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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19. 2024

책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독서 취향을 쓰게 된 이야기

10대에서 20대까지는 읽으면 도파민이 쭉 올라갈 만큼 스릴 있거나, 잘 모르던 흥미로운 세계가 마구 펼쳐지거나, 수수께끼가 불어나다가 어느 순간 해결되는 스토리라인의 책을 좋아했다. 아빠 책장에 있던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 책을 읽으며 스릴러와 탐정물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동네 책방에서 빌린 베르나르베르베르와 파트리크쥐스킨트가 만든 상상의 세계를 헐떡이며 탐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 되면서부터는 작아서 들고 다니기 좋은 에쿠니 가오리 같은 일본 작가의 책을 즐겨 읽었다. 차분하거나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퇴근길을 동행했고, 그 분위기만큼 나도 차분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책을 더 쉽고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창 시절 다니던 아파트 단지 내 독서실 같은 건물에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서 늘 인기 있는 소설책을 빌려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 빌리지 못한 책은 학교 가는 길, 학원 가는 길에 있는 책 대여점에서 빌렸다. 만화는 300원, 소설은 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천 원이면 주말에 소설책 2권과 함께 흥미롭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혼자 읽으면 심심했을 텐데, 그래서 독서를 꾸준히 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베스트셀러는 학교에서 화젯거리였기 때문에 함께 읽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서로 돌려보기도 하고, 줄거리를 스포 하기도 하고, 읽은 책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누구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고 누구는 <소설 이휘소>를 읽고 뭐가 다른지 뭐가 더 어른책 같은지 (야한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직장인일 때도 출퇴근하며 지나는 광화문 지하상가에 크고 작은 서점들이 있었다. 좌판에는 30~50% 할인하는 책들이 있으니, 지나가다 눈에 띄는 책을 사서 한쪽 팔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그 팔에 머리를 살짝 기대듯 해서 다른 손으로 책을 들고 봤다. 집에 도착하면 책에 나온 데로 맥주를 따고 나머지를 읽으며 소설 주인공이 된 기분을 내기도 했다.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즈음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여름 해 지는 시간에 맥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40대가 된 지금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좋지만,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도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감정이 싹트고 이야기가 폭발한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에 비하면, 가령 살인사건이나 개미 왕국 같은 것들에 비하면, 약간 시시한 수준이다. 시시하다는 표현은 좀 미안하지만, 어릴 때는 좀 더 자극적인 소재와 이야깃거리에 흥분했었다. 밋밋하달까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에는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선물 받았던 은희경작가의 책이나 박경리 소설들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책들이 더 좋다. 섬세하게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뭐라고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사람들을 보며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애매하게 된 불편한 감정들이 좋았다. 분명하지 않은 찝찝한 감정은 책을 다 읽고도 남아있어서, 책 어딘가를 다시 펴보고 되새겨보고 평론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불편한 게, 아마도 여운 같은 것이 좋아서 다시 비슷한 글을 찾아 헤맨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40대가 되니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그래서 그런 거였다. 화가 나지만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 화는 나를 향하고 그러니 억울하고 그래서 동정하다가 다시 화를 냈다. 종종 외부로 화가 미칠 때는 곧 미안해지면서 후회스럽고 그렇지만 이지경이 된 것에 분노했다. 단정 짓기 어려운 감정과 원인을 따지기 힘든 사건의 결말들을 만나면서 세상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이 인이 박히듯 새겨지고 있는데, 책을 만나며 비로소 정리가 된 거다. 내가 느낀 그 불편한 것들을 책이 대신 말해주니까. 그래서 더 찾아보고 궁금해하고 빠져든 거였다.


내 책 취향 같은 거 누가 궁금해할까 싶다.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요즘 하루라도 길든 짧은 글을 쓰지 않으면 불안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불안증의 정체는 잘 알 수 없지만, 하루를 허투루 살았다는 기분이기도 하고 답답한 미래이기도 하고 그저 허기진 식욕 같은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지런히 쓴다. 오늘은 이런 책 취향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원래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은 리뷰를 쓰려고 했다. 친구 S의 추천으로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대충 5번 이상은 추천도서라고 했던 것 같다) 읽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요즘 내가 읽는 책과 많이 다르네라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은 어릴 때 좋아하던 스타일의 책이라는 생각이 이어지다가, 그다음 좋아하던 책들은 뭐였지 라는 생각의 흐름대로 글이 써지게 된 것이다.


이 글을 버릴까? 고민하며 ‘저장’ 버튼을 눌렀다. 창을 끄고 노트북을 한켠에 치우고 핸드폰을 잠시 잡았다가 다시 글을 열었다. 언젠가 다시 적어서 발행해야지 싶은 마음에 저장해둔다. 하지만 냉장고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음식처럼 잊히고 썩어서 사라진다. 당장 버리기에는 좀 아까운 마음에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넣어둔 음식들은 결국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 냉장고 청소할 때 언제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런 글이 되는 건 싫었다. 글을 쓰지 않을 때 생기는 불안증만큼이나 글을 쓸 때 생기는 애정도 크다 보니. 물론 이 애정을 좀 객관화해서 글을 볼 필요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렵지. 그게 안되니 브런치에 발행해서 반응도 보고, 합평 모임에 가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아무튼 키보드에서 타자를 치고 있는 건 내 손이 분명한데, 생각은 내 머리에서 흘러나온 게 맞을 텐데, 내 글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양새를 자기 맘대로 잡아가더니 꿈틀꿈틀거리더니, 주인인 나의 허락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나돌아 다니고 있다. 그래도 그게 좋아서 이리 껑충 저리 후다닥 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본다. 좋아서 혀를 쑥 내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달려가는 비숑같이 우다다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내 맘대로 낚아채서 내 무릎 위에 앉혀봐야 팔딱거리는 심장은 채 5초를 기다리지 못하고 또 뛰쳐나갈 테니까. 게다가 주인 손 아래에서 그저 조용히 잠자코 있는 건, 그래서 하자는 데로만 명령에 충실한 글은 생명력이 없는 기분이 드니까. 그러니 천방지축 이런 글도 있는 거다,라고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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