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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12. 2024

우주 앞에 선 미약한 존재의 강인함

류츠신의 <삼체 1, 2, 3>을 읽고

이 책을 읽는 매 순간이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흥분과 전율이었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져서 책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책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밖에 없었고, 잠을 줄여서라도 읽어야 했다. 그 책은 <삼체>이다. 남자친구가 읽어보라 추천할 때,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어'라며 외면했는데 그 두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리학이나 우주에 대한 관심이 있거나 SF장르를 좋아하면 완독이 좀 더 용이할 듯하다. 매우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물리학 이론들이 여기저기 책 전반에 걸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유튜브에서 양자역학 등 물리학에 대한 강의들을 보고는 했는데, 그게 책의 전체 내용을 따라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찾아보고 어렵사리 이해한 듯 안 한 듯 아리송해하면서 한 발 한 발 책을 따라 걸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류츠신 작가의 총 3권에 걸친 SF (Science Fiction)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은 예원제가 인간에 대한 거대한 실망감으로 외계와 조우하기 시작했고, 그게 이 책의 전체 스토리를 이끄는 계기이자 지구에 닥친 위기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그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호기심과 모험심은 언젠가는 우주 지능 생명체를 만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은 어마어마한 기회가 되기도 위기가 되기도 할 테니까.


이 책은 고전물리부터 현재의 과학, 미래의 과학까지 모두 망라하여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물리가 백화점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고전역학의 삼체문제, 양자역학, 컴퓨터(트랜지스터 게이트)의 원리, 고차원과 저차원, 질량을 가진 물질의 광속 이동, 나아가 우주의 팽창과 축소, 빅뱅 이론까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과학의 신비로운 이론들은 몽땅 나 나와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니 이론상 허점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화려한 옷과 패션 아이템들이 펼쳐져있어 눈을 여기저기 돌리며 호강하는 백화점처럼 잘 이해되진 않지만 물리에 흠뻑 빠져 며칠을 황홀하게 허우적거렸다. 


삼체인의 문명을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컴퓨터게임(?)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역사적으로 아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폰 노이만이 나와 진시황제 군대로 컴퓨터의 작동원리, 게이트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삼체인을 속이기 위해 4명의 면벽자를 선정하는 내용이었다. 그 면벽자는 어마어마한 권한과 예산을 가지지만 삼체인에 대항하는 성공 전략을 본인의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가 된다. 이 과정에서 뤄지라는 평범한 과학자가 선정이 되고 (예원제가 그에게 이야기한 우주 사회학의 2가지 공리가 원인이 된다) 그는 3권 마지막까지도 인류의 존속을 위한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가 백 살이 되어갈 때의 모습은 거의 신선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2권을 다 보았을 때 더 이어질 이야기가 있나? 완벽한 결말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3권은 그 보다 더 두껍고 방대한 이야기라길래 도대체 작가의 마르지 않는 샘솟는 아이디어와 투지는 어디서 나온 걸까 싶었다. 장편을 쓰는 것도, SF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독자들의 흥미를 잃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도 대단한데, 이 보다 더 나아가는 내용이라니? 상상도 잘 되지 않았다. 1권이 삼체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위기에 접어들며 절망하게 되는 내용이라면, 2권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고군분투 과정이 이어진다. 2권 끝에는 결국 삼체인을 위협하는 것에 성공하여 (뤄지가 결국 우주 사회학을 깨닫게 된다) 비로소 평화가 시작된다.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작가에게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3권을 보니, 작가에게는 우주만큼 넓은 이야기가 숨어있었고, 그걸 표현하느라 정말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 전쟁으로의 전개만으로도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는 동안 순간순간 떠오르는 의문이랄까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다. 중국 작가이기 때문인지 매우 중국 스러운 대립과 이야기전개들이 눈에 띄었다. 분명 SF소설이지만, 어린 시절 본 중국영화가 생각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뤄지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아주 평범한, 천재성이 돋보이거나 성실하거나 영웅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인물이 알고 보니 인류의 존망을 책임질 중요한 인물이었고, 나중에는 무림고수(신선)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두 번째로 전체 스토리 전개를 위해 각 개인의 사정과 심리, 고민들은 저 멀리 치워져 있어 가끔은 인간이 그저 큰 우주선의 나사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일부로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200년 뒤 연구를 위해 조직에서 동면하라고 결정하면 동면하는 등 개인의 자유의지가 깡그리 무시된 듯한 전개가 불편했다. 물론 아주 중요한 인물 몇몇은 스스로 선택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중국의 전체주의 색이 입혀진 건지, 아니면 미래인들은 죄다 로봇 같은 건지, 인간적인 면모가 크게 보이지 않았었다. 뭐랄까, 한 가지 사명 및 기질을 타고나면 그대로 쭉 이어지는 인물들이라 (입체적이지 않아) 살아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세 번째로 청신이라는 주요 인물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이 책에서는 다소 편협해 보여 불편했다. 가령 이 세계의 위기를 불러온 건 예원제라는 여성 과학자이고, 두 번의 실수로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 건 청신이라는 여성과학자였다. (그녀를 검잡이로 선택한 인류가 애초에 잘못한 거긴 하지만) 게다가 청신은 우수한 과학자임에도 너무도 유약하게 나온다. 혼자로는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남자(윈톈밍, 관이판)에게 의지하는 연약한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나가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브가 생각나기도 했다. 또한 잘못된 위기경보로 우주선들이 대탈출하거나 3차원 태양계가 2차원이 되는 과정에서 도망치는 우주선에서 나오는 악에 바친 비명들은 거의 다 여자 목소리였다. 반면에 굳은 뚝심으로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인물들은 대체로 남성이었다 (뤄지, 웨이드 등) 재미있는 SF 소설이지만 약간 씁쓸해지는 부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소설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쭉 좋아했다. 물론 요즘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문학들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SF소설을 통해 어른이 되면서 굳어버린 몽상가적 상상력을 다시 기지개킬 수 있어 좋다. 게다가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사실 전 우주적인 시점에서 보면 정말 하찮고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에서 조금 떨어져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삼체에서는 그것 외에도 몇 가지 교훈이 더 있었다. 문명을 가진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려들 수밖에 없고, 그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 달리 이야기하면 소통이 가능한 우리는 좀 더 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인간은 늘 잘못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차원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니까, 우리는 한 번에 다양한 것을 시도해 보고 결과를 비교해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시도한 것은 언제나 크거나 작은 아쉬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잘못된 선택인가 하는 의심을 완벽히 떨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오히려 실수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매일 닥치는 선택의 순간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실수하게 되어있으니까. 게다가 이 책 마지막에 삼체인과 인류가 아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통해, 실수 속에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 할 것이고 그건 언젠가는 좋은 결말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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