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를 보고
저런 출판사에서 내 책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작가가 아닌 출판사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대답 없는 외로운 짝사랑이긴 하지만, 출판사에 대해서는 금사빠에 속한다.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그 작가의 팬이 되기도 하고 출판사의 팬이 되기도 한다. 기획자와 편집자의 안목에 감사할 때도 있고, 내용은 조금 내 스타일이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멋진 표지디자인과 편안한 글자체, 손 끝에 전해지는 표지와 내지의 질감에 감동받기도 한다. 종이책을 사르륵 넘기는 기분이 좋아 필통에는 늘 작은 핸드크림을 들고 다닌다. 카페에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손이 금세 건조해져서 종이를 넘기는 손끝의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거스름 없이 책에 빠지기 위해 그럴 때마다 핸드크림을 꺼낸다. 이동하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는 하드커버보다 소프트커버에 손에 쏙 들어오는 조금 작은 책이 좋다. 하지만 도록이나 사진책, 그림책 같은 아트북은 책장에서 삐죽 튀어나와 도드라지는 형태가 더 좋다. '난 예술 책이란 말이야.'라는 옹골찬 고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책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옆에 커피를 한잔 두고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며 구경한다. 커피가 엎어져서 책을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니, 그냥 머그잔이 아니라 뚜껑 달린 보온컵으로 준비해야 한다. 새 책에는 갓 구운 빵처럼 갓 인쇄한 종이 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좋아 가끔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도 한다. 이때 번들거리는 코 기름이 책에 묻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딱 그 향기는 아니지만 Ink Wood 향수를 외출 시 종종 뿌린다. 그날은 책을 만나기로 계획한 날인데, 예를 들어 서점에 들른다거나 북클럽 모임에 가는 날이다. 미리 책 향기를 뿌리고 맘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상상하고 벌써부터 읽는 사람이 되어 길을 나선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 향수를 귀밑과 손목에 뿌리고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책과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모임은 서촌에서 진행되었는데, 서촌 그라운드 시소에서 하는 전시 <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를 보고 근처 카페에서 책 이야기를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전시에서 슈타이들 출판사와 사랑에 빠졌다.
슈타이들 STEIDL은 독일의 시골마을 괴팅겐의 작은 골목에 있는 출판사이자 출판 디렉터 이름이다. 출판사 건물 하나에서 기획과 편집, 디자인, 인쇄까지 한 권의 책이 나오는 모든 작업이 이루어진다. 보통의 출판사에서 기획, 편집, 디자인 등이 진행되면 인쇄는 인쇄소에 맡기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시스템이다. 전시는 4층까지 이어지니 원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천천히 보게 된다. 계단마다 슈타이들의 명언이 적혀있고, 층마다 새로운 프로젝트 및 아티스트들의 소개가 있다. 그러니 출판사 전시회면서 동시에 많은 아티스트의 작업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압축 전시회의 형태이기도 하다. 슈타이들 건물의 계단마다 책들이 쌓여있는 것처럼 중간 유리벽 옆으로 책이 한 줄 누워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좋아하는 사진작가 낸 골딘을 발견하곤 창문으로 누워있는 그녀의 사진책을 사진 찍었다.
미술관을 가면 늘 도록을 산다. 전시된 오리지널 작품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도록의 형태로 적은 금액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시는 입장과 퇴장 사이에만 존재하지만, 도록은 언제나 손 닿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그 작가와 예술, 전시를 만날 수 있다. 매번 무거운 도록을 사서 낑낑거리는 모습은 간혹 이해받기 어렵기도 하다. 그 무거운 것을 왜 매번. 게다가 한두 푼이 아닐 때도 많은데 꾸역꾸역 사는 것인지. 그래도 무겁게 가져온 도록을 가방에서 꺼내는 순간 나는 그 전시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책을 보다가 글을 쓰다가 일상생활을 하다 갑자기 떠오르는 작가나 그림이 있어 도록을 펼쳐서 찾다 보면 역시 사길 잘했어라고 뿌듯해한다. 그래도 굳이 저 무거운 책들을 매번 고민도 하지 않고 사는 행동을 나도 가끔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 전시를 보며 나를 이해했고 이해받았다. 전시 자체도 좋았지만, 그래서도 너무 좋았다.
앤디 워홀, 헤드 류샤, 야콥 투게너, 데미안 허스트 등 많은 작가의 작품은 슈타이들을 만나 책의 형태로 ‘멀티플(상업적 목적으로 다작이 되어 작가가 사인을 하여 한정판으로 판매되는 작품) 예술‘이 된다. 소수를 위한 비싼 작품이 아니라 책의 형태로 다수에게 다가가는 예술이 되는 건데, 도록으로라도 작품을 곁에 두고 싶은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책이자 예술품이다.
한 층을 올라가면 짐 다인의 공간이 나온다. 거대한 타이포그래피 작품들과 책 표지를 모아둔 벽, 그리고 중간에 둥둥 떠있는 책 모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짐 다인은 매주 한 권의 책을 내는 프로젝트를 했다. 일 년에 한 권 나오기도 어려운 일을 일주일에 한 권이라니. 그만큼 많은 예술적 영감이 샘솟고 아웃풋으로 만들어내는 실행력과 어마어마한 양을 지속적으로 분출해 내는 끈질김이 있다는 말인데, 상상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의 안에는 얼마나 많은 상상과 생각과 감각이 터져 나오고자 소리치고 있는 것인가. 부럽다가도 무서워졌다. 만일 그게 나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짐 다인은 슈타이들과 함께 정말 1주일마다 한 권, 그래서 1년에 52권의 책을 만들어냈다.
중간중간에는 아티스트와 만든 작품뿐 아니라 출판이 이뤄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그래픽, 아티스트와의 인터뷰영상, 다양한 인쇄용지 체험 공간, Q라는 글자로 볼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 같은 것들도 볼 수 있었다. 종이, 인쇄, 출판 덕후가 콘텐츠를 담은 형태에 머무르던 책을 어떻게 예술의 경지까지 올라가게 했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날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작가는 다야니타 싱이라는 사진작가였다. 그녀는 여행을 가면 사진을 찍고 일기를 써서 그걸로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한 권은 자신이 갖고 한 권은 같이 간 친구에게 주었는데, 그 책을 본 슈타이들은 그녀를 설득했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이 되었다. 아코디언 식으로 접고 펼칠 수 있었는데 길게 펼쳐진 책은 그 자체로 전시품이 될 수 있었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생활하며 늘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고, 최근에는 그 사진으로 포토에세이를 브런치에 연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일상과 사랑하는 친구와의 소통이 세상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작품이 되는 과정이 정말 흥미로웠다.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책의 형태로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그러니 슈타이들과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거였다. 이 전시를 보기 전에는 타센 Taschen 만 알고 있었는데, 취향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버킷리스트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언젠가는 슈타이들에서 내 책을 내야지. 가당찮은 이야기라 생각해서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꿈은 원대하게. 미래는 아직 모르는 거니까.
나오는 길에 테세우스 찬 Theseus Chen의 베르크 32호 Manifest를 한 권 샀다. 테세우스찬이 설립한 출판사 베르크와 슈타이들이 협업하여 만든 책 중 가장 최근의 책이라고 한다. 그보다는 그냥 백설공주 그림이 맘에 들었다. 공주스럽지 않고 괴기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아이가 크레용으로 열심히 그린 그림 같이 서툴러 보이는 이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책이 뭔지, 이 그림은 무슨 의미인지, 테세우스 찬과 슈타이들은 이 책을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수상한 점 투성이다.
책은 다른 책처럼 반질반질한 표지가 아닌, 종이 질감이 물씬 느껴지는 하드커버로 되어있다. 게다가 손글씨로 쓴 텍스트가 표지 전면을 가득 채운다. 종이박스같이 서투른 듯 그러나 날것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책이 옆에서 얼른 열어봐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다. 아트북은 보고 뜯고 씹고 내 맘대로 해석하며 혼자 낄낄거리거나 중얼거리거나 깨닫거나 울거나 그럴 수 있는 평화로운 것이니까. 전시회장에서 점잖은 척 뒷짐 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볼 필요가 없으니까. 얼른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배 깔고 누워 한 장씩 천천히 넘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