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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30. 2024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

박경리의 <죄인들의 숙제>를 읽고

박경리 소설 읽기 챌린지의 두 번째는 <죄인들의 숙제>였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그저 제목만 보고 선택했던 책인데, 주문하고 도착한 책을 보고는 '아차' 했다. 꽤나 두꺼웠기 때문이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얇은 책 두 배나 되는 분량에 양장본이라 묵직했다. '토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나 자신을 북돋으며, 다산북스챌린지의 과제를 확인하고 책을 열었다.


그리고 3주가 지나 책을 덮었다. 다 읽고 보니 조금 더 빨리 읽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초반, 그리고 후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답답하고 어두웠다. 고구마 같이 답답한 것을 챌린지 규칙 때문에 매일 아침 조금씩 읽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이냐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침을 시작하기에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녁에 읽기도 좋지 않았다. 왠지 꿈자리마저 뒤숭숭하고 우울할 것 같았다. 그저 어느 하루 날 잡고 방구석에 처박혀 코를 박고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인물들의 독백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둡고 우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인내하고, 박경리 작가의 문장력과 나의 호기심에 기대어 단숨에 읽어버렸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챌린지로 읽었던 <김약국의 딸들>에서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마냥 유쾌하진 않았지만, 특히 한실댁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중심을 잡고 다시 살아가는 용빈이를 보며 안심했었다. 오히려 그들의 비극을 보며 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냉정함과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달랐다. <김약국의 딸들>을 읽는 내내 나는 용빈이가 되어 그녀처럼 세상을 보고 그녀를 응원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당연하게도 희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희련을 응원했었다. 그러나 책은 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았다.


희련에게는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언니 희정이 있다. 둘은 배다른 자매인데, 저러고 어떻게 한 집에서 사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희정은 늘 희련을 컨트롤하려 하고 희련은 희정의 신세한탄과 가짜 눈물이 만들어내는 감옥 안에서 산다.


희정은 아버지가 어린 여자와 재혼하게 되면서 외가댁에서 자랐다. 부모의 부재가 문제의 시작일 텐데, 살기 위해 주변을 조작하거나 음해하는 습관은 외할머니의 보호아래 '불쌍한 것'으로 동정받으며 굳어졌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스무 살이 넘어 아버지와 새어머니 집으로 들어간 희정은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자신을 언니 언니 하며 따르는 희련을 만났다. 희정은 희련을 아끼지만 보통 생각하는 아이를 향하는 무조건적인 애정은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조련했다. 그건 보호이기도 하고 동시에 학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재혼 가정의 희생자로 만들어 새엄마와 아버지의 죄책감을 예리하게 긁었다. 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하고 새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희정은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눈 밑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생기는 사고를 겪지만, 그 과정에서도 희련만큼은 상처 없이 키워냈다. 그러니 희련이 희정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보상심리에서 나온 것이며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 초반 희련은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 같은 유약한 인물, 동시에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한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고, 그런 희련을 늘 표독스러운 말로 몰아대는 희정은 생명력이 강한 엉겅퀴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이 되면 희련이 단호하고 강한 모습으로 희정의 빚을 해결한다. 소설 처음에 희련이 이야기한 것처럼 결국 희정에게 돈으로 보상한 것이다.


희련에게는 언니처럼 기댈 수 있는 은애라는 친구가 있다. 희정은 은애를 싫어하며 자신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희련을 못마띵해한다. 희정은 과거의 종속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즉 희련이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혹은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돈놀이 (곗돈을 빌려주고 불리는 것)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곧 시작될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은애라고 해서 희련의 응석과 고민을 마냥 받아줄 만큼 정신이 건강하고 마음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 전 유부남인 한현설과 연애를 했고, 그 후 한현설의 친구인 정양구와 결혼했다. 남편 정양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체계 안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충실했다. 그리고 그 밸런스를 만들기에 은애라는 인물이 아내로서 적합하다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은애가 남편 정양구와 애인 남미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한 후, 그녀는 냉장고 같은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이 도진다.


희련과 정양구가 확실히 인지할 만큼 은애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희정의 친오빠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다. 성공한 사업가인 오빠 강은식은 은애의 일로 희련과 친밀감을 쌓게 되고 희련은 태어나 처음 생명의 샘이 솟아오르는 기운을 느낀다. 삶의 목적이 없어 늘 방황하고 애정에 메말라 있던 희련에게 촉촉한 단비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강은식 또한 희련을 사랑하게 되어 답답한 고구마가 끝나는 것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강은식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신병 DNA 때문에 아이를 못나는 몸이 되었으며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희련에게 고백했다.


서울에서 돈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에게 강은식은 좋은 타깃이 된다. 성공한 사업가 강은식과 결혼하고 싶은 인숙은 이 소설의 대표적인 속물이고 악인이다. 돈에 대한 욕심, 명확한 목표의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건 그것을 마음에 품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다. 인숙은 희정이 돈 문제가 생기도록 방조하고 거짓정보를 흘려 희련과 강은식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리고 희정의 빚문제에 최상무를 엮어 희련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 사이 본인은 더 많은 부를 쟁취하고 강은식을 차지하고자 노력한다. 20년의 사회생활 중 한두 번은 족히 만났을, 그러나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입의 사람이었다. 내 머릿속에 두어 명 정도가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인숙은 희련을 마음에 두고 있는 최일석(최상무)과 손을 잡고 희정의 빚을 수단으로 그들을 옭아맸다. 갈등의 시작이었다. 혜련과 이혼한 장기수는 장래가 불분명한 화가인데 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 이혼했지만 그 후 희련에게 계속해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혜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혹은 불감증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상황을 통제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 그 후 계속해서 후회하고 곁을 맴돌았다. 정말 지질한 남자의 전형이다. 그리고 스토커의 모습이 보여 조금 오싹해지기도 했다. 인숙은 이러한 장기수를 이용하여 희련의 마음에 강은식에 대한 오해를 만들고, 동시에 강은식에게도 오해의 씨앗을 뿌렸다. 결국 둘은 오해를 풀지 못하고, 아니 서로에게 어떤 오해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헤어졌다.


답답한 건 강은식이 그 이후 인숙의 인품과 속내를 알게 되어 모든 오해를 풀었지만, 희련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해는 자연스러운 결말을 만든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물론 일본에 가기 직전 혜련의 집에 찾아가고 여러 번 전화를 걸긴 했지만 이미 혜련은 상처를 받고 고모집으로 가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한다. 강은식이 혜련을 두 번째 만났을 때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었다. 내가 본 둘의 공통점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으며, 사랑과 결혼에 결격사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늘 행복보다 불행이 어울린다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는 유약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문학을 짧게 요약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압축되는 순간 문장과 문장 사이에 스며든 작가의 한숨이 사라지고, 인물 사이의 예민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왜 그랬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단서들이 날아간다. 그래서 책 리뷰를 할 때 줄거리는 가급적 요약하지 않으려 하며, 책을 덮고도 남아있는 잔재 같은 문장이나 내용에 붙은 감정과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나도 모르게 줄거리가 나와버렸다. 소설에 나온 서사와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이해하고 곱씹어봐야 왜 박경리 작가가 이렇게 썼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읽다 보니 많은 내용이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되새김질이 필요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시절은 혼돈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며 효율성을 극도로 높인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들이 전파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식사와 빨래 같은 집안일을 해주는 식모, 그러니까 유물 같은 옛 것이 존재하기도 했다. 은애가 이야기한 냉장고, 정양구의 애인 남미가 살던 아파트 같은 획일화된 문명의 결과물은 모두 똑같이 보이는 삶으로 흘러가는 비인간성을 뜻하기도 하는데, 희련을 포함한 인물들은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정양구와 한현설의 긴 대화에서, 장기수와 친구 K의 대화에서 문화와 문명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문명은 균일적인 지식 공급의 결과로 편리함이 극대화되고 대량생산의 이윤이 우선시 되면서 다양성은 사라지고 획일화된 효율성만 남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칫 지루해 보이는 이 부분은 소설에 흐르는 고민을 닮았다. 문명이 문화를 말소시킨다는 주장. 은애는 냉장고 같은 기계가 되길 거부하다 미쳐버리고, 희련은 문명에 순응하고 강해지는 것을 포기한다. 강은식은 이미 문명이 만들어낸 획일화된 효율성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했을 것이나 문명이 문화를 잠식시키는 것은 거부하고자 했다. 부자가 되면 양반이나 속물이 될 수 있는데 속물을 지양한다는 언급에서 그러한 성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인숙과 최상무는 고민은 없고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서려는 욕망만이 존재한다. 희정은 그 욕망의 희생양이 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는 엉겅퀴풀이기도 하다. 정양구는 양 극단의 두 가지에 대해 절제된 균형감으로 어느 한쪽으로 휩쓸리지 않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고구마는 잔뜩이지만 등장인물이 왜 저런 판단을 내리는지, 왜 저런 성격인지는 진득하게 읽다 보면 차츰 이해가 된다. 아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 하던가. 심지어 인숙과 최상무, 장기수의 행동조차 공감은 가지 않지만 이해는 간다. 다만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 읽는 내내 불편함을 만들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과 상대의 반응을 이해하고 미안해하기도 한다. 가령 희련이 중반정도부터는 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자신이 그저 방어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미안해한다. 정양구는 애인 남미의 존재로 인해 아내 은애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성실한 남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대로 은애가 건강히 돌아오고서는 남미를 동정하기도 한다.


그러니 나오는 모두가 죄인이었다. 그 죄목과 죄질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불쌍한 죄인이었다.  정양구의 말처럼 살아남으려면 죄인이 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강한 것은 죄의식을 갖지 말아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살아남아 있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어리석음, 미안함 같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적당한 타협'을 하지 못한 결벽증을 가진 희련은 결국 죄인이 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혼돈의 시대에 나온 많은 소설들은 전체 글에 흐르는 분위기가 퇴폐적이거나 음울하거나 암담하다. 그러다 주인공은 자살을 하고, 이 혼돈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폐배자 혹은 희생자가 되거나 적극적인 선택을 한 승자가 되기도 한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묘하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럼 이 소설을 읽은 나는, 혹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스러워졌다. 희련이처럼 은애처럼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런 순수성으로 그때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이 시대를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개인적인 욕망과 순수성이 부딪힌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밸런스를 잡아가는 정양구처럼 몇 가지 페르소나를 준비해서 나를 단단한 성 안에 보호하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욕망에 솔직하여 인숙처럼 직진해야 할까. 어찌해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한다한들 내가 변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정답이 없는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제목이 <죄인들의 숙제>였구나! 살고자 하는 우리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거였다. 그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고, 우리가 죽인 무수한 희련에게 속죄하는 방법이다. 그거로구나. 박경리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바빴던 주말이 지나 컨디션이 저조했다. 그런 연유인지, 이 책의 무게만큼 내용과 문장이 무거웠기 때문인지, 책 리뷰를 쓰는데 무척 고생했다.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써졌고, 퇴고하기 위해 다시 읽는 문장이 버거웠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책을 펼치고 독서노트를 뒤적이는 손가락이 무거웠다. 손가락에 어깨에 눈에 몸에 무거운 추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죄인이 된 기분일지, 희련이 된 기분일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영영 끝나지 않을 숙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100자 평>

살아남고자 하는 우리는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고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죄의식을 버리고 강해져야하는 시대이니. 그러니까 더더욱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하는거다. 살고자 하는 이들의 평생에 걸친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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