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고
S가 다섯 번 추천했나? 아니 열 번이었나? 서점에서 슬쩍 보니 삼 센티미터는 될 만큼 두툼했다. 동화 백설공주에서 따온 제목이 왠지 어그로를 끌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고. 게다가 베스트셀러라니, 너도 나도 다 보는 거잖아, 나까지 볼 필요 있을까?라는 이상한 생각으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S가 읽어보라는 등쌀 추천에 책을 사게 되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사는 걸 S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많으니 좀 정신이 없을 거라는 경고를 사고 나서 뒤늦게 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고 50페이지가 넘기 전에 이미 수십 명의 등장인물로 정신 사나운 걸 떠나서, 누가 누구인지를 도통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술집 ‘흑마’는 그 동네 핫플인가? 왜 이렇게 손님이 많단 말인가. 손님뿐만이 아니다.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며 나누는 대화에 종업원들이 여러 명 등장하고, 사장에 사장오빠에 부모에 뭔가 비슷비슷한 이름이 계속 나왔다. 게다가 소설 초반이니 이 중 어느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나갈지? 중요한 복선을 암시할지? 범인으로 지목이 될지? 그걸 모르니 나오는 모든 인물을 대충 알고는 있어야 했다. 등장인물이 많은 것이 다가 아니었다. 하필 그 이름이 읽기도 어려운 독일 이름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읽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기억이나 날까? 예를 들어 ’ 흑마‘에는 아멜리 프뢸리히가 나오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멜리”라고 부르니 어느새 아멜리로만 나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프뢸리히 부인은~‘이라는 부분이 나오면, 아니 이건 누구야?라고 카오스에 빠졌다가. 메모지를 들춰내고서야, 아 아멜리 새엄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 독서노트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등장인물의 특징과 관계를 메모하거나, 좋은 문장들을 기록하는 용도로 책을 읽을 때는 꼭 필요한 것인데, 이게 안 보이는 거다. 독서 노트를 쓰는 건 글쓰기 스승인 편성준 선생님을 따라 시작한 습관이었다. 엄마 집에도 남자친구 집에도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젠장. 무더기로 쏟아지는 인물들에 매장당하지 않기 위해 메모지에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독서노트를 꼭 찾아서 다시 제대로 정리해야지.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꼭 내 소중한 주황색 독서노트여 나에게 돌아오라. 아직 읽고 있는 책들이 많단 말이다! (그 노트에 메모 중인 책들이 아직 있단 말이다!)
(스포 주의)
이 책에 흥미가 생긴 건 요즘 나오는 같은 제목의 드라마 때문이다. 그렇다고 드라마를 본 건 아니다. 얼마나 재밌으면 드라마로까지 나오나?라는 생각이 트리거가 되었다. 드라마와 책은 많이 다르다고 하니, 따로 드라마도 챙겨봐야겠다.
이야기는 토비아스라는 잘 나가는 청년이 여자아이 2명의 살인사건 범인이 되어 10년형을 지내고 출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죽은 것이 분명하다는 정황과 여러 증거로 범인으로 지목되고 결국 유죄판결이 난 것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예상할 수 있다시피 토비아스는 진범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대체 왜 어떻게? 이걸 밝혀나가는 게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등장인물이 정신 사납게 많은 것처럼,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도대체 누가 죽였다는 거야? 누가 누명을 씌운 거야?라는 질문이 끝나지 않는다. 누구는 고구마를 잔뜩 먹은 거 같다고 했지만, 그렇진 않다. 오히려 형사 피아 키르히호프와 올리버 보덴슈타인의 수사를 따라가며 범인을 유추해 보고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수많은 떡밥들이 던져지고, 마지막까지 숨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붕어빵을 하나 사 먹었는데, 좋아하는 팥이 꼬리까지 꽉 차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메모를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 그 메모들은 손때가 묻고 구겨지고 지저분해졌다.
게다가 재미있는 건, 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들이 어릴 때 읽은 셜록홈스처럼 늘 예리한 관찰력으로 추리하고 늘 비슷한 컨디션이며 개인사가 추리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인간적인 그러니까 결국 월급 받고 일하고 있는 직장인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피아는 집을 증축하고 남자친구와 말들과 살고 싶은데, 알고 보니 지금 집이 불법으로 지어진 집이라 증축은 커녕 집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고, 올리버 반장은 와이프가 깜쪽같이 자신을 속이고 바람을 펴서 일상을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또 살아야 하니까, 그 말은 형사로써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일을 꾸역꾸역 해치우고, 종종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간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 카리스마로 사건을 해결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영웅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억울한 주인공이 다 해결하고 악인을 해치우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형사들의 잘못된 수사로 일어난 일이지만 결국 (다른) 형사들이 일을 해결하는 것에서 평범한 안도가 흘러나온다.
밝혀지는 악인은 결국 악인이었다.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용서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부족한 존재였다. 불쌍하다는 연민조차 들지 않는 그냥 나쁜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왜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어린 시절 학대 같은 상상할 수 있는 이유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냥 그들은 나빴다. 작가는 그런 나쁜 인간들도 있다는 걸, 웃고 있는 가면 속에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생명마저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소설을 통해 이야기한다. 심지어 평소 신망이 두터운 가람, 특히나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실은 처방해선 안될 약을 처방했고 살인을 눈감아줬고 결국 살인을 시도하기까지 이르는. 의사라면 응당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태연하게 저지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따뜻한 존경받는 사람으로 행동했다는 것에 치가 떨렸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건 그저 매력적인 주인공이나, 그 주인공이 처한 불행, 그리고 그걸 이겨내는 과정, 스릴과 반전,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 외 여러 가지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로 악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후회하거나 바로잡으려고 시도라도 하거나 고민한다. 개인 삶을 고뇌하면서도 본분(형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입체적인 다양한 인간들이 나오기에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공감하며 보게 된다. 처음엔 ‘왜 올리버 어머니 생일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살인 사건과 전혀 상관없잖아.’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것 또한 사람 이야기이니까. 올리버 이야기에서는 올리버에 흠뻑 빠졌다가, 피아 이야기엔 피아에게 흠뻑 빠졌다가, 토비아스 이야기엔 토비아스에 흠뻑 빠졌다가. 10명이 넘는 아이돌 그룹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최소 한 명은 있을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이 책 어딘가에 하나 둘쯤은 있을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저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정도가 아니라, 전체 마을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큰 재벌기업과 정치적 리더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밑에서 손발이 될 수밖에 없는 마을사람들, 그 안에 각자가 저지른 실수와 악행을 덮기 위한 행동과 불안 같은 것들이 한데 뭉쳐 죗값을 치르고 돌아온 토비아스를 다시 집단적으로 괴롭힌다. 작은 마을이 집단으로 한 사람 그리고 한 가정을 파탄낼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권력이 집단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진실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공포를 보여준다. 더 크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 시, 혹은 국가 단위로 권력의 교묘한 활동들 (선해 보이는 활동과 이미지 구축 행동들)로 집단이 얼마나 쉽게 조정당하고 우매해질 수 있는지, 그 안에 권력이 원하는 데로 소수가 고통받고 더 큰 권력을 받게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셋째로 문제 해결 (진범을 찾는) 과정에 도움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위치와 역할에서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계속 이야기한 형사들도 그렇지만, 토비아스도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자신의 무죄를 믿어준 아멜리를 걱정하며 스위스 산장에서 얼어 죽을 각오를 하며 걸어 나온다. 아멜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선입견 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살인자 낙인이 찍힌 토비우스와 자폐증이 있는 티스를 대할 때)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다. 토비는 오랫동안 몹쓸 약을 먹어 기억을 잃어버리고 제대로 된 삶을 살기 힘든 상황이지만 끝까지 아멜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폐라는 틀을 넘어 고군분투한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토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토비우스는 누명을 벗고 범인을 체포한 것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아멜리라는 사랑스럽고 용기 있는 심지어 10살이나 연하인! 여자가 있지 않는가. 올리버는 새로운 인연으로 설렘을 시작하고 피아는 동물들과 남자친구와 함께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집을 소개받는다. 물론 많은 이가 죽고, 상처받았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그저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가장 염려했을 토비우스가 앞으로 잘 살아가겠거니, 어쩌면 상당히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거니 싶은 생각은 이 소설을 동화처럼 만든다. 토비우스 왕자는 아멜리 공주를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 백설공주는 동화 속에서 왕자님의 키스를 받고 저주에서 풀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면, 토비우스는 용기 있는 아멜리 덕분에, 성실한 형사들 덕분에 살인자라는 저주에서 풀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
소설의 해피엔딩처럼 나는 주황색 독서노트를 찾고 싶다. 이 메모지의 인물 관계도를 정리해서 옮기고, 좋았던 문장이나 중요한 단서들을 옮겨적으며 이 소설을 복기하고 싶다. 집 나간 노트야 혼내지 않을 테니 얼른 돌아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