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모 &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 공연을 보고
유튜브 뮤직의 큐레이션이 늘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새롭고 맘에 드는 곡을 많이 발견하는 편이라 잘 쓰는 편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임윤찬을 검색해 듣다가 오페라 라크메의 꽃의 이중창을 듣다가 비발디의 오페라를 듣다가 그러다 양인모의 우아한 유령을 알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을 종종 들으면서도 그쪽 분야에 상식이 별로 없다. 그저 좋으면 듣지 뭘 알아보거나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팝이나 K-pop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튜브가 추천해 주는 곡 들 중 귀에 꽂히는 게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고 계속 틀어두곤 한다. 양인모를 알게 된 것도 그 덕이었다.
양인모가 연주한 우아한 유령을 'Classic'이라는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물릴 정도로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그 곡이 나오면 듣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쯤 부천 아트센터에서 온 광고문자에서 양인모 공연 소식을 접했다. 비록 요즘은 양인모를 듣지 않지만, 한동안 푹 빠져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반복해서 들었을 그 곡을 연주한 청년이 보고 싶었다. 실황이 주는 감동이라는 게 또 따로 있으니까.
우아한 유령은 재즈풍 음악으로 작곡가 볼턴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 양인모의 연주만 듣다가 문득 이 곡이 궁금해 다른 곡을 검색해 들어봤는데, 연주자에 따라 곡의 느낌이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또 한 번 느꼈다. 양인모는 딱딱딱 끊어지게 연주를 하기보다는 음의 끝까지 소리를 꽉 채우는 느낌이다. 4분 음표 다음에 8분 음표가 2번 나온다면, 그 사이 아주 약간이라도 틈이 벌어질 수도 있을 텐데 양인모는 4분 음표에게 할당된 시간을 아슬아슬 넘기기 직전까지 아니 오히려 살짝 넘길 정도로 채우는 느낌이다. 만일 유리잔이 있다면 다른 연주자들은 물이 흘러넘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음잔을 악보에 맞춰 채우기 위해 약간 부족할 수 있지만 넘어간다면, 그래서 그 연주가 좀 더 담담하거나 담백한 느낌이라면, 양인모가 연주한 4분 음표라는 물 잔은 표면장력으로 겨우 버틸 만큼 가득 채워진 소리였다. 그래서 그가 연주하는 우아한 유령은 바이올린 현에 이끌려 감정이 춤을 추듯 이곳저곳을 넘나들었다. 마치 낚싯줄에 매달린 물고기가 강태공의 손에 의해 휘둘리듯 말이다.
궁금해졌다. 바로크를 연주하는 양인모의 곡은 어떨까? 내가 느끼는 바로크는 좀 더 딱딱 끊어지고 절제미가 있었다. 그래서 밀리거나 복잡하거나 속도가 빠르거나 긴장되는 운전을 할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종종 듣곤 했다. 양인모가 연주하는 바로크 음악은 어떨까? 다만 프로그램이 비발디의 <사계> 인건 조금... 아쉬웠다. 비발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냥 사계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나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심지어 가요에서도 조금씩 듣던 곡이라 또다시 물려버리는 건 아닌지, 맘먹고 간 공연인데 실망하는 건 아닌지, 좀 더 새로운 레퍼토리를 듣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 있었다.
예매한 것도 잊어버리고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예매를 했을 때는 밤에도 에어컨을 틀어야 할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전이었나? 공연은 갑자기 찾아온 가을 덕분에 긴 팔 재킷을 꺼내 입어야 하는 날 저녁이었다. 공연을 보러 갈 때는 셔츠나 재킷을 입는 게 좋으니까, 약간 쌀쌀한 날씨인 게 맘에 들었다.
공연 1부는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연주들로 구성되었다. 하프시코드의 소리가 청량하게 공연장을 가로질러 나갔고, 바이올린과 첼로 등 현악기들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공간을 채웠다. 고악기의 매력은 일전에 신년 음악회에서 만난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양창자를 이용해 만든 현은 현대의 현악기가 가진 날카롭고 예리한 소리 보다 좀 더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그래서 조금 둔탁하거나 필터링된 듯한 소리같기도 하지만, 바로크 음악의 편안한 분위기를 더욱 부드럽고 안정감 있게 만든다. 바이올린과 첼로연주자 등 몇몇 분들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젊은 남성과 여성도 물론 있었지만, 내 눈을 끌었던 것은 그 두 분이었다. 연주에 감정이 담겨 리듬에 흥이 담겨 바이올리니스트는 상하체를 움직이며 격정적으로 연주를 했고, 의자에 앉아있어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적은 첼로리스트는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고 흥을 돋우었다. 분명 실내악이고 서양 클래식인데 한국 산조 음악에서 고수가 추임새를 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공연 2부는 비로소 기다렸던 양인모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 함께 비발디 <사계> 전곡을 연주했다. 전체를 실황으로 들은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다. 비발디는 내가 느꼈던 전형적인 바로크곡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바흐를 통해 바로크를 좋아하게 되어서일 텐데, 비발디의 사계는 좀 더 역동적이고 서정적인 곡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사계>를 양인모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음표의 마지막 끝 한 방울까지 소리를 채우는 그답게 연주는 강렬하고 리듬감이 넘쳤다. 기다렸던 연주자라고 해서 양인모의 소리만 도드라졌던 것도 아니었다.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소리는 고악기인 것을 잊을 정도로 강렬하고 경쾌하고 그리고 여러 대의 악기가 하나인 듯 호흡이 딱딱 들어맞았다. 봄에서 재잘거리는 대화, 여름의 강렬한 합주, 듣다 보면 양인모의 시작 시그널과 호흡에 맞춘 듯 하지만 어느 순간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리드에 양인모가 스며들듯 들어가 연주하기도 한다. 고악기로 연주하는 바로크 음악은 음색이 좀 심심하다는 나의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연주였다. 사계는 너무 잘 알고 자주 들어서 지루할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완전히 날려버리는 연주였다. 지휘자가 없이도 연주자들의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조화를 이루며 흘러갈 수 있다는 걸 본 연주였다. 자유로운 그들의 몸집과 연주는 단 일의 불협화음도 만들지 않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게다가 첼로와 하프시코드를 제외한 모든 악기는 연주 전체를 통틀어 앉지 않고 서서 곡을 소화한다.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가 아닌가. 그 에너지는 객석까지 전파되었다.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연주에 감정을 담는 양인모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을 보며 모든 객석은 숨을 죽이고 연주의 강약을 따라갔다. 듣는 것뿐만 아니라 눈으로 연주자들의 모든 모습을 담겠다는 집중력 또한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서 한 악장이 끝나면 여기저기에서 비로소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고조되는 멜로디에 따라 나 또한 숨을 편안히 쉬지 못하고 긴장했다가 다음 곡이 준비되는 짧은 순간 잠시 이완했다. 그런 객석의 열정이 무대까지 전달되었는지 양코르를 2곡이나 하고 공연은 예상보다 조금 늦게 끝났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끝나고 화장실을 갔는데, 스텝이 불을 다 꺼버려서 컴컴한 어둠 속에서 손을 씻고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관객이 다 빠져나가기도 전인데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양인모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사계>는 운전하면서 듣지는 못할 것 같다. 중간중간 숨을 참아가며 클라이막스를 기다리게 되고, 일사불란한 현을 바라보며 같이 감정이 널뛰기 뛰다가, 가끔씩 눈을 감고 멜로디를 따라 생겨나는 봄의 지저귐, 여름의 정열, 가을의 완숙함, 겨울의 서정을 상상해야 하니까. 누가 클래식이 지루하다고 했던가. 누가 바로크를 심심하다고 했던가. 편견을 걷어내고 보고 듣다 보면 눈앞에 닥친 작은 걱정거리는 잠시 사라져 버린다. (어젯밤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었는데 공연 내내 과제를 잊고 있었다) 그만큼 집중하게 만들고 가끔 신나고 가끔 슬프고 전반적으로 재미있다.
음악을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남길 수밖에 없는 건 소리가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 남긴 글을 나중에 보고 추억하며 다시 그날의 감동을 일부라도 되새기고 싶은 마음. 이렇게 좋은 곡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더 알았으면 하는 마음. 일분일초 휘발되듯 사라지는 소리의 기억을 붙잡고자 글을 쓰고 있다. 어젯밤에 두 손을 마주 잡고 무대를 바라보던 그때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생각난다. 유튜브 뮤직을 열어서 사계를 다시 재생해 봐야겠다. 이번엔 좀 덜 긴장하고 편안하게 즐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