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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20. 2024

힘빼는 연습

조급하지 말고 너무 애쓰지 말고 부지런히 천천히

10월 중순에 경주 가야금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10월은 매주 토요일 글쓰기 수업이 있다. 인기 강좌이지만 자주 열리지 않으니 귀한 기회라는 말에 덜컥 등록을 했는데, 등록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지는 만큼 점점 기대가 채워지고 있었다. 커리큘럼을 다시 들여다보고 내가 들을 수준은 되나 돌아보고 그걸 들으면 대단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래에 그런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니 10월 주말에 대회를 가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유쾌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를 막는 거대한 장애물처럼 부담스럽고 싫어졌다. 하지만 바쁜 직장인도 아니고 거절할 수 있는 핑계가 부족했다. 이럴 땐 백수가 뭐가 그리 바빠 라는 말이 가장 슬프다. 토요일에 듣고 싶은 강좌가 있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지난번에도 그 핑계로 안 했잖아 라는 핀잔이 그대로 돌아올 걸 알기에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날 글쓰기 강좌에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하는 이런 슬픔을 아무도 이해하거나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안 간다고 바득바득 우기면 안 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한편으론 가야금도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를 더 좋아하지만 가야금을 그다음으로 좋아한다. 


대회를 준비하는 건 선생님에게 밀착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다. 나는 그저 취미로 하기 때문에 적당히 가락만 떼는 수준으로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혼자 집에서 연주하다 보면 늘 듣던 선생님 소리와 너무 다르니 답답하다. 똑같이 연주하는거 같은데 왜 소리가 튀지? 왜 은근한 소리가 안 나오지? 왜 애절하고 슬픈 소리가 안 나오지? 왜 애매하게 찡찡거리지? 같은 생각이 맴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잡아가다 보면 그 음이 왜 이상했는지를 이해하기도 하고, 연주에 오호~ 지난번보다 나아졌네 라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주말 반납과 잦은 호통이 있더라도 해보고 싶은 매력이 있는 거다. 연주를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는 기회. 이런 생각이 들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야금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직장인 딱지를 떼고 나니 비로소 생긴 욕심이었다. 


그래서 대회를 나가는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직장인의 귀한 주말을 헌납하는 건 어린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는 것과 같다.  지금은 바쁜 직장인의 제한된 리소스라는 제약이 없다 보니 오히려 마음속 우선순위들이 명확하게 드러났고 그것들에게 할애하는 시간과 노력을 조율하면서 애착이 커졌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곡을 먼저 정리해야 했다. 선생님과 논의해서 진양조 짧게 중모리를 길게 연주하기로 하고 자른 곡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수백 번도 더 연습하고 연주한 곡이라 더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호흡과 단전의 힘, 어깨 긴장, 손의 각도와 눈의 시선에 따라 음 하나하나가 달라진다. 순간 긴장을 풀고 검지로 현을 뜯다가 엄지가 단단하게 받치고 있지 않으면 텅하고 빈 소리가 현에 스며든다. 그러니 한음 한음 모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 한답시고 온몸에 긴장이 들어가면 소리는 날카롭고 딱딱해진다. 풀어지는 농현이 있고 힘 있게 조이는 농현이 있고 구르는 게 있고 집는 게 있고.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약간의 차이로 다른 음이 난다. 심지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니 전공생이라도 나이가 들어서도 선생님을 찾아가 소리를 배운다. 


자꾸 같은 자리에서 실수를 했다. 묵직하고 깊이 있게 들어가다가 힘을 살포시 빼야 하는데 그렇다고 단전의 힘까지 빼면 안 되는 그런 음. 실수가 반복되자 점점 움츠러들어 소리는 더 이상해졌다. 편안하고 자신 있게 타야 편안한 소리가 나온다. 가야금을 안고 내 손인양 같이 가야 하는데, 내가 가야금을 못 이겨내고 있는 거다. '아, 왜 안되지.' 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잖아. 손에 힘 빼고 팔 전체로 흔드는 거야. 편안하게. 배에 힘 딱 주고." 

얼핏 들으면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어려운 말이지만 그렇게 몸을 신경 쓰면서 호흡을 하면서 다시 했더니 원했던 그 소리가 나왔다. 

"그래 그거야. 알겠어?"

예전이라면 주눅 들어 "네"라는 대답을 겨우 했을 텐데, 10년을 마주 보았더니 궁금한 게 툭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어떻게 다 아세요?"

"어떻게 알긴,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다 터득한 거니까. 너네는 전공자가 아니니까 듣고 이리저리 해보면서 터득하는 게 잘 안될 거니 일일이 설명해 주는 거잖아. 그래서 내 말이 내 단어가 예쁘지 않아. 교습법 같이 정리하기가 어렵다고. 어깨 풀고 똥꼬에 힘 딱 주고. 그런 거."

똥꼬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정말 그랬다. 선생님은 교습법 책에 적기엔 애매한 표현들을 많이 했는데, 그런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몸에 연습해 보면 원하는 소리가 나왔다. 똥꼬에 힘주는 것도 있고, '커다란 공을 품은 것처럼 그리고 아련하고 슬프게'라든가 '툭 떨어트려 툭'라든가 '편안하게 농현 하는 거야 그러나 무겁게 다 떼면 안 돼.' 같은 글로 써서는 전달이 안될 순간순간의 지침들이 있었다. 


연습 내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힘 빼, 어깨 힘 빼, 목에 힘 빼"였다. 선생님에게 듣는 이야기 중 열 번에 일곱 번 이상은 '힘 빼'인 듯하다.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야금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무지게 크게 뜯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점점 올라가고 목이 뻐근해진다. 그럼 가야금은 기가 막히게 그 상태를 알아채고 딱딱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어설퍼진 소리를 낸다.

"인생이 그래, 힘을 빼야 해. 가야금도 힘을 빼. 힘을 다~ 빼고 편안하게 타야지 그제야 소리가 나와. 욕심이 가득 차잖아 그럼 선생들도 소리가 안 좋아져. 공력이 안될 때는 힘 빼면 농현이 안되지. 그래서 시간이 더 필요한 거야 연습이 필요한 거야. 그럼 몸에 힘 다 빼고도 소리가 나온다."

이어서 한마디 더 붙이셨다.

"그러니까 그냥 인생 행복하게 사는 거야. 뭐 그리 욕심 많이 부리지 말고."


네, 선생님. 맞아요 욕심낸다고 열심히 한다고 모두 다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좌절하더라고요. 남들은 쉽게 되는 거 같은데 나만 어려운 것 같고. 나만 안되는 거 같고. 어디 점이라도 보고 굿이라도 해야 하나 싶고. 근데 또 문이 하나인건 아니니까. 그냥 해보는 거죠 욕심을 내려놓고. 제 글도 그래요. 잘 쓰고 싶고 얼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그러면 힘이 잔뜩 들어가요. 어디서 어떻게 힘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많이 들어가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깨달음이 생기면 힘이 빠지겠죠. 몸에 힘을 빼고도 묵직한 농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애쓰지 않고 편안한 하지만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글이 나오겠죠. 


다시 연습이 시작되었다. 중모리는 집에서 연습을 좀 더 하고 간 덕분인지, 수월하게 넘어갔다. "연습했나 보네."라고 툭 던지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져 귀가 찌릿했다. 가야금을 할 땐 '잘했다. 멋있다.' 보다 '연습 많이 했나 보네.'가 칭찬이다. 그만큼 조금 더 나아졌다는 이야기니까. 애쓴 게 영향이 있었다는 거니까. 시간을 들이는 만큼 모두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나아질 수는 있다. 그러니 조급하지 말고 너무 애쓰지 말고 천천히 부지런히 연습하는 거다. 그렇게 살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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