주할 산조 길이를 조정하고 농현과 박자감을 키우는 연습을 했다. 지난번 공연 리뷰글이 좋았다는 칭찬을 받고 예술인 자격 신청과 내년 지원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같이 살펴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변하지 않은 것은 나일까? 아니면 그들일까? 내 상상 속에서 역삼 그 건물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나에게만 보이는 거대한 둥근 막에 둘러싸여 옛날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은 따뜻했고 정겹고 그립고 그리고 여전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상상을 하니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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