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고전독서모임에서 선정하지 않았으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편성준 선생님 덕분에 읽게 된 레이먼드카버의 대성당이 아니었으면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미 생겨버린 선입견을 거두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나에게 그렇게 잊힌 옛 지인 같은 존재였다.
십여 년 전 1Q84를 읽으며, 두꺼운 책을 1, 2권이나 읽었지만 문장에 스토리에 전혀 빠지지 않았던 옛날 모습이 생각났다. 소설을 무척 좋아하던 시기였고 그러니 누구나 읽는 하루키의 책을 읽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흰 것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씨로다. 그것 외에 등장한 인물도 스토리도 물론 세계관도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종이 위에 둥둥 떠있는 텍스트들을 드문드문 건저 내듯, 그러나 이미 생기를 잃어 축축 쳐진 미역 같은 글자들을 주어 담듯 읽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독서였다. 그 이후로 하루키 책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당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습관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는다는 건 치욕까지는 아니지만 그다지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우울하기도 했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연인처럼 친구처럼 소담스럽게 보듬게 되는데, 이 책과는 싸웠던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남자와 악을 쓰며 바락바락 싸우듯.
하지만 그 사이 나도 변했고, 더 많은 책을 읽었고, 텍스트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 이면에 숨겨진 뭔가를 찾아보는 습관도 조금 생겼다. 그래서 도전해 봤다. 이번달에는 고전독서모임을 꼭 나가고 싶으니까. 다행인 건 가장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였고, 등장인물이 아주 많지 않았으며,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버거움이 없었다. 하루키의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 덕분에 수월하게 읽었고, 어렸을 때라면 이해하지 못하고 거북했을 정사신도 40대 중반이 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책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번뜩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책은 어느덧 중반을 넘어 2/3 지점 정도 가고 있었는데, 고민이었다. 잘 시간이 지났는데 어쩌지? 내일 아침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이럴 때 매우 다행이다. 나는 1분도 채 고민하지 않고 끝까지 읽기로 했다. 지금의 호흡을 끊기 싫었다. 그러다 와인을 한병 따고,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 병문안에서 먹었던 김과 오이가 생각나서 김과 치즈를 꺼냈다. (오이가 집에 없었다) 새벽 한 시에 나는 그렇게 또 다른 하루키가 되어 새벽 4시까지 와인반 병을 마시며 남은 책을 읽어치웠다.
읽으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건 판타지다.'라는 것이었다. 왜 그 시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하루키열풍을 만들었을까? 그건 지극히 현실의 이야기이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들을 꿈꾸고 나를 대입해 보고 상상해 볼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남자아이라면 미도리 같은 생기발랄한 여자아이와 친구가 되어 자유롭게 섹드립을 하고 싶기도 하고, 나오코처럼 신비스러운 정반대 되는 매력의 여자를 대책 없이 사랑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가사와 선배와 함께 문란한 밤문화를 일탈을 겪어보고도 싶을 것이고, 당대 유명했던 책과 음악을 즐기며 브랜디를 즐기는 허세 같은 그러나 진지한 모습이 되어보고도 싶을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옛날 싸이월드의 장근석 허세가 생각났다) 20대 여자아이도 마찬가지다. 성실하고 순하고 늘 내 옆에 있어 줄 것 같은 와타나베 같은 남사친이 있어서 술도 마시고 야한 영화도 보고 섹드립도 해보고 싶을 수 있고, 나오코가 되어 슬픈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도 할 수 있다. 왠지 보살핌이 필요한 상처받은 영혼인 와타나베를 감싸 주고 싶기도 하고, 나가사와 선배 같은 인물과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과 화끈한 하루를 보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이 소설은 20대의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 때에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는 남자친구에게 하루키를 좋아했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답은 "아니, 난 하루키 스타일 별로야. 그냥 텍스트로 된 포르노 같아서 3번이나 읽었지."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단편에서는 귀지, 잘린 귀는 소통의 부재를 의미했다. 일상적인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카버만의 메타포들이 숨겨져 있고 그것들을 이해하는 순간 단편들에 흐르는 주제의식이 드러났다. 노르웨이의 숲에도 그러한 메타포들이 있다.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섹스는 인간의 가장 긴밀한 소통과 관계 맺기이다. 그러니 생명 혹은 삶에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저 섹스를 즐기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면서도 딴 여자와 자는 철없는 와타나베로만 볼 수는 없다. 나가사와 선배와 즐기는 원나이트는 당시의 허무한 인간관계, 그럼에도 계속해서 삶을 갈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자기혐오와 피로뿐. 이기적인 나가사와는 그런 자기혐오 속에서도 생명력을 시험하는 불쌍한 존재이기도 하다. 나오코가 기즈키와 결국 섹스하지 못했다는 것은 (불감증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기즈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완벽하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나오코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좌절과 기즈키에 대한 죄책감으로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독서 모임에서 레이코와의 정사신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또한 죽음 앞에서 살기로 결정한 자들의 몸부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번의 정사로 (그만큼 매우 절절하게) 나오코의 죽음을 인정하고 동시에 우리는 남아서 살기로 결정했다는 의식인 것이다. 섹스는 타인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는 것, 죽음은 영원한 이별. 소설 전체에 흐르는 그 내용을 인지하자 낸골딘의 사진이 생각났다. 하루키는 그것을 책으로, 낸골딘은 그것을 자기 삶과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라는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옆에서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와타나베와도 결국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러니 살아가기보다는 죽는 것을 택했고,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내겠다는 결심이고 매일 태엽을 감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일상을 지탱함으로써 언젠가는 나오코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상상. 별거 아닌 하루,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밥을 해 먹고 소방차가 출동하는 걸 보며 맥주를 마시는, 기타를 꺼내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아침이면 밭일을 하는. 매일매일 태엽을 감는 일은 너무 기본적으로 깔린 것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랑의 행위다.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옆에 있을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여 일상을 지키고 삶을 살아내는 노력. 그러니 빈번히 나오는 섹스보다는 늘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타나베의 일상이 이 이야기를 지탱하고 우리 삶을 지탱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건 레이코의 말로도 표현이 된다 "그러니 괴롭겠지만 더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거야. 나는 네게 이 말을 해 주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왔어." (p.557)
그러한 사랑은 책의 마지막에서 와타나베가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다시 드러난다. 어디인지 모르는 건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길을 가기로 했고, 그 길의 목적지는 미도리였고 사랑이었다. 그는 살기 위해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고, 살기로 결심한 그것은 미도리를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 책은 방황하는 20대의 성장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데미안이 생각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성인이 되어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 앞에서 당황하기도 하고 길을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고 더 강해지는,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을 응원하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그 방황은 20대 초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평생 언제일지 모르게 불쑥불쑥 나타날 테니, (나는 지금이 그렇다) 또 언젠가 굳게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할 때 생각나는 책일 수도 있겠다. 하필 지금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눈앞을 가리던 선입견을 좀 걷어내고 1Q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자 평>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좋아하게 만든 책. 표면에 흐르는 텍스트만 건질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과 사랑, 일상 사이 끈끈한 연결을 발견하고 평범했던 하루가 반짝이게 된다.